27화 두 번째 시스템 : 방출 (6)
아겔은 앞으로 나서는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백단발의 어여쁜 숙녀.
7년 전의 꼬마는 사라졌다.
적에게 나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도도했고, 어엿하게 자라난 숙녀의 기품이 서려 있었다.
‘복도에서 길을 잃고 엉엉 울고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아리스의 목에는 5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가 5급 죄수였던 건 아니다.
아겔의 기억상, 7년 전 그녀는 3급 죄수였다.
급수 변경.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는 성장하고, 낙인의 숫자는 바뀐다.
고독의 봉인술사에게 힘이 봉인된 고독의 죄수 중 이러한 기적과 같은 결과를 보이는 자들이 있었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수십 번이 넘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 여태까지의 자신을 깨부수는 극한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일이니까.
‘평범한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테지.’
아리스는 그런 고통을 2번이나 넘어섰다는 뜻이다.
길을 잃고 우는 아이는 이제 없다.
사아아아…….
한기가 복도에 휘날렸다.
갑작스럽게 추워지는 복도.
벽에는 서리가 끼기 시작했고, 입김이 퍼져 나갔다.
“추, 추워요…….”
세로가 팔을 교차해 얼른 양팔을 비볐다.
복도가 원래 싸늘한 편이긴 하지만, 이토록 추울 순 없다.
아리스의 능력이다.
“저 누나가 한 거예요?”
“그래.”
아리스의 능력은 ‘한기(寒氣)’.
저것도 ‘기(氣)’를 다루는 능력의 한 갈래라고 볼 수 있다.
그녀와 그 언니는 차가운 기운을 다루는 데 도가 텄다.
굳이 아겔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그 능력을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을 만큼.
-그워어어…….
차가운 기운에 좀비들이 다가오는 속도가 느려졌다.
“제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 드릴게요.”
아리스의 손에는 새하얀 구체가 떠 있었다.
한기를 압축한 무언가.
그녀는 손을 들어 그 새하얀 구체를 천장으로 던졌다.
높이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천장.
하얀 구체는 어둠으로 빨려 들어갔고.
“어?”
세로는 위에서 내려오는 무언가를 보았다.
“눈?”
하얗게 송이송이 내리는 눈꽃.
복도 전체에 눈으로 만들어진 꽃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예쁘게 내려오는 눈꽃이 세로의 콧잔등에 앉았다.
“와아…….”
적과 마주쳤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눈꽃이었다.
그러나 눈꽃은 아군에게만 아름다운 것이었다.
차가운 꽃은 아겔 일행뿐만 아니라, 좀비들에게도 내렸다.
쏟아지는 눈꽃에 닿자마자 좀비들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적.
눈꽃에 닿은 좀비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는다.
얼어붙은 좀비들은 그 뒤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폭설화(爆雪花).”
그녀가 조그맣게 읊조리자마자, 얼어붙은 좀비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쾅! 콰창! 콰창! 콰자장!
수십 마리의 좀비가 단숨에 얼어붙은 육편이 되어 버렸다.
좀비 오우거든, 좀비 트롤이든 상대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아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구먼.’
좀비는 죽어도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 때문에 까다롭다.
하나 아리스처럼 아예 몸을 터뜨려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면 좀비가 다시 일어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얼려서 시체 골렘으로 재구성하기 어렵게 했다.’
흑마법사들은 좀비들의 육편을 재구성하는 흑마법을 사용한다.
다 쓰고 남은 좀비들을 한데 모아서 시체 골렘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인데, 아리스는 그 부분까지 염두에 둔 것 같았다.
훌륭한 공격이었다.
천장에서 내리는 눈꽃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깔끔하구나.”
“칭찬 고마워요, 할아버지.”
아리스는 기쁘다는 듯이 손을 입가로 가져가 웃었다.
