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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59)화 (60/186)

59화 세 번째 시스템 : 개방 (6)

셋째 날이 저물기 전, 아겔과 안톤, 세로가 모닥불에 둘러앉아 있었다.

아겔이 입을 열었다.

“지금 세로의 급수가 몇 급이지, 안톤.”

눈이 없어서 정확히 볼 수 없기에 질문한 것이었다.

안톤은 세로의 왼쪽 목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3급입니다.”

세로가 놀란 얼굴을 했다.

자신은 분명 1급 죄수였는데, 언제 3급으로 올라 버린 건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급 죄수가 대적자가 되어 괴물이 소환되어도 학살이란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중급 죄수가 대적자일 경우보단 낫다.

4~6급 죄수가 대적자가 된다면, 소환되는 괴물은 재앙이나 다름없다.

다행인 것은 하급 죄수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기에, 대적자도 대개 하급 죄수라는 것이었다.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만하겠구나.”

아겔은 ‘괴물’을 사냥해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몸이 늙어서 혼자선 쉽지 않겠지만, 약점만 찾아낼 수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안톤과 세로도 있으니, 승산은 충분했다.

다만, 어떤 괴물이 소환될지는 완전한 미지수였다.

고독의 사육시설은 기존의 몬스터들을 개량한다.

타이룽은 그 방면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자.

유전자를 조합해 아예 처음 보는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 내는 괴물은 우주 어느 곳에서도 쉽게 마주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괴물의 강함까지도 조절할 수 있는 경지였다.

‘그러니 문제는 항상 새로운 괴물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지.’

전대 사육사는 대충 강한 몬스터를 풀어 버렸지만, 타이룽은 다르다.

항상 새로운 괴물을 가져와 죄수들을 괴롭히는 놈.

스스로 좋다고 하는 일이니 말릴 수도 없었다.

딱히 말릴 이유도 없었고.

아겔이 말했다.

“내면으로 들어가자꾸나.”

그 말에 안톤과 세로는 눈을 감았다.

내면을 걷는 공포로 내일 있을 전투의 불안감을 잊는다.

더 강력한 감정은 약한 감정을 지워 버린다.

아겔이 이들을 내면 속으로 불러낸 것은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나름의 방법으로 내일 있을 전투를 대비했다.

모닥불이 숨을 다할 때까지.

.

.

.

약속한 다음 날, 점심.

웅성거리는 바를라 일행을 향해 아겔 일행이 걸어왔다.

성자가 그들을 반겼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저흰 끝났습니다.”

어떻게 설득한 건지, 바를라의 추종자들은 괴물과 싸우겠다고 결의한 모양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억울함에 울부짖던 자들의 눈엔 그래도 투기가 서려 있었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으니까.

아겔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준비는 끝났네만, 인원은 조정이 필요하겠구먼.”

“예?”

“먼저 괴물과 싸울 사람은 4명이면 충분하네.”

아겔의 말에 죄수들이 술렁였다.

성자도 조금은 염려하는 얼굴로 말했다.

“인원이 너무 적지 않겠습니까?”

“괴물이 어떤 특성을 갖추었을지 모르네. 인육을 먹고 순식간에 몸을 회복하는 종류라면, 넘치는 인원은 오히려 독이지. 상황을 봐서 나가는 게 좋겠네.”

“아,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싸움의 첫 순서는 탐색전이 될 거란 말투에 성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겔이 진심으로 임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

싸움에 나갈 인원은 뻔했다.

아겔 일행의 3명과 바를라.

다른 죄수들은 멀찍이 자리를 잡고 지켜보기로 했다. 바를라가 신호를 하면 달려와 주기로 약속했다.

4명의 사람이 정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밸런스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팀원을 보호해 주고 실시간으로 치유해 줄 성자와 적의 시선을 담당할 안톤.

거기에 아직 3급이지만, 수인화하면 그 무력이 더 강해지는 세로와 판세를 읽을 아겔까지.

바를라는 잠깐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잘하면 이 인원으로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바를라는 아겔이 이 싸움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가장 믿음직스러웠다.

64년간 고독에서 살아온 죄수가 승산 없는 게임에 몸을 던질 리가 없다.

그 사실만으로도 해볼 만했다.

이들은 각자 싸움을 준비했다.

