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47)화 (48/186)

47화 투기장으로 (1)

델라무는 연합원을 이끌고 94번 체력단련실에서 나왔다.

그가 이끄는 94번실 말고도 복도엔 연합원이 가득 차 있었다.

-야, 귀신 조심해!

-오우거 좀 치워 봐라. 시끄럽잖아.

-너 지금 나한테 어깨빵 했냐?

숫자만으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조직, 운동 연합.

흑마법사놈들이 한 차례 벌집을 쑤셨으니, 응당 보복해야 하는데.

‘없다.’

델라무는 복도 이곳저곳을 누볐지만, 살아 있는 흑마법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렸다.

-그래. 자네 목숨을 살려 주지. 거기에 악마숭배자들도 물러나도록 해 주겠네.

델라무는 아겔 영감의 말대로 정말 살아났다.

그에게 당했던 상처가 모두 아물었고, 컨디션은 전에 비할 바 없이 좋았다.

심지어 6급으로 성장하기까지.

그에 대해 생각하던 델라무는 수하의 목소리를 들었다.

“형님……! 근처에 시체들이 어마어마하게.”

델라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

그의 수하를 따라 한쪽 복도로 걸어온 델라무는 무수히 많은 시체를 볼 수 있었다.

대개 연합원의 시체였지만, 흑마법사의 시체도 수백 구가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격전이 치러졌으리라 예상되는 커다란 복도에는 성한 시체가 하나도 없었다.

깊게 관찰하지 않아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영감님이 했군.’

꼬마의 몸에 빙의한 아겔이 여기에 있는 모든 시체를 토막 낸 것이리라.

자신과 싸웠을 때, 라이칸스로프의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었던 꼬맹이였고, 시체에 난 상처도 그 짐승에게 난 것이 분명했다.

“시체는 어떻게 할까요, 델라무 형님.”

“놔두면 썩는다. 흑마법사들이 좋아서 환장하겠지. 전부 태워.”

“예.”

델라무는 타오르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거래 따위가 아니다.

어마어마한 빚을 졌다.

연합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겨우 한 늙은이에게.

‘영감님…….’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를 것이다.

영혼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델라무는 두려워하고 싶진 않았다.

‘반드시 갚는다.’

주먹을 꽉 쥔 그의 눈은 어두운 복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어둠 어디엔가 있을 노인의 형상을 떠올리며.

* * *

윌리엄과 그 잔당들을 처리한 아겔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아까 끊어진 산책의 연장선.

편안한 마음으로 투기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곁에선 안톤이 걷고 있었다.

“또 한 번 한계를 뛰어넘었구나, 안톤.”

곰 수인은 무표정이었지만, 머쓱하긴 했는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쩌다 보니……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쁘지 않구나. 그렇게만 하다 보면 7급의 벽도 허물 수 있을 게다.”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겸양 떠는 말처럼 들릴지 몰라도 안톤에게서 전해져 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제 길의 끝은 멀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아겔을 따라가려면 한참 남았다고 느꼈다.

“무얼. 지금 이 팔팔한 몸으로 싸워도 내가 너에게 질 터인데.”

“그,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어르신과 저 같은 놈이 어찌 겨룰 수 있겠습니까. 생각만으로 불충입니다. 그리고 어르신께선 무(武)의 척도가 다르잖습니까.”

안톤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어르신의 정신력은 느끼면 느낄수록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이만큼 어둠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어르신 덕분입니다.”

“칭찬 고맙구나. 한데 나도 그냥 살다 보니 이렇게 된 거란다.”

살다 보니 그렇다란 말에 안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다 보니 그랬다?

길 가다 갑자기 행성이 폭발할 확률과 비슷하지 않을까.

“저 같으면 백 번 죽어도 그리 못했을 겁니다.”

“너도 할 수 있을 게다. 사람은 목표가 생기면 강해지는 법이니까.”

“전 모르겠지만…….”

안톤이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대의를 이루기 위해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그러고 있다. 무사히 살아남는 게 내 목표이니.”

곰 수인은 알고 있었다.

그가 살아남으려는 이유가 뭔지.

대개 고독은 죄수들이 삶에의 희망을 갖추고 있든 잃었든 가리지 않고 살해하곤 하지만.

돌아보았을 때, 이 끔찍한 곳에서 살아남은 자 대부분은 삶에 대한 희망과 목표가 뚜렷한 경우였다.

안톤이 알기로 아겔은 살기 위해 아주 끔찍한 시간을 견뎌 내고 있는 중이었다.

걸어가던 아겔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안톤이 의아한 감정을 띠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린 몸이라 그런지 꽤 졸리는구먼. 잠시 업히자꾸나.”

아무리 에너지 넘치는 어린 라이칸스로프라도 한바탕 거친 싸움을 치렀으니, 몸이 피곤한 게 당연했다.

