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거점 공략 (5)
아겔은 괴륙을 향해 달려드는 비스트 서클의 기세를 느꼈다.
과연 과거 ‘약탈자’ 소속이었던 서클이라 그런지, 내뿜는 기세가 확연히 달랐다.
덜떨어진 환약 중독자들이나, 허약한 흡혈귀들과는 달랐다.
물론 인듀라스가 직접 피를 먹여 키운 놈들은 쓸 만하겠지만.
“캬학……!”
수인들은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가, 오히려 괴륙에게 잡아먹히는 신세가 되었다.
웬만한 물리 공격은 그대로 흡수하는 괴륙이었다.
전신에서 수십 개의 팔을 뽑아낸 녀석은 수인들을 사로잡아 몸 이곳저곳에 벌어진 날카로운 입에 집어넣었다.
콰득……! 우드득……!
-꺄아아아악……!
-크허엇……!
그 모습에 분개한 쿠라스크가 소리쳤다.
“캬앗! 이런 짐승 같은 새끼들……! 대가리를 써! 무작정 달려들면 어쩌자는 거야!”
-대장님이 싸우라면서!
-돌격하면 안 돼……?
“이런 뇌가 호두만 한 놈들을 봤나!”
쿠라스크는 방방 뛰면서도 솔선수범의 자세를 보였다.
한쪽에서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린 그가 괴륙을 향해 집어 던졌다.
“캬아아아앗……!”
퍽……!
바위에 맞은 괴륙은 몸을 휘청였다.
바위 공격이 통한다는 것을 보고, 힘센 짐승들이 주변에서 던질 만한 것들을 가져왔다.
쿠라스크가 손가락을 뻗었다.
“앞에서 날랜 놈들이 촉수를 잘라 내! 힘 있는 놈들은 바위 던지고! 날개 달린 놈들은 위에서 무거운 걸 떨궈!”
쿠라스크는 교활한 하이에나답게 적의 약점을 꿰뚫고, 정확한 명령을 내렸다.
비스트 서클은 쿠라스크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거대 서클이 하나가 된 모습으로 괴륙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아겔은 한쪽에 물러나 그들이 움직이는 흐름을 지켜보았다.
약탈자들이라고 단순히 힘만 센 머저리들이 아니다.
조직에 위계가 있고, 단합력은 여타 서클을 웃돈다.
그들의 기본적인 입장이 ‘약탈’이라 그렇지, 단체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쓸 만한 서클이 떠나도록 놔두다니.’
‘약탈자’의 수장이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아마 전쟁이 과열되어 쿠라스크를 ‘세뇌’하려 한 모양인데, 보기 좋게 실패한 것 같았다.
상급 죄수들 간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지에도 호기심이 생겼다.
‘코르브스에게 물어봐야겠구먼.’
개방이 끝나기 전에 코르브스를 한 번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는 아겔이었다.
까마귀는 전령으로 아주 좋은 친구였다.
전투는 점점 일방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무거운 것을 잔뜩 얻어맞는 괴륙은 점차 힘을 잃어 가는 반면, 비스트 서클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사기를 높이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다! 쏟아부어!”
-이 개새끼 왜 안 죽어!
-개새끼라고 하지 말라니까, 이 씹새야!
-‘새’ 들어간 욕은 하지 마, 머저리들아-!
듣기만 해도 혼란스러운 욕지거리들이 전투의 소음을 가중했다.
끝이 보이는 듯했으나, 괴륙은 쉽사리 쓰러지지 않았다.
놈은 두들겨 맞으면서도 기회를 노렸다.
촤악!
촉수 같은 팔을 뻗어 수인을 하나씩 낚아채 입으로 가져갔다.
괴륙은 수인의 싱싱한 몸통을 씹으며 다시 몸을 회복해 냈다.
-제길, 포코!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
싸움이 지지부진해지자, 수인들의 기세도 조금씩 약해졌다.
쿠라스크는 이를 드러내며 괴물 같은 것을 바라보았다.
“젠장, 대적자를 상대하는 것 같네. 끄응차-!”
점박이 털 사이로 핏줄과 근육이 솟아올랐다.
쿠라스크는 다시 자신의 몸보다 커다란 바위를 던졌다.
괴륙은 여력이 남는지 바위를 쳐 내려 했지만, 하이에나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퍼억-!
“꾸워어어어억……!”
몸통 한쪽이 심하게 파이며 주저앉는 괴륙.
그 기회를 노리고 다시 수인들이 득달같이 바위와 돌을 던져 댔다.
아겔은 주저앉는 괴륙 쪽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으음……?’
아까부터 느껴졌던 괴륙의 원념.
