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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63)화 (64/186)

63화 세 번째 시스템 : 개방 (10)

아겔은 세로의 시선으로 괴물을 내려다보았다.

1미터가 조금 넘어가는 작은 키.

전체적으로 날렵한 외형에 손발톱을 가진 놈이었다.

‘겉모습은 평범하구먼.’

척 보았을 때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외형이었지만, 이런 종류일수록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수십 명에게 동시에 환영을 보여 줄 수 있는 능력.

그것도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 정도라면 쉽게 대할 순 없었다.

방금 자신에게 환영을 보여 주려 한 모양이었는데, 그게 제대로 먹혔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단숨에 처리해야겠구먼.’

아겔은 세로의 몸을 움직여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놈이 재빨리 뛰어 도망갔다.

수풀 사이로 뛰어들어 몸을 숨기며 도망가는 녀석.

아겔은 놓칠 생각이 없었다.

촤악……!

늑대의 강인한 다리가 땅을 박차고 정글을 헤쳐 나간다.

세로의 종족은 숲이 본향인 만큼 울퉁불퉁한 정글의 길이라도 쉽게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음……?’

뭔가 이상했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괴물의 속도가 완전 수인화한 세로의 속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건 분명했다.

라이칸스로프의 몸으로 숨이 차오르도록 전력으로 뛰었는데도 말이다.

‘따라잡지 못한다?’

아겔은 발달한 짐승의 눈으로 괴물을 노려보았다.

지금 보니, 괴물은 도망치는 데 특화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정글을 뛰어다니기 좋게 얇고 단단하게 설계된 다리, 그것을 뒷받침하는 두꺼운 허벅지 근육.

‘타이룽이 애초에 저런 식으로 설계한 모양이구먼.’

육탄전이 아닌 정신 착란 능력으로 사냥하도록 사육된 괴물인 것이다.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 도주 능력을 극대화하고서.

“이런 놓치고 싶진 않은데.”

아겔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저 멀리 괴물 근처로 덩치 큰 무언가가 뛰어올랐다.

부웅.

덩치는 그대로 전투 망치를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앙-!

압도적인 힘에 땅이 갈라졌다.

주변 일대에 강렬한 충격파가 발산되었고, 나무들의 뿌리가 드러났다.

도망치던 난쟁이 괴물은 그 충격파를 이겨 내지 못하고 튕겨 나가, 한동안 땅을 굴렀다.

“츠릇……!”

괴물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곧 대가리를 홱홱 턴 놈이 다시 일어났을 땐, 그늘이 자신을 가리고 있었다.

전투 망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괴물은 기겁하며 안톤이 내리찍는 전투 망치를 피해 땅을 굴렀다.

난쟁이 괴물은 빠르게 달려서 안톤을 뿌리쳐 보려 했지만.

촤악!

안톤은 어느새 괴물의 옆까지 박차고 달려와 있었다.

“나까지 따돌린 순 없을 거다.”

당연하게도 안톤은 세로보다 빨랐다.

덩치가 큰 곰이라고 해서 그 속도를 얕보면 큰코다친다.

그는 뒤따라오는 아겔을 위해 괴물을 붙들어 놓으려 했다.

거대한 손이 괴물을 향해 뻗어졌다.

“도망칠 수 없……!”

괴물을 붙잡으려던 안톤의 손이 움찔했다.

난쟁이 괴물의 머리에 돋아난 돌기가 빠른 속도로 떨렸다.

츠르르르르르…….

안톤의 눈이 붉어지며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이 무슨…… 끄으…….”

6급 죄수인 안톤마저 무릎을 꿇리는 어마어마한 정신 공격.

대신 괴물은 곰 수인을 무릎 꿇리기 위해 그 자리에 서야만 했다.

“끄으으으…….”

안톤은 전투 망치를 붙잡고 다시 일어섰다.

벌게진 눈으로 괴물을 향해 다가가려 했지만.

“츠르릇……!”

더욱 강한 파동을 내보내자, 다시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이…… 끄르르…….”

입에서 거품을 무는 안톤.

따라오던 라이칸스로프도 그 파동에 영향을 받았는지, 저쪽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탓.

그 사이 누군가의 신형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촤악.

“츠르르르릇……!”

허벅지 근육을 베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단검.

언제 따라왔는지, 늙은 죄수가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었다.

“따라오느라 토할 뻔했구먼.”

“우웨에에엑……!”