무표정한 안톤의 가슴에서 기쁨의 감정이 팍 솟아났다.

“얼마든지 업히십시오.”

쿵.

안톤은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었다.

소년의 몸에 빙의한 아겔이 슬며시 안톤의 등에 올라탔다.

“투기장까지 부탁한다.”

3미터나 되는 덩치의 거인은 아겔이 자신이 멘 무기 배낭에 잘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코오.

안톤은 그가 잠들자마자,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편히 주무십시오, 어르신.”

.

.

.

아겔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이곳은 세로의 내면 속이었다.

육체와 정신은 잠을 자도, 영혼만큼은 깨어 있었다.

“벌써 일주일 정도가 되었는가.”

독방형이 또 한주 남았고, 세로가 어둠에 유폐된 지도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이쯤에서 한 번 풀어 줘야겠군.”

아겔이 세로의 내면의 어둠 속에서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어둠이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누군가를 토해 냈다.

털썩.

어둠 위에 나동그라지는 소년의 영혼.

눈은 뜨고 있었으나 초점이 없었고, 입과 눈, 코에서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영혼의 피폐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아겔은 아무런 말 없이 소년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아겔의 말에 소년의 몸이 흠칫 떨려 왔다.

눈의 초점이 점점 맞춰지기 시작하더니, 소년의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할아버지……?”

“그래, 나다. 좀 괜찮으냐.”

격한 반응은 없었다.

다만, 소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겔에게 걸어와 그를 꽉 안았다.

“크흐흐흑…… 무, 무서웠어요…… 아, 아무것도 없는 어, 둠이…… 크흑…….”

아겔은 조용히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둠의 유폐된 자들의 반응은 다 이랬다.

독방에 갇힌 것보다도 더 진한 어둠.

냄새도, 눈에 보이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 없는 감각의 소멸.

나중엔 자신이 존재하긴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다가, 결국 그 의문, 즉 생각마저 사라지게 된다.

그것이 어둠에 유폐되는 것의 의미이다.

세로가 울음을 끅끅 참아 가며 말했다.

“제, 제발 이제 그만해 주시면 안 돼요……?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일주일만 더 참거라. 원래는 2주 동안 계속 가둬 놓으려다가 지금 한 번 풀어 준 것이다.”

“아…….”

세로는 좌절의 감정을 느꼈지만, 그래도 아겔의 말을 거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수용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 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그럼 일주일만 더 견뎌 볼게요.”

그 모습을 보고 아겔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둠에 유폐되는 형벌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만큼 어둠에 익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니.

분명 꼬마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잠시 후, 진정이 된 세로를 앉혀 놓고, 아겔이 말했다.

“내가 널 잠시 풀어 준 건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할 말이요……?”

“그래. 넌 이제 곧 팔릴 거다.”

“팔린다고요……?”

소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겔이 설명했다.

“넌 내 상품이다. 고독에선 너 같은 상품을 모아 경매를 하지.”

“경매…….”

죄수를 사고파는 건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주엔 꽤 다양한 투기장이 존재했고, 죄수 혹은 노예를 투기장에서 사용하니까.

“고독의 죄수를 파는 건 불법이지만, 이 교도소의 주인은 불법 따윈 신경 쓰지 않지. 은하 정부와 성좌 교단의 눈을 피해 경매장이 열릴 것이고, 넌 그곳의 상품으로 등록되어 팔려 나갈 것이다.”

“그럼……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갈 수 있다는 말에도 소년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럼 루카스 형은…….”

세로를 돌봐 주었던 루카스.

그는 아겔의 상품이 아니었고, 3-448 감방에 배정될 때 헤어졌다.

그건 아겔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

애초에 아겔에게 구할 의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잊어라. 고독에선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

“네 형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부모, 자식, 친구, 형제. 여기선 모두 죽는다. 모두 사연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전부 흉악범이라 말할 셈이냐?”

그 말에 소년이 몸을 떨었다.

아겔이 세로의 앞으로 고개를 가져갔다.

“그럼 나는?”

“…….”

“나는 흉악범이 아니겠느냐. 여긴 고독이다. 악인들의 사회이지. 네 형이라고 특별 대우받을 일은 없다. 넌 상품이라 다르지만.”

아겔의 말을 들은 세로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잠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인 걸 어쩌겠는가.

고독은 누군가의 편의를 봐 주지 않는다.

그 안에 종속된 자들이라면 몰라도.

“다만, 만약 살아 있다면 네 안부를 전해 주마. 그 정돈 해 줄 수 있지.”

“살아 있다면요……?”

소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고개를 들었다.

표정엔 자그마한 희망이 있었다.

“그래. 살아 있다면.”

“……감사합니다.”

할 말을 끝낸 아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도 엉거주춤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그리곤 여기가 내면 세계라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일주일 뒤에 보자꾸나.”

“네…….”

