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보고와 결재
마곤과의 싸움이 있고 난 후, 아겔은 환약의 불순물이 더럽히지 않은 구석에서 쉬고 있었다.
세로는 하루가 지났는데도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된 환약이 아니라, 불순물을 들이킨 것이라 중독성이 없어 꼬마는 괜찮을 것이다.
아겔은 감방 구석에 누워 있었다.
취침시간이 아니었지만,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누워 버리는 노인이었다.
불립과 불침은 매한가지고, 노인은 그 규칙을 이미 이겨 냈으니까.
그는 자신의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생각보다 괜찮다.’
마곤을 상대할 때, 그는 짧지만 5급 죄수의 힘을 냈다.
1~2급 죄수와 그 힘이 별반 다르지 않은 아겔이 상대하기엔 터무니없이 강한 힘이었지만, 로스나에게서 빼앗은 생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그의 주먹을 검으로 받아 낼 때는 근육이 찢어질 만큼 흔들렸으나, 지금은 모조리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직 생기의 양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고.
이번 개방까지는 거뜬히 버틸 수 있으리라.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든다.
‘탐스러운 힘이군.’
힘이란 건 그렇다.
어떤 형태이든 유혹적이고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다.
집착하게 만들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힘에 취한 자들은 괴로운 갈망을 채우기 위해 더 발버둥 친다.
죽음과 더 가까워지는 줄도 모르고.
주륵.
강하게 쥔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상처는 다시 생기로 인해 회복되었고, 아겔은 피를 땅바닥에 흩뿌렸다.
내면에 쌓인 탐욕을 제한다.
구석구석까지 다시 어둠으로 뒤덮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 버린다.
다시 어둠이 그를 물들인다.
잠시 후, 노인은 상체를 일으켜 등을 벽에 기대었다.
저번 감방에선 ‘우회’했지만, 이번엔 직접 죽인 숫자가 너무 많았다.
간수들의 눈을 피할 순 없다.
이미 그들은 그가 죽인 죄수들의 숫자를 파악하고, ‘계산’하느라 바쁠 것이다.
그리고 형벌이란 이름 아래, 유예 기간을 얻으려 하겠지.
‘곧 독방에 가겠군.’
고독의 죄수들은 모두 ‘자산’이다.
이 감옥의 설립을 주도한 이가 ‘사업가’이니까.
자산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좋아할 사업가는 많지 않으리라.
고로 아겔이 한 일은 재물손괴죄와 결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쯧.”
그러나 참 웃기게도 사업가는 그걸 바라고 있다.
돈을 최우선으로 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면서 물질 너머의 가치 또한 중시하기 때문이다.
참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내일쯤 오겠구먼.”
그는 벽에 기댄 채로 감방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데려갈 간수를 기다렸다.
* * *
호게스는 휘파람을 불며 잘 정리한 서류철을 들고 [문서 작업실]의 문을 열었다.
회색 바탕인 작업실은 고독 어디 보다 밝아 보였고, 수백 명의 간수와 교도관들이 서류 작업을 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에일로 교도관님, 전화 바꿔 달랍니다.
-이거 교도관님 관할이야. 갖다 드려.
-야 이, 병신아. 자료에 오타 났잖아.
-그럼 니가 고치든가, 씨발.
마치 평범한 회사와 같은 분위기였지만, 규모는 평범하지 않았다.
호게스는 그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가 한쪽에 멈춰 섰다.
거기엔 덩치 큰 교도관이 다크서클을 하고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꺼져.”
노란 머리를 훌렁 넘긴 호게스가 씩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 교도관님. 이거 중요한 겁니다.”
호게스의 말에 교도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사원증에는 「6급 교도관 델타르」라고 쓰여 있었다.
“이 새끼는 진짜, 나한테만 이러네. 야, 다른 교도관은 일 안 해?”
“델타르 교도관님이 제일 편한데 어쩌라고요.”
“이런 씹쌔…….”
그의 얼굴이 더 험악해지기 전, 호게스가 품에서 약통 하나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델타르는 고개를 뒤로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 씨, 뭐야?”
