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거점 공략 (7)
푸슛……!
단검이 꽂힌 바키아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6급 흑마법사는 그리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목을 공격한 건 훌륭한 판단이었지만, 바키아의 넘치는 생명력을 단번에 꺾을 순 없었다.
악마숭배자의 고위 간부들은 항상 타인에게서 빼앗은 생명력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기 때문.
바키아는 곧장 아겔을 밀쳐 내고 물러섰다.
“빌어먹을 노인네……!”
그녀는 어두운 기운으로 목과 배를 지혈하면서 아겔을 노려보았다.
흘러넘치는 생명력이 더해지자, 상처가 금방 사라지고 핏자국밖에 남지 않았다.
아겔은 섣불리 그녀에게 달려들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바키아가 내뿜는 기세가 점점 포악해졌다.
“네가 아겔라스토스구나……! 제사장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방해꾼!”
“남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못된 버릇이 있구먼.”
“하! 잘도 내 앞에 나타나?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널 처단해 주마. 제사장님께 네 머리를 진상하면 반드시 상을 주실 테지!”
바키아와 아겔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선수는 바키아가 날렸다. 허공에 검은 기운으로 뭉쳐진 포환들이 아겔에게 쇄도했다.
아겔은 포환을 쳐 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온몸으로 맞아 가면서 돌진했다.
바키아는 다시 한번 검은 창을 소환해 아겔에게 날렸다.
그러나 결과는 이전과 같았다.
그녀는 아겔에게 날린 창이 그의 몸에 닿자마자, 가루가 되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섰다.
‘저, 정말 흑마법이 안 통하다니……!’
반신반의했지만 이젠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겔에겐 흑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괴물 같은 노인네……!”
사출 흑마법의 대가인 바키아였지만, 흑마법이 아예 통하지 않는 아겔을 상대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겔은 바키아를 몰아치지 않았다. 천천히 몰아가면서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급하게 하면 뭐든 탈이 나기 마련이니까.
그는 바키아의 움직임을 따라가면서도 주변 상황을 인지하려 했다.
‘수인들이 붙어 줬을 테니, 이젠 좀 수월하겠지.’
제3거점에서도 느꼈던 그 이상한 고깃덩이의 기운이 느껴졌다. 원념과 사기(死氣)가 뭉쳐진 ‘괴륙’.
안톤이 막고 있는 모양인데, 수인들이 힘을 합쳐서 이젠 백중지세의 형국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죽지 않은 악마숭배자들이 수두룩했다.
흑마법사들은 끝없이 흑마법을 쏟아 냈고, 바를라가 선두에서 그걸 막고 있었다.
세로는 정신을 잃었는지 전장 한복판에서 팔자 좋게 대자로 누워 있었다.
다행히 숨소리는 고르게 들렸다.
‘딱히 문제없겠구먼.’
주변 상황을 인지한 아겔은 바키아를 점점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빠르게 접근하는 아겔을 피하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흑마법을 남발하지 않고선 그를 뿌리칠 수 없었다.
속박해 보려 해도 무용지물. 오히려 아겔이 더 가까이 붙는 결과만 날 따름이었다.
촤악……!
“꺄악!”
왼팔을 길쭉하게 베인 바키아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쉴 새 없이 뛰었다.
목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웬만한 부상은 쉽게 회복할 수 있으니 괜찮았다.
그래도 단검에 베이는 고통만큼은 끔찍했다.
“빌어먹을……!”
아겔은 천천히 바키아를 쫓으며 몸에 자상을 남겼다.
그녀가 가진 생명력을 소모하도록 유도해, 말려 죽이기 위해서. 그의 뜻대로 바키아는 몸을 회복하는 속도가 이전보다 느려졌다.
‘어렵지 않구먼.’
아겔은 다시 주변을 향해 감각을 집중했다.
안톤도 안정감을 되찾았고, 흑마법을 견디는 바를라도 힘겨운 얼굴이긴 했지만 큰 동요는 없어 보였다.
이대로 천천히 밀어붙인다면, 제2거점도 무리 없이 완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대로만 흘러가진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찢어 죽일 놈……! 내가 만만해 보이는 거니?!”
