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투기장으로 (2)
고독의 복도에서 투기장으로 향하는 입구를 통과하자, 먼저 나타난 것은 거대한 스타디움들이었다.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눈으로 다 볼 수 없는 크기의 스타디움이 늘어서 있었다.
실외도 아니고 실내에.
특수한 자재로 건축된 화려한 스타디움의 모습은 칙칙하고 피폐한 고독 내부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안톤이 멍한 얼굴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투기장…….”
“넌 여기가 처음이겠구나.”
“예. 보는 것도 직접 온 것도 처음입니다.”
“지독히 넓기만 한 곳이지.”
아겔은 걸음을 옮기다가 안톤의 감정을 느끼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구경이라도 시켜 주랴.”
“아, 아닙니다. 어르신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야 상관없다만.”
아겔의 말에 안톤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견문을 넓히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뭘 그리 딱딱하게 말하느냐. 구경하러 가자꾸나.”
“예.”
아겔은 고독에 수감된 초창기에 투기장 죄수로 살았다.
눈이 없는데도 특출난 전투 능력을 보여, 투기장 죄수로 발탁이 되었었다.
그를 선정한 교정관도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끼고, 굉장히 좋아했었다.
지금은 퇴직했지만.
아겔을 발탁하고 후임으로 들어온 투기장 담당관이 바로 톨먼이었다.
관람객이 아니라 죄수 중 투기장에 출입할 수 있는 건 투기장 죄수, 혹은 그의 가족이 전부.
쉽게 발탁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만큼, 만약 가족이 이곳에 수감되어 있다면 왕래를 허락하는 것이다.
물론 복도를 지나 투기장까지 찾아올 담력과 길치가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했다.
아겔은 특별한 예외로 투기장 출입을 허락받은 케이스였다.
안톤이 질문했다.
“투기장을 은퇴하신 지 꽤 시간이 지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직도 길을 기억하십니까?”
“우스운 질문이구나. 내가 복도에서 길을 어떻게 찾는다고 생각하는 게냐.”
안톤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머리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원래 맹인이었다.
“죄송합니다. 당연한 것인데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무얼. 죄송할 일이 아니다.”
아겔의 발걸음은 빠르고 일정했다.
정확하게 자신이 찾아가야 할 곳을 알고 있는 움직임이었다.
이곳에 처음 온 자들이라면 압도적인 풍경에 넋을 잃고 헤맬 텐데, 아겔에겐 그런 모습이 없었다.
그는 걸어가며 투기장에 대해 설명했다.
“스타디움엔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번호가 붙어 있다. 숫자도 딱 그만큼이지. 그 모든 걸 아울러 투기장이라고 부르는 게다.”
“그런 거였군요.”
“알파는 가장 낮은 무급 죄수들로 이루어져 있고, 오메가로 갈수록 높은 급수의 죄수들이 경기를 치르는 곳이다.”
“그럼 저흰 어디로 가야 합니까?”
“아무 곳이나 상관없다. 내가 갈 곳은 모든 스타디움과 연결된 ‘지하’이니까. 들려 보고 싶은 곳이 있느냐?”
아겔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안톤이 말했다.
“6급 죄수들이 있는 곳으로 가 보고 싶습니다.”
자신과 동급인 죄수들이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궁금해진 것이리라.
아겔은 흐뭇함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그쪽으로 가 보자꾸나.”
거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스타디움이라 두 사람은 오래 걸어야 했다.
아겔은 빨리 갈 수 있었지만, 안톤이 주변을 잘 둘러보며 올 수 있도록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흔히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
잠시 후, 두 사람은 커다란 스타디움 간판 앞에 설 수 있었다.
“도착했군.”
22번째 스타디움.
간판엔 ‘카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투기장 죄수의 마지막 급수인 7급 죄수들도 이곳에서 경기를 치르곤 했다.
“들어가자꾸나.”
“예.”
입구를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잠겨 있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시즌’이 아니면 교도관이나 간수들이 투입되지 않았고, 투기장 죄수는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 놓았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투기장 죄수는 자신이 속한 스타디움을 떠나면 페널티가 있었다.
“허엇…….”
안톤은 안으로 들어와 눈을 크게 떴다.
스타디움 내부 복도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붉은 카펫이 깔린 곳은 ‘고객’과 ‘관람객’이 지나다니도록 지어진 곳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고독의 복도와는 천양지차.
그곳의 어두운 분위기와 달리 고풍스러운 촛불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겔은 거침없이 붉은 카펫을 밟고 지나갔다.
안톤이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스타디움 복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방이 있었다.