“수면제요. 이거 싸제인데, 쉽게 못 구하는 거예요. 이번엔 페어리 날개 가루로 만든 거예요.”
호게스의 말에 델타르의 눈이 커졌다.
“뭐? 이, 이런 건 어디서 났냐?”
델타르가 수면제를 낚아채려 하자, 노란 머리 간수는 피식 웃고 그의 손을 피했다.
“비밀.”
“……빨리 내놓기나 해. 그래서 왜 왔는데.”
교도관은 그의 손에 있던 약통을 낚아채더니 재빨리 품에 집어넣었다.
요새, 아니 고독에서 근무하는 자들은 모두 격무에 시달리고 있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특히 불면증이 심한 델타르에게 수면제는 생명의 알약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영감 건으로 보고하러 가는 거지?”
“네. 그거 아니면 제가 찾아올 이유가 없죠. 「자산 평가 유예서」 한 장 뽑아 주세요.”
“그거 간수는 왜 못 뽑게 해 놨는지, 젠장.”
“모르겠는데요?”
“우라질 교도소.”
달칵달칵달칵.
델타르는 빠른 속도로 마우스를 움직이고.
타다다다다닥.
어마어마한 속도로 타자를 두드렸다.
마침내 모니터 화면에 ‘승인’이란 글자가 뜨자마자.
쾅.
종이 하나에 도장을 찍어 호게스에게 넘기는 델타르.
호게스는 희희낙락 종이를 받았다.
그 모습을 보고 교도관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너도 대단한 변태 새끼다…….”
“칭찬 감사합니다. 두고 봐요. 언젠간 성공한 덕후가 될 테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이제 꺼져. 나 일해야 해.”
“넵, 충성충성.”
그는 서류를 받고 문서 작업실에서 나왔다.
호게스는 후 심호흡했다.
긴장감을 털어 내기 위해서다.
그가 찾아갈 사람은 이제 고독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위치에 있는 사람.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호게스가 무전기를 꺼내 CCTV실 근무자에게 연락했다.
“후우, 서기관님 집무실로.”
-지시에 따라 이동하도록.
그는 신이 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갔다.
.
.
.
.
고독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여기도 평범한 회사처럼 직급이 나뉘어 있었다.
5급 간수(看守).
6급 교도관(矯導官).
7급 교정관(矯正官).
8급 집행관(執行官).
9급 서기관(書記官).
10급 교도소장(矯導所長).
이곳에서 근무할 수 있는 최소 급수는 5급.
그 이하는 절대 뽑지 않는다.
호게스는 말단 사원임에도 불구하고 교도소장까지 만나 본 꽤 잘 나가는 간수라고 볼 수 있었다.
전부 ‘아겔’의 덕택.
그저 늙은 죄수 한 명에게 관심을 가졌을 뿐인데, 재밌는 것들을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
“후우.”
그는 [서기관 집무실]이라 적힌 문 앞에서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풍스러운 문이 그의 취향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이미 안쪽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기척까지 파악했지만, 문을 두드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호게스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고독에서 ‘자산 평가’를 유예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최소 8급 이상 고위 간부였고, 집행관에게 찾아가면 살해당할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서기관은 아겔에 관한 유예라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었다.
똑똑.
“5급 간수, 호게스입니다.”
-들어와라.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간 호게스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된 집무실이었다.
조그마한 방 내부엔 개인 소지품은 거의 없고, 오직 일할 때 필요한 서류철과 만년필 하나, 잉크, 책상이 전부.
의자에는 거뭇한 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매, 깔끔한 정장에 엘리트 사무원의 느낌을 팍팍 풍기는 남자.
가슴에 보이는 사원증엔 「9급 서기관 베믈리오」라 적혀 있었다.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호게스를 바라보았다.
진중한 시선에 호게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제부턴 장난 따윈 하나도 칠 수가 없다.
“아겔인가.”
“예. 여기 자료입니다.”
호게스가 서류철을 넘겼다.
서기관 베믈리오는 서류철을 열어 종이를 자신의 책상에 펼쳤다.
「관찰일지」라 적힌 서류.