방금 큰 일격을 받고 그 기운이 한층 더 강해졌었다.
아겔이 그 기운 쪽으로 다가가자, 쿠라스크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캬앗! 영감……! 방금 느꼈어?”
“그렇다네.”
쿠라스크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겔이 질문했다.
“뭐가 있었나?”
“둥그런 뭔가가 놈의 몸통의 파인 부분에서 잠깐 드러났었어. 내 주먹만 한 건데, 기운이 불길했어. 지금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네, 씨부럴…….”
“그걸 부숴야겠구먼.”
영혼이 아닌, ‘원념’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괴륙은 아마 그 구슬 같은 걸 부숴야 기능을 상실할 것 같았다.
아겔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가 직접 움직일 것을 눈치챈 쿠라스크가 소리쳤다.
“야! 덩치 좋고 힘세고 단단한 놈들! 나를 따라와! 길을 뚫는다!”
쿠라스크의 호출에 물소, 코끼리, 악어, 표범과 같은 대형 수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쿠라스크보다 덩치가 컸지만, 대장의 말을 거역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간다, 영감! 내 뒤에 똑바로 붙어!”
“노력해 보겠네.”
탓……!
맹수들이 발을 박찼다.
타이밍에 맞춰서 정면으로 쏟아지는 바위 세례가 멈췄다.
수인들이 잔뜩 긴장한 채로 몸의 근육을 부풀렸다.
괴륙이 쏟아지듯 촉수 팔을 내뿜어 수인들의 돌격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촉수의 움직임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맹수들은 하나씩 확실하게 끊어 내며 돌격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캬아아앗……!”
쿠라스크는 쏟아지는 촉수 팔을 단단한 이빨로 뜯어내며 전진했다.
아겔은 쿠라스크의 덩치에 몸을 숨긴 채로 옆을 지나가는 촉수를 단검으로 쳐 냈다.
‘가까이 가니까 더 잘 느껴지는구먼.’
원념이 발악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마치 생명체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았으나, 놈이 이루고 있는 신체는 절대로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죽은 것이 산 것을 흉내 내는 것은 역겨운 기분이었다.
아겔이 흑마법사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영가암-!”
“고생했네.”
괴륙의 썩은 살 냄새가 코앞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캬아아아아앗--!”
쿠라스크는 이빨로 놈의 몸통 한 부분을 크게 물어뜯었다.
콰직……!
“꾸워어어억……!”
확 파인 몸통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붉은 구슬.
아겔은 원념이 가득 느껴지는 그곳으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콰득……!!
구슬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아니면 벌레 단검이 구슬쯤은 단숨에 꿰뚫을 정도로 예리하고 튼튼했거나.
어쨌든 아겔은 단번에 구슬을 부순 다음, 뒤로 물러섰다.
“꾸워어어어억…….”
구슬의 부서진 틈 사이로 하얀색 혼백이 흘러나왔다.
마치 수증기처럼 흘러나온 혼백과 원념은 그대로 공기 중에 흩어졌다.
구슬 안에 가두고 있었던 게 풀려난 모양이었다.
쿵.
아겔은 쓰러지는 괴륙 앞에서 단검을 슥슥 닦았다.
쿠라스크가 썩은 살점을 뱉어 내며 입가를 훔쳤다.
“퉷퉷, 진짜 맛대가리 없는 새끼네.”
“고생했네.”
아겔은 단검을 갈무리하고 죽은 괴륙에게 걸어갔다.
그는 끔찍한 썩은 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놈의 몸에 박여 있던 구슬 파편을 꺼내 들었다.
“흐음…….”
손으로 만지고만 있어도 불길한 물건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물건은 아겔도 처음 보았다.
고독에도 수많은 저주받은 물건이 있긴 했지만, 이만한 건 없었다.
쿠라스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거 대체 뭐야? 뭔데 씨벌, 이딴 괴물을 만들어 내는 거냐고.”
“나도 모르네. 듣기론 이 괴물은 다르키스가 만들었다고 하던데.”
“그 악마의 종이다 뭐다 하는 새끼? 그 새끼 나랑 급수도 똑같을 텐데, 뭐 이딴 지랄 맞은 걸 만들 수가 있냐?”
“내 생각에도 그렇구먼.”
아겔은 구슬 파편을 만지며 그 느낌을 음미해 보았다.
촉감만으로는 무슨 물건인지 제대로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이것이 고독에서 자연 발생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밖에서 들여온 물건이란 말이지.’
게다가 이 물건은 마치 이 세상엔 존재해선 안 될 물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악마가 건네준 무언가 같은 느낌이었다.
아겔은 구슬을 땅바닥에 슥 떨궜다.
