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몸 상태 (2)
사육사 타이룽은 아겔 일행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사육사실 내부도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의 방은 각종 과학 서적이나 도구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하핫! 방이 좀 너저분해도 이해해 주세요!”
중년 남성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웃음을 만발한 채로 방을 이리저리 뒤졌다.
“앗! 내가 어디에 뒀더라? 설마 망가지진 않았겠지?!”
안톤은 정신 사납다는 표정이었지만, 아리세이아는 담담하게 소파에 앉았다.
아겔은 조용히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첨단 과학 연구소인 사육시설에 그가 들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전보다 더 안 좋을지 모르겠구먼.’
그는 주기적으로 몸 상태를 진단받았다.
고독의 근무자들도 아겔의 생존에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그는 주요 인물.
오직 아겔만이 받는 특혜라 볼 수 있었다.
생명 과학을 담당하는 이곳, 사육시설에서는 아겔의 몸 상태를 매번 확인해 주었다.
“찾았다!”
타이룽은 환한 얼굴을 하고 테블릿 기기 하나를 가져왔다.
그는 잠시 아겔을 바라보고 질문했다.
“혼자 들으시겠습니까?”
안톤과 아리세이아는 같이 있고 싶다는 표정을 보내왔다.
그에 아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룽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보시죠.”
띡.
그가 기기를 조작하자, 첨단 장치 위로 홀로그램이 하나 떠올랐다.
조그맣게 떠오른 그것은 아겔의 전신 형상.
소년의 몸이 아닌, 아겔의 본신이었다.
안톤과 아리세이아는 궁금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섣부르게 질문을 꺼내진 않았다.
타이룽이 말했다.
“자, 한번 볼까요! 몇 달 전에 스캔한 영감님 몸 상태입니다!”
띠리리리리릭.
빠른 속도로 뭔가를 입력하는 타이룽.
“참고로 이 자료는 은하 정부도 탐낼 만한 기기들로 얻은 것이니 신뢰도 99.8% 이상입니다.”
그가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떠오른 아겔의 몸 옆으로 몇 가지 수치들이 나타났다.
“자, 보십시오! 이건 전반적인 세포 재생력. 이건 혈구 건강도. 이건 수명 예측치입니다!”
대부분 붉은색의 문자.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예측치에는 [6개월]이라 적혀 있었다.
안톤과 아리세이아가 자그마한 탄식을 내었다.
타이룽이 하나하나씩 짚어 가면서 설명했다.
“세포 재생력이 점점 깎여 나가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으면 자연적으로 치유하는 데 오래 걸린다는 의미지요. 혈구도 건강치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정상인의 신체 기능을 10점이라고 한다면, 영감님의 몸은…….”
말을 끄는 그의 입술에 안톤과 아리세이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폭탄 머리 사육사의 눈과 입이 가늘어졌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폈다.
“한 1점 정도?”
듣고 있던 안톤과 아리세이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스승님께선…… 흠…….”
정작 당사자인 아겔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타이룽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살아 있는 게 용합니다, 아겔 영감님! 당신의 신체는 다 죽어 가는 좀비와 다름없습니다!”
그 말에 안톤이 으르렁거렸다.
“어르신 앞에서 말 가려서 해라.”
“하핫! 사실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직 살아 있잖습니까?!”
타이룽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에 있는 플라스크 몇 개를 들고 오더니, 안에 들어 있는 용액을 섞었다.
꿀꺽꿀꺽!
단숨에 들이키곤, 다른 용액을 아겔에게 넘겼다.
안톤은 그가 독을 주는 건 아닌지 의심했지만, 아겔은 거리낌 없이 플라스크를 받아 그 안에 있는 초록 용액을 홀짝였다.
타이룽의 눈이 한순간 예리하게 빛났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셔야 합니다. 당신의 신체가 붕괴하는 걸 나는 막을 수 없어요.”
그 말에 안톤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신체가 붕괴하고 있다니.”
타이룽이 손가락 하나를 펴며 설명했다.
“눈치를 보니 모르고 계신 모양이군요. 차근차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우선 영감님의 수명이 다하고 있다는 건 아시겠죠? 늙었으니까요.”
