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세 번째 시스템 : 개방 (8)
의자에 앉은 아겔과 인듀라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 수하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 쪽은 건드리지 않고, 흑마법사들을 잡아 피를 보충할 테니.”
“그거 유익하구먼.”
“우린 정보를 얻는 데 탁월하지. 흑마법사들의 이목을 속이기도 쉽다.”
“그것도 좋구먼.”
“그나저나 오늘 대적자는 영감이군. 내게 도움을 바라나?”
“전혀.”
“…….”
아겔은 조용히 인듀라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는 아겔과 달리, 인듀라스는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뭐라도 자신의 가치를 어필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겉으로는 우아한 말투로 말하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반응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평소 이렇게 묵묵한 성격이란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반응이 없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든 아겔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인듀라스의 속이 복잡하든 말든 아겔은 아까 했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었다.
‘사도.’
여전히 활동 중인 빛의 사도들과 달리 어둠의 사도들은 자취를 감춘 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들의 생사도 행방도 불명한 상황.
그리하여 ‘고독’이 설립된 이후, 우주엔 유례없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일컬어지고 있었다.
하나 그들이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만 해도 우주는 감당할 수 없는 피바람이 불었다.
우주를 지배하는 패권을 놓고 격렬히 싸우던 지배자들.
결국, 승리는 성좌 교단의 손에 돌아갔지만, 그리 영광스러운 승리는 아니었다.
아겔이 말했다.
“자넨 어둠의 사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듣고 싶었던 주제가 나오자, 인듀라스는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틈을 두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광범위한 질문을 던지면 쉽게 답하기 어렵군.”
“다 알 만한 이야기 말고 자네가 알고 있는 것 말일세.”
인듀라스는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재확인이라고 보는 게 좋겠군. 최근 들은 바에 따르면, ‘사도 전쟁’ 이후로 ‘분노의 사도’는 여전히 공석이라고 들었다. 다른 어둠의 사도는 전부 멀쩡히 살아 있지.”
“호오, 그걸 어떻게 알지?”
아겔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자, 인듀라스가 미세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중급 죄수들을 거느리는 그는 고독 안에서도 우주의 새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투기장 죄수와 관계를 맺으면 되었다.
그곳엔 고객과 외지인들이 찾아오는 곳이므로 바깥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하지만 아겔이 물은 건 그게 아니었다.
인듀라스가 답했다.
“우리 종족은 애초에 ‘공좌’를 따른다. 외계(外界)에서 활동하는 내 권속들도 많지. 사도들의 거취에 대한 정보는 이곳에서도 오직 나밖에 알지 못한다.”
사도의 자취를 알기 위해선 외계에 소식통을 두어야만 했다.
인듀라스의 손길은 외계까지 뻗어 있었다.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쓸 만하군.”
“훗, 무슨 당연한 소리를. 후룩.”
인듀라스는 짐짓 으스대는 듯 눈을 감고 찻잔의 피를 홀짝였다.
“?”
뭔가 이상함을 느낀 건 3초 뒤였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뭐지. 왜 방금 위화감이…….’
그가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아겔이 말했다.
“자네가 좋은 걸 가르쳐 줬으니, 나도 하나 말해 주겠네. 사도가 되는 방법에 대해 질문했었지.”
인듀라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서, 설마 사도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나?”
백작은 탐식의 공좌를 따르고 있었다.
악마숭배자의 다르키스처럼 사제니, 제사장이니, 대제사장이니. 뭔가 이름을 붙이면서 직위를 논하는 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하지만 사도라면 다르다.’
모든 게 베일에 싸인 존재.
빛의 사도들조차 모습은 드러내지만, 장막에 감춰진 존재들이나 다름없었다.
아겔이 말했다.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은 자. 이 두 가지만 기억하게.”
“보내는 자……?”
처음 듣는 말에 백작은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분명 신과 사도의 관계를 말하는 것일 테다.
이 사이에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 알고 싶었지만, 아겔은 더 말해 주지 않았다.