자신을 대강대강 상대하는 아겔의 모습에 바키아가 발작을 일으켰다.
츠으으으으…….
그녀의 눈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경시할 수 없는 어두운 기운.
삽시간에 흘러나온 기운은 그녀가 서 있는 땅을 거뭇하게 물들였고, 주변 공기 또한 텁텁하게 만들었다.
아겔은 그것을 느끼고 일단 뒤로 물러섰다. 바키아로부터 태동하는 거센 기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익숙한 기운.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만 같은 역행의 섭리.
악마의 기운이 이곳에 강림하고 있었다.
바키아의 영혼을 매개로 삼고 그 틈을 비집고서 말이다.
아주 적은 양으로도 반경 수십 미터가 흑색 지대로 물들어 갔다.
아겔이 물러서는 걸 보고 바키아가 깔깔 웃었다.
“물러서? 그래, 너도 이 힘을 느끼고 있구나!”
그녀가 애용하는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바를라를 공격했을 때와 다르게 거점 전체를 뒤덮을 만한 크기였다.
곧 주변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검은 연기의 상층이 흔들리더니, 물리적 형상을 지닌 무언가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게 바로 악마의 힘이다……!”
쾅! 쾅! 쾅! 쾅!
4개의 거대한 검은 기둥이 거점 주변에 박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결계가 형성되었다.
거기에 더해 하늘에서 검은색 창이 다발로 쏟아져 내렸다.
피아를 가리지 않은 공격에 악마숭배자들 또한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끄아아악……!
-바, 바키아 님! 살려 주십시오!
-커흑……!
창은 근처에 있는 생물이란 생물은 모조리 꿰뚫었고, 심지어 몇 초 후 폭발까지 일으켰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강-!
거점 전체를 뒤흔들 만한 위력. 아겔은 창이 꽂히지 않은 공간을 밟아 나가며 폭발을 피했다.
땅에 꽂혀 폭발이 일어나면, 흙이나 돌조각에 맞아 다칠 수도 있으니.
“쯧.”
안톤과 바를라는 무사한 모양이지만, 세로가 위험했다.
아겔은 꼬마의 뒷덜미를 잡고 곧장 전장을 이탈했다.
그는 수인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들은 언제 도망 나왔는지 정글 한쪽으로 물러나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겔을 발견한 쿠라스크는 환한 얼굴을 했다.
“엇……! 영감! 무사했구나! 갑자기 저 검은 연기랑 기둥은 도대체 뭔 지랄이야?”
아겔은 검은 연기가 사방을 둘러싼 거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리석음의 결과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쿠라스크에게 세로를 던져 주었다.
“꼬마를 좀 맡아 주게.”
“어엇, 잠깐! 저거 검은 연기가 생기를 빨아 먹는다고! 다시 돌아가면 위험해!”
쿠라스크는 다시 검은 연기로 향하는 아겔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늙은 죄수는 뛰고 있었다.
“내 걱정일랑 하지 말고 고깃덩이나 잘 상대하게.”
아겔이 검은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전처럼 괴륙을 상대하란 말에 쿠라스크는 이를 드러냈다.
“제길……! 죽으면 안 돼!”
그는 수인들을 데리고 연기가 미치지 않는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 * *
바를라는 검은 연기 속에서 신음했다.
끔찍한 기운이 그가 펼친 신성 보호막을 뚫고 들어오려 했다.
한 걸음 내딛기도 무척 힘이 들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한쪽으로 걸어갔다.
‘어르신…….’
아겔 어르신은 무사할까.
지옥처럼 검은색으로 물든 이 공간에서 그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자신조차 숨쉬기도 불편한 곳인데.
‘소망의 성좌시여…….’
바를라가 할 수 있는 건 한없이 기도문을 외우며 걸음을 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몇 분이 지나서야 안톤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쿵……! 쿵! 쿵!
전신을 철 갑옷으로 무장한 곰 수인은 검은 연기 속에서도 묵묵히 괴륙을 상대하고 있었다.
가히 괴물과도 같은 체력이었다.
