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68)화 (69/186)

68화 거점 공략 (2)

깊은 정글의 밤 속을, 아겔은 걸어가고 있다.

사방에 깔린 몬스터들이 아겔을 주시했다.

야행성 몬스터들이 많기도 했지만, 설사 잠들어 있었다고 해도 아겔이 내뿜는 진득한 살기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데도, 노인의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뚜벅뚜벅 짐승들 사이로 나아가는 아겔.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쿠우우우우……!

‘왔다.’

기다리고 있던 게 왔다.

곧 아겔의 앞으로 거대한 몬스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쿠왁-!”

기를 제압하듯이 소리를 지르는 원숭이 몬스터.

어둠에 잘 녹아드는 남색 털과 노란 눈깔을 가진 녀석이다.

키는 고작 3미터에 불과한 놈이었지만, 뿜어내는 기운은 평범한 정글의 몬스터들과 달랐다.

이놈이 이 근방의 우두머리였다.

정글엔 몬스터가 셀 수 없이 많다.

놈들은 각자 영역이 있고, 각 영역의 우두머리를 따르는 경향을 보인다.

하급 죄수들에겐 무리이지만, 정글에 사는 몬스터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선 우두머리를 제압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바를라가 세운 성자의 마을도 근처에 있는 우두머리를 제압하고 터를 잡았을 것이다.

“쿠왁! 쿠왁!”

거대 원숭이는 쉽사리 아겔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마치 그를 재 보려는 듯 주변을 돌면서 허점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탐색전.

아겔은 자신의 주변을 빙빙 도는 소리를 들으며 쉽게 틈을 내어 주지 않았다.

‘감이 꽤 좋구먼.’

정글엔 3미터 되는 이 원숭이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한 놈들이 많다.

몬스터 중엔 대적자처럼 몸길이만 해도 10미터가 넘는 놈들도 있을 테니.

그런데도 이 거대 원숭이가 우두머리가 되었다면, 그만한 오성(悟性)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겔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언제까지 바라만 볼 테냐. 네 땅을 침입한 나를 죽이지 않을 셈이냐?”

노인이 전투태세를 잡자, 거대 원숭이는 화가 났다는 듯 팔로 나무를 잡아 기어 올라갔다.

“쿠왁-!”

놈은 정면 대결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숭이 몬스터는 순식간에 나무 위로 올라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슉슉슉……!

정글의 단단한 나무 열매들이 아겔을 노리고 날아왔다.

쩍!

아겔을 맞추지 못한 나무 열매들은 바위를 박살 낼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그가 빠르게 몸을 움직여 피했기 망정이지, 정확도도 상당했다.

몬스터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나무를 타면서 아겔을 노렸다.

밤이라 더 보이지 않기도 했다.

하나 어둠은 아겔에게 장애가 되지 않았다.

“쯧, 뛰어다니는 건 귀찮건만.”

아겔은 원숭이 몬스터처럼 나무에 올라갔다.

상대방이 택한 전장을 받아들인다.

이제부터는 어떤 몬스터도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대결이 되었다.

몬스터들은 잠자코 물러나 두 생명체 간의 싸움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쿠왁-!”

슉슉슉……!

어둠 속에서 나무 열매들이 속사포처럼 날아온다.

주변의 열매를 얼마나 빠르게 따서 던지는지, 마치 기관총 같은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투두두두두……! 콰직! 쿠구구구구…….

나무 열매탄에 직격당한 아름드리나무는 허리가 꺾여 쓰러졌다.

아겔은 신중하게 나뭇가지로 발을 내디디며 열매를 피해 냈다.

나무 위쪽에서 들려오는 나뭇잎의 소리.

오직 소리만으로 아겔은 다음 착지할 나뭇가지를 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쿠왁……?!”

원숭이 몬스터는 점점 자신이 따라잡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나뭇가지 위는 바로 자신의 전장.

그 누구도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어야 정상인데, 저 인간이 따라붙는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마치 저 인간도 태어났을 때부터 나무 위에서 살았던 것처럼 능숙하게 움직였다.

“쿠왁!”

원숭이 몬스터는 나무 열매를 마저 던지고, 나무 위에 걸린 넝쿨 같은 채찍을 붙잡아 사방으로 휘둘렀다.

나뭇가지들이 단단한 넝쿨에 부러지기 시작했고, 아겔이 운신할 폭도 좁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겔은 능숙하게 몸을 움직여 아직 부서지지 않은 나뭇가지를 밟고 다녔다.

원숭이 몬스터는 점점 따라붙는 아겔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공포를 느꼈다.

빨리 떼어 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양손에 하나씩 넝쿨을 들고 난리를 쳐 보았지만.

“쿠와아악……!”

아겔을 물리쳐 낼 수가 없었다.

노인은 부서지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발을 박찼다.

‘이쯤에서.’