아겔이 손을 휘두르자, 어둠이 소년의 영혼을 집어삼켰다.

* * *

안톤의 배낭에 들어가 있던 아겔이 눈을 떴다.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숙면이었다.

아겔의 정신과 영혼은 충분히 쉬었고, 소년의 몸은 말할 것도 없는 활기가 솟아올랐다.

배고픈 것만 빼면.

“기침하셨습니까. 배낭 안에 먹을 것이 좀 있습니다.”

“고맙구나.”

아겔은 배낭에 들어 있는 식량을 찾아냈다.

말린 고기들이 따로 보관된 주머니가 있었다.

아겔은 고기를 씹어 먹었다.

우뚝.

갑자기 안톤이 걸음을 멈추었고, 아겔은 의아함을 느끼고 배낭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그리고 안톤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영감님, 오랜만이군요. 몸은 어떠십니까.”

“주암. 오랜만이군.”

7급 교정관 주암.

너풀거리는 옷이었지만, 확실히 교정관의 제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키 작고 평범한 중년 남성처럼 보이는 남자는 아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겔의 몸이 소년의 것임에도 주암은 그가 아겔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날 찾아온 건가?”

“예. 아랫것들의 원성이 좀 심해서 말입니다. 제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암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산 평가 때문에 독방형에 처하셨는데, 이리 또 죽이고 다니시면 아랫것들이 곤란합니다. 영감님의 자산 가치는 덧셈·뺄셈으로만 계산해도 며칠은 걸리는지라.”

“어차피 안 하지 않는가.”

아겔의 말에 주암의 몸이 굳었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아겔을 바라보았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한 10년 전부터 안 하고 있다고 들었다네. 서기관에게 들었지.”

“서기관님이라…… 과연…….”

아겔의 말에 주암은 오호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믈리오가 말했으니, 아마 이 명령은 더 위에서 내려왔겠지. 나도 그 돈벌레가 돈 세는 일을 그만둘 줄은 몰랐다네.”

자신의 주인을 모독하는 말을 듣고도 주암은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확실히 주인님께선 돈에 환장하시지요.”

주암이 아겔을 바라보며 말했다.

“개방까지만 참아 주신다면, 소장님께 건의해서 이번엔 약물의 양을 늘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그 말에 안톤이 거친 음색으로 말했다.

“감히 어르신께 조건을 거는 거냐.”

주암의 눈이 안톤을 향했다.

안톤은 그 눈빛을 보고 등에서 전투 망치 자루를 꽉 잡았다.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겨우 한 급수 차이라고 보기엔 넘보기 어려운 자였으니까.

안톤이 말했다.

“나에게 눈깔 부라리지 마라. 봉인만 아니었으면 대가리를 찍었을 거다.”

주암은 아겔에게 했던 존대와 다르게 안톤에겐 반말했다.

“안톤. 자네도 부디 덜 죽였으면 하는군.”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오직 어르신밖에 없다.”

그 말에 주암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아겔이 있어 뭐라고 하진 못했다.

“내 아이를 건드릴 생각은 아니겠지.”

아겔의 말에 주암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요. 그런 마음은 품지 않았습니다.”

“할 말은 끝났는가?”

“한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이번 개방이 끝나면 새로운 교정관이 부임될 겁니다.”

“새로운 교정관이라.”

교도소에 근무할 근무자에 대해 죄수에게 보고하는 꼴이 우스웠지만, 아겔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문제 있나?”

“예. 그는 우리 사람이 아닙니다. 성좌 교단 쪽 인물이라 하더군요.”

“음…….”

주암의 말에 아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브스가 말했던 성좌 교단의 시찰과 관련된 부분일 수도 있었다.

“알아서 대응하겠지만, 영감님께서도 각별히 주의하셔야 할 겁니다.”

아겔이 말했다.

“경고는 잘 받았네. 더 할 말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 물러가게. 괜히 길 막지 말고.”

주암은 황급히 길을 비켜 아겔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겔을 태운 안톤은 일부러 쿵쿵거리며 그의 앞을 지나갔다.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주암은 숙인 허리를 펴지 않았다.

.

.

.

.

아겔은 투기장 입구까지 도착했다.

복도의 한쪽에 위치한 투기장 입구.

이곳으로 들어가면 투기장 죄수들이 대기하는 대기실이 나온다.

투기장 입구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최소 교정관의 권한이 아니라면 열리지 않는 문.

아겔이 입구에 서서 말했다.

“문 열게, 톨먼.”

또 다른 교정관의 이름을 부르는 아겔.

문은 잠시 고요하더니, 이내 거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목소리가 들렸다.

-영감. 뒤에 곰돌이는 안 돼.

교정관 톨먼의 목소리였다.

“빡빡하게 굴 텐가?”

-…….

아겔의 말에 교정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알았어. 곰돌이도 들어가.

아겔과 안톤이 어두운 입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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