안톤의 얼굴이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고 말했다.
하나 함부로 그의 말을 막진 않았다.
“하지만 영감님이 죽어 가는 이유에는 노화가 아닌 ‘다른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다른 것?”
“네! 바로 이겁니다.”
타이룽이 소년의 몸을 한 아겔을 가리켰다.
안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아리세이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입을 살짝 벌렸다.
“바로 빙의! 과학적으론 설명할 수 없는 환상적인 능력이지요. 지금 꼬마에 빙의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영감님의 몸은 죽어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럴 수가…….”
안톤과 아리세이아는 과거를 떠올렸다.
아겔에게 영혼을 바친 자들은 그가 자신의 육신에 빙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실은 아겔 본인의 생명을 깎는 일이었다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아겔의 빙의로 인해 이전보다 월등하게 강해진 사람들.
그것이 노인의 삶을 앗아 가고 있었다는 건 두 사람에게 참담한 심정으로 다가왔다.
타이룽이 음흉하게 웃었다.
“대가라는 겁니다. 당장 이 짓거리를 멈추지 않는다면…… 영감님은 정말 6개월밖에 못 살 겁니다.”
타이룽의 말에 안톤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그럼 여태까지 예측치가 틀렸단 말인가.”
“정답입니다. 사실 1년 전 측정 때에도 예측치는 6개월로 나왔어요.”
“최첨단 기기로 측정한 거라 하지 않았나.”
“자료는 정확합니다. 다만, 숨은 공로자가 있죠.”
타이룽은 흰 가운의 주머니를 뒤지더니, 알약 하나를 꺼냈다.
“그게 뭐지?”
“이건 보시는 대로 알약입니다.
“……설명해라.”
“이게 아겔 영감님을 살리고 있는 유일한 방책입니다. 무척이나 비싸지요. 이 알약을 먹으면 신체의 붕괴가 멈추고, 그나마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안톤은 눈을 크게 뜨고 알약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하얀색을 띠는 알약이 지금까지 아겔을 살리고 있었다니, 믿기 어려웠다.
타이룽이 아겔을 바라보았다.
“약은 받으셨습니까?”
오직 거래로만 알약을 받기로 약속한 아겔이었다.
아겔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받진 않았지만, 서기관이 독방형이 끝나면 지급해 주겠다더군.”
타이룽은 고개를 끄덕이고 알약 샘플을 도로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안톤은 물었다.
“알약 하나가 얼마나 하는 거지?”
타이룽이 즉답했다.
“알약을 구성하는 재료가 재료인지라, 행성 하나 값은 나갑니다.”
안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어떻게 알약 하나 값이 행성…….”
굳어진 안톤의 얼굴을 보고 타이룽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농담 같나요? 믿든지 말든지 자유입니다.”
장난하듯 말하는 그 모습에 안톤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차가운 손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고개를 내리니, 아리세이아가 쳐다보고 있었다.
“진실이다.”
“…….”
분위기가 싸해질 즈음, 아겔이 입을 열었다.
“둘 다 나가 있거라.”
“어르신……?”
“둘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구나.”
아리세이아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어버버하는 안톤을 붙잡고 방을 나섰다.
덩치 차이가 있는데도, 아리세이아의 근력은 안톤을 붙잡아 당기기에 충분했다.
위잉.
밖으로 끌려 나온 안톤이 아리세이아를 바라보았다.
“너는 알고 있었나.”
아겔을 만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안톤은 처음 듣는 것투성이었다.
아겔이 죽어 간다는 사실.
약을 복용한다는 말.
수인족인 자신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아겔이었다.
그는 인간이니까.
‘여태껏 받은 은혜를 다 갚지도 못했는데…….’
아리세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알고 있었다.”
신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알약을 복용하는 스승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도울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투기장 경기를 치르며 아겔이 먹을 약을 사는 것.
그녀가 아겔에게 받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스승님의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말을 듣자, 애써 부정하던 사실은 현실이 되었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곰탱이답군.”
“내가 분명 곰탱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
숙이고 있던 아리세이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보고 안톤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의 붉어진 눈에서 떨어진 이슬이 얼어붙고 있었다.
