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66)화 (67/186)

66화 재회 (3)

성자의 마을.

한쪽에는 아직 치료받지 못한 환자들을 위한 천막이 쳐져 있었다.

바를라의 신성 치유는 몸의 외상을 전부 낫게 하지만, 후유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신성 치유 덕에 몸은 말짱해졌지만, 아직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이 있는 자들은 천막에 남아 있었다.

“몸이 다 나으신 분들은 자리를 비켜 주세요!”

수백 명의 환자가 동시에 마을로 찾아왔다.

전부 흑마법사에게 당한 죄수들.

팔다리가 잘려 나간 자들도 많았고, 저주를 받아 피부에 포진이 생긴 사람도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바를라는 곧바로 광역 신성 치유를 시작했다.

파아아앗…….

푸른 기운이 퍼져 나가 이제 막 마을에 들어온 죄수들을 감쌌다.

죄수들이 흘리던 피가 멎기 시작했다.

하나 이건 급한 불을 끄는 조치일 뿐.

중상을 입은 자들은 하나씩 직접 치유해 줘야 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성자님이 치료를 시작하십니다!

-중상자부터 데리고 오세요!

어수선한 분위기 사이로 아겔이 비집고 들어갔다.

죄수들이 마을에 들어올 때, 느껴졌던 한기.

자신이 아는 한 그런 기운을 낼 수 있는 사람은 2명밖에 없다.

‘아리스.’

아리세이아는 투기장 죄수이니 개방에 해당되지 않는다.

개방은 오직 일반 죄수 구역에 머무는 죄수들에게만 적용되는 시스템.

그렇다면 오직 한 명밖에 남지 않는다.

“비키게.”

아겔이 성큼성큼 죄수들 사이로 나아갔다.

“…….”

죄수들을 비집고 나온 그곳엔 한 소녀, 아니 숙녀가 있었다.

몇몇 죄수들이 들것으로 옮겨 온 아이.

아리스가 누워 있었다.

“이보게.”

“예……?”

아겔의 부름에 아리스를 데리고 온 죄수 중 한 명이 답했다.

“내 눈이 안 보여서 그런데, 이 아이 상태를 좀 말해 줄 수 있겠나.”

“……혹시 이분을 아십니까?”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빛’을 내는 아이인데.

아겔이 아리스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걸 깨달은 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리스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백옥 같은 두 팔의 피부가 검게 물들었고, 왼쪽 다리는 잘려 나가 있었다.

하얀 머리칼은 칙칙한 보랏빛으로 얼룩졌다.

화상을 입었는지, 전체적인 피부에 보기만 해도 쓰라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복부엔 큰 관통상을 입었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말할 법한 상태였다.

곁에 선 죄수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이분이…… 저희를 구해 주셨습니다. 흑마법사들이 습격했는데, 몇몇 죄수분들과 함께 흑마법사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가장 앞에서요. 그 대신…… 크흡…….”

중년 죄수는 소매로 눈을 비볐다.

아겔은 고개를 돌렸다.

아리스와 같은 중상을 입은 자들이 몇몇 느껴졌다.

흑마법사에게 직접 대항한 모양이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생기는 금방 끊어질 것처럼 희미했다.

호흡을 막기만 해도 사망할 것이다.

“하, 할아버지……?”

미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겔은 바닥에 뉘인 아리스 곁에 다가가 앉았다.

눈꺼풀에 힘이 잘 들어가진 않았지만, 분명 아리스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래.”

아겔은 거뭇하게 물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여기…… 계셨네요……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겔은 고개를 저었다.

“더 말하지 말거라. 몸이 상한다.”

“괜찮, 아요…….”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리스를 보며, 곁에 선 죄수들이 눈물을 흘렸다.

이 자리에 있는 수백 명의 죄수가 그녀로 인해 목숨을 건졌다.

흉악범들이라도 사연이 있고, 그들 안의 도덕까지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다.

아니, 사실 도덕이 무너지지 않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을 구해 준 자를 위해 눈물 하나 흘리지 못할 사람은 여기 없었다.

“장한 일을 했구나.”

아겔은 진심이었다.

왜 구해 줬느냐고.

네 목숨부터 신경 써야 했다고.

죄수들을 살리려 흑마법사와 맞선 이유가 뭐냐고.

말하지 않았다.

아리스는 스스로 할 일을 했다.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

그것은 아겔이 뭐라 한다고 변할 일은 아니었다.