“이 사체와 구슬을 잘 태우게. 가만두면 그리 좋은 꼴을 볼 것 같진 않구먼. 그리고 힘센 친구들 몇을 데리고 날 따라오게.”
“쳇, 내가 당신 따까린 줄 알아?”
아겔이 대답 없이 돌아서자, 쿠라스크는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어쨌거나 노인의 말대로 해서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었다.
굳이 아겔을 적대할 이유도 없고.
약탈자 시절일 때였다면 모르겠지만, 아겔을 적으로 두어서 이득 볼 게 없다는 것을 아는 쿠라스크였다.
이미 머릿속에서 계산이 끝난 상태였다.
아니, 약탈자 소속이었을 때도 한번 아겔과 부딪쳐 보고 그의 진가를 알아본 쿠라스크였다.
‘괜히 열받게 해서 좋을 게 없겠지.’
혼자서도 알 수 없는 기행을 벌이는 자가 동료까지 몰고 오면 답이 없을 것이다.
.
.
.
쿠라스크는 힘센 수인들 몇을 데리고 아겔이 걸어간 쪽을 따라갔다.
냄새를 잘 맡아서 노인네 자취 따위는 쉽게 따라갈 수 있었다.
어느새 그는 수하들을 데리고 악마숭배자들의 거점이 있는 절벽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거점의 상태를 보고 잠시 움찔했다.
수인들도 멍하니 악마숭배자의 거점을 바라보았다.
“이, 이런 씨부럴…….”
수백 명의 악마숭배자가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평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땅이 과격하게 패여 있었고, 놈들이 세웠던 목책이나 감시탑, 움막들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사람 한 명이 해낸 일치고는 과도한 일이었다.
쿠라스크는 저 멀리 서 있는 아겔을 바라보았다.
‘이거 설마 혼자 한 건 아니겠지?’
거점이 있다는 소릴 듣고 악마숭배자들을 습격하려던 쿠라스크였다.
그런데 웬 소음이 들리길래 갔더니 아겔이 이상한 괴물과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처음 발견했을 때, 아겔은 혼자였다.
그럼 이 모든 걸 저 노인네 혼자 했다는 소리가 된다.
비스트 서클 전원을 투입해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울 만한 규모였을 텐데, 그는 홀로 해냈다.
‘젠장, 옛날에 깝쳤던 게 후회되는데…….’
만약 저 노인의 칼날이 자신의 서클을 향하면 막을 수 있을까 계산해 보는 쿠라스크였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지만, 역시 그 끝은 아무래도 전멸이란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쿠라스크는 애써 심호흡하고 아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여기로 부른 이유는 뭐야, 영감?”
아겔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여길 정리하고 싶구먼.”
“정리? 여길? 뭐 여기다 오두막이나 하나 짓고 떵떵거리면서 살게?”
“그럴 생각은 없네. 주위를 둘러보게.”
아겔의 말대로 쿠라스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악마숭배자들의 토템이 좀 남아 있을 테지.”
“하긴 그렇네.”
거점은 완파란 말도 부족할 정도로 손상되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토템들이 있었다.
저주 토템은 주변을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채운다.
놔두면 몬스터들이 타락하거나 주변 땅 기운이 죽을 수도 있다.
쿠라스크가 팔짱을 꼈다.
“그래서 저 토템들 다 부숴 달라고? 그거 하라고 힘 있는 애들 모으라고 한 거야?”
“그냥 정리하는 건 내키지 않으니, 절벽을 좀 부숴 주게나.”
“……?”
쿠라스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 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난장판을 부숴서 정리한다는 개념은 또 처음이네.”
“그게 깔끔하니 좋을 것 같구먼.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더 난장판이 될 것 같은데, 내 생각엔.”
“그래서 할 수 있나, 없나.”
쿠라스크는 아겔을 보고 씩 웃었다.
“뭐 뚝딱뚝딱 짓는 건 못해도 부수는 건 또 우리가 잘하지. 얘들아!”
““예, 대장!””
“노인네가 이거 부수란다. 부수자.”
““예!””
아겔은 절벽 근처에서 멀어졌다.
곧 어마어마한 굉음이 연속적으로 들리며 절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아겔은 무너진 절벽 근처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늙은 그의 육체는 회복되는 시간마저 느렸다.
그러나 아겔은 참을성 있게 자신이 만전의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본거지에는 만 단위가 있다고 했나.’
거점을 습격해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겔이 다수에게 유리한 기술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악마숭배자들의 시야를 빼앗을 수 있었던 기술.
그것 또한 ‘거래’의 과정에서 얻어 낸 기술 중 하나였다.
남발할 수 없을 만큼 체력을 빼앗고, 또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이럴 땐 유용했다.
