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38)화 (39/186)

38화 1인자 (1)

델라무는 개인실에서 눈을 떴다.

자그마한 탄식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

그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꼬마가 알려 준 대로 정좌한 모습.

“뭐야…… 꼬마는?”

곁에서 자신을 가르치던 꼬맹이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어딜 간 모양이군.”

델라무는 세로를 찾지 않고, 다시 현재 자신에게 집중했다.

그는 방금 있었던 일에 지극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소년이 붙잡았던 자신의 두꺼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건 처음이다…….”

명상이란 간단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경험이었다.

처음엔 어둠이 펼쳐졌고, 몇 걸음 걷기 무섭게 검은 바닥에 파문이 일더니 다채로운 색채가 그의 내면을 채워 나가는 모습.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별천지에 그는 심히 놀랐다.

‘내 과거의 기억들이었지.’

발바닥 아래에서 본 것들은 전부 과거 그가 지나왔던 나날들이었다.

고독에 들어오기 전의 기억부터 들어와서 지낸 시간.

투기장 죄수로 발탁되어 경기를 치르고, 결국엔 챔피언의 자리를 쟁취하는 자신의 모습.

과거의 영광은 매혹적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모습을 보는 델라무는 떨군 고개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나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과거는 결국 과거일 뿐.

본인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작은 어둠…….”

화려한 기억의 색채 너머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 보였다.

어디가 앞인지 모를 만도 한 곳에서 그곳이 정녕 앞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면 누군가 그곳에 서서 자신에게 손짓했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라고.

“누구였을까. 도대체 누가 손짓한 거지? 미래의 나인가?”

델라무는 내면에서 홀린 듯이 그의 손짓을 따라 움직였다.

기억의 색채가 검게 물들 무렵,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고, 한 걸음 내디디기도 공포스러웠다.

자칫하면 어둠 가운데 떨어질까 봐.

그런데도 손짓하는 자는 계속 그를 바라보고 오라고 했다.

델라무가 깨어난 건 바닥의 어둠을 보고 그의 손짓을 다시 한번 더 본 순간이었다.

“아쉽다.”

전신이 간질간질한 것이 뭔가를 깨달을 듯 말 듯 하는 것 같았다.

“그를 빨리 발견했더라면…….”

어둠 속에 서 있었던 그자가 누군진 알 수 없었다.

온통 검은 형체였으니까.

누가 있다라는 것밖에 그는 알지 못했다.

떠오르는 감정은 조금은 무감각한 그런 시선이…….

쿵쿵쿵……!

그의 상념을 방해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형님! 파이럼이 싸우잡니다!

체력단련실의 수하 중 하나가 대결을 알려 왔다.

94번 체력단련실의 2인자인 파이럼은 자주 델라무에게 대결을 요구하곤 했다.

1인자의 자리를 탐내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델라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나처럼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가웠다.

어둠 속에서 깨달은 무언가를 지금 당장 시험해 보고 싶었으니까.

더 강해질 수 있는 길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겠다.”

덜컥.

그가 문을 열고 개인실을 나섰다.

.

.

.

델라무는 익숙하게 상의를 벗어 던지고 주먹에 새 붕대를 감았다.

오직 싸움으로만 단련된 그의 튼튼한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이럼과의 대결은 항상 피가 터지도록 싸우니, 붕대가 성할 날이 없었다.

쿵.

그가 링으로 올라섰다.

델라무와 파이럼은 아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공이 울리기 전까지 두 사람은 말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음?’

델라무는 맞은 편에 서 있는 그를 보고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파이럼도 그가 자신을 이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소 걸어오던 대결은 사생결단이 아닌, 기량을 확인한다는 목적인 것처럼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에선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단단히 긴장된 기색과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묵사발 내 버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험악한 얼굴이다.

델라무가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와야지.’

곧 체력단련실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 전부 모였다.

그들 중 1인자와 2인자의 대결을 공정하게 바라볼 심판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경기는 시작되었다.

뎅!

파이럼이 먼저 달려들었다.

“오늘은 쉽지 않을 거다!”

“와라!”

쿵-!

두 사람이 맞부딪쳐 힘겨루기부터 들어갔다.

덩치가 훨씬 큰 파이럼 쪽에서 압도해야 옳지만, 델라무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강한 완력이 팽팽하게 서로를 밀어내는 긴장감이 링 밖에서 보고 있는 수하들에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끄으으으……!”

