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몸 상태 (1)
안톤은 지하 대기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체형이 남다른 고객들을 위한 맞춤 소파라 앉아도 별 상관은 없겠지만,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라 바닥에 앉았다.
그는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단지 하나를 꺼냈다.
챱.
단지에 손을 넣어 꿀을 떠먹으며 아겔을 기다렸다.
그는 혼자 남은 이 시간, 여느 때처럼 아겔에 대한 상념을 이어 갔다.
‘어르신과 내가 만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군.’
고독에 처음 들어온 15년 전.
그는 자신이 있던 행성에서도 이름난 무도가였다.
속세와 연을 끊고 수양을 하던 안톤은 근방 행성 사람 중에서 제일 뛰어난 전사였다.
비록 너무 큰 덩치와 요령이 좋지 않다는 점이 그의 성장을 느리게 했지만, 그는 차근차근 확실하게 힘을 키웠다.
고독에 들어오기 전까지.
자신이 살던 행성에서 퇴거하라는 정부의 명령.
혼자 살던 안톤은 웬 헛소리를 하냐는 듯 무시했지만, 은하 정부는 공격적이었다.
퇴거하지 않는 안톤에게 공격을 가해 온 것이다.
안톤은 화가 나서 은하군을 격퇴했고, 그 대가로 고독에 갇히게 되었다.
풍부한 자연의 기운을 누리지 못하는 이 기괴한 감옥에 갇힌 후 그는 낙담했다.
영원히 이곳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이 바로 아겔 한 사람을 만나 사라져 버렸다.
안톤은 분노를 풀기 위해 몇 년간 미친 듯이 죄수들과 싸웠다.
몸을 과하게 혹사한 안톤은 결국 죽음의 문까지 당도했고, 그가 눈을 감을 무렵.
그 앞에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죽고자 하면서 아직 복수를 놓지 못한 눈빛이구먼.
-…….
-난 부질없는 희망을 품은 사람을 참 좋아하지.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보단 인간적이니까.
그때 안톤은 죽어 가는 와중에 자신의 눈에 올려지는 주름진 손을 볼 수 있었다.
-확인해 보지 않겠나? 희망을 이루었을 때, 과연 어떤 느낌일지.
안톤은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고개를 어떻게든 끄덕였다.
그 이후로 엉망진창이던 안톤의 몸은 순식간에 회복되기 시작했고, 내면의 어둠을 걷는 공포가 시작되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식은땀이 흘렀지만, 저 멀리 앞서 나가는 노인을 따르기 위해선 심장을 부여잡고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감정이 지금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챱.
‘쓸데없이 감상적이었군.’
꿀을 떠먹은 안톤은 빈 단지를 배낭 안에 고이 넣었다.
단지의 꿀이 떨어졌으니, 이번 개방에 채집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안톤은 혓바닥으로 손바닥을 잘 핥고서 몸이라도 움직일까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투 망치뿐만 아니라, 대검과 창, 대궁까지 다루는 안톤이었다.
‘음?’
그중 검을 잡고 자세를 취하려던 안톤은 문득 차가운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안톤은 자세를 풀지 않고 그쪽을 노려보았다.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뼈가 시려 오는 한기.
그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
검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얼음 갑옷을 입은 늘씬한 기사.
푸른 장발을 포니테일로 묶은 그녀는 가늠하듯이 안톤을 노려보았다.
안톤도 그녀를 훑어보았다.
목에 새겨진 6이라는 급수.
그는 여기사의 모습을 보고 어둠을 느꼈다.
여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스승님께 영혼을 바쳤구나.”
그녀가 말하는 스승님이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렇군. 어르신과 아는 사이인가.”
“쓸데없는 질문이네. 방금 말했잖아. 그분은 내 스승님이야.”
그녀는 안톤을 훑어보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이곳에 오셨지?”
안톤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너야말로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있군. 어르신을 느껴서 이곳으로 온 게 아닌가.”
“…….”
여기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안톤을 바라보았다.
안톤도 그리 탐탁진 않은 표정이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데가 아닌데.”
“아무나가 아니니까 그렇다. 아겔 어르신께서 날 이곳으로 데리고 와 주셨지.”
“스승님께서?”
여기사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이내 다시 날카로움을 되찾았다.
“스승님은 어디 가셨지?”
“내가 너에게 보고해야 하나?”
쩌저저저적…….
여기사가 딛고 있는 바닥부터 한기가 주변을 얼리기 시작했다.
안톤은 거리낌 없이 전투 망치를 손에 쥐었다.
여기사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너, 마음에 안 들어.”
“피차일반이군. 들어와라.”
검을 뽑은 여기사가 안톤을 향해 뛰었다.
한기가 검 주변을 얼렸고, 안톤에겐 이쑤시개만 했던 검은 얼음이 붙어 기둥처럼 두꺼워졌다.
거대한 얼음 기둥이 휘둘러졌고, 안톤이 전투 망치를 휘둘렀다.