안톤은 주변의 드높이 솟은 나무 몇 개를 쓰러뜨리며 공터를 만들었고, 세로는 수인화한 모습으로 준비했다.

아직 완전 수인화는 아니었지만, 거의 도달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아겔은 묵묵히 괴물이 소환되기를 기다렸고, 성자는 기도문을 외웠다.

-삶이란 한줄기 소망이 지워지지 않게 하소서.

아겔을 제외한 안톤과 세로에게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성자는 축복이 제대로 되었음을 확인하고도 조금 아쉬운 얼굴이었다.

역시 아겔은 축복이 되지 않는다.

그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쿠궁…… 짹짹짹…….

정글 너머에서 굉음이 울리고, 새들이 날아올랐다.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아겔이 일어나 그쪽을 바라보았다.

진동이 느껴졌다.

“온다. 준비하거라.”

괴물이 다가오는 방향 선두에 안톤이 섰다.

그는 상체를 가릴 만한 철제 방패 하나와 대검을 한 손으로 들었다.

공격보단 방어에 치중한 모습.

아겔과 세로는 선두에 선 안톤의 뒷라인에 양옆으로 섰고, 바를라는 가장 뒤에 섰다.

세로는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아겔은 무덤덤한 얼굴로 달려오는 괴물을 가늠했다.

땅의 울림소리를 통해 발의 개수를 세고, 몸무게와 대략적인 키까지 느껴졌다.

‘키는 5미터, 발은 4개, 몸무게는 최소 6톤.’

그저 돌진뿐이라면, 안톤의 힘으로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하지만 괴물의 능력은 단순히 체급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죄수들을 학살하기 좋은 능력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왔다.’

수풀 사이로 놈이 커다란 몸집을 드러내었다.

세 개의 뿔을 가지고 머리가 방패처럼 서 있는 괴물.

모습을 보면 케라톱스과인 모양이었다.

4족 보행을 하는 놈은 곧장 제일 몸집이 큰 안톤을 향해 돌진했다.

“쿠우우우우……!”

안톤도 지지 않으려는 듯 포효를 내지르며 앞으로 뛰었다.

“쿠워어어어어어엉-!”

쾅! 콰드드드득……!

괴물과 부딪친 안톤은 몇 미터나 주르륵 밀려 나며 그가 선 땅이 갈려 나갔다.

발목이 땅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밀려났지만, 안톤은 굳건하게 서 있었다.

성자의 치유가 안톤의 부러진 팔을 회복했다.

레쿠페라레.

안톤은 팔이 치유되는 것을 느끼고 대검을 들어 괴물을 내려찍었다.

쾅!

곰 수인이 괴물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사이, 아겔과 세로는 놈의 빈 부분으로 달려들어 공격을 시도했다.

휘릭. 촤악!

세로의 손톱과 아겔의 단검이 놈의 배 부분을 쑤셨지만, 공격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아겔은 뒤로 물러났다.

‘몸 전체가 강철이구먼. 제일 까다로운 타입이야.’

그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괴물의 신체 강도를 가늠했다.

이 정도라면 안톤의 공격으로 충격을 줄 수 있겠으나, 안톤은 놈의 정면을 맡아야 한다.

아겔은 한쪽에 자신의 본체를 숨기고 당장 세로에게 빙의했다.

으득……! 으드득!

곧장 세로의 몸을 완전히 수인화한 아겔이 아까보다 더 강력해진 손톱을 놈의 배에 휘둘렀다.

촤악!

먹히지 않았다.

아겔이 빙의한 세로의 힘으로도 생채기를 내는 게 고작이었다.

노인은 다시 자신의 본체로 돌아와 잠시 뒤로 물러났다.

“살이 연한 곳을 찾아라!”

몸 전체가 다 저런 부분은 아닐 것이다.

세로는 아겔이 자신에게 말함을 깨닫고 서둘러 움직였다.

늑대 수인이 빠르게 달려들자, 괴물의 등에서 주먹만 한 구멍이 몇 개 열렸다.

마치 숨구멍처럼 열린 구멍에서 회색 연기가 팍 하고 터져 나왔다.

정글은 삽시간에 회색 연기로 가득 싸여 앞뒤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젠장, 조심해!”

안톤이 바를라에게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아겔은 침착하게 소리로 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웃기는 놈이구먼.’

