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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58)화 (59/186)

58화 세 번째 시스템 : 개방 (5)

해가 기운 시각, 스산한 바람이 부는 정글의 분위기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사실 바를라 일행은 서로 동료라고 부르기 민망한 사이였다.

그저 ‘죄를 지은 성자’라는 거대한 위명 아래 모였을 뿐, 언제든 서로를 등질 수 있는 사이.

분위기가 먹먹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적자가 된다면, 오늘 죽은 죄수처럼 자신도 똑같이 죽임당할 테니.

식사가 끝나고 서로 대화하는 소리조차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를라는 한쪽에 앉아 있는 세로에게 다가갔다.

죽은 죄수를 묻어 놓은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년.

성자는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꼬마 친구, 괜찮으십니까?”

“아…… 네.”

세로는 그가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야 반응을 보였다.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못 볼 꼴을 보여 드려서 미안합니다.”

“전 괜찮아요. 이제 익숙해지고 있어요.”

생각보다 담담한 세로의 모습에 바를라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성자는 이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고독에선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저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데, 꼬마 친구는 담력이 좋군요.”

그의 마음속엔 궁금증이 일었다.

이 소년은 언제부터 아겔 어르신의 상품으로 있었을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을 텐데, 이 어린아이가 ‘고독’을 벌써 받아들인 것일까.

아겔은 어떻게 이 아이를 가르치셨을까.

자신의 경우를 돌아보던 바를라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다.

‘하긴. 내가 정신을 차린 것도 아겔 어르신 덕분이야.’

고독은 흉악범들이 오는 곳이지만, 사실 죄 있는 자만 오는 곳도 아니었다.

은하 정부는 최악의 범죄자들을 집어넣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도구로서 이 교도소를 이용하고 있었다.

바를라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에겐 고독에 어울릴 만한 죄가 하나도 없었다.

갈 곳 없는 행성민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리는 은하 정부에 대항한 게 죄라면 죄일까.

이 우주에는 말도 안 되는 행태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강자들은 약자를 핍박하지만, 약자를 지켜 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바를라도 고독에 갇혀 억울함에 빠져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런 자신을 마음의 늪에서 끌어 올려 준 사람이 다름 아닌 늙은 죄수였다.

심마(心魔)에서 빠져나온 바를라가 취한 행동은 고독에 수감되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고독을 돌아다니며 수없이 많은 죄수를 치료했다.

이 세상에 죽을 때까지 고통받아야 마땅한 죄인은 없다.

죄인일지라도 소망을 품을 자격까지 없는 건 아니다.

그게 소망의 성좌를 따르는 그의 생각이었다.

이 생각이 셀 수 없는 숫자의 죄수를 치유하고 살려 낸 위업을 만들어 내었다.

-저, 성자님……?

생각에 빠져 있던 바를라를 누군가 불렀다.

죄수들이었다.

자신이 이끌고 다니는 불쌍한 어린 양들.

-다친 이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혹시 치유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바를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느 날, 마음의 병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주었던 그분처럼.

몸의 상처를 넘어 누군가의 마음을 치료해 줄 수 있기를.

“다친 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

.

.

한차례, 정찰을 마친 아겔은 바를라 일행과 살짝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는 노인.

북적이는 건 그리 달갑지 않다.

바를라가 있다는 것 자체로 정글에 떨어진 죄수들은 계속 모일 것이다.

정글엔 각종 위협이 넘쳐나고, 다친 죄수들은 치유받기 위해 성자를 찾아온다.

타닥. 타다닥.

나무 아래에선 안톤이 몬스터 하나를 불에 굽고 있었다.

“신경 쓰이십니까.”

“…….”

아겔의 얼굴이 바를라 일행이 있는 쪽을 향하고 있기에 질문한 것이리라.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겔은 잠시 불에 고기가 구워지는 내음을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대적자가 되어 본 적이 있느냐.”

아겔의 질문에 안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어 번 정도 있었습니다.”

그걸로 대답은 되었다.

대적자가 되고도 살아남았다면, 괴물이 정글에 소환되었을 것이다.

안톤은 약하지 않으니, 그에 걸맞은 괴물이 정글의 죄수들을 학살했으리라.

“대적자가 되어 살아남은 게 수치스럽진 않습니다.”

본인은 살아도 정글에 떨어진 셀 수 없이 많은 죄수는 죽음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을 것이다.

“죄책감도 없습니다. 살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물론이다.”