인듀라스가 생각에 빠질 무렵.
어디선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아겔은 가만히 앉아 있었고, 인듀라스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부웅!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거대한 전투 망치를 내리찍는 안톤.
망치 면적으로 인한 그늘이 인듀라스의 몸을 삼킬 정도였다.
백작은 손바닥을 펴서 전투 망치를 막아 내었다.
쾅-!
먼지가 일어나며,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으십니까, 어르신.”
안톤은 한쪽 남은 눈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살기 넘치는 눈이 인듀라스를 내려다보았다.
“감히 어르신 앞에서 더러운 입 냄새를 풍기고 있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모기.”
안톤의 모욕적인 언사에 인듀라스도 참지 않았다.
“너야말로 죽고 싶나. 선을 넘는군.”
흡혈귀의 왕으로부터 스산한 기운이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푸르렀던 풀잎이 바짝 시들기 시작했고, 서늘한 한기가 주변을 감돌았다.
인듀라스는 태연하게 차를 홀짝였다.
“전엔 아겔 영감을 봐서 넘어갔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어르신 앞에서 주둥이가 살았구나. 지금 당장 쥐포로 만들어 주겠다.”
두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운에 숨 막히는 기분이 들 무렵.
아겔이 말했다.
“그만.”
“…….”
“…….”
“거래했다. 무기를 거둬라, 안톤.”
“예, 어르신.”
아겔의 말이 떨어지는 즉시, 안톤은 전투 망치를 회수하고 아겔 곁으로 물러섰다.
여전히 의문 따윈 가지지 않고, 아겔의 말에 복종하는 안톤이었다.
“인듀라스.”
아겔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악마숭배자들의 본거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
“동향을 파악해 주게. 괜찮은 타이밍에 습격하는 것으로 하지.”
설마 이 인원으로 습격하자는 말인가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인듀라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의심해 봐야 얻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때가 되면 소식을 전하러 오겠다.”
말을 마친 인듀라스의 몸이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박쥐로 화해 버렸다.
촤악. 파다다다다다다…….
아겔이 말했다.
“식사하자꾸나.”
“예.”
곧 두 사람은 뒤늦게 고기를 끌고 온 세로와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 * *
셋째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아직 정글의 모습은 훤히 보였지만, 이제 곧 해가 떨어지면 앞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아겔은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바를라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죄수가 모였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다친 죄수들이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바를라를 찾아오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무리 중에 성자가 있다는 걸 알리고 죄수들을 끌어모으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뭉치면 살 확률이 높아지니까.
“쯧. 좋지 않구먼.”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곧 아겔의 말이 바를라 무리를 향한 것임을 깨달은 안톤이 말했다.
“전부 죽이고 오겠습니다.”
“그만두거라. 기력 낭비다.”
아겔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직접 바를라를 만나러 갔다.
안톤과 세로도 뒤따랐다.
바를라는 죄수들에게 둘러싸여 소망 성좌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다친 죄수들을 치유하고 있었다.
“성좌님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하길.”
-아아, 성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독에 들어온 죄수라도 사람은 사람이었다.
그들도 죽음의 위험과 고통 앞에선 한없이 나약해지는 존재다.
안톤의 거대한 몸체가 드러나니 죄수들이 갈라졌다.
바를라는 자신을 찾아온 아겔을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어르신?”
“할 말이 있어서 왔다네.”
“예, 자리를 옮기지요.”
성자가 그를 따라가자, 죄수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겔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한쪽으로 바를라를 데려와 말했다.
“자네를 따르는 무리가 점점 커지는구먼.”
“개방 때마다 이렇습니다. 제게 치유받기 원하는 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흑마법사들의 이목을 끌 수도 있네.”
“아…… 그렇군요. 그건 생각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흑마법사들은 사람을 노리는 자들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흑마법사의 시선이 따라붙지 않는 것도 힘들었다.
“여기서부턴 따로 행동하도록 하지.”