빙의와 착란이 동시에 풀린 세로는 한쪽에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와 구역질해 댔다.

안톤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털며 무던히 애썼다.

쉽게 벗어 나오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겔이 괴물에게 다가갔다.

“꽤 쓸 만한 능력이구나.”

안톤 같은 강한 전사도 무릎 꿇릴 수 있는 능력이다.

보통 강력한 힘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능력은 언제 당했는지도 모르게 대상을 죽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지금까지 여기서 죽은 죄수들도 알지도 못하는 새에 환영에 갇혀 사망해 버렸을 것이다.

“츠르르…….”

괴물은 아겔이 두려운지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로 뒷걸음질했다.

놈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머리에 난 돌기들이 미친 듯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츠르르릇……!

그와 동시에 아겔의 시야가 환해졌다.

.

.

.

.

.

“이사벨.”

온 세상이 하얀 배경으로 변하고.

그곳에 환히 웃는 여인이 보였다.

여느 평범한 가정 주부처럼 보이는 여인.

특출나게 예쁘지 않았다.

다만, 미소가 사랑스러웠다.

미소가 사라지면, 다시 웃게 해 주고 싶을 만한.

그런 여자.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갈 줄 아는 사람.

매번 식사를 차려 줄 때마다,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던 사람.

세월이 얼마나 지나,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진다고 해도.

그 미소의 가치는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때의 아내가 눈앞에 보였다.

“이사벨.”

“네.”

아겔의 젊은 손이 앞으로 뻗어 나간다.

아내의 고운 손을 맞잡았다.

젊어진 아겔은 말문을 열지 못했다.

다시 만난 아내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을 말해 보기로 했다.

“우리…… 우리 아이는 잘 크고 있겠지?”

아내와 사랑을 나눠 얻은 아이.

천금을 주어도 맞바꾸지 않을 아이.

그 아이는 지금 두 사람에게 있지 않았다.

아내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잘 크고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다정한 말투.

아겔은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콱……!

“컥……!”

아겔은 손을 들어 아내의 목을 붙잡았다.

아내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고, 살기 위해 두 손으로 아겔의 팔을 긁어냈다.

“컥…… 왜, 왜…….”

아겔은 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푸른 눈을 가지고 있던 젊은 남자는 붕대를 감고 있는 노인으로 변했다.

시야가 변했다.

주변을 채우던 백색 배경은 사라졌다.

노인은 괴물의 목을 붙잡고 들고 있었다.

“츠르르륵…… 츠륵……!”

괴물의 손톱이 아겔의 팔을 마구 헤집었지만, 살이 얼마나 파여도 아겔은 꿈쩍하지 않았다.

아직도 아내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듯했다.

왜…… 왜…….

메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내 아내는 죽었다.”

꽈드드드득.

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뿌득.

“츠르르으으으…….”

괴물의 목이 부러져 버렸다.

아겔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벌레 단검을 꺼내 괴물의 목을 쑤셨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단검이 푸른 피로 물들었다.

완전히 죽었다는 걸 알고 괴물을 바닥에 던졌다.

털썩.

아겔은 괴물을 잡고 있던 왼손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강하게 잡았는지, 손가락 관절이 어긋나 있었다.

왼팔은 괴물의 손톱에 당해 죄수복이 넝마가 되어 있었다.

자상도 꽤 컸다.

아겔은 단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엿 같군.’

괴물이 마지막 발악으로 공격한 정신 착란은 아겔마저 환영을 보게 했다.

비록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한순간 진짜라고 믿을 만큼 정교한 환영이었다.

아겔은 품에서 케이스를 꺼냈다.

거기에 든 알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온몸이 순식간에 회복되고, 힘이 느껴졌다.

하나 알약을 먹은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텁. 치이이익…… 으득.

피가 흐르는 왼팔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고, 오른손으로 왼손의 어긋난 관절을 맞춰야 했다.

끔찍한 비명을 지를 법한 고통 속에서도 아겔은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그저 케이스에 남은 알약을 확인할 뿐이었다.

이제 알약은 2개 남았다.

-치이이익…….

떨어진 괴물의 사체에서 소리가 들렸다.

머리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들리십니까, 영감님?

타이룽의 목소리였다.

아겔이 다가가 쭈그려 앉아 거의 잘려진 괴물의 목을 들었다.

-제가 보낸 친구는 어땠습니까? 좀 발악하던가요?

“꽤 재밌는 친구를 만들었구먼, 타이룽.”