그 방의 문에는 각 죄수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대기실이라 쓰여 있었다.
죄수 한 명 한 명이 개인 대기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투기장 죄수는 대우부터가 달랐다.
“스케일이…… 대단하군요.”
“여기도 고독의 일부다. 이곳은 외부인이 돌아다니기도 하는 곳이니, 겉보기에 좋게 지어졌지.”
우주 최악의 교도소.
그거 하나만으로 홍보는 끝이나 마찬가지이다.
우주 전역에서 고독의 투기장을 주목하니, 돈도 명예도 이곳으로 흘러들어 올 수밖에 없다.
고독에서 고통받는 죄수들과 달리, 이들은 별천지를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 부러워할 것 없다. 이들도 살인적인 스케줄을 살아야 하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려온 대진표가 있을 때마다 나가 싸워야 한다.”
“결국, 죽는 건 이곳이나 저곳이나 다름없군요.”
“그렇지.”
명예나 돈, 그리고 누릴 수 있는 것이 고독의 죄수들보다 월등히 많겠지만, 결국 이곳에서도 죄수들은 죽어 나간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누리기에 투기장 죄수들은 더욱 허무함을 느끼며,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여태껏 누려 왔던 것을 죽음으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투기장 관람객들은 그렇게 죄수들이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때쯤 깨닫지. 이건 결국 놀림거리,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겔이 투기장 죄수가 된 것은 명예나 돈 때문이 아니었다.
투기장만큼 자신을 날카롭게 단련할 수 있는 장소도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
-얘네, 뭐냐.
-신입인가?
지나치는 죄수마다 안톤과 아겔의 꾀죄죄한 모습을 보고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전부 6급 이상의 죄수들.
그러나 그들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아겔과 안톤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투기장 죄수들 간의 싸움은 지정된 경기가 아니라면 절대 금지 사항이었기에.
아겔은 안톤에게 빌린 스카프로 목의 죄수 번호를 가린 상태였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엔 다른 몸에 빙의해도 곧잘 알아보곤 했는데, 말이지.’
그가 알고 있는 얼굴도 없는 걸 보면, 옛날 투기장 죄수들은 전부 죽은 모양이었다.
안톤은 복도 한쪽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누구나 출입 가능한 ‘명예의 전당’ 전시실.
어느 스타디움에나 하나씩은 마련된 곳으로 여태껏 투기장에서 싸워 왔던 죄수들의 기록이 있는 곳이었다.
“저곳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직접 보는 게 설명하는 것보다 낫겠지. 가 보자꾸나.”
아겔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당연히 잠겨 있지 않았고, 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열렸다.
덜컥.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자마자, 안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타디움 규모에 비하면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충분한 넓이의 방은 휘황찬란하게 죄수들의 사진과 약력이 전시되어 있었다.
“제일 큰 명예의 전당은 오메가 스타디움에 있다. 여긴 그곳의 축소판에 불과하지.”
“대단…… 하군요. 여태껏 챔피언에 오른 죄수가 수천 명이 넘었다니.”
감탄스러운 감정이 들었는지, 한동안 멀뚱히 서 있던 안톤은 이내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아겔은 그가 뭘 찾는지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곧 그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아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 이것이 어르신의 젊었을 적 사진.”
“뭐 볼 게 있다고 그걸 찾아보느냐.”
투명한 유리 넘어, 당당하게 1급 챔피언 왕관을 쓰고 있는 아겔의 모습이었다.
젊었을 적이라도 중년의 나이대인지라, 주름이 살짝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때도 눈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안톤은 사진 옆에 적혀 있는 약력을 천천히 읽었다.
“무려 10년 동안 챔피언의 자리를 지켜 ‘강산’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패배해 자리를 내려온 것이 아니라, 직접 은퇴 의사를 밝혔기에 그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았다…… 현재 그의 생사는 알 수 없다…….”
곰 수인은 글을 전부 읽은 다음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허리를 폈다.
생사를 알 수 없긴.
지금 자신의 앞에서 그 전설이 멀쩡하게 숨 쉬고 있었다.
기쁜 감정에 취해 있던 안톤에게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자꾸나. 볼 것 없다. 죄다 죽어 버린 사람인데, 뭣 하러 보느냐.”
안톤은 드물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르신.”
아겔이 먼저 방을 나섰고, 안톤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 * *
스타디움 복도에서 걸음을 옮기던 아겔이 문득 뒤돌아서 안톤을 바라보았다.
안톤은 뭔가를 들킨 것처럼 움찔했다.