파이럼 쪽이 천천히 밀리기 시작했다.

그는 흑인인데도 피가 몰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거구가 먼저 손을 놓고 델라무를 크게 밀어냈다.

두 사람은 잠시 떨어진 다음 득달같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무자비한 난타전이 시작되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서로의 몸을 때리는 난타전이지만, 링이 흔들릴 정도로 과격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자비한 데미지를 견뎌 내는 것은 첫째로 밀도 높은 근육.

단 하루라도 단련을 게을리했다면 상대의 주먹에 벌써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근육을 준비하면서 고통을 견디는 정신력도 단련이 되기에.

두 사람은 오로지 정신력과 근육으로 싸움을 견뎌 내고 있었다.

손이 안 보일 정도로 상대에게 공격을 퍼붓던 두 사람은 이내 스타일을 바꾸어 자신만의 개싸움을 시작했다.

델라무는 인파이팅을 구사하면서 치고 들어왔고, 파이럼은 거구의 몸집임에도 위빙을 하면서 공격을 피했다.

단단하면서도 놀랍도록 유연한 파이럼의 몸은 치명적인 공격은 전부 피하도록 했고, 델라무에게 유효타를 안겼다.

퍼벅-!

“큭……!”

델라무는 몇 대 맞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기회가 될 때마다 몸을 밀어붙여 연타를 날렸다.

두 사람의 대결을 보고 수하들이 말했다.

-평소와 똑같이 가는구나, 둘 다.

-아니야. 좀 달라. 오늘은 둘 다 독이 바짝 올랐는데?

-이거 심판이 잘 봐야겠어. 자칫하면 둘 중 하나가 죽을 수도…….

쩍.

델라무의 로우킥이 파이럼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큭……!”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로우킥.

파이럼은 저 로우킥 때문에 기동력을 손상당하고 여태껏 패배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절대로 질 수 없다.

아득-!

델라무는 파이럼이 입 속에 있던 무언가를 깨무는 것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보지 못했지만,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자신을 알 수 있었다.

‘뭐지……?’

갑자기 기세가 바뀌기 시작한 파이럼.

눈에 잘 띄진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근육이 조금 커진 것 같기도 했다.

불길한 기운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했고.

쿠구구구구……!

델라무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 뭐지……?’

파이럼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델라무.”

쾅-!

링이 우그러질 정도로 박차고 달려오는 파이럼.

델라무는 순식간에 달려온 파이럼의 공격에 대비해 가드를 올렸다.

쩍!

“크윽……!”

주먹을 막은 팔에 부러질 것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파이럼은 그 뒤로 미친 듯이 델라무의 전신을 난타했다.

“크하하……! 이거야!”

연신 뒤로 밀리는 델라무를 보면서 파이럼은 폭소를 터뜨렸다.

“오늘로 끝이다, 델라무! 너처럼 몸이 볼품없는 놈이 1인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옳지 않아!”

“큭……! 무슨 개소릴……!”

퍽!

“쿨럭……!”

델라무는 복부에 강력한 한 방을 맞고 쭉 밀려났다.

파이럼은 여유롭게 어깨를 풀며 델라무에게 걸어왔다.

“난 너보다 이 단련실에 오래 있었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네가 1인자라는 건 말도 안 되지.”

그 말에 델라무는 우습다는 듯 피식 웃었다.

“웃기는 말이군. 1인자의 자리는 오직 싸움 실력으로만 가린다는 거 잊었냐?”

“그래서 오늘은 좀 준비를 했지, 큭큭큭.”

파이럼이 낮게 자세를 취했다.

“지금 널 쓰러뜨리고 내 단련실에서 쫓아내 주마, 델라무!”

파이럼이 달려들자 델라무도 전력을 다해 마주 뛰었다.

그러나 그의 돌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파이럼은 빠른 속도로 주위를 돌며 주먹을 던졌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주먹에 델라무는 링 한가운데서 가드를 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떠올라, 젠장……!’

델라무는 맞는 와중에서도 어둠 속에서 깨달은 무언가를 떠올리려 무던히 노력했다.

분명 어둠 속에 서 있던 자신은 지금의 모습보다 강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어떻게 이끌어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투기장에서 싸웠을 때는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끝없는 노력으로 쌓아 온 그의 무력 앞에 모든 것이 무너졌고, 버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할 만큼 델라무는 임기응변이 뛰어나지 못했다.