그녀의 힘 덕분에 좀비들은 접근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좀비 너머에 있는 흑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흥, 좀비들이 끝인 줄 알아? 사돌.”
쿵쿵.
커다란 발걸음 소리.
얼어붙은 좀비들을 밟아 깨부수며 커다란 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을 자르는 귀신, 기수.
5미터가 넘는 덩치에 위협적인 가위를 들고 있는 귀신이 다시 등장했다.
귀신은 온갖 저주 흑마법을 몸에 둘렀는지, 천장에서 내리는 눈꽃도 무시하고 있었다.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귀신? 설마 사역에 성공한 거예요?”
“최근에 한 애송이가 성공했지.”
“맙소사…… 흑마법사들이 귀신까지 부릴 수 있게 될 줄은…….”
아무리 사령술사라고 해도 ‘고독의 귀신’은 쉽게 부릴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사돌처럼 특출난 재능이 있어야 간신히 가능한 것.
저번에 꽤 타격을 줬다고 생각했는데도 사돌이 다시 사역에 성공한 듯싶었다.
아리스가 귀신을 보고 읊조렸다.
“설화갑(雪花甲).”
사아아아.
그녀의 전신이 얼어붙기 시작하고, 이내 꽃으로 장식된 갑옷이 되어 몸을 감쌌다.
영롱한 푸름을 머금은 갑옷을 입고, 그녀는 양손의 건틀렛을 마주 부딪쳤다.
쿵.
“죄송해요, 할아버지. 귀신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머진 부탁드릴게요.”
“아무렴, 나라고 알았겠느냐. 맡기거라.”
귀신을 상대하기 위해 아리스가 자리를 박차고 도약했다.
“흐압!”
[키히히히히-!]
쾅!
가위와 건틀렛이 부딪치며 굉음을 낸다.
평범한 인간은 가볍게 뛰어넘은 초인적인 힘의 대결.
겉모습은 숙녀일지라도, 갖추고 있는 힘은 복도를 진동하게 할 만큼 강했다.
‘저주받은 귀신을 쉽게 이기진 못하겠지.’
마법사들도 그렇지만, 특히 사령 혹은 소환 계열 흑마법사와 싸울 때는 마음속에 한 가지 원칙을 두고 싸우면 된다.
소환수가 아닌 술자를 노릴 것.
아리스는 시간을 벌어 준 것이다.
아겔이 걸음을 옮겼다.
“꼬마야, 좀비들을 상대하고 있거라.”
“아, 네!”
으드드득.
순식간에 골격을 변용하며 수인화하는 세로.
이제 수인화의 고통을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크르르…… 크와아아앙!”
아겔은 두 사람을 두고 좀비들 너머에 있는 흑마법사 둘 쪽으로 고개를 고정했다.
그는 품에서 벌레 단검을 꺼냈다.
* * *
솔바린은 귀신과 싸우는 아리스를 보고 있었다.
“소빙화(小氷花).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아리스에 대한 정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잠시 지켜보니 생각보다 갖춘 무력이 뛰어났다.
그저 5급 죄수들 사이의 소문이라고만 여겼는데, 그녀는 자신이 직접 저주를 건 귀신을 맞상대할 정도로 강했다.
물론 귀신과 부딪칠 때마다, 몸에 저주가 쌓여 결국 지겠지만.
‘저년 언니도 고독에 있다던데.’
아리스의 언니는 투기장 죄수라고 들었다.
일반 죄수와 달리 투기장 죄수는 오직 투기장에서만 거주하며, 일반 죄수와는 차원이 다른 혜택을 누린다고 했다.
일반 죄수가 굶주림에 고통받는 것과 다르게 양질의 음식과 극상의 관리를 받으며, ‘관람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경기를 뛰는 죄수들.
특히 챔피언들은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흥, 어차피 투기장 죄수와 우린 상관이 없어. 죽여도 문제없겠지.’
고독에 들어온 지 이제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곳의 생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솔바린이었다.