괴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건 단순한 회색 연기가 아니라 가루였다.

놈은 사방에 퍼진 가루를 통해 아겔 일행을 감지했다.

가루가 움직이는 것을 민감한 감각 기관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 증거로 아겔이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반응하듯 몸을 움찔거렸다.

가만히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세 사람에게는 그다지 반응을 보내진 않았다.

‘이래선 죄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하는구먼.’

상대의 시야는 가리면서 자신은 상대를 감지하는 능력.

전차와도 같은 단단한 몸과 돌진력으로 연기 속에서 헤맬 죄수들을 학살하도록 설계된 놈이었다.

쾅!

발을 박찬 괴물이 타깃을 정했다.

그 대상은 역시 안톤.

숨소리도 커서 어디에 숨든 가루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쿵……!

안톤이 잘 막아 낸 모양이지만, 부딪칠 때마다 몸 어딘가가 부러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크윽……! 치유해라!”

“안 보입니다……!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성자가 싸움의 근원지로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아겔이 소리 질러 막았다.

“가까이 다가가지 말게!”

쿵……!

괴물은 영악하게 치유사가 있다는 걸 알고 안톤을 버려둔 채로 성자에게 뛰었다.

지금 당장 힘으로 놈을 막을 수 있는 건 안톤이 유일.

아겔은 발이 느린 성자의 팔을 붙잡고 자리를 벗어났다.

“으억……!”

콰앙-!

성자가 서 있던 뒤쪽 바위가 완전히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단 생각에 바를라는 식은땀을 잔뜩 흘렸다.

아겔이 조용히 말했다.

“생각보다 영리한 놈일세.”

“어, 어떻게 하죠? 보이지 않으면 안톤 님을 회복시켜 줄 수 없습니다.”

성자의 회복력은 팔이 잘리거나, 상·하체가 분리되더라도 보이기만 한다면, 아예 새로 재생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신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회복시켜 줄 수가 없었다.

“당장 필요한 건 안톤의 회복이 아닐세. 놈의 반응 속도가 느리니 천천히 해보도록 하지.”

성자를 놓친 게 분했는지, 괴물은 다시 안톤에게 돌아가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겔은 이어진 어둠을 통해 명령을 내렸다.

‘안톤은 그대로 괴물을 막는다. 세로는 내게 와라.’

안톤은 남은 팔 하나로 대검을 휘두르며 괴물과 혼자서 대치했다.

곧 세로가 가루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겔이 묻기도 전에 세로가 말했다.

“찾았어요……! 몸이 연한 곳이 있어요!”

아겔이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쉿, 조용히 말하거라. 그래서 어느 부분이냐.”

“등. 등이에요. 연기를 뿜어내는 부분은 다른 곳보다 연했어요.”

“되었다.”

아겔은 괴물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돌파할 구멍을 발견한 이상, 사냥은 끝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놈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한 가지가 떠오른 아겔이 바를라를 바라보았다.

“확실치 않지만, 자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네.”

바를라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 주세요, 어르신.”

간단하게 지시 사항을 전달한 아겔.

그를 선두로 두 사람이 괴물을 향해 뛰어갔다.

쾅……!

안톤은 홀로 괴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놈은 단단한 제 몸을 믿고 세 개의 기다란 뿔을 휘둘렀다.

뿔이 어찌나 단단한지, 안톤이 전력으로 휘두른 대검에도 잘려 나가지 않았다.

이미 검면에 새겨진 문자가 푸르게 타오르고 있었는데도.

‘아클락시오로도 자를 수 없다면, 내 힘으로 부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전투 망치였다면, 충격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혼자서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아쉽진 않았다.

그저 놈을 쓰러뜨릴 수를 찾아올 어르신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 뿐이었다.

안톤이 생각보다 쉽게 쓰러지지 않자, 괴물은 화가 난 것처럼 머리를 휘둘렀다.

“쿠우우우우……!”

뒤로 물러서서 돌진해 보려 했지만, 안톤이 악착같이 따라붙어서 속도가 붙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근거리에서 달려드는 건 안톤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기에 그런 것이었다.

“안톤 님……!”

근처에서 성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치유사라는 걸 깨달은 괴물이 곧장 그 방향으로 뛰었다.