“그럼…….”
“자네는 이쪽에서 계속 사람들을 모으고 치유하게. 어디 가지 말고.”
“알겠습니다. 아, 마침 근처에 매번 쓰던 공터가 있는데, 거기서 지내도 될는지요?”
“마을 말인가?”
바를라는 개방 때마다 정글의 한 구역에 머물면서 다친 죄수들을 치유했다.
이른바 ‘성자의 마을’.
죄수의 숫자가 많아지면 그만한 힘이 생기니, 방어하기도 좋았다.
“예, 마을입니다. 몬스터들이 부숴도 금방 복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은 곳입니다.”
“그러도록 하게. 난 계속 돌아다니면서 괴물을 처리해 보겠네.”
예상치 못한 아겔의 말에 바를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괴물을…… 처리하시겠다고요?”
“자네 목숨값치고 한 번은 너무 싼 것 같아서 말일세. 계산은 깔끔하게 해야, 자네 마음에도 뒤탈이 없겠지.”
“아아…….”
바를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소매로 눈가를 비볐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 합니다, 어르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가 아니라 거래일세. 아, 한 가지 더.”
뭐든 말해 달라는 듯 바를라의 눈이 활기로 빛났다.
아겔이 수염을 쓸며 말했다.
“자네 사람 중 몇 명을 시켜서 이오베를 찾아 주게.”
“광신도…… 말씀이십니까?”
“그래. 정글이 넓어서 찾아가기 힘들구먼.”
아겔이 왜 이오베를 찾는지 단숨에 이해한 바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신도가 누굴 적대하는지 알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오베를 찾아 제 마을로 데려오겠습니다.”
“그래. 말 잘 들어서 좋구먼. 나중에 찾아오지. 그때 동안 목숨 소중히 하게.”
아겔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바를라는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말엔 뼈가 있었다.
그의 목숨은 그의 것이 아니니, 소중히 보관하라는 의미였다.
‘나를 신뢰하시는구나.’
자신의 물건을 타인에게 맡길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었다.
맡기는 물건이 소중할수록 그 신뢰의 무게는 무거워지는 법이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바를라에게 안톤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뭔가 뚱한 표정이었다.
“?”
바를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톤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기강을 잡듯이.
“어르신의 것이 되었다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난 몸과 영혼까지 바쳤다.”
“……?”
잠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어 바를라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안톤 님께선 저보다 더 소중한 것을 드렸군요.”
“물론이다. 그러니 기억해라. 어르신은 날 더 좋아하신다.”
“아무렴요. 부디 어르신을 안전하게 보필해 주십시오.”
“그럴 거다. 네 할 일이나 잘해라.”
쿵.
안톤이 육중한 덩치를 잽싸게 움직여 멀어지는 아겔에게 따라붙었다.
세로도 질세라 그 뒤를 따랐다.
바를라 하돌라는 미소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개방의 셋째 날 새벽.
아겔 일행은 정글 한쪽에 자리 잡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안톤이 어마어마한 고집을 부렸기에, 불침번은 세로와 안톤 둘이서 번갈아 가면서 보기로 했다.
애초에 아겔은 별말하지 않았지만, 안톤이 자초한 일이었다.
혼자 깨어 있는 세로는 하품이 나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고 정글을 바라보았다.
‘정글은 정말 위험한 곳이구나.’
안톤과 몇 번 몬스터를 잡으러 간 사이.
그에게 정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수백 종류가 넘는 독초가 자생하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다양한 몬스터들이 산다.
마음을 놓고 있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고 배웠다.
그렇기에 소년은 더욱 긴장한 채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졸리지 않느냐.”
“히익……!”
깜짝 놀란 세로가 벌떡 일어섰다.
옆엔 언제 다가왔는지, 아겔이 있었다.
“아…… 괜찮아요, 할아버지.”
“무리하지 말고 졸리면 자거라.”
“아녜요. 제가 할 일인 걸요.”
