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산보 (1)
아겔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판치는 복도.
안톤이 처음 처리한 놈들을 제외하면 아직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안톤 웨이크.
고독에선 ‘무기술사(武器術士)’란 이명이 붙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다양한 무기를 상황에 적절하게 다루며, 그 숙련도 하나하나가 달인과 같다는 것에서 붙여진 이명.
그는 이제 막 6급에 올라선 델라무와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남자다.
같은 6급일지라도 경험과 힘의 차이는 쉽게 메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쿵.
3미터의 체고를 가진 안톤은 걸음걸이만으로 위압감을 주었다.
그는 웬만한 떨거지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일부러 발소리를 냈다.
이 위험천만한 복도에서 누가 나오든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태도였다.
안톤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아겔이 그를 왜 불렀는지, 무슨 일을 할 건지에 관련된 질문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아겔이 부르면 오는 것으로.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따르기로.
무언의 태도가 겉으로 드러나는 안톤이었다.
아겔은 슬슬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요즘은 잘 지내느냐.”
그의 물음에 안톤은 미약하게 고개를 숙였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르신.”
아겔은 슬쩍 눈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번엔 보지 못했던 눈의 상처.
안대로 가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당한 상처인 모양이었다.
‘누구에게 당했는지.’
아겔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눈은 왜 그렇게 됐느냐.”
“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걱정 끼쳐 드릴 만한 일은 아닙니다.”
“신경을 안 쓸 수 있겠느냐.”
“…….”
아겔의 말에 곰 수인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더 숙였다.
마치 황송하여 쩔쩔매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어르신. 그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일없다. 소장에게 한 번 들려야 하긴 하는데, 마침 힘을 조금 회복해 놓아서 괜찮다.”
“다행이군요.”
안톤은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더니, 옆으로 맨 가방을 뒤적였다.
그는 투박한 곰의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뭔가를 내밀었다.
아겔은 그 풀을 보고 말했다.
“연생초(聯生草)구나.”
“저저번 개방에 땄습니다. 제겐 쓸모없는 것이니, 어르신께 드리겠습니다.”
아겔은 안톤에게서 풀을 받아들었다.
뿌리까지 씹어 먹으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만큼 몸에 좋은 풀이라고 알려져 있다.
풀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뿌리는 흙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고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다.
“따느라 고생했겠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별거 아니었습니다. ‘심마니’랑 싸우긴 했는데…….”
안톤의 말에 아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놈에게 당한 것이로구나.”
“아, 그것이…… 전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아겔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심마니를 이겼다라.’
심마니는 안톤과 같은 6급 죄수이지만, 아겔의 판단으로 안톤보다 강한 자다.
그를 이겼다면, 안톤이 이전보다 훨씬 성장했다는 말이다.
아겔에게 영혼을 바치고, 내면의 어둠을 걸어가면서.
스스로 노력하여서.
하지만 그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아겔은 고개를 저었다.
“안톤. 내 누누이 말했지. 네 목숨까지 걸 필요 없다고.”
“…….”
소년의 목소리였지만, 낮은 음성엔 중압감이 깔려 있었다.
안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경청하듯 고개를 숙였다.
“난 너희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짓 하느라 몸을 축내는 짓 하지 말거라. 내가 써야 할 몸이기도 하니.”
“제가 경솔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그는 아겔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다음부턴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거면 되었다.”
아겔은 그렇게 말하고 받은 연생초를 죄수복 안쪽에 넣었다.
안톤은 그가 풀을 몸에 넣는 모습을 바라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복도 앞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잔챙이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쿵.
육중한 몸무게의 수인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복도의 어둠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저 어둠 속에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후웅…….
어둠 속에서 저주 흑마법이 날아든다.
안톤은 아무런 대비 없이 저주 흑마법을 온몸에 맞아 가며, 그저 걸음을 내디뎠다.
쿵.
흑마법에 걸렸지만, 그의 몸을 막을 순 없었다.
등에서 대검(大劍) 하나를 꺼내는 안톤.
대검에 새겨진 문자가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안톤이 흘려보낸 기가 검에 음각된 문자와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발을 박찼다.
쾅!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앞으로 뛰쳐나간 안톤.
복도의 어둠 속에 있던 흑마법사들은 그가 이만한 속도로 달려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대검에 허리가 잘려 나가는 결말을 맞이해야만 했다.
스겅-!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인간 흑마법사 5명의 상·하체가 분리되었다.
