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49)화 (50/186)

49화 짧은 접견 (1)

세 사람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교정관급만이 지나갈 수 있는 각종 보안 장치를 통과하고 나서야, 계단은 끝이 났고 어두운 지하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랜만이구먼.”

아겔은 감회가 새롭다는 얼굴로 지하를 바라보았다.

그가 챔피언에서 은퇴하고 투기장 지하에 방문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사실 올 이유조차 딱히 없는 곳이다.

안톤이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지하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고독의 복도처럼 이곳은 어느 곳으로 이어질지 길을 아는 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었다.

드문드문 허공에 부유하는 라이트 마법의 불빛이 아니라면 앞을 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지독한 냄새가 나고 불쾌한 것들이 잔뜩 있는 일반 죄수 구역의 복도와는 달랐다.

지하임에도 먼지 냄새는 나지 않았고, 고급스러운 남색 카펫과 부드러워 보이는 소파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톨먼이 말했다.

“여긴 ‘고객’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경매에 참여하는 오직 극소수의 고객분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지. 원칙대로라면 너 같은 건 평생 볼일 없는 곳이란 말이다. 알겠나, 곰탱이?”

안톤이 눈썹을 씰룩였다.

“자꾸 곰탱이라고 하지 마라…….”

아겔이 두 사람이 다투든 말든 걸음을 옮겼다.

“볼 것 없는 곳이다. 가자꾸나.”

몇 걸음 걸어가던 아겔은 문득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교도관 한 명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토, 톨먼 교정관님……!”

창백해진 얼굴로 달려온 그는 톨먼 앞에 서서 경례했다.

톨먼은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무슨 일이냐.”

막 달려온 교도관은 귓속말로 톨먼에게 뭐라고 전달하였다.

-그…… ‘고객’께서 지금…….

살짝 엿들은 아겔은 교도관이 무슨 말을 전달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교도관은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어디론가 떠났다.

톨먼이 아겔에게 다가왔다.

“영감. 구경은 나중에. 지금은 손님을 만나러 가는 게 우선이야.”

“흠…… 참을성 없는 손님이로구먼.”

아겔의 무덤덤한 감상에 톨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면전에다 그런 소리를 하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제발 조심해. 난 오래 살고 싶다고.”

“50이면 충분히 오래 살았지.”

“난 영감보다 오래 사는 게 꿈이야.”

톨먼이 길을 재촉했다.

“그러니까 이제 가지. 구경은 끝이다.”

아겔이 안톤을 보고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거라. 금방 돌아올 테니.”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르신.”

아겔에게 깍듯이 대답한 안톤은 눈을 돌려 톨먼을 노려보았다.

“어르신을 보필하는 데 결례가 있다면,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독방에 처넣기 전에 주둥이 단속하는 법부터 배워라, 곰탱이.”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 전, 아겔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톨먼은 안톤을 노려본 다음, 빠르게 아겔의 뒤로 달라붙었다.

.

.

어두운 투기장 지하.

아겔은 지하에 있는 각종 ‘시설’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가 향하는 곳은 ‘고객’들을 응접하는 투기장의 밀실.

누구나 ‘고객’이 될 수는 없는 만큼, 은밀한 곳까지 들어가야 했다.

…….

“다 왔구먼.”

아겔은 VIP 고객용 응접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압박감을 감지했다.

‘살벌하군.’

답답한 기운은 전신을 마비시키는 느낌을 주었다.

다가가기만 해도 온몸이 굳어서 도망조차 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

마치 포식자 앞에선 먹잇감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옆에 서 있는 교정관 톨먼조차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안에 있는 자가 흘려보내는 기세만으로 밖에 서 있는 교정관의 정신력을 압도되고 있었다.

아겔이 톨먼을 올려다보았다.

“자네도 들어갈 건가.”

“난…… 여기까지다. 안에 있는 고객님 앞에 설 자격은 없지.”

톨먼은 씁쓸하게 말하고선 한쪽 무릎을 꿇고 아겔을 바라보았다.

“후우, 일단 설명부터 해야겠군. 안에 있는 고객님은 상품을 확인하러 오신 분이야.”

“상품? 이거 말인가.”

아겔이 자신을 가리켰다.

톨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영감이 그 꼬마에게 빙의해서 다행이군. 함부로 손 쓰진 못할 테니까.”

톨먼의 말에 아겔은 응접실 안에 있는 고객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안으로 들어가면 알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영감. 고객님의 성질을 긁는 말은 하면 안 돼. 알겠지? 이번엔 특히 더더욱.”

“노력해 보도록 하지.”

아겔은 문 앞에 섰다.

들어가려 문손잡이를 잡으려는 찰나, 안쪽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잠시 문 옆쪽으로 물러났다.

그 순간.

콰아아앙--!

문이 터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크게 밀려 나와 바닥에 착지했다.

아겔은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기관?”

반 백발의 남자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일어섰다.

엘리트 사무원의 느낌이 나는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옷을 털었다.

“때마침 잘 왔군, 아겔 영감. 필요하던 참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구먼.”

그렇게 말해도 베믈리오의 전신은 깔끔함 그 자체였다.

방금 공격을 받았는데도, 상처 한군데 없는 모습.

흐트러진 모습은 절대로 보여 주지 않는 불굴의 성정이었다.

아겔이 말했다.

“날 부른 건 소장인데, 왜 자네가 여기에 있는가?”

“소장님은 다른 분을 접견하시느라 바쁘시다. 내가 대리로 나왔지.”

“흐음…….”

아겔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부른 건 소장인데, 그 비서 같은 인물이 자신을 맞으러 왔다니.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소장님께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 하셨다.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말뿐인 사과는 맛이 없지.”