세로는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아겔과 함께 다닐수록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처음 보았을 땐, 볼품없는 노인인 줄로만 알았지만, 같이 다닐수록 그에 대해 아는 게 많아졌다.
자신은 한주먹거리도 안 될 안톤마저 아겔을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
‘도대체 할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일까.’
물어도 매번 같은 답만 주니 궁금함만 쌓여 갔지만, 그렇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안톤에게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고.
아겔이 말했다.
“너는 나에 대해 궁금할 필요가 없다.”
“…….”
자신의 생각을 꿰뚫는 것 같은 말에 세로는 괜히 움츠러들었다.
“사실 모두가 그렇다. 어차피 때가 되면 모두 알게 될 테니. 시간은 반드시 우릴 지나쳐 간다.”
“……?”
“게다가 어릴 때의 시간은 꽤 빠른 편이지. 눈 깜빡할 사이에 크고 말 거다.”
턱.
주름진 손이 소년의 머리 위에 놓였다.
“그러니 잠이나 자거라. 그래야 키가 클 테니.”
순간, 세로의 눈앞이 핑 돌았다.
방금까지 긴장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눈꺼풀이 물에 탄 솜처럼 무거워졌다.
곧 소년은 바닥에 쓰러져 색색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내일 괴물과 싸워야 하기도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린 아겔은 홀로 일어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오늘 밤도 그에겐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둑한 밤이었다.
곁에 누가 있어도 혼자 있는 것만 같은 그런 고독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 있으면 그렇다.
눈을 빼앗긴 그 순간부터 그는 누구도 의지할 수 없었다.
자신마저.
하나 지금은 아니다.
어둠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지라도, 그의 마음속엔 희망 하나가 자리 잡아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2년.’
아겔은 곧 펼쳐질 환한 별빛을 상상하며 새벽의 공기를 삼켰다.
.
.
.
개방의 넷째 날.
해가 중천의 뜬 시각, 긴장감이 정글에 감돌고 있었다.
오늘, 괴물이 소환된다.
아겔이 대적자인 만큼 어떤 괴물이 소환될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안톤마저 긴장한 기색으로 자신의 전투 망치를 꽉 쥐고 앉아 있었다.
한 손엔 커다란 방패를 들고.
세로도 심히 긴장했는지, 아직 괴물이 소환되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호흡이 거칠어졌다.
오직 아겔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세로는 겁에 질려 떨려 오는 손발에 힘을 주려 노력했다.
‘사, 살 수 있겠지?’
아겔을 믿고 싶지만, 전에 마주쳤던 괴물조차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안톤조차 어떤 괴물이 소환되는지에 아는 게 없으니, 소년은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 괜찮을 거야. 할아버지 곁에 있으면 살 수 있어.’
자신을 수없이 다독였지만, 심상 속에 맺힌 무형의 적이 자꾸만 세로의 목을 노리는 것 같았다.
슥.
아겔이 고개를 들었다.
노인의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소환되었다.”
괴물은 대적자 근처에 소환되니, 소리를 들은 아겔이 알아챈 것이다.
파다다다닥……!
타이밍 좋게 근처에서 새들이 놀라 하늘로 솟구쳤다.
안톤이 망치를 들고 일어섰다.
세로는 전신을 늑대의 형상으로 바꾸며 전투를 준비했다.
아겔은 잠시 괴물이 올 방향을 짐작하듯 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적막한 분위기.
곧 일어날 전투에 정글조차 숨죽이는 듯했다.
…….
“음……?”
소리를 듣던 아겔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반응에 세로는 극심히 긴장했다.
당황.
당황이라니.
지금껏 아겔이 당황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마 아겔조차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난 것인가.
그렇다면 당장 도망쳐야 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떤 괴물이 나타났길래…….
소년은 떨리는 입술로 질문했다.
“무, 무슨 일이에요, 할아버지?”
세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에게서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아겔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놈이 도망쳤구먼.”
괴물이 소환되자마자, 도망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