휘릭.

아겔이 다른 나뭇가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사라졌다.

“쿠왁?!”

원숭이 몬스터는 갑자기 아겔의 기척이 사라지자, 깜짝 놀랐다.

마치 연기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놈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겔을 찾으려 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적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했지만, 느껴지는 게 없었다.

그저 주변에서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몬스터들의 숨소리와 정글의 바람이 흔드는 나뭇잎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아겔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녀석의 뒤로.

커다란 나무들 사이를 뚫고 온 달빛에 반사된 단검이 보였다.

촤아아아악……!

“쿠와아아아악-!”

딱딱한 등 근육과 끈질긴 가죽을 종이처럼 베어 내는 단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등 근육을 갈라내는 건 순식간이었기에, 원숭이 몬스터는 그 짧은 시간에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했다.

아겔을 붙잡으려 팔을 휘둘러 보았지만, 어느새 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쿠익……!”

놈은 등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중상을 입었다.

이대로 싸우는 건 무리라고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숭이 우두머리는 등근육을 당해서 나무를 타는 속도가 이전보다 현저히 떨어졌다.

“쿠익……! 쿠익……!”

원숭이는 아겔의 발걸음 소리가 들을 수 없었지만, 뒤늦게 바람에 실린 혈향으로 적이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냄새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촤악……!

발밑에서 나타난 아겔이 단검으로 놈의 발바닥을 그었다.

원숭이 우두머리는 한 발을 쓰지 못하면서도 헐레벌떡 도망치려 했다.

그 뒤로는 대결이 아닌, 사냥의 시간이었다.

아겔은 손쉽게 우두머리를 죽이지 않았다.

오른쪽 어깨를, 왼쪽 무릎을, 왼쪽 손목을, 오른쪽 발목을.

하나하나 깊은 자상을 만들어 주며 놈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집요하게 노렸다.

“쿠이이이…….”

쿵.

결국, 전신에 상처가 난 원숭이 몬스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아겔은 홀연히 그 뒤에서 나타났다.

그는 단검으로 신체의 한군데씩 찔러 주었다.

선명한 비명이 정글 안으로 가득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쿠와아아악-!”

제 우두머리가 당하고 있는데도, 몬스터들은 달려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공포에 떨 듯,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겔은 더 잘 보라는 듯이, 잔인한 손길로 우두머리를 천천히 죽음으로 끌고 갔다.

“쿠륵…….”

결국, 우두머리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쇼크로 죽었다.

아겔은 고개가 몬스터들을 향했다.

몬스터들의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놈들의 전신으로 피가 잔뜩 돌면서 혈류를 제공한다.

공포에 사로잡힌 녀석들은 곧장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아겔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몬스터들을 쫓아갔다.

“쭉 가거라.”

이곳은 절벽 지대.

여기서 도망칠 곳이라곤 저 절벽 끝 한 방향밖에 없었다.

공포 때문에 흐트러진 몬스터들의 이성은 일단 도망치고 보자고 말할 것이고, 그 방향은 흑마법사들의 거점이 있는 곳이었다.

아겔의 뜻을 따라, 몬스터들이 거점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귀찮게 우두머리를 사냥한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공포의 물든 몬스터들이 거점을 향해 도망치도록.

그리고 늙은 자신을 대신해, 목책을 부수도록.

우두머리 사냥으로 준비 운동을 마친 아겔이 저 아래 절벽 끝에 있는 거점을 향해 달렸다.

노인의 거점 공략도 이제 막을 올렸다.

* * *

쿵.

백작과 아겔이 거점 공략을 시작했을 무렵.

안톤이 선두로 자리한 일행도 흑마법사들의 거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박쥐는 그들을 인도해 주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세로가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방비가 너무 단단해 보이는데요…….”

점점 전사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한 세로는 거대한 흑마법사들의 거점을 보고도 물러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우려스럽긴 했다.

1천에 달하는 흑마법사와 싸운다는 건 소년의 일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저희 셋만으로 정말 가능할까요……?”

안톤은 정성스럽게 무구를 점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은 불가능한 일을 맡기지 않으신다.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내면 될 따름이다.”

세 사람은 몬스터들을 뚫고 오며 전투의 합을 맞춰 보았다.

생각했던 것 외로 세 사람의 합은 잘 맞았다.

바를라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힐러였고, 안톤이야 말할 것도 없는 뛰어난 전사였다.

세로조차 1인분의 몫은 거뜬하게 해내었다.

소년은 몬스터 몇 마리를 혼자 압도하기도 했다.

아겔이 그 몸에 빙의함에 따라 이전과 다른 힘이 몸에서 느껴졌다.

세로가 수인화하는 모습을 보고, 바를라는 그가 라이칸스로프란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를 믿으세요, 꼬마 친구. 당신은 절대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성자는 알고 있었다.