“대가도 치르겠다고 하셨다. 더 얹어 주시겠다고 하셨다.”

베믈리오의 말을 이해한 아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손해는 아니로군.”

“이해해 줘서 고맙군. 대금은 독방형이 끝나고 지급하겠다.”

“그렇게 하게.”

옷을 깔끔하게 정리한 베믈리오가 말했다.

“고객님께서 좀 난폭하시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군.”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믈리오가 문 없는 응접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들어가지. 돌발 상황은 내가 통제하겠다.”

두 사람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응접실 내부는 꽤 넓었다.

원래라면 고급스러운 미스릴 테이블과 푹신한 붉은 소파.

그리고 보라색 방음벽으로 아름답게 있어야 할 응접실.

하나 지금은 전부 박살이 나고, 곳곳에 거대한 스크래치가 난 모습이었다.

바닥엔 부서진 유리 접시들과 그 위에 올려져 있었을 과일들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누가 성질을 부렸는지는 명확했다.

서기관이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아겔은 넓은 응접실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주목했다.

‘과연 짐승답구나.’

맹수는 자신이 포식자임을 숨기지 않는다.

온몸으로 사냥꾼과 사냥감이 누군지 갈라놓는 폭력적인 기운이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겔은 그게 착각임을 알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베믈리오가 입을 열었다.

“이제 난동 부리는 건 그만하시지요. 고객님께서 원하시는 상품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말에 반응하듯 안쪽에서의 기운이 흔들거렸다.

“상품? 지금 내 아들을 상품이라고 부르는 거냐?”

묵직한 짐승의 음성.

한 글자를 내뱉을 때마다 오금이 저리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아겔은 아들이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부성애도 없는 자가 아들을 걱정하는 척하니 웃음이 나왔다.

저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힘 있는 자를 따를 뿐.

아겔은 잠자코 그를 지켜보았다.

베믈리오는 표정 하나 변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저흰 그렇게 지칭합니다. 고객님께서 저희에게 의뢰하셨고. 우린 우리 방식대로 상품을 안전하게 보관했습니다.”

“너희가 잘난 짓을 했다는 듯이 떠들지 마라. 돈 받고 하는 일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쿵.

저 멀리 소파에 앉아 있던 짐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묵직한 음성과 달리 생각보다 호리호리했다.

키는 2미터가 넘었지만.

“내 아들을 보여라.”

베믈리오는 순순히 자리를 옆으로 비켰다.

은색 장발이 허리까지 흘러내려 온 남자의 눈이 아겔을 향했다.

아겔은 그 남자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

잠시 아겔을 바라보는 남자.

눈빛에는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고, 잠시 후 점차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 장난하는 거냐?”

그 말에 베믈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상품을 보관하는 일에 허튼 수작은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내 아들 몸에 들어가 있는 저 새끼는 뭐야. 저게 허튼 수작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그는 아겔이 세로의 몸을 차지하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짐승 수인의 정점에 오른 자에게 물리 세계 너머를 바라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베믈리오가 태연하게 설명했다.

“그는 전문가입니다. 고독에서 상품을 보관하는 일에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지요.”

“전문가?”

“그렇습니다.”

으득.

남자의 주먹에서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너흰 내 아들을 건드렸다. 지금 당장 여기서 전부 찢어 죽여 버리겠다.”

크르르르르…….

짐승의 숨소리가 응접실을 진동시켰다.

점점 차오르는 투기에 베믈리오가 나서려 할 때, 아겔이 그의 팔을 잡았다.

“……?”

“내가 하지.”

베믈리오는 멍한 얼굴로 앞으로 나서는 아겔을 바라보았다.

겨우 꼬마의 몸으로 뭘 하겠다는 말인가.

저 남자는 자신이 전력으로 부딪쳐도 동수를 이룰까 말까 하는 괴물인데.

‘음…….’

잠시 염려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베믈리오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누구보다 살고 싶어 하는 자가 어리석은 짓을 할 리는 없을 테니까.

아겔이 남자 앞에 섰다.

은발의 남자의 날카로운 짐승 눈동자는 잡아먹을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말로 하면 좋겠구먼.”

“……당장 내 아들의 몸에서 나와라. 안 그럼 죽이겠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네. 자네 아들의 몸이 꽤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순간,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아겔의 목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아겔은 손길에서 느껴지는 힘을 느끼고 감탄했다.

‘힘 조절이 훌륭하구먼.’

남자라면 새끼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이 몸을 가루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지금 그는 위협하고 있었다.

딱 숨이 막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거기에 심령을 흔드는 맹수의 눈동자로 바라보는 것까지 확실했다.

“내가 지금 장난치는 것 같나.”

쿠구구구구구구…….

응접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니, 투기장 지하가 요동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겔은 허공에 대롱대롱 떠 있으면서도 태연한 얼굴이었다.

“순혈 라이칸스로프는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

남자는 자신의 위협이 통하지 않는 아겔을 보고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자넬 닮아서 그런지 이 몸은 참 재밌더군. 이런 것도 할 수 있으니.”

우득.

아겔의 몸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검은 털이 전신에서 뽑혀 나오고 가슴에 은빛 갈기가 자리했다.

눈은 푸른색 짐승의 눈동자로 바뀌며, 남자와 마주 볼 수 있을 만큼 키가 커졌다.

크르르르르…….

라이칸스로프의 왕은 잠시 멍한 얼굴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자신의 아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자를 바라보았다.

완전한 라이칸스로프의 모습으로 변한 아겔이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아겔라스토스라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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