그러나 곰 수인도 피해를 많이 입었는지, 철 갑옷 전체가 피 칠갑이 되다시피 한 모습이었다.
“안톤 님……!”
“물러서라!”
바를라의 외침과 동시에 괴륙의 촉수가 날아왔다.
안톤은 대검으로 땅을 후려친 촉수를 잘라 내고 전투 망치로 괴륙을 밀어냈다.
콰앙!
괴륙의 몸이 움푹 파이며 밀려났지만, 거대한 덩치의 괴물은 금방 충격을 회복해 내고, 다시 안톤을 향해 뛰어왔다.
바를라가 말했다.
“어르신은……!”
“어르신은 무사하시다. 그러니 우리의 싸움에 집중해라.”
아겔의 생사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곳 전황조차 여의치 않았다.
괴륙은 여전히 멀쩡한 모습이었고, 안톤과 바를라가 놈에게 타격을 입힐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바를라는 안톤을 축복하며 신성한 힘을 불러냈다.
조금이지만, 그의 신성력이 검은 연기를 밀어내고 안톤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안톤이 다시 괴륙과 몸을 맞대며 부딪쳤다.
바를라는 바싹바싹 마른 침을 삼켰다.
싸울 준비는 되었지만, 어떻게 놈을 쓰러뜨려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거대한 원념이 느껴졌지만, 그걸 부술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고민하던 와중, 성자는 어디선가 날아오는 묵직한 파공성을 들었다.
부웅! 퍼억-!
커다란 바위가 괴륙의 머리에 명중했다.
괴륙은 바위에 맞는 순간 온몸에서 촉수를 뿜어내며 고통에 반응했다.
“꾸워어어어어억-!”
바를라는 바위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곧 그곳에서 크고 작은 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목소리도 들렸다.
“캬앗……! 그 새끼는 우리가 잠깐 붙들어 줄 테니까, 체력 회복해!”
“당신은……?”
연기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깨달은 성자가 눈을 크게 떴다.
아겔과 함께 온 쿠라스크가 자신들을 지원하러 온 것이었다.
하이에나 수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놈은 몸에 이상한 구슬을 숨기고 있다! 그걸 파괴해야 해!”
바를라는 주먹을 쥐었다.
쿠라스크의 말을 믿을 수 있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아겔과 함께 온 사람.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다른 방법은 없으리라.
바를라가 안톤에게 말했다.
“힘을 비축하시죠, 안톤 님! 놈에게 일격을 먹여야……!”
“그럴 필요 없다. 지금 하지.”
화륵!
수십 분이나 전력으로 부딪쳐 지칠 법도 한데, 안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덮은 철 갑옷에서 그의 강렬한 전의를 대변하는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곰 수인이 괴륙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바를라는 그를 전력으로 지원하기 위해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문을 외우는 그때, 뒤에서 누군가 그의 어깨에 커다란 손을 올렸다.
“쿠라스크……?”
“제기랄, 저 곰탱이는 뒤가 없는 거냐?”
검은 연기에 생명력이 흡수되는 걸 버티고서, 그는 자신의 수하들과 안으로 진입했다.
바를라는 곧장 그들에게 신성 보호막을 씌워 주었다.
“제길, 이제야 숨 좀 쉬겠네.”
“어쩌려고 들어오신 겁니까.”
“당연히 도와주러 왔지. 저 고깃덩이는 곰탱이 혼자선 안 될 테니까.”
확실히 쿠라스크의 말처럼 안톤은 쉽사리 괴물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뛰는 놈에게 일격을 먹이려면, 틈이 필요했다.
쿠라스크가 손가락을 풀었다.
“캬앗, 곰탱이가 괴물 몸뚱아리 부술 수 있도록 우리가 놈을 붙잡는다!”
““예, 대장!””
수인 열 명가량이 전장으로 뛰었다.
그들은 괴륙에게 도달하자마자, 어마어마한 근력으로 놈을 밀어 쓰러뜨렸다.
쿠우웅--!!
“꾸워어어억……!”
촉수 다발이 삐져나왔지만, 수인들이 놈의 팔과 함께 제압했다.