“화장실이 가고 싶은 게로구나.”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니라고 하느냐. 여긴 일반 죄수 구역이 아니라, 화장실이 있다. 다녀오거라.”
“그것이…….”
안톤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아겔은 단호했다.
“안 갔다 오면 나도 안 가겠다.”
“최대한 빨리 갔다 오겠습니다.”
쿵! 쿵! 쿵! 쿵! 쿵!
육중한 몸의 안톤이 뛰니, 스타디움 복도가 울리는 듯했다.
대기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를 바라보는 죄수들도 있었다.
아겔은 누가 자신을 쳐다보든 말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좋을 때야.’
투기장 죄수로 살 때는 좋았다.
하나 너무 많은 유혹이 있었고, 아겔은 원하는 바를 이루자마자 은퇴해 버렸다.
굳이 더 있어서 수명을 깎고 싶진 않았으니까.
안 그래도 오래 살아야 하니 말이다.
걸어가는 아겔의 뒤로 호기심이 생긴 죄수들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겔을 보고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진짜 신입인가? 그러기엔 너무 어린데?
-어려 보이는 종족일 수도 있지.
턱.
아겔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죄수를 바라보았다.
각종 문신을 한 몸에 야비한 눈매를 한 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이런 애새끼가 우리 스타디움 신입이겠냐?”
문신 죄수의 말에 주변 죄수들이 긍정했다.
-그건 그렇네.
-하긴, 너무 어리긴 해.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어서 몇 급인지 못 봤어.
문신 죄수는 주변 죄수들의 호응을 얻더니, 팔짱을 끼고 아겔을 바라보았다.
“딱 봐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장난감이겠지.”
소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저열한 욕망이 깔려 있었다.
“야, 꼬마야. 얼굴 꽤 반반하네? 이따 밤에 형 침대로 올래?”
명백한 조롱의 의미가 담긴 말에 주변 죄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겔은 잠자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문신 죄수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왜. 말 못 해? 형이 기분 좋아지는 거 가르쳐 줄게. 너도 좋을걸?”
-저 새낀 진짜 변태 새끼야.
-장난감 또 하나 망가지겠네.
-작작 써. 나도 쓰고 싶으니까.
아겔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투기장 죄수.
어느 정도 랭킹에 오른 죄수라면, 무서운 것 없이 살아간다.
스타디움 랭킹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주어지는 혜택과 자유는 많아지고, 이곳이 교도소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단계까지 온다.
높은 랭킹의 죄수에게는 환약과 술, 여자 등등 쾌락을 채울 수 있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대신 나가는 경기마다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아겔은 불쌍한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눈앞의 문신 죄수는 잦은 환약 사용으로 인해 눈이 풀려 있었고,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으니까.
날카롭게 자신을 다듬어도 살아남기 힘든 투기장에서 죽음을 옆에 끼고 사는 꼴이었다.
‘이 친구는 곧 죽겠구먼.’
문신 죄수가 쪼그려 앉아, 아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큰 손으로 소년의 목을 붙잡았다.
“형이 대답 안 하는 사람을 굉장히 혐오하거든? 그러니까 말 좀 해 볼래? 안 그럼 여기서 목 꺾인다?”
으득…….
점점 더 조여 오는 숨통.
아겔은 숨이 쉬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문신 죄수는 그제야 위화감을 느꼈다.
목을 조르며 숨을 막고 있는데도, 소년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너, 뭐…….”
콰아아앙!
커다란 전투 망치가 문신 죄수의 머리를 부수고 스타디움 벽에 박혔다.
언제 돌아왔는지, 눈이 시뻘겋게 변한 안톤이 전투 망치로 문신 죄수를 죽인 것이다.
목소리가 분노로 가라앉은 안톤이 조용히 말했다.
“어르신께 불경하다. 죽인다.”
같은 급수의 동료가 순식간에 살해당하자, 투기장 죄수들이 반응했다.
-뭐, 뭐야! 저 새끼 뭐야?!
-감히 아다케를……!
-이런 씨발. 잡아!
분노한 투기장 죄수들이 다가오는데도, 아겔은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태연하게 닦아 내었다.
‘당장 죽을 줄은 몰랐구먼.’
소년이 책망하듯이 안톤을 바라보았다.
“소란을 일으켰구나.”
“죄송합니다. 감히 어르신의 존체에 더러운 손을 대었기에.”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탓.
6급 죄수들이 달려들려는 찰나, 누군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남자의 제복을 본 투기장 죄수들의 눈이 커졌다.
교정관 톨먼.
제복에 푸른 머리를 뒤로 넘긴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교, 교정관님……?