안톤의 팔을 회복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안 돼……!”

괴물이 공격하려는 걸 눈치챈 안톤이 소리를 질렀지만, 성자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성자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안톤처럼 괴물의 공격을 다 막아 낼 수는 없었지만, 한 번쯤은 가능했다.

스페스 메 테 프로히베레.

플레나 레쿠페라티오.

녹색 방어막이 성자의 몸을 감쌌다.

괴물의 뿔은 그 단단한 방어막을 무참히 부수고 성자의 복부를 꿰뚫었다.

“커헉……!”

뿔에 몸이 꿰뚫림과 동시에 아겔을 안은 세로가 놈의 등으로 도약하는 것이 보였다.

안전히 등에 도약한 아겔이 벌레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잘했네.”

푸욱……!

세로와 함께 감싸 쥔 단검이 괴물의 숨구멍을 찔렀다.

아겔은 단검을 눌러 그 안에 농축된 것을 괴물의 몸속으로 흘려보냈다.

주륵…….

아겔과 세로는 뿔에 꿰뚫린 바를라를 붙잡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쿠우우우우……?!”

뭔가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온 걸 느낀 괴물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30초 동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랄하던 놈은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쿵…….

아겔은 상처 입은 성자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은가.”

“아, 예…… 저는 괜찮습니다.”

미리 걸어 놓은 치유 주문 때문에 그는 지금도 몸이 회복되고 있었다.

복부가 거대한 뿔에 꿰뚫리는 상처를 입었어도 회복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래도 충격이 없진 않은지, 그의 얼굴은 핼쑥했다.

“괴물은 어떻게…….”

“그냥 약점을 공략했네. 그게 전부야.”

아겔은 품에 단검을 갈무리했다.

친우에게 받은 벌레 단검엔 아주 좋은 기능이 하나 있었다.

물을 넣기만 하면 저런 괴물조차 단숨에 죽일 수 있는 극독을 생산하는 기능.

벗의 덕을 많이 보고 있었다.

“그보다 안톤을 좀 봐 주게.”

“물론입니다…….”

성자는 더 질문하지 않고, 지팡이를 의지하여 안톤에게 걸어갔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어리더니, 곧 안톤의 부러진 팔이 순식간에 나았다.

과연 성자라 불릴 만한 실력이었다.

어깨를 주무른 안톤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죽이셨습니다, 어르신.”

“방법이 있으니 어렵진 않았다.”

안톤은 멀쩡한 아겔의 몸을 살펴보며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세로가 성자를 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덕분에 제 목숨을 구했어요.”

감사 인사에 성자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괴물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그런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쉬운 눈길로 아겔을 바라보는 성자였지만, 괴물 사냥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목숨을 주었으니, 아겔에게 줄 수 있는 게 이제는 없다.

영혼이라도 바치고 싶었으나, 그의 영혼은 성좌의 소유였다.

소망의 성좌를 따르기로 한 이상 영혼을 남에게 바칠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괴물을 같이 사냥해 주셔서. 역시 어르신은 괴물을 사냥하는 게 가능하셨군요.”

이 조합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바를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 중엔 안톤만 한 전사가 없다.

아겔처럼 괴물을 쓰러뜨릴 한 수가 있는 사람도 없었다.

‘꼬마 친구도…… 어르신의 지시를 잘 이행했지.’

만약 이들 없이 괴물 사냥에 자신들이 나섰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도 파멸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겔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거래일 뿐일세. 자네 목숨은 이제 내 것이란 걸 알아 뒀으면 하는군.”

“물론입니다.”

성자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네 사람은 가루가 전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가루는 생각보다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20분이나 지나서야 가루가 사라지고 주변이 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쪽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괴물의 몸체가 드러났다.

아겔은 잠시 괴물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가죽을 잘라 내면 뼈는 쓸 만할 것 같은데, 어떤가.”

“…….”

곁에 있던 세 사람이 흠칫 놀랐다.

가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아겔의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노인은 그들이 말이 없자 의아한 감정이 들었다.

“왜 그러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그…… 아…….”

성자는 벌어진 입을 막았다.

안톤은 묵묵하게 있었고, 세로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성자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결국, 그가 말했다.

“어르신…… 대적자가 되셨습니다…….”

“…….”

아겔의 얼굴에 대적자의 표식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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