수인들이 괴륙을 제압하는 일련의 과정은 마치 한 몸처럼 자연스러웠다.
“지금이야, 곰탱이!”
쿠라스크 일행이 합세하자, 여유가 생긴 안톤이 놈의 몸을 밟고 두 손으로 전투 망치를 들었다.
안톤의 외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것도 견딜 수 있나 보자.”
화륵!
푸른 불꽃이 감싼 전투 망치가 중력과 하나가 되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멈출 줄 모르고 괴륙의 몸을 망치로 두들기는 안톤.
옆에서 괴륙을 붙잡고 있는 수인들마저 질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땅이 갈라지고 안톤이 찍는 부분은 우묵하게 들어갈 정도였다.
반짝.
그 순간, 오묘한 색의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놓치지 않은 쿠라스크가 손을 뻗어 구슬을 잡았다.
“잡았……!”
구슬을 잡은 그 손위로 안톤의 전투 망치가 작렬했다.
콰앙-!
“캬아아아아아앗, 이런 씨바아아아알……!”
구슬과 쿠라스크의 손이 한꺼번에 박살 났다.
쿠라스크는 으스러진 오른팔을 붙들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미련한 곰탱이 새끼야!! 내 팔! 끄아아아아, 존나 아파-!!”
그와 동시에 괴륙은 힘을 잃고 몸에서 솟아올랐던 모든 촉수가 축 가라앉았다.
“꾸우우우…….”
드디어 괴륙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제3거점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괴물.
괴륙을 제압하자 수인들은 한시름을 놓은 얼굴을 했고, 안톤마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바를라가 쿠라스크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길 벗어납시다. 검은 연기 안에 있으면 좋지 않아요. 다친 손은 밖에서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움직이시죠.”
“너, 이 곰탱이 새끼……! 언젠간 갚아 준다!”
쿠라스크는 수하들의 부축을 받고, 바를라와 안톤도 검은 연기 밖을 향해 움직였다.
바를라는 연기 밖으로 나오기 직전, 이 사달의 근원이 되는 거점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아마 아겔이 있는 것 같았다.
‘어르신…….’
바를라는 고개를 돌려 연기 밖으로 나갔다.
.
.
.
아겔은 홀로 연기 속에서 바키아를 상대하고 있었다.
쾅!
무수히 많은 검은 창이 땅에 꽂혀 폭발을 일으킨다.
아겔은 주변을 빙빙 돌면서 바키아의 공격을 피했다. 폭발에 휩쓸려 다치지 않기 위해서.
주변으로 튕겨 나가는 바위 조각이나 모래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제대로 피했는데도, 아겔의 죄수복은 걸레짝이 되었고 팔다리에 모래가 스친 자상이 있었다.
자상은 알약의 기운으로 금방 회복되긴 했지만, 바위 조각에 머리를 맞으면 안 되니 열심히 발을 놀렸다.
“깔깔깔깔! 죽어! 죽으란 말야! 이 압도적인 힘! 네놈 따위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바키아의 히스테릭하면서도 웃음기 담긴 기괴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말대로 악마의 힘은 위협적이었다.
공좌(空座) 또는 악마라 불리는 존재들.
그들은 대가를 받고 그만한 힘을 내어 주기도 한다. 바로 지금 앞의 바키아가 내는 힘처럼.
그러나 악마와 거래하는 자들 대개, 강한 힘만큼 큰 대가를 가져간다는 것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공좌의 힘을 얻을 수 있는 데에만 몰두하기 마련이었다.
‘다르키스의 의식이 성공하면 이건 애들 장난에 불과할 테지.’
그는 자신의 영혼을 거래의 대가로 삼지 않고, 백만 명을 제물로 바친다.
스스로 제물이 되는 건 아니라 얻을 수 있는 힘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만이란 숫자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바키아가 내는 힘은 새 발의 피나 다름없다.
아겔은 바키아의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변을 박살 내는 폭발력이 이전보다 현저히 떨어졌다.
지금까지의 힘만으로도 거점을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만들었다.
늙은 죄수가 피하기를 멈추고 한 자리에 멈춰 서 물었다.
“자네, 후회하진 않나?”