안톤은 흑마법사들의 로브로 대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아겔에게 걸어 돌아왔다.
“될 수 있으면 제가 정리할 테니, 편히 걸어 주십시오.”
“길은 내가 가르쳐 주겠다.”
“예. 그럼.”
쿵.
육중한 무게의 곰 수인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겔이 걸어갈 길을 정리하러 간 것이다.
그가 느끼기에도 주변엔 귀찮은 장애물들이 조금 많았다.
‘본체로 왔어야 하는 것을.’
역시 늙은 몸으로 산책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며, 아겔은 피 묻은 복도를 지나갔다.
쿵…… 콰직…… 콰득…….
앞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전투의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앞서가는 안톤은 오우거, 식인 고블린, 귀신, 흑마법사나 다른 누구든지.
아겔의 앞길을 막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고 있었다.
.
.
아겔은 느긋하게 안톤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확실히 예전보다 강해졌구나, 안톤.’
이전에도 무기술사로서 명성을 드높이고 있던 안톤이었지만, 그는 아겔을 만나 한 차원 더 도약할 수 있었다.
전사나 파이터 등 근접전에 뛰어난 이들은 대체로 원거리 공격에 취약했다.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성기사가 아니거나, 사제, 마법사의 도움이 없다면 실상 전사의 입지는 좁다.
그러나 안톤은 아겔의 도움으로 그런 차원을 넘어섰다.
내면의 어둠을 걷게 된 이후로부터 그에게 흑마법이나 마법은 걸리적거리는 정도가 되어 버렸을 테니.
물론 아겔의 도움이 있었다곤 해도 성취를 끌어올리는 건 온전히 본인의 몫이었다.
안톤은 그런 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했을 것이다.
막상 이러한 ‘특권’ 비슷한 걸 받아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안톤이 그의 힘을 갈고 닦은 이유는 명명백백했다.
오로지 아겔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미련한 것. 그렇기에 충성심이 드높은 게지.’
아겔은 타인의 영혼을 취할 때는 한 가지 조건을 세웠다.
바로 목숨이 위태로운 자들에게만 거래를 권하는 것.
안톤도 목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에 아겔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 이후,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아겔의 목숨을 더 소중히 여겼다.
살지 않아도 될 시간을 받았으니, 남은 시간은 아겔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노인은 그런 충성심은 조금 부담스러웠으나, 이제 그러려니 했다.
안톤과 같은 놈들이 몇몇 더 있었기에.
쿵.
안톤이 아겔의 곁으로 돌아왔다.
피가 잔뜩 묻은 그의 모습은 마치 야차를 보는 것 같았다.
싸울 때면 눈동자가 붉게 변하기도 하여 그런 분위기가 한층 짙어지기도 했다.
“앞쪽은 정리가 끝났습니다. 피 냄새가 나는 건 죄송합니다.”
“무얼. 가자꾸나.”
“예.”
안톤은 흑마법사들이나 죄수들을 죽이고 빼앗아 온 식량을 아겔에게 넘겼다.
인육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생산된 고기를, 아겔은 소년의 몸으로 질겅질겅 씹었다.
맛이 꽤 괜찮아서, 아겔은 안톤에게 고기를 주었다.
“너도 먹지 그러냐.”
“저는 괜찮습니다. 정리하면서 조금 주워 먹었습니다.”
아겔은 혀를 찼다.
안톤은 예의를 극도로 중시하는 곰이다.
아겔이 먹지도 않았는데, 먹을 것에 손댈 성격이 아니었다.
다 아겔에게 주려는 것이다.
“그래도 먹어라. 나 혼자 먹긴 많다.”
“많이 드시고 건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이건 내 몸도 아니지 않느냐.”
잠시 멍한 얼굴을 하던 안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감사히.”
안톤은 고개를 숙이고 먹을 고기를 조심스럽게 받아 입에 넣었다.
그는 조용하게 주둥이를 움직이며, 씹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고기를 씹어 삼켰다.
두 사람이 고기를 씹으며 복도를 걷고 있을 때, 앞에 네거리가 나왔다.
아겔과 안톤은 동시에 자리에 멈춰 섰다.
양옆으로 그들을 노리는 흑마법사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문득 아겔이 말했다.
“내기 하나 하겠느냐.”
그 말에 안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내기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오른쪽, 네가 왼쪽. 누가 먼저 정리하는지.”