콰앙-!!
기둥이 박살 나며 주변에 얼음을 흩뿌렸다.
그와 동시에 얼음이 사방으로 한기를 퍼뜨렸다.
퍼져 나가는 한기는 안톤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다.
샤아아아.
공기 중 수분이 얼어붙더니, 여기사의 아름다운 얼굴이 투구에 가려졌다.
이제부터 제대로 할 모양.
안톤이 들고 있는 전투 망치에서도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내뿜는 기운이 폭발적으로 대립했다.
한기와 무형의 기가 부딪쳐 대기실을 엉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한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두 사람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엔 소년 한 명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어르신……!”
“스승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빨리 아겔에게 달려갔다.
아겔은 달려오는 두 사람을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톨먼이 사고 치지 말라고 했는데, 너희들이 이러면 안 되는 게야.”
안톤은 황급히 두 무릎을 꿇었고, 여기사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 고개를 숙였다.
안톤이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 여자가 제게 시비를 걸길래.”
여기사가 가는 눈으로 안톤을 흘겨보았다.
“이 곰탱이가 싸가지 없길래, 손 좀 봐 주려고 했습니다.”
“어르신 앞에서 주둥이 조심해라.”
아겔이 말했다.
“왜 싸우고 그러느냐. 너희 둘 다 내 친구이거늘.”
“어르신……! 친구라뇨, 당치 않습니다.”
“한 번 스승님은 영원한 스승님입니다.”
폭.
두 사람의 머리에 자그마한 손이 올려졌다.
그러자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손바닥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노인의 잔잔한 마음이 느껴졌다.
“아…….”
“음…….”
마음이 진정된 두 사람은 잠자코 있었다.
아겔이 여기사를 바라보았다.
“아리세이아. 오랜만이구나.”
6급 죄수 청빙검(靑氷劍) 아리세이아.
그녀는 아리스의 언니였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자, 여기사는 환하게 웃었다.
“예, 스승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강녕하셨습니까?”
“나는 잘 지내고 있단다. 투기장 생활은 좀 괜찮으냐.”
“문제없습니다. 여전히 제가 챔피언입니다.”
“훌륭하구나.”
칭찬을 받자, 아리세이아는 기쁘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아겔이 두 사람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아리세이아는 아 하고 안타까운 탄식을 냈다.
아겔이 물었다.
“설마 날 찾아온 것이냐?”
아리세이아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스승님께서 오셨다는 걸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톨먼 교정관과 거래를 했습니다. 스승님이 방문하시면 반드시 말해 달라고요.”
챔피언인 그녀는 많은 부분 혜택을 받는다.
이렇게 투기장 지하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것도 그 혜택의 일부였다.
그러나 투기장만큼은 떠날 수 없었다.
그녀는 아겔이 찾아오길 기다리거나, 일반 죄수 구역에 있는 아리스에게 그의 안부를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거래했다고.”
“예. 스케줄이 늘어났지만, 상관없습니다. 스승님이 들러 주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챔피언인데도 여러 번 경기를 뛰어야 한다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그녀는 아겔을 만나고 싶어 했다.
“날 만나려고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말투는 무덤덤했지만, 걱정이 서린 말이었다.
그에 아리세이아는 다시 환히 웃었다.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전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으니까요. 스승님처럼 무패 신화를 세워 가는 게 제 꿈입니다.”
“난 겨우 1급 죄수였다. 너와는 환경 자체가 달랐다.”
아리세이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급수가 낮다고 스승님께서 세우신 업적까지 빛바래지진 않습니다. 여전히 스승님은 제 우상이십니다.”
“…….”
아겔은 살짝 부담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저 좋을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나을 것이다.
-톡톡. 아아.
투기장 지하에 마이크 소리가 울렸다.
톨먼의 목소리였다.
-감동적인 상봉은 좋은데. 이제 나가 주면 안 될까, 영감.
톨먼은 세 사람이 지하에서 떠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인 것 같았다.
뭔 사건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러나 아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지.”
그의 시선은 안톤을 향해 있었다.
“기껏 구경하러 내려왔는데, 그냥 갈 수가 있나.”
“…….”
안톤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의 어두운 내면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투박한 기쁨이 솟아나고 있었다.
“가자꾸나.”
“예, 어르신.”
“저도 가겠습니다, 스승님.”
세 사람이 한쪽으로 걸어갔다.
-……하아. 투둑.
곧 탄식이 섞인 한숨과 함께 마이크가 꺼졌다.
오늘 업무를 보는 내내, 톨먼의 가슴은 불안할 예정이었다.
* * *
투기장 지하에는 여러 시설이 있었다.
투기장의 전력을 담당하는 전력시설과 하수도시설.
거기에 몬스터를 사육하는 ‘사육시설’과 경매장이 있었다.
경매장은 고객 이외에는 출입이 금지되는 터라, 아겔은 사육 시설로 향했다.