“뭐?”
“악마와 거래한 것에 후회하지 않냐고 물었네.”
잠시 공격을 멈추고 멍한 얼굴을 하던 바키아가 이내 광소를 내며 대답했다.
“깔깔깔, 후회? 그럴 리가! 악마와 거래한 것은 내 생 최고의 업적이야, 알겠니? 다르키스 님마저 그런 날 알아보시고 수하로 거둬 주셨어!”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는 모습은 좋구먼.”
그는 순간 다리에 강한 힘을 주며 걸음을 옮겼다.
바키아가 그의 움직임을 놓쳤을 정도.
그녀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이미, 아겔은 바키아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언제 접근했는지도 모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크읏……!”
“마지막까지 후회하지 않길 바라네.”
아겔의 손이 바키아의 얼굴에 닿았다.
* * *
어둠 속.
주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이었다.
밤하늘이라면 별빛이라도 보여야 하나, 이곳엔 빛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먹물로 이루어진 바다에 빠졌다면 이런 모습일까.
그저 색채를 입은 자신의 모습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
바키아는 홱홱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늙은 죄수.
그는 여전히 붕대를 감고 죄수복을 입은 차림 그대로였다.
“너, 너……! 여긴 어디야! 날 어디로 데려온 거야!”
“진정하게.”
바키아는 아겔에게 흑마법을 날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연산에 연산을 더하고 술식을 그려 봐도 흑마법은 성립되지 않았다.
“무슨…….”
아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겔은 바키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공격은 통하지 않으니, 다시 한번 물어보겠네.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구먼.”
아겔이 메마른 목소리로 다시 질문했다.
“자네, 악마와 거래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나?”
바키아는 입술을 꽉 씹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아겔을 향한 적의를 거두지 않은 채로 말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그렇구먼.”
아겔은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이젠 시간이 되었다네.”
“뭐?”
쿵…….
옅은 진동이 어둠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바키아는 아무것도 없는 바닥이 흔들리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뭐, 뭐야…… 뭘 하려는 거야?”
“아무것도 안 했네. 난 그저 구경하러 온 것뿐이지. 악마와 거래한 자의 최후를 말일세.”
“최후……?”
쿵…… 쿵…… 쿵…….
진동은 점점 더 잦아지고 크게 들려왔다.
바키아는 긴장감에 식은땀을 흘렸으나, 아겔은 초연하게 서 있었다.
쿵……!
그제야 바키아는 자기 발밑을 볼 수 있었다.
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뭔가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 아아아…….”
‘그것’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바키아는 허무한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이 어둠을 기어 올라오는 이유는 바로 자신을 데려가기 위함이란 것을.
거대한 무언가는 깊은 어둠 속에서 길쭉한 손을 뻗었다.
형용할 수 없이 거대한 손이 다가오자, 바키아는 겁을 먹고 한쪽으로 달렸다.
“아, 안 돼! 이럴 순 없어! 왜 나야! 저 노인을 데려가! 난 싫어!”
아겔은 씁쓸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악마와 거래한 자의 최후는 영혼의 필멸을 불러온다.
겁도 없이 악마와 거래한 자들의 최후는 잔인했다.
“꺄아아아아악……!!”
기어이 거대한 손으로 바키아를 붙잡은 그것.
바키아는 발작하듯 버둥거렸지만, 기괴하게 마른 손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노인을 보며 울며불며 소리쳤다.
“구해줘! 살려 줘! 뭐든지 할게! 제바알-!”
그러나 아겔이 대답하기도 전에 거대한 손은 바키아를 붙잡고 내려가 버렸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메아리처럼 비명이 어둠 속을 울렸다.
아겔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그 모습을 보려고 고개를 숙였다.
“…….”
‘그것’ 또한 아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겔은 한마디 남기고 뒤돌아섰다.
“너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구경하러 온 것이니 이제 자리를 비켜 주도록 하지.”
그가 뒤돌아서자마자, 늙은 죄수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
저 밑 끝없는 어둠 속에서 그것은 아겔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어둠의 공간 전체를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상관 있다.]
말을 마친 그것은 다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