결국, 이곳도 똑같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그녀는 팔을 들어 저주 흑마법을 준비했다.
고독에 들어오기 전부터 저주 흑마법을 주로 익힌 솔바린이었다.
아무리 명성이 자자한 소빙화라 할지라도 자신이 직접 건 저주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노인은 그 뒤에 사로잡아도 늦지 않을…….
흠칫.
순간, 솔바린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재빨리 아리스 근처를 둘러보았다.
‘뭐야……! 노인네가 어디 갔지? 그 잠깐 사이에……!’
귀신과 격돌 중인 소빙화와 수인화를 한 꼬맹이밖에 보이지 않는다.
설마 그사이 도망친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방금 그녀가 느낀 기분은 찝찝했다.
도망치는 것 따위로 느낄 만한 그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쉭.
그녀는 기척을 느끼고 몸을 옆으로 피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복도의 어둠 속에서 나타난 노인이 이상하게 생긴 단검을 휘둘러 왔다.
“서퍼링 아머(Suffering Armor).”
몸에 저주를 걸어, 검은 갑옷이 솔바린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혀를 내밀어 피어싱한 입술을 핥았다.
“꽤 하는데.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내가 모를 줄이야.”
“과찬이군.”
아겔은 짧게 대답하고 곧장 백치가 된 사돌에게 뛰었다.
사돌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멍한 얼굴로 보고만 있었다.
“헤…….”
“멍청한 새끼…….”
솔바린은 마주 뛰어 사돌의 앞을 가로막고 아겔의 공격을 막아 냈다.
아겔의 단검이 그녀의 저주 갑옷을 난자했지만, 갑옷을 뚫진 못했다.
그는 곧바로 물러섰다.
휙.
보랏빛으로 물든 솔바린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노인네치고 움직임도 빨라. 당신 뭐야? 뭔데 우리 제사장이 그렇게 집착해?”
“난 별것 아닌 사람이네. 자네 주인의 집착은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구먼.”
아겔의 말에 솔바린은 씩 웃으며 품을 뒤적였다.
그녀의 품에서 나온 것은 부채.
촤륵.
활짝 펴자, 검은 바탕에 보라색 나뭇잎이 그려져 있었다.
“재밌어. 이럴 줄 알았으면 흑마법 수련 때려치우고 진작 밖에 좀 돌아다녀 볼걸.”
“그리 권장하고 싶진 않네.”
고독에 들어온 이후, 솔바린은 그녀의 주인인 다르키스의 명령에 따라 최대한 안전한 생활을 해 왔다.
고독은 아주 위험한 곳이니 힘을 비축하며 그것을 제때 사용하라고.
솔직히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런 곳에서 신기한 인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겔이란 존재 자체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늙어 빠졌는데도 어떻게 그리 빠르게 움직이지? 오러 나이트(Aura Knight)인가?”
마나로 자신은 연단하는 기사들은 느린 노화를 겪고, 늙었어도 초인적인 힘을 내는 자들.
그러나 솔바린은 섣부른 가정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앞에 있는 노인에게선 마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마음대로 생각하게.”
이상한 형태의 단검이 휘둘러졌다.
솔바린은 코웃음을 치며 그 단검에 그대로 맞아 주었다.
어차피 방금도 갑옷은 뚫리지 않았는데, 미련한 돌격이었다.
오러 나이트가 아니라면, 그녀의 저주 갑옷을 뚫을 수 있는 건 더 강력한 화력의 마법밖에 없었으니까.
겨우 단검 하나에 뚫릴 갑옷이 아니었다.
“그런 공격으론 소용 없…….”
촤악!
이전과 다르게 그녀의 갑옷이 베였다.
마치 물을 가르는 것처럼.
솔바린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팔 쪽을 베였는데, 정말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너, 어떻게……?”
순간 솔바린의 눈이 노인의 단검으로 향했다.
저 단검이다.