철컹.

체력단련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델라무는 눈동자를 돌리다가, 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꼬마……?’

자신을 가르치던 꼬마였다.

어딜 갔다 온 건지 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아까와는 달라 보였다.

마치 무감각한 그런 분위기가…….

꼬마는 천천히 발을 옮겨 대결이 이뤄지고 있는 링까지 걸어왔다.

그리고는 델라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무감각한 시선으로.

델라무는 그 시선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

아까 어둠에서 마주했던 그 눈빛.

꼬마와 다른 깊은 심연이 자리한 눈동자.

목에 새겨져 있는 ‘그’의 죄수 번호.

델라무는 확신했다.

아겔라스토스.

그가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손짓을 한 장본인이란 사실을.

꼬마의 입술이 움직였다.

-눈을 감아라.

델라무는 소리를 듣진 못했지만, 그 입술이 말하는 바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소나기처럼 내리치는 난타 속에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 여기서 눈을 감으라고? 도대체 어떻게…….’

만약 파이럼의 주먹을 놓쳐 턱이라도 맞게 된다면?

그대로 다운될 것이다.

개싸움에서 쓰러지는 자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자비한 파운딩이 이어지리라.

심판도 막지 않을 테지.

델라무는 두 번째 말을 볼 수 있었다.

-두려움을 이겨 내라.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한 번 해 봤으니, 두 번도 가능하다.

델라무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이겨 내고 걸어갔다.

단지 시간이 조금 모자랐을 뿐.

결심한 순간, 델라무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붕…….

부웅…….

탓…….

타앗…….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소리 또한 느려졌다.

어둠 속에서 그는 소리의 방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놀라움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걸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다만, 수준은 아직 미약했기에 그저 파이럼의 주먹이 날아오고 그가 어디로 발을 내딛는지만 파악할 수 있었다.

천천히 소리에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델라무는 그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자신의 몸을 폭력적으로 두드렸던 주먹이 허공으로 빗겨 나갔고, 상대의 공격 속에서 빈틈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때, 델라무가 눈을 떴다.

퍼억-!

“컥……!”

복부에 주먹을 맞은 파이럼은 링의 로프까지 밀려났다.

그의 눈에는 경악이 담겨 있었고, 주먹을 내지른 델라무조차 놀라 눈이 살짝 커졌다.

“끄으으…… 뭐, 뭐야…… 어떻게 지금의 나를……? 쿨럭쿨럭……!”

한껏 당황한 파이럼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와 다르게 델라무는 한순간 동요했던 감정을 잠재웠다.

기침을 하는 파이럼의 숨으로부터 불결한 기운이 느껴졌다.

델라무는 그 기운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그가 씩 웃으며 주먹을 풀었다.

우득. 우두둑!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배신자 새끼야.”

각성한 길거리 파이터가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수하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

.

아겔은 세로의 몸에 빙의된 채로 다시 94번 체력단련실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델라무와 파이럼이 대결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오래 있을 수 있겠어.’

그가 차지한 세로의 몸은 정신력은 약한 편이었으나, 육체 능력만큼은 최상이었기에 오랫동안 빙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독방에서 나오는 2주 동안 전부 빙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과격하게 싸우는 것만 아니면 더 오래 하는 것도 가능하겠군.’

흑마법사 셋을 상대할 땐, 만족스러울 정도로 움직이긴 했지만, 과격하게 움직이진 않았다.

소년의 몸이 죽을 정도로 싸워야 빙의에서 풀릴 듯싶었다.

아겔은 델라무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밀렸던 아까와 달리 델라무는 압도적으로 파이럼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겔은 혀를 찼다.

“쯧, 이 꼬마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하거늘.”

그것이 소년과 델라무의 차이였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자와 그렇지 못하는 자.

저 정도까지 스스로 실력을 쌓아 올린 것도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말할지 몰라도 아겔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델라무의 한계가 명백하게 보였으니까.

물론 그것도 늙어 빠진 자신의 육체에 비하면 한없이 높은 수준이었다.

자신의 몸은 델라무의 주먹 하나 견디지 못하리라.

물론 맞을 일은 없겠지만.

뎅!

공이 울리고 승자가 결정되었다.

아겔은 링 위에서 팔이 들려지는 델라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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