라이칸스로프가 어떤 종족인지.

우주에서 신체 능력으로 라이칸스로프를 따라올 수 있는 종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초월적인 힘을 탐낸 인간들이 멸종으로 몰고 가지만 않았다면.

우주의 패권을 잡고 있는 건, 라이칸스로프들이 아니었을까.

세로는 바를라가 따로 치유해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력이 기가 막혔다.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토막이 나도 새롭게 자라 오른다.

대가로 좀 많이 먹어야겠지만, 독성이 있는 것만 가릴 수 있다면 정글은 먹을 것 천지였다.

세 사람은 거점이 잘 보이는 언덕에서 마지막 준비를 했다.

바를라가 말했다.

“우선은 제가 먼저 흑마법 결계를 깨뜨릴 겁니다. 그럼 무기술사님께서 안쪽을 휘저어 주십시오.”

“어렵지 않다.”

“꼬마 친구는 절 지켜 주세요. 제가 ‘성역’ 선포를 마칠 때까지.”

수준급의 사제만이 불러올 수 있는 성좌의 ‘성역’.

바를라의 급수를 생각해 보면, 이 권능은 어느 정도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30대에 달하는 나이로 성좌 교단의 추기경급 신성력을 몸에 지니고 있으니.

평소 소탈하게 지내는 그의 모습에선 유추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성역이 뭐죠?”

세로의 질문에 바를라가 답했다.

“성좌님의 힘을 특정 지역에 불러오는 것입니다. 음…… 지금 악마숭배자들이 하려는 의식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들도 악마의 힘을 강림시키려 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그들처럼 끔찍한 희생제물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성역이 선포되면 모든 흑마법의 기운이 정화되고 소멸한다.

흑마법사들이 제대로 힘을 낼 수 없는 환경으로 뒤바꾼다는 의미.

그럼 승기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는 자명했다.

“그런 걸 혼자서 할 수 있다면 대단하신 거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성좌님의 은총일 따름이죠. 대신 성역의 크기는 그리 넓지 않고, 시간이 좀 걸립니다. 적어도 10분은 기도 드려야 합니다.”

“거기에 무기술사님께 계속 신성 치유를 걸어 드리면서 기도하려면 15분은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15분…….”

안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약이 있긴 하지만, 우리도 걸어 볼 만한 비장의 한 수가 있었군. 그거면 충분하다.”

꾸득.

곰 수인은 커다란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꺼운 강철 판금 같은 것을 꺼내어 가슴팍에 가져갔다.

텅! 철컹, 철컹, 철컹.

강철판이 스스로 제 몸을 넓히기 시작하더니, 안톤의 몸을 감쌌다.

갑옷의 어깨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건틀렛에는 푸른 글자들이 빛났다.

순식간에 거대한 갑옷을 입은 안톤은 전투 망치와 대검을 하나씩 들었다.

“우와…….”

세로가 감탄했다.

중장갑의 기사처럼 변한 안톤이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가자. 결계를 부탁한다.”

“예.”

세 사람은 은밀하게 흑마법사들의 거점까지 다가갔다.

안톤의 몸이 보이지 않을 만큼만 떨어진 곳.

바를라가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나의 주인이자, 세계를 이끌 소망의 주재시여. 지금 이곳에 악한 기운을 몰아낼 당신의 신성을 허락하소서.

성자의 지팡이가 밝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흑마법사 거점 쪽에서도 그 빛을 감지할 만큼 환해졌을 때.

눈을 번뜩인 성자가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파아아아아아아앗……!

한 줄기 빛의 기둥이 거점을 향해 폭발했다.

콰아아앙--!!

결계 한쪽이 단숨에 깨져 나갔다.

틈이 생기자마자, 안톤이 포효를 내질렀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어엉--!!”

꾸드드드득.

허벅지 근육이 극한까지 힘을 내며 육중한 몸을 하늘로 분출시켰다.

콰앙!

그는 결계가 깨진 부분으로 혼자 쳐들어가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바를라가 세로를 보며 말했다.

“갑시다.”

“네……!”

바를라는 세로를 데리고 결계 안쪽으로 뛰었다.

결계 안쪽엔 수백의 흑마법사들이 있었다.

세로는 그들을 향해 달려들면서도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아겔 할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이 거점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살짝 걱정이 일었다가, 소년을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는 흑마법 결계도 단숨에 깨뜨리셨어.’

저주 토템을 세우는 흑마법사들을 토벌할 때, 세로는 아겔의 힘을 보았다.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흑마법을 깨뜨리는 아겔의 모습을.

지금 걱정해야 할 건 아겔이 아니었다.

우득……! 우드득……!

“크르하아악……!”

이젠 얼굴까지 늑대의 형상이 조금 비칠 정도로 수인화하는 세로.

가장 늦긴 했지만, 안톤 일행도 거점 공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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