“가면 꽤 재밌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고독의 사육시설은 ‘소환’에 쓰이는 마물과 투기장 경기에 쓰일 몬스터를 사육하는 곳이었다.
위험한 곳인 만큼 사육시설 출입구는 교도관들이 지키고 있었다.
“……?”
철창문 양옆에 서 있는 교도관들은 다가오는 세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3미터가 넘는 곰 수인에 투기장 6급 챔피언 아리세이아, 그리고 조그마한 꼬맹이까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교도관들은 긴장한 얼굴로 아리세이아를 바라보았다.
“아, 아리세이아. 여긴 무슨 일이지?”
“사육시설 내부를 보고 싶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띠릭.
황당한 표정을 지은 교도관은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무전을 연결한 사람의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다.
“교정관님……?”
-열어.
톨먼의 목소리였다.
억지로 쫓아낼 생각은 없는지, 그냥 빨리 열어 주고 돌아가길 바라는 것 같았다.
교도관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여긴 교도관이 아니면 출입이…….”
-타이룽에겐 내가 말해 둘 테니까, 열기나 해.
“아, 예…….”
사육시설을 책임지고 있는 교정관의 이름을 대자, 교도관들은 황급히 열쇠로 문을 열었다.
아겔이 고개를 까닥이며 먼저 들어섰다.
“열어 줘서 고맙구먼.”
멍한 교도관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선 아겔은 일반 죄수 구역과 비슷한 철창들을 볼 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확 퍼져 나오는 퀴퀴한 냄새.
빈 철창들에는 무엇이 살았었는지, 분비물이나 털 같은 게 있었다.
“사육시설은 뭘 하는 곳입니까, 어르신.”
“동물원에 왔다고 생각하거라.”
“그렇군요. 동물원이군요.”
세 사람은 복도를 지나 시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구에서 가까웠던 빈 철창들은 사라지고, 이제 철창 안에 갇혀 있는 몬스터들을 볼 수 있었다.
크르르르…….
컹! 컹!
어둠 속에서 울음소리를 내는 몬스터들.
세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사이를 지나 걸어갔다.
안톤이 말했다.
“긴가민가했는데, 정말이었군요. 고독에선 마물을 기를 수 있다는 게.”
그는 철창에 갇혀 있는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라, 악의 기운을 내뿜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고독은 사육하고 있었다.
‘소환’과 ‘개방’ 때에만 마주치던 마물들이 여기에 전부 있었다.
“재밌게도, 이건 정부가 허락한 일이란다. 여기서 하고 있는 마물 사육 연구 자료를 정부에 넘겨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
“그런 것까지 알고 계셨다니.”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을 때, 아리세이아는 마물들이 철창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한기를 내뿜었다.
혹시라도 아겔에게 공격을 가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녀의 철저한 보호 덕에 아겔은 편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복도 끝에는 또 문 하나가 있었다.
자동문처럼 보였고, 열쇠 같은 것이 없어도 알아서 열리는 문이었다.
세 사람이 앞에 서자, 자동문이 옆으로 비켜났다.
안쪽을 바라본 안톤의 눈이 커졌다.
“이건…… 크군요.”
“그래. 작은 규모는 아니지.”
백색 바탕의 커다란 공간.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 수백 명이 광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깔끔한 최첨단 기계 설비들이 한가득 자리하고 있었고, 각종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곳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투기장 지하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안톤이었다.
세 사람의 등장에 연구원들은 잠깐 시선을 보내왔지만, 제 연구가 더 급한 듯 이내 신경을 꺼 버렸다.
그들에게 경비 교도관들이 다가왔다.
교도관들은 이미 전해 들은 게 있는지, 세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부터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사육사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안내하게.”
교도관 두 명이 앞장섰다.
안톤은 이리저리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듯 둘러보았고, 아리세이아는 묵묵히 아겔의 곁을 걸었다.
몇 개의 보안 구역을 지난 세 사람은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도관이 카드키를 보안 장치에 대고 말했다.
“사육사님. 모시고 왔습니다.”
-아! 문 열겠습니다. 들여 보내 주세요!
활기찬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컹.
앞서 지나온 자동문들처럼 사육사실의 문도 저절로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각종 플라스크에서 용액이 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형체를 알 수 없는 해부된 몬스터의 사체나 각종 물질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물안경을 쓴 웬 폭탄 머리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영감님! 때마침 너무 잘 오셨습니다!”
“반갑네, 타이룽.”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직접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검진 결과가 나왔거든요!”
타이룽이라 불린 교정관이 소년의 몸을 한 아겔에게 달려왔다.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년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이쪽으로 오시죠.”
아겔이 사육시설을 찾은 건 안톤을 구경시켜 주고자 한 것도 있지만, 다른 용무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독에서 이곳만큼 최첨단 설비를 갖추고 있는 곳은 없었다.
폭탄 머리 사육사는 희희낙락하며 아겔을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