이상하게 생긴 저 단검은 평범한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더블 서퍼링 아머(Double Suffering Armor). 젤러스 스킨(Jealous Skin).”
이전과 다르게 더 강력한 저주로 자신을 보호했다.
두 배로 강해진 아머의 방어력과 피부를 강화하는 저주까지.
평범한 사람에게는 저주가 될 테지만, 본인에게 사용하면 반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흑마법이었다.
살짝 위기감을 느낀 그녀는 부채를 휘둘렀다.
그러자 보랏빛 바람이 크게 형성되어 아겔에게 불어왔다.
후우웅.
아겔은 넓은 범위의 바람을 피해 내고 솔바린에게 접근하려 했다.
솔바린은 최대한 부채를 휘둘러 바람을 내뿜으며 노인의 접근을 차단했다.
“부채까진 안 쓰려고 했는데. 내가 부채를 쓴 이상, 넌 이제 날 이길 수 없어.”
그녀의 부채가 내뿜는 바람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부채 또한 저주가 걸린 물건.
바람을 피하고 있지만, 다 피할 수는 없다.
부채의 바람을 맞으면, 저주가 몸에 쌓이기 시작하고 결국 상대는 무너진다.
노인의 첫 기습이 실패한 순간, 승패는 기울었다고 볼 수 있었다.
장기전은 저주 흑마법의 대가인 그녀의 특기였으니까.
“자, 어디 발악해 봐. 죽이진 않을 테니까 최선을 다해 날 즐겁게 해 보라고.”
그간 조용히 사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다 풀고 싶었다.
그녀의 바람대로 노인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자신을 제압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상황은 아겔에게 너무 불리해 보였다.
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부채 바람의 저주와 단단한 갑옷으로 보호받는 솔바린.
게다가 가끔 날리는 저주 흑마법은 하나하나 아겔에겐 위협적인 것이었다.
“더 발악해 봐! 더! 이대로 끝나면 너무 아쉽잖아!”
노인은 쉬지 않고 달려들었지만, 바람을 피하느라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달리던 아겔이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솔바린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 이제 포기한 거야? 재미없는데? 이딴 노인이 뭐라고…….”
피한다고 했겠지만, 노인은 바람에 맞아 저주가 쌓인 상태일 것이다.
처음엔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중첩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저주가 된다.
‘서 있기도 힘들 텐데, 꼴에 자존심은.’
순간, 아겔이 다시 움직였다.
솔바린은 당황하지 않고, 다시 부채를 휘둘러 바람을 내뿜었다.
아겔은 이번엔 피하지 않고 바람에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정신이 나갔구나!”
바람에 정면으로 달려들면 저주는 배가 된다.
그런데 아겔은 아랑곳하지 않고 솔바린에게 접근했다.
노인보다 달리기가 느린 솔바린은 결국 근접전에 돌입했다.
‘이번엔 갑옷을 강화했어. 뚫을 수 없을 거야.’
그녀는 단검의 궤적을 읽었다.
자신의 저주 흑마법에 단검이 튕겨 나가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촤악!
피가 튀었다.
단검은 갑옷을 가르고, 그녀의 어깨까지 베고 지나갔다.
흑마법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큭……! 어, 떻게?”
솔바린은 급히 물러나려 했다.
아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까이 따라붙어 쾌속하게 단검을 휘둘렀다.
“크하아악……! 꺼져!”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솔바린은 겁을 먹기 시작했다.
분명 저주가 가득 중첩되어 움직일 수조차 없어야 한다.
부채엔 「쇠약」, 「감각 둔화」, 「완속(緩速)」의 저주가 걸려 있다.
한두 개가 아니라 무려 3개의 저주.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금쯤 쓰러졌으리라.
그러나 노인은 멀쩡했다.
마치 처음부터 저주 따위는 걸리지 않았다는 듯이.
‘말도 안 돼…… 이 노인 뭐야……!’