-하핫, 이거. 영감님을 화나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신체 반응이 꽤 격렬하시군요.

“마지막 발악은 꽤 뼈 아프더군. 이걸 만든 자넬 죽이고 싶을 만큼.”

-…….

타이룽이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투의 긍정적인 톤은 변하지 않았다.

-그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만든 놈 중에 영감님께 ‘배달’할 만한 녀석은 그놈밖에 없었거든요! 아무래도 허접한 괴물을 배달부로 쓸 순 없지 않겠습니까? 누가 가로채면 안 되니까요!

아겔은 뭘 배달하려는 건지 묻지 않았다.

타이룽이 알아서 대답했다.

-교신이 끝나면 머리를 부수시면 됩니다! 사비를 털어서 드리는 거니까 마음껏 사용해 주세요!

“사비를?”

아겔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사육사는 남에게 한 푼도 적선하지 않는 구두쇠 같은 면모를 가진 남자였다.

그런 그가 사비를 털어서 아겔에게 뭔가를 준다는 건 처음이었다.

-요즘 영감님 건강이 많이 걱정되어서 말이죠! 방금도 ‘빙의’를 사용했잖습니까?

잠깐이긴 했지만, 세로에게 빙의하긴 했다.

“아주 잠깐이었다네.”

-그래도 말이죠. 그 빙의란 게 한 번 하면 영감님의 몸을 아주 많이 망가뜨린단 말입니다! 자제한다고 약속했잖아요!

“약속한 적은 없네만.”

-그래도 말이죠! 알약으로 꾸역꾸역 연장하는 것도 나중엔 통하지 않을 겁니다!

“명심하지.”

아겔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지, 그대로 괴물의 머리를 밟아 부쉈다.

-자, 잠깐만요……! 아직 더 잔소리를 해야……! 치이이이…….

괴물의 머리가 부서지자, 교신이 끊겼다.

아겔은 괴물 머리 내부에서 케이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열어 보자, 알약이 들어 있었다.

‘2개.’

타이룽은 행성 2개 살 값을 알약으로 아겔에게 바쳤다.

그만큼 우려하고 있다는 뜻.

아겔은 고개를 끄덕이고 케이스를 잘 닦은 다음 품에 넣었다.

“날 짜증 나게 한 값으론 좀 모자라군.”

아무래도 손해 보는 느낌이었지만, 지금 당장 어찌할 순 없으니 내버려 두기로 했다.

쿵.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안톤이 다가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어르신.”

“난 괜찮다. 넌 괜찮으냐.”

“아, 예…… 고독에 처음 갇혔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끌끌, 꽤 고통스러웠겠구나.”

“지나간 시간입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안톤은 그 지나간 기억 때문에 무릎을 꿇었음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로 말했다.

아겔은 저쪽에 덩그러니 누워 있는 세로를 바라보았다.

괴물의 정신 착란 공격에 한 번에 녹다운 당한 모양이었다.

“쯧, 끌고 오너라. 돌아간다. 이제 사냥은 끝이다.”

“예, 어르신.”

안톤이 세로를 어깨에 올려놓았다.

아겔은 바를라가 있을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마을로 돌아가려 걸어온 지 하루째.

정신 착란 상태에서 벗어난 세로는 비척거리긴 했어도 제 발로 걷고 있었다.

“다 왔나요……?”

“조금만 더 가면 있다.”

정글 중앙에 거의 도착했다.

그곳엔 바를라가 세운 ‘마을’이 존재한다.

죄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울타리.

바를라의 치유를 원하는 죄수들은 그곳으로 죄 몰려들었다.

아겔은 거리를 가늠했다.

1시간 정도만 더 걸으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조용한 정글.

앞서 걸어가던 안톤이 커다란 언월도를 들었다.

“누구냐. 나와라.”

“…….”

그가 멈추자, 아겔과 세로도 걸음을 멈추었다.

소년은 긴장한 표정을 했고, 아겔은 담담하게 누군가 숨어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바라보았다.

안톤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

“나오지 않는다면 죽이겠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누군가 비틀거리는 행색으로 나무에서 나왔다.

숨어 있던 사람은 한 명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새의 부리를 하고 있는 자였다.

아겔은 그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참새 친구?”

“아겔 영감님…….”

참수리 수인 호루크.

1급 죄수인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튼튼했던 날개 한쪽은 잘려 나가고 날카로웠던 발톱이 모조리 뽑힌 모습이었다.

호루크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오랜간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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