“훌륭하다.”

“칭찬…… 정말 오랜만이에요…….”

숙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리고 다시 잠이 들 듯이 눈을 감았다.

바를라가 급히 아겔이 있는 천막으로 달려왔다.

그는 아겔의 안색을 살피곤 서둘러 아리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자는 바로 기도문을 외웠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이여. 부디 다시 일어날 소망을 허락하소서.

1분 동안 땀을 몇 방울 흘리며 기도하던 성자는 눈을 뜨고 일어났다.

짧은 시간 사이, 아리스의 전신이 회복되어 있었다.

잘려 나간 다리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고, 아리스를 괴롭혔던 모든 저주가 사라졌다.

기적을 마주한 죄수들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바를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는 이마의 땀을 훔쳤다.

“끔찍한 저주에 당했었군요. 여기 있는 분 중 가장 크게 다친 분이었습니다.”

아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일어날 수 있겠나?”

“…….”

바를라는 확답을 주지 못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입을 열었다.

“몸은 다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주로 인해 정신과 영혼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겁니다. 이제부터는 숙녀분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그렇군.”

아겔은 대답을 듣자마자, 천막 밖으로 나갔다.

휘장 밖으로 나서는 아겔에게 바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십니까.”

“잠시 혼자 있고 싶구먼.”

바를라는 아겔을 잡지 않았다.

그는 아겔이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 * *

아겔은 혼자 정글 한쪽으로 나왔다.

수풀이 가린 곳엔 작은 시냇물이 하나 있었다.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만한 물가는 정글에서도 꽤 귀한 장소였다.

늙은 죄수는 물가 곁에 서서 잠시 사색하고 있었다.

아리스.

그녀는 자신에게 영혼을 바치진 않았다.

기실 아리세이아도 아겔에게 영혼을 바치진 않았다.

그러나 아겔은 자신에게 영혼을 바친 자만을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모든 신뢰의 관계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친구’라는 단어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아리스와 아겔은 귀한 것을 공유하긴 했다.

바로 시간.

아리스, 아리세이아 자매가 고독에 들어온 7년 동안, 아겔은 누구에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두 자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특이했다.

차가운 기운을 타고났으면서도 성정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빛’ 또한 남을 태우고 눈을 멀게 만드는 것이 아닌, 길을 비춰 주고 어둠을 밝히는 종류였다.

누구라도 선망하고 따랐을 그런 환한 빛.

그뿐만 아니었다.

‘만약 그녀와 낳은 아이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았다면.

손녀를 보는 느낌이 과연 그랬을까.

손녀 같은 아이를 건드렸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씻었다.

차가운 시냇물을 온몸으로 느꼈다.

늙은 죄수는 시냇물 한가운데 서서 눈 주위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허리를 숙이고 험악한 눈의 상처에 시냇물을 비벼 닦았다.

눈이 시리다.

그러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추위를 타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지만, 몸이 떨려 왔다.

오랜만에 감정이 육신을 지배하는 감각이 느껴진다.

아겔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닦기 시작했다.

굳어 있던 핏자국이 핏물로 변해 시냇물을 타고 흘러갔다.

단검 안으로 물이 들어가 스스로 독을 생성해 낸다.

품 안에서 케이스를 꺼내 알약의 개수를 세어 본다.

‘4개.’

충분한 숫자다.

놈들을 토벌하고도 남을 만한 양.

확인을 마친 아겔은 케이스를 닫고 다시 품에 넣었다.

그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끄허어억…….”

수풀 사이에서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수풀 뒤에 숨어서 아겔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 어르신…….”

그는 아겔과 이어져 있는 존재.

내면의 어둠을 통해 감정을 공유한다.

아겔은 평소에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은 편이라, 그의 권속들이 아겔의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에 안톤도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

안톤 곁에 있던 세로는 기절한 듯이 쓰러져 있었다.

곰 수인은 겨우 숨을 되찾고 두 무릎을 꿇었다.

“어르신의 이런 감정은 오랜만입니다.”

“그렇구나. 나도 그렇다.”

두 사람 모두 낯설기 짝이 없는 감정이었다.

분노라니.

화를 내 본 게 언제쯤이었을까.

‘오랜만이구먼.’

몸이 떨려올 정도로 분노를 품었던 건 참으로 옛일이었다.

고독에 살기 시작했던 초창기에는 화가 많았다.