털썩.
그 자리에 있던 투기장 죄수 전원이 무릎을 꿇었다.
마치 한없이 위에 존재하는 인물을 만난 태도였다.
교정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답답한 기운이 주변에 있는 모든 자를 짓누르는 듯했다.
안톤조차 무거운 압박에 놀라 무기를 쥘 뻔했다.
그는 잠시 투기장 죄수들을 둘러보더니, 그리 유쾌하지 않은 얼굴로 아겔을 돌아보았다.
“후…… 이렇게 사고 칠 것 같아서 바로 달려왔는데…….”
그의 기분과 별개로 아겔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엎질러진 물일세. 그보다 자네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지 않나?”
“최대한 빨리 온 거야.”
아겔이 톨먼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내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가?”
푸른 머리의 중년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아…… 아니. 그럴 순 없지.”
톨먼이 뒤돌아 부복한 투기장 죄수들에게 말했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투기장 죄수들이 한 차례 몸을 떨었다.
“방금 있던 일을 입 밖으로 꺼내고 다니는 놈이 있다면 죽이겠다.”
-…….
죄수들은 납득하지 못하겠단 표정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놈은 없었다.
톨먼은 투기장 죄수들의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자, 눈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아니, 죽는 건 너무 편하겠군. 투기장 죄수에서 박탈한 다음, 독방에 집어넣어 주지. 이의 있는 사람 있나?”
그 말에 투기장 죄수들이 전원 즉답했다.
-없습니다.
고독의 죄수로서 받는 이 특혜를 놓치기 싫었고, 독방에 들어가는 건 죽는 것보다 싫으니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톨먼이 경고했다.
“잊어라. 오늘 여기서 곰돌이와 꼬마를 본 건 없던 일이다.”
교정관은 다시 아겔에게 몸을 돌렸다.
“가자, 영감.”
그의 말에도 아겔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송이 녀석. 많이 컸구나. 이제 겁주는 건 잘하는구먼.”
아겔이 가만히 서서 씩 웃자, 톨먼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소년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안톤은 그가 마음대로 아겔을 붙드는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순간 투기장 죄수들에게 내뿜던 기세는 살의 비슷한 것이었으니.
곰 수인조차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기세였다.
톨먼은 죄수들 앞에서 위신이 깎이는 것은 극도로 싫다는 기색을 보이며, 아겔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그의 경고에 두려움에 떨던 죄수들이 조용히 자신의 대기실로 내뻈다.
.
.
.
아겔을 안아 들고 바삐 걷던 톨먼은 죄수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곧바로 소년을 내려놓았다.
죄수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선 좀 더 목소리에 힘을 풀고 말하는 톨먼이었다.
“젠장, 나도 올해로 50이 넘었다. 애 취급은 이제 그만해.”
그는 제복을 정리하더니 이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알겠지, 영감? 이제 내가 투기장 담당관이니까 멋대로 구는 건 자제해.”
“해 주세요. 라고 하면 그럴지도 모르지.”
“…….”
톨먼이 약이 올라 부들부들 떠는 동안, 아겔은 알아서 길을 걸었다.
“자네가 안내해 주지 않아도 길은 알고 있네.”
“……그래도 영감을 혼자 보내는 건 알맞지 않으니까, 내가 안내하려고 했던 거야.”
“음? 그런가. 오늘 손님이 있던가?”
그 의문에 대답하듯 톨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겔은 그제야 소장이 투기장으로 그를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하긴, 손님이 없었더라면 소장실로 날 불렀겠구먼.”
“그래. 오늘 손님은 중요한 분이시니까, 나 정도는 되는 사람이 영감을 모셔야지. 이런 곰돌이 말고. 도대체 이런 곰탱이는 왜 데려와서 일을 벌이는 거야?”
안톤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봉인만 없었으면 너도 대가리를 깼을 것이다.”
“젤리처럼 씹어 주기 전에 닥쳐, 곰돌이”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듯했지만, 아겔은 무시하고 걸었다.
그는 [관계자 외 출입엄금]이란 글이 쓰여 있는 문 앞에 섰다.
“투기장 구경 좀 시켜 주려고 불렀다네. 그것까지 제할 셈인가?”
“아니, 그건 아닌데. 이런 곰탱이에게 뭘 보여 주겠다고…….”
덜컹.
아겔은 그 문을 열며 말했다.
“따라오거라, 안톤. 투기장 지하에 있는 게 뭔지 보여 주마.”
“하아…… 진짜 안 되는데…….”
톨먼의 한숨과 함께 세 사람은 투기장 지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