그러나 악마숭배자들의 본거지를 공격할 때는 더욱 신중해야만 한다.
놈들의 숫자도 숫자이거니와, 무시할 수 없는 강자가 지키고 있을 테니.
이번만큼은 시간이 아겔의 편은 아니었다.
저벅.
수풀 한쪽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쿠라스크가 나타나 아겔의 곁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서클을 근처에 자리 잡게 하고 아겔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이에나 수인의 손에 들렸던 몬스터의 고기가 아겔의 앞에 놓였다.
“좀 먹어. 당신은 먹지도 않아?”
“알아서 잘 챙겨 먹고 있다만, 일단 고맙군.”
아겔은 고기를 한입 씹더니 퉤 뱉고 한쪽에 버렸다.
쿠라스크는 그의 기행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상식으로 이해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봐, 영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음?”
“거점을 박살 냈잖아. 그럼 악마숭배자놈들과 전면전이라고. 제정신이면 이제는 도망가야지.”
“애초부터 도망갈 생각은 없었네. 그랬다면 아예 거점을 치지도 않았겠지.”
아겔의 말에 쿠라스크는 당혹스런 얼굴이 되었다.
“서, 설마 본거지까지 쳐들어가려는 거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네.”
“캬앗,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만, 노인네!”
비스트 서클의 왕인 쿠라스크는 악마숭배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놈들인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놈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지만, 감정과 별개로 녀석들을 얕보면 큰코다친다.
악마숭배자들의 거점을 습격하려던 것도 충분한 계산하에 겨우 용기를 내 공격해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놈들의 본거지는 다르다.
최소한 상급 죄수 하나 정도는 데려와야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놈들은 정글의 주인이야!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도 알지도 모르고, 습격하려는 사실도 이미 알 수도 있어! 대비가 끝났겠지! 그런 곳에 가면 아무리 영감이라도 개죽음일 게 뻔해!”
“내 목숨을 걱정해 주는 겐가? 이거 눈물 나는구먼.”
“이런, 시벌…… 농담 아니야!”
쿠라스크는 아겔과의 관계가 그리 깊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베푼 자비는 기억하고 있었다.
잔뜩 상처 입은 자신의 서클을 내칠 수도 있었으나, 성자를 설득해 치료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이었는지, 쿠라스크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죽으러 가는 걸 본능적으로 말리고 싶었다.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 놈들은 정글의 주인이지.”
악마숭배자들은 ‘정글’의 땅을 지배하는 놈들.
그들이 정글 대부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놈들은 없을 것이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로 주인이 있다.
‘창공’, ‘바다’, ‘화산’ 전부 주인이 존재한다.
물론 상급 죄수들의 땅인 ‘멸지’에는 아직 주인이 없지만.
“아무래도 집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일세.”
아겔의 말에 쿠라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영감 설마…….”
“여태까진 그냥저냥 지냈지만, 이젠 주인이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먼.”
“진담이야?”
“거짓말을 즐겨 하는 편은 아니지.”
아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선 키가 자신이 앉아 있는 것과 비슷했지만, 쿠라스크는 갑자기 그가 거대해 보였다.
마치 이방 땅을 정복하러 가는 거인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흉터 많은 손을 내밀었다.
쿠라스크는 그 손길에 움찔했다.
“날 따르면 땅 하나는 떼어 주지. 어떤가.”
“…….”
쿠라스크는 정글의 주인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정글은 자원이 매우 풍족한 곳이었다.
고독과 다르게 개방 시기 한 달만큼은 충분히 먹고 마실 수 있는 곳.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지만, 무리를 이룬 비스트 서클에게 정글 환경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들의 걸림돌은 오직 악마숭배자들뿐이었다.
앞에 선 늙은 죄수는 그 걸림돌을 제거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글 한쪽에 편안히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이득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선 악독한 악마숭배자들과 싸워야 한다.
쿠라스크는 침을 삼켰다.
‘침착하자.’
지금 이 선택 하나가 훗날 비스트 서클의 존망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태껏 다른 수인들보다 영리한 두뇌로 계산하면서 서클을 이끌었던 쿠라스크였지만, 지금만큼은 계산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은 몰라도 본능은 알고 있었다.
저 작은 손을 잡고 흔드는 게, 압도적인 ‘플러스’가 될 것이다.
“젠장, 이게 도박하는 것도 아니고…… 씨벌…… 그래…… 해보자고, 그 까짓거. 땅 떼 준다는 거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쿠라스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잠깐 횡설수설했지만.
커다란 하이에나의 손은 아겔의 손을 확실하게 붙잡았다.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 성립일세.”
약탈자 소속이었던 서클과 동맹이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