안톤도 아겔이 그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애초에 숨긴다고 숨길 수 있지도 않았고.

안톤은 문득 고개를 들어 아겔을 쳐다보았다.

“어르신도 대적자가 되어 본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젠 기억도 안 나는구나. 꽤 많이 있었지.”

눈이 없는 아겔은 자신이 대적자란 사실도 누군가 지적하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정글을 배회하다가 마주친 죄수들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하나 얼굴에 표식이 생기든 말든 아겔은 남을 위해 희생할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애초에 그게 아겔의 탓도 아니고.

노인은 그런 의미에서 바를라 일행의 ‘약속’이란 건 참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는다.

언제까지 살 수는 없는 법.

정글 어딘가에 생겨날 대적자를 찾아 죽인다는 발상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바를라는 정글에 있는 모든 죄수의 목숨을 책임지려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질문이란 걸 알아챈 안톤이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 같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저 남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면 말리진 않을 겁니다.”

“그렇구먼.”

아겔도 동감이었다.

사람은 각자 사는 방식이 있으니.

참견도 간섭도 오히려 불화만을 낳을 것이다.

나무 위에서 내려온 아겔은 안톤이 먹기 좋게 찢어 준 고기를 입에 넣었다.

후각이 살아 있음에도 맛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살기 위해 먹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렇게 개방 둘째 날이 저물었다.

.

.

.

다음 날, 바를라와 아겔 일행은 대적자를 찾기 위해 정글을 헤매고 있었다.

아겔은 귀신같이 흑마법사들이 토템을 세운 장소를 찾아내었다.

흑마법사들과 부딪칠 때마다 사상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바를라를 추종하는 무리는 군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더 죽음과 가까워지는 일일 것이다.

바를라 하돌라라는 사람이 가지는 위상은 그만큼 대단했다.

거기에 안톤의 말도 안 되는 무력이 한몫했고.

쾅-!

또 한 차례 토템을 박살 낸 안톤이 무기를 갈무리했다.

아겔은 부서진 토템을 바라보았다.

‘뭔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올해 들어서 개방 때마다 흑마법사들은 토템을 세웠다.

아겔의 이름을 저주한 건 이번 개방 때부터였지만, 토템 세우는 일 자체는 이전부터 해 오던 일이었다.

마치 뭔가를 준비하고 계획하고 있다는 듯이.

귀찮은 일을 벌이려는 것이라면, 이제 가만두고 볼 수는 없다.

‘여태까진 방종했으나, 이젠 아니다.’

적극적으로 위협을 제거한다.

악마숭배자들의 윗선에 있는 자가 분노할 수도 있지만, 아겔의 어둠에 있는 아이 중 하나가 훌륭하게 막아 내고 있기에 두렵진 않았다.

아겔은 정글의 해를 바라보았다.

벌써 셋째 날의 태양도 노을을 만들러 가는 중이었다.

그에 바를라의 추종자들이 웅성거렸다.

-제길, 오늘은 대적자를 못 찾는 거 아니야?

-괴물이 소환되면…… 끔찍할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에겐 성자님이 있잖아.

목숨을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누군가를 의지하여 이겨 내려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곧은 심지를 보였던 자들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혼란이 가중되는 와중, 안톤과 바를라, 아겔은 묵묵히 있을 따름이었다.

‘음?’

아겔은 문득 세로가 일행과 조금 거리를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겉도는 모양새.

둘째 날, 추종자들이 대적자를 죽인 것에 충격을 받았나 싶기도 했지만.

‘이젠 그런 것에 휘둘릴 때가 아닐 터인데.’

아겔이 안톤에게 조용히 말했다.

“세로를 데려와라.”

“예.”

육중한 곰 수인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겔은 잠자코 기다렸다.

곧 굳은 얼굴을 한 안톤과 세로가 걸어왔다.

세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겔이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

세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이를 꽉 물고 고개를 들었다.

아겔은 소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으로 연결된 세로의 내면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는 감지할 수 있었다.

꼬마는 심히 떨고 있었다.

“오늘은 네가 대적자구나.”

“…….”

소년의 얼굴에 문신처럼 표식이 떠올라 있었다.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 같은 표식.

그것을 발견한 바를라의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다.

-저, 저거……! 표식이야!

-쯧, 꼬마가 대적자가 되었군.

-몇 살 되어 보이지도 않는데.

그들은 불쌍하다는 듯이 세로를 바라보면서도 내심 안도하는 듯 보였다.