“그러니까 잘하란 말이야. 스승님이 죽지 않도록.”
“…….”
두 사람은 아겔이 방에서 나올 때까지 침묵을 이겨 낼 수 없었다.
* * *
“하핫, 둘을 물리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옆에 있는 게 성가셨거든요!”
아겔은 타이룽이 건네준 플라스크에 든 용액을 들이켰다.
그는 잠시 맛을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바깥 상황은 어떠한가.”
타이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들으신 바가 있으실 텐데요? 상황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고독조차 이제 치외법권이 아니지요.”
“새로운 교정관이 부임한다는 말은 들었네.”
“정부는 사실 큰 관심은 없을 테지만, 문제는 성좌 교단입니다. 놈들은 고독에 관심이 많아요. 설립 초기부터 말이지요. 주인님께서도 어떻게든 막아 보려 하셨지만, 이제는 한계인 것 같습니다.”
“정부와 교단 둘이서 밀어붙였다면, 그도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겠구먼.”
“안타까운 일이죠.”
잠시 소파에 몸을 묻고 있던 타이룽이 허리를 숙이며 아겔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새 교정관이 오면 들킬지도 모릅니다. 그때부턴 ‘상품 보관’은 그만두시지요.”
“그러려고 생각하고 있었네. 괜히 귀찮아질 우려가 있으니.”
타이룽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탁월한 생각입니다. 그땐 알약을 무상으로 지급하겠다고, 주인님께서 전하셨습니다.”
“흠…….”
아겔은 알약의 무상 지급이란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알약은 땅 파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독의 주인조차도 꽤 출혈을 감수해야 얻을 수 있는 물건.
그만한 물건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받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기업가’인 그가 대가 없이 호의를 보낸다는 건, 사실…….
‘내게 족쇄를 채우려는 걸지도 모르지.’
그런 의미에서 아겔은 고개를 저었다.
거래는 즉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래야 시간에 의해 가치가 가중되는 뒤탈이 없을 테니.
“공짜로는 받을 수 없네.”
“하핫! 여전히 고집불통이시군요! 그래서 더 영감님이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만…….”
타이룽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아십니까? 아리세이아가 요즘 어마어마한 몸값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챔피언이니까요.”
“…….”
“버는 돈도 상당하죠. 그녀는 자신이 버는 돈의 상당량을 제게 바치고 있습니다. 스승님을 살려 줄 알약을 구매하는 데 쓰고 있지요. 지금까지 모은 돈으론 두 알밖에 사지 못할 테지만, 노력이 가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본인이 원해서 몰래 상품이 되어 팔려 나간다면, 바깥에서 영화를 누릴 수도 있을 만한 액수인데 말이죠!”
고독은 영원히 갇혀 죄수를 고통 속에서 죽어 가게 하도록 설계된 감옥이었지만, 나갈 수 있는 편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투기장 챔피언 그것도 고독의 챔피언이라면, 눈독을 들이는 우주의 유력한 자들이 적지 않을 터.
고독의 주인은 돈이 된다면, 당연히 팔아 버릴 것이다.
“그녀는 이곳에 스스로 묶어 두고 있는 겁니다! 오직 당신만을 위해!”
타이룽의 감격에 찬 말투에도 아겔은 담담하게 반응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군.”
“하핫, 아리세이아가 들었다면 속상하겠군요. 어쨌든 그녀가 구매한 두 알은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필요하실 때, 드리도록 하지요.”
타이룽은 앞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저 꼬마의 몸 안에 있을 노인.
그는 자신이 상상도 못 할 시간을 걸어온 괴물이었다.
“최근 ‘사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11성좌의 대리인, 사도.
그들은 평소 무거운 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은 이 말뜻을 알아들을 것이다.
“그럼 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겠구먼.”
“예. 외계(外界)에서 움직였습니다. 지금 정부는 물밑에서 대응하고 있지만, 대중화되는 건 순식간일 겁니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은 성좌의 사도들밖에 없으니까요.”
은하 정부와 성좌 교단이 고독에 간섭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혹시 모를 위험 요소는 애초부터 제거하자는 입장.