게다가 2단으로 중첩한 방어막과 강화된 피부조차 손쉽게 갈라 버렸다.
경악에 빠진 솔바린은 한순간 아겔의 움직임을 놓쳤다.
푹.
“커헉……!”
목을 뚫고 들어오는 단검.
솔바린은 저주 흑마법을 터뜨리며 아겔을 밀쳐 내고 한 손으로 구멍 난 목을 잡았다.
울컥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끄륵……!”
탱글드 스킨(Tangled Skin).
상처를 지혈할 수 있는 흑마법을 쓴 그녀는 숨을 가다듬으며 아겔을 노려보았다.
노인은 집요하게 접근해서 단검을 찔러 넣었다.
펑!
흑마법을 터뜨리고 다시 물러나는 솔바린.
전세가 좋지 않다.
사돌 또한 그녀를 도와줄 수 없었다.
‘제, 제기랄…… 사돌 녀석은 쓸모가 없는데……!’
백치가 되고 나서는 좀비와 귀신을 부릴 줄 아는 것 말고는 쓸모가 없다.
아리스가 마구 날뛰고 있어서 귀신과 좀비도 가로막힌 상태였다.
쉬익.
솔바린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아겔의 단검을 피했다.
노인의 단검이 무섭다.
저 무자비한 것이 언제 또 자신의 몸을 꿰뚫고 베어 낼지 알 수 없다.
도망치던 그녀는 문득 생소한 감정에 경악했다.
‘내, 내가 두려워한다고?’
7급 흑마법사로 사회에서 악명을 떨쳤던 그녀다.
고독의 수감되어 5급이 되긴 했어도,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그녀의 프라이드는 어디 가지 않았다.
솔바린은 이를 갈았다.
“으득……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일 거야…….”
눈이 돌아간 그녀는 곧바로 바닥에 손을 짚었다.
빨간색 원이 바닥에 그려져 그녀의 몸 주변을 둘렀다.
후웅.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겔이 뒤로 물러났다.
흑마법이 순식간에 완성되어 갔다.
솔바린이 가진 가장 강력한 저주.
누구도 이 저주를 맞고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게 확신하며 그녀는 눈을 희번득 떴다.
윌링 수어사이드(Willing Suicide).
제물을 바쳐 상대를 저주하는 강력한 흑마법.
바쳐지는 제물의 상태가 좋을수록 흑마법의 위력은 증가한다.
제물은 다름 아닌, 사돌이었다.
“어……? 끄헤에에에에에에엑-!”
사돌의 몸이 보라색 불꽃으로 확 타올랐다.
잿더미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사돌의 시체.
그가 없으면 좀비와 귀신도 부릴 수 없게 되겠지만, 솔바린으로선 어차피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녀는 노인을 노려보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저주여, 내 눈앞의 적에게 쏟아져라!”
그녀가 악 외치자, 바닥에 그려진 빨간 원으로부터 보라색 기운이 솟아나 노인에게 방출되었다.
아겔은 피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저주의 기운이 노인을 삼키는 것을 보고, 솔바린은 쾌재를 불렀다.
‘됐다……!’
흑마법이 정확히 적중되었다.
그녀가 건 저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저주.
풀 수 있는 건 오직 성좌를 믿는 신실한 사제 정도이다.
웬만큼 실력 있는 자라도 이 저주는 풀지 못하고 죽었다.
이 저주야말로 그녀가 사회에서 악명을 떨칠 수 있던 원동력.
이변이 없는 이상, 아겔은 자살할 것이다.
‘자, 이제 죽어라……!’
그녀의 생각대로 노인은 단검을 든 손을 목으로 올렸다.
꿀꺽.
솔바린은 두 주먹을 꽉 쥐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단검으로 목을 그으려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려 스스로 자해하려는 노인.
날카로운 단검이 주름진 목을 찌르려는 순간.