자신이 대적자가 아니란 사실에.

그리고 추종자 무리도 아닌, 죽이기 쉬워 보이는 꼬마가 대적자란 것에.

-어쩌겠어. 약속은 약속이잖아.

누군가의 말에 추종자들이 세로에게 모여들었다.

세로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서서 벌벌 떨기만 했다.

그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꼬마는 건드리지 말게.”

-……?

늙은 죄수가 세로 앞에 섰다.

추종자들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태도를 보였다.

-대적자는 죽여야 해.

-비켜요. 얼른 안 죽이면 괴물이…….

아겔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꼬마를 건드리지 말게. 우린 자네들이 했다는 약속 따위와는 상관없네.”

노인의 말에 추종자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분명 같이 대적자를 처리하기로 했잖아요!

-우리도 아콜을 죽여야 했다고!

-아콜의 죽음만 개죽음으로 만들 순 없어!

-네 일행이라고 감싸고 도는 거냐!

추종자들이 흥분하기 시작하자, 안톤이 그르렁거렸다.

“어르신께 윽박지르지 마라. 버릇없이 나불대면 입을 뭉개 버리겠다.”

-…….

초인적인 힘을 내는 덩치의 수인이 말하자, 죄수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싸늘한 분위기마저 사라지진 않았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 성자가 나섰다.

“그만. 제가 말해 보겠습니다.”

바를라가 아겔 앞으로 나섰다.

그는 나서면서도 이미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상품만큼은 절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아겔 일행이 자신들이 했던 ‘약속’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사과드립니다, 어르신. 무리가 흥분한 것 같습니다.”

“저들의 잘못을 왜 자네가 사과하나. 받아들이지 않겠네.”

“…….”

추종자들의 시선이 점점 곱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은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성자가 중재하는데, 누가 감히 나설 수 있을까.

바를라는 잠시 고민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지금처럼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극도로 위험할 뿐이지.

“어르신. 저와 거래하시겠습니까?”

바를라는 아겔의 거래를 알고 있었다.

그는 거래한다.

그리고 거래 내용은 반드시 지킨다.

거래만이 아겔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대로라면 내일 꼬마 친구분의 ‘괴물’이 소환되겠죠. 그 괴물을 같이 잡아 주십시오. 그렇다면 대적자가 살아 있어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

정글의 죄수들을 학살하는 괴물을 도리어 사냥하자는 말.

그 말에 죄수 무리가 술렁였다.

불가능하다. 부질없는 짓이다. 모두 죽어 버릴 거다.

그런 부정적인 웅성거림이 나돌아 다녔다.

그러나 바를라는 그들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았다.

오직 아겔의 대답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노인이 질문했다.

“자넨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바를라는 이미 답을 생각해 두었다.

간단한 말이지만, 스스로 말하기가 쉽지 않을 뿐.

그는 떨리는 가슴을 잠재우고 결의 있게 말했다.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

성자가 자신의 목숨을 준다는 말에 무리가 다시 한번 크게 술렁거렸다.

같이 괴물을 사냥해 주는 대가로 목숨을 주겠다니.

말도 안 되는 거래 내용에 당황한 무리는 성자를 말리려 했다.

-당치 않습니다, 성자님……! 목숨을 바치겠다니…….

-그럼 성자님을 믿고 따르는 저흰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바를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성자는 알고 있었다.

과거 아겔이 정글에서 해낸 일을.

‘어르신은 괴물을 사냥할 수 있다.’

바를라도 고독에 수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

그는 보고야 말았다.

홀로 괴물에 맞서는 늙은 죄수의 모습을 말이다.

절대로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이 쓰러지는 모습이 다시 성자의 두 눈에 아른거렸고, 그때의 전율이 온몸을 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적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괴물을 두려워하는 감정이 아닌, 살기 위해 맞설 용기가 죄수들의 마음에 한 조각이라도 새겨진다면.

그렇다면 자신의 목숨 하나 따위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성좌를 따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순교일 것이다.

아겔은 잠시 바를라를 바라보았다.

눈 없는 노인의 직시에 심령이 꿰뚫리는 듯했다.

“꽤 비싼 것을 올려놓는구먼.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수지타산이 맞겠군.”

노인은 꼬마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

“내일 점심 이후에 사냥을 시작하겠네. 그때까지 푹 쉬어 두게.”

“…….”

아겔과 두 사람은 바를라 무리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개방의 셋째 날도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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