종이 서류엔 아겔이 이번에 죽인 사람의 숫자와 시각, 방법 등 다양한 것들이 나와 있었다.
…….
잠시간, 서류를 살피던 베믈리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꽤 많이 죽였군.”
“에. 자산 가치를 평가하려면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고독이란 교도소에선 꽤 특별한 일을 한다.
죄수 하나하나에 값어치를 매기는 것.
그것을 관계자들은 ‘자산 평가’라고 말했다.
죄수가 다른 재소자를 죽이면, 자산 가치가 올라간다.
죽인 자에게 값을 전부 더하는 간단한 일이 아니고, 따로 기준이 있기에 누군가 다른 이를 죽이면 복잡한 계산을 거쳐야 한다.
한 사람을 죽여도 그럴진대, 수십·수백 명의 죄수를 직접 죽인다면 그 계산은 꽤 오래 걸리게 된다.
그렇기에 고독은 한 가지 꾀를 냈다.
‘너무 많이 죽인 놈은 일정 기간 독방에 격리한다.’
형벌의 의미가 사람을 죽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근무하는 이들을 귀찮게 했다는 데에 있기에 핀트가 나간 것 같지만.
격무에 시달리는 간수들에겐 꼭 필요한 일이었다.
“3일이면 족한가?”
“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유예서에는 3일이라 적혀 있었다.
호게스는 그 안에 충분히 자산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베믈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3일이라 적힌 부분을 펜으로 슥슥 지우고 다른 숫자를 적었다.
“2주일로 하지. 너도 업무가 많을 텐데, 천천히 해라.”
“아…….”
호게스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베믈리오를 바라보았다.
회사 생활의 한 줄기 빛.
잘해 주는 이사님.
그러나 노란 머리 간수는 이내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베믈리오는 서류를 살펴보고 호게스가 건넨 ‘자산 평가 유예서’에 도장을 찍었다.
고독에서 오직 8급 이상의 간부만이 찍을 수 있는 도장.
이 도장이 찍힌 서류는 고독의 주인에게 전달된다.
서기관은 관찰일지를 잘 정리해서 다시 서류철에 넣어서 호게스에게 건넸다.
호게스는 황송한 자세로 서류철을 받았다.
“가 보게. 돌아가는 길 조심하고.”
“감사합니다, 서기관님.”
달칵.
호게스가 방문을 열고 나갔다.
…….
“흠…….”
베믈리오는 그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다가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새끼 라이칸스로프라…….”
그는 아겔의 관찰일지에 적힌 내용을 떠올렸다.
일하느라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는데, 소장이 이번엔 꽤 비싼 상품을 들고 왔다.
상품이 아겔에게 맡겨진 이유는 단순했다.
고독에서 그보다 상품을 잘 ‘보관’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무니까.
“잘 키우기만 한다면 값어치가 어마어마하겠군.”
상품이 몇 개 쌓였으니, 아마 ‘경매’가 곧 시작될 것이다.
교도소장이 출장을 간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테니.
베믈리오는 모니터에 죄수 목록을 띄웠고, 아겔을 클릭했다.
그러자 그의 과거가 요약된 정보가 주르륵 나타났다.
[죄수명: 아겔라스토스, 성별: 남]
[급수: 1급(하급 죄수)]
[자산 가치: 측정 불가]
저 5급 간수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아겔의 ‘자산 가치’는 평가할 수 없다.
이미 상부에서 내려온 조치다.
그의 자산 가치는 이 정보를 볼 수 있는 다른 ‘감시자’들에게서 숨기기로.
고독에서도 오직 상급 죄수들만이 받는 대우를 하급 죄수가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쥔 유예서에 눈길을 돌렸다.
유예한다는 건 시간을 번다는 뜻이다.
그만큼 독방에 가둬 둔다는 말이다.
일반 죄수라면 독방이란 말을 듣자마자 진저리를 쳤겠지만, 아겔은 다르다.
‘그 남자는 공포의 비명조차 내지 않겠지.’
그는 형벌 목록을 클릭해, 독방형을 내렸다.
기간은 2주.
서기관이 읊조렸다.
“2주 동안 잘 쉬다 오게.”
달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