그러나 감정은 점점 마모되기 시작했고, 몸이 늙어 버린 이후론 화낼 일도 잘 없었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차가운 분노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파다다다닥…….

박쥐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나무의 그늘로 모여든 박쥐들이 한 남자의 형상을 만들었다.

“영감. 놈들의 동향을 살피고 왔다. 출발하는 시기는 언제로……?”

상황을 전하려던 인듀라스는 기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말을 멈추었다.

어느새 늙은 죄수는 바를라에게 받았던 새 붕대를 눈에 감고 있었다.

“오늘 밤. 출발하도록 하지.”

“오늘 밤…… 당장 말인가?”

“원래는 사흘 뒤에 출발하려 했지만. 혹시 문제라도 있나?”

인듀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나도 그 생각일세.”

아겔이 시냇물 밖으로 나왔다.

“전부 죽여야겠어. 당장.”

그는 단검을 쥔 채로 마을에 돌아갔다.

.

.

.

오늘 밤, 출발하게 될 거란 소식을 들은 바를라는 뒤늦게 회의에 참가했다.

아겔 일행과 인듀라스가 천막에 모여 있었다.

안톤과 세로는 한쪽에 같이 앉아 있었고, 인듀라스는 아겔 옆에 서 있었다.

성자는 백작을 향해 어색한 인사를 보내며 자리에 앉았다.

인듀라스도 살짝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았다.

“설마 백작도 함께할 줄은 몰랐군요.”

“나도 성자와 같이 갈 줄은 알지 못했군.”

바를라는 아겔에게 미리 언질을 받아, 그가 같은 목적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로 방어막부터 만들었을 것이다.

흡혈귀와 성직자의 조합.

오직 고독에서만 볼 수 있는 기묘한 팀이었다.

천막에 모인 인원은 우선 자신이 알고 있는 상황부터 보고했다.

인듀라스가 먼저였다.

“놈들은 이미 제물을 다 모았다. 제물의 숫자는 죄수 백만 명. 놈들이 하려는 이 ‘백만 번제’는 제물을 모아 ‘제단’에서 치르는 의식이다. 다만, 제단은 완성되었어도 ‘거점’은 아직 준공 중이지. 놈들을 막으려면 ‘거점’을 공략하는 게 좋다.”

“거점이라고요?”

바를라가 묻자, 인듀라스가 자세히 설명했다.

“흑마법이란 건 꽤 단순하지 않다. 제단에 악마의 힘을 불러오려면, 그 강림의 때를 견디기 위해 거점을 지어 힘을 분산하는 거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무게를 견디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거점이란 걸 공격하면 번제도 불가능한 거군요.”

“그래. 놈들은 3개의 거점을 짓고 있다. 무리한다면 2개로도 의식은 가능하겠지만, 3개가 있는 게 안정적이지.”

“적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거점당 흑마법사가 1천 명은 있다. 놈들이 거느리는 타락한 몬스터도 수백은 있지. 제단은 더하다. 최소 만 명에 달하는 흑마법사가 있다.”

숫자로 보면 불가능한 도전처럼 보이는 일이었지만, 천막 안에 있는 자 중 누구도 낙담한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바를라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이오베 님이 있었다면, 거점 2개를 동시에 공략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요.”

성자의 생각으론 광신도까지 있어야, 안정적으로 거점을 공략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겔은 달랐다.

“아니. 이오베가 없어도 상관없다. 동시에 3개의 거점을 공략하는 것으로 하지.”

천막에 모인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바를라가 질문했다.

“그게 가능합니까?”

아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듀라스. 자네가 거점 하나를 맡아 줄 수 있겠지.”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놈들의 거점 방어가 뛰어나긴 하나, 내 권속들과 덮친다면 충분하지.”

인듀라스의 수하로 있는 흡혈귀들도 셀 수 없이 많다.

거점 하나 정도에 몰린 흑마법사와 비등할 정도였다.

“바를라. 안톤과 세로를 데리고 다른 거점을 공략해 주게.”

“그럼 나머지 하나는 어떻게…….”

아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혼자 가도록 하지.”

바를라가 얼떨떨한 얼굴로 질문했다.

“호, 혼자서 가신다고요?”

아겔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천막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아겔은 천막의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거점 공략이 끝나면 안톤을 통해 알리겠네. 시간이 없으니 나부터 출발하지.”

“아, 아니 잠깐만요, 어르신!”

바를라는 무모한 일이라 생각하며 그를 말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늙은 죄수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이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