덜컥.
노인의 손이 멈추었다.
“……?”
긁적.
“어……?”
그는 목을 찌르지 않았다.
대신 단검을 든 손가락을 움직여 목을 긁었다.
“음. 비장하게 뭔가 한 것 같은데, 질문해서 미안하네. 혹시 이건 무슨 효과인가?”
솔바린은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뭐……?”
“확실히 뭔가 굉장한 느낌이네만, 그리 효과가 있진 않구먼.”
입이 벌어진 그녀의 머릿속에 하얗게 변했다.
흑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여태껏 저주가 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노인에겐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촤락.
벌레 단검이 숏소드로 변형되었다.
노인이 앞으로 뛰었다.
푸욱……!
“컥……!”
솔바린의 심장이 숏소드에 꿰뚫려 버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을 꿰뚫은 검을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시야 가운데 노인이 보였다.
“이 정도 흑마법은 오랜만이야. 자넨 재능이 있어.”
“스스로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는지도 모르고 흑마법을 쓰다니 말일세.”
“끄으으으으…….”
그녀는 죽어 가는 와중에도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붕대로 눈을 감싼 노인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느낌.
솔바린의 벌려진 눈과 입에서는 맑은 체액이 흘러나왔다.
노인은 쥐고 있는 검을 비틀었다.
꾸드득.
“아…… 으아아…….”
꼬치가 된 흑마법사는 제대로 말도 내뱉지 못하고 신음만 내었다.
노인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의 영혼은 이제 ‘공좌’에게 진상되겠지.”
푸슛.
아겔은 심장을 꿰뚫은 검을 단번에 빼내었다.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친구도 곧 보내 줄 테니 조금 기다리게.”
아겔은 그렇게 흑마법사를 죽였다.
관자놀이를 찔러 뇌를 헤집은 다음에야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복도를 둘러보았다.
사돌이 죽었으니, 그가 부리던 좀비들도 다시 시체로 변했고, 귀신은 사라졌다.
상황이 종료되었다.
“할아버지!”
입고 있는 갑옷이 거뭇해진 아리스가 이쪽으로 뛰어왔다.
저주에 걸린 건지 그녀의 몸에 보랏빛 기운이 가득했다.
흑마법사의 저주를 받은 귀신을 상대하다가 그런 것이리라.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다. 너는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저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다.
그녀의 말과 달리 흑마법사의 저주는 꽤 지독하다.
술자가 해제하지 않는 이상, 쉽게 풀 수 없는 게 흑마법사의 저주이니까.
아겔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헥…… 헥…….”
세로는 탈진한 모양인지, 좀비의 육편 사이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죽진 않은 것 같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꾸나. 뭐가 올지 모른다.”
“네.”
세로를 챙겨 움직이려던 아겔.
짝. 짝. 짝.
그는 갑자기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느릿한 박수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대단한 솜씨입니다, 영감님.”
복도의 어둠 한쪽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신도복을 입고 있는 중년 남자와 신도들.
화려한 수실로 장식된 사제복을 입은 자들이었다.
“이오베.”
“반갑습니다, 영감님.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더러운 기운을 쫓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군요.”
모르는 사람이 등장하자, 아리스가 날카롭게 기운을 세웠다.
“저 사람은 누구죠?”
“진정하거라. 적은 아니니까.”
적이 아니란 말에 이오베란 남자가 빙긋 웃었다.
“영감님 말씀대로 적은 아닙니다.”
그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소빙화의 명성은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이오베라고 합니다. 고독에선 ‘광신도’라고 불리고 있죠.”
“과, 광신도……?”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그는 고독에서도 악명을 떨치는 남자다.
사교도나 이단으로 지정한 자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것으로 말이다.
위대한 성좌의 이름을 힘입어.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좌님께서 우리의 만남에 복을 내려 주시길.”
웃는 낯을 한 광신도의 목에는 ‘6’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