“……받아들이겠습니다. 뭘 거실 겁니까.”
아겔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지면 털을 골라 주마. 어떠냐.”
“좋습니다. 제가 지면 이번 개방 때까지 어르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아겔이 혀를 찼다.
“쯧, 구미가 당기는 조건은 아니구나.”
“……죄송합니다.”
“되었다. 더 얘기하다간 좋은 타이밍도 놓치겠구나.”
두 사람은 말이 끊기자마자 누가 신호를 주지 않았는데도 동시에 양방향으로 뛰었다.
둘이 갑자기 달려들 줄은 몰랐던 흑마법사들이 깜짝 놀라 대응했다.
-준비된 거 날려!
-접근하지 못하게 해!
아겔은 흑마법을 온몸으로 맞아 가며 흑마법사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저주 중 하나도 아겔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느리게 하는 저주나 몸을 쇠약하게 하는 저주.
부식의 저주 등.
다른 이들에겐 통했을지 몰라도 아겔에겐 통하지 않았다.
콰직……! 콰득!
손과 발을 늑대의 것으로 변형시킨 아겔은 흑마법사들의 목을 잘라 버렸다.
개중엔 인간이 아닌 수인족 흑마법사도 있었지만, 육탄전으로 세로의 육체에 빙의한 아겔을 이길 상대는 없었다.
“크핡……!”
독수리 수인 흑마법사가 아겔의 손에 날갯죽지가 잘려 나가고, 바닥을 뒹굴었다.
왠지 아는 사람과 비슷한 놈을 괴롭히는 것 같아서 조금 기이한 기분이 들었지만, 적의 목숨을 살려 줄 정도로 위화감은 없었기에.
촤악!
독수리 수인의 머리는 여지없이 잘려 나갔다.
아겔은 흑마법사들을 해치우고 다시 네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가자마자, 혀를 찼다.
“쯧.”
안톤은 아직도 흑마법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단숨에 해치우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안 하고 있다.
안톤이 제대로 싸운다면 저런 흑마법사 나부랭이 몇 명 따윈 진즉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아겔이 세로의 몸을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속도는 낼 수 없다.
일부러 흑마법사들을 늦게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쿵.
안톤이 돌아왔다.
그는 먼저 돌아온 아겔을 보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역시 어르신을 따라가기엔 한참 멀었군요.”
“여우 같은 놈.”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칭찬 아니다.”
아겔은 몸을 돌려 갈림길 정면으로 앞서 나갔다.
안톤은 그가 멀어지기 전에 조심스럽게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 * *
“끄응…….”
94번 체력단련실.
델라무가 정신을 차렸다.
단련실 안에 있는 회복실이 소란스러워 눈을 뜬 것이다.
“뭐, 뭐야…….”
회복실은 거의 만원이었다.
습격을 당한 근처 체력단련실의 연합원이 수천 명 넘게 회복실로 대피한 모습이었다.
이게 뭔 상황인지 파악해 보려는 델라무에게 몇몇 사람이 다가왔다.
-델라무, 고맙다. 신세 좀 지겠다.
“뭐?”
그는 의아한 얼굴로 실장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체력단련실을 책임지고 있는 자들.
델라무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자들이었다.
-네 결정으로 수많은 연합원이 살아남았다.
-우린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나갔거든.
-결과는…… 처참했지.
실장들이 델라무에게 전해 준 이야기는 이랬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근처 체력단련실 연합원 전원이 출동했다.
결과는 대패.
흑마법사들이 준비한 흑마법에 대응하지 못하고 패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상자를 옮길 곳이 필요했는데, 이미 체력단련실은 놈들에게 점령을 당한 상태였다.
-돌아갈 곳이 없는 우리에게 네 체력단련실은 하나의 희망이었다.
-이곳에서 농성할 수도 있게 되었지.
-그 몸. 흑마법사들과 싸우다 다친 거겠지. 네 의기(義氣). 존경한다.
델라무는 이놈들이 뭔 말을 하는지 몰라 머리를 흔들었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깨어나자마자 뭔 소리를 하는지.
그는 실장들을 물리며 자신의 개인실로 돌아갔다.
‘영감님은……?’
그는 아겔을 찾았으나, 아겔은 없었다.
대신 개인실에 있는 그의 책상 위에 새겨진 문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산책 갔다 오마.]
“산책……?”
델라무의 그 단어가 뜻하는 의미가 뭔지 몰라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