그러나 고독의 주인은 정부와 교단의 압박에도 쉽게 굴하는 자는 아니었다.
“한 2년쯤 지나면,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재밌지 않겠습니까?”
타이룽은 앞에 있는 아겔을 보고 확신했다.
그는 그 전쟁의 중심이 될 자였다.
그 가치를 벌써 아는 자는 이 ‘고독’밖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몸 아껴 주시기 바랍니다.”
타이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 노인은 자기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깎아 내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 내려고 하니.
그러나 그런 태도는 투자자 입장에서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아겔이지, 그가 돌봐 주는 죄수들이 아니니까.
“아까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는데 말이죠.”
타이룽은 아겔이 들고 있는 케이스를 가리켰다.
“이제 약으로 견딜 수 있는 시간은 끝났습니다.”
“이미 느끼고 있다네.”
타이룽의 눈이 살짝 커졌다.
본인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니.
역시 감 하나는 기가 막힌 노인이었다.
“충고는 고맙네만. 내가 알아서 하지.”
사육사의 눈이 진한 곡선을 그렸다.
“부디 6개월로 2년을 버텨 내시길 바랍니다.”
“노력해 보겠네.”
대화를 마친 아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갈 모양이었다.
“좋은 이야기해 줘서 고맙구먼.”
“하핫, 별거 아닌 것들입니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영감님.”
위잉.
소년이 뒷짐을 지고 문을 나섰다.
타이룽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띠릭.
타이밍 좋게 그가 소유한 단말기에 신호가 왔다.
“예, 사육사입니다.”
단말기에선 서기관 베믈리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장님께서 회의를 소집하셨다. 일시는 내일 저녁.
“예예. 회의란 말이죠. 물론 참석하겠습니다. 자료들은 준비되었습니다.”
-아겔 영감에 대한 자료도 잊지 말고.
“하핫, 물론이죠! 마침 영감님이 들렀다 가셨습니다. 아직 정정하시더군요.”
-그럴 리가. 어쨌든 이번에도 연구 핑계로 늦으면 집행관에게 넘기겠다. 녹화해서 주인님께 전달해야 하니, 늦지 마라.
“아앗, 그것만은…… 집행관님은 무섭습니다.”
통화를 마친 타이룽이 단말기를 내려놓고 아겔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핫,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 * *
아겔은 묵묵히 걸었다.
투기장 지하에서 올라와, 고독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안톤은 더 이상 구경하고 싶은 게 없는지, 말없이 그의 곁을 걷기만 했다.
문득 아리세이아가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겔은 그 감정을 눈치챘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아, 그게…….”
아리세이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체급 타이틀전에 도전하려 합니다. 경기가 내년에 있을 겁니다.”
아겔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말은 6급인 아리세이아가 7급 챔피언에게 도전하겠다는 말이었다.
“보러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돈 때문인 게냐.”
“…….”
타이틀전, 그것도 한 급수를 뛰어넘어 도전하는 것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좋다.
그것도 중급 죄수의 끝자락에 위치한 아리세이아와 상급 죄수의 결투이니, 사람들은 끝없이 몰릴 테고, 모이는 돈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저도 이제 7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절대 지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이겨도 멀쩡하지 않을 게다. 투기왕은 만만하지 않은 자이니까.”
7급 챔피언은 5년 넘게 투기장의 챔피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러 조건이 붙습니다. 제가 불리하지만은 않습니다.”
원래라면 급수를 뛰어넘는 대결은 애초에 성립조차 불가능하겠지만, 급수가 더 높은 쪽에 ‘족쇄’를 채우겠다는 뜻.
아리세이아는 그것에 걸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겔은 그만두라고 권하고 싶었다.
그야말로 자살행위.
그러나 그가 아리세이아가 원하는 바를 막을 권리는 없었다.
막는다고 듣지도 않을 테고.
게다가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겠는가.
아겔의 육신은 지금도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투기장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쿵. 쿠구구구구…….
곧바로 열리는 투기장 출구.
아리세이아는 출구를 통해 나가는 아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반드시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어떻게든.”
꽉 쥔 그녀의 고운 주먹 아래로 차갑게 얼어붙은 붉은 결정들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