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의문 (1)
후우우우…….
폐허가 된 거점엔 살아 있는 생명체의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바키아가 일으킨 폭발로 인해 주변은 엉망이었고, 검은 연기는 생명력을 잔뜩 빨아먹어 주변 수풀은 메말라 있었다.
마치 황무지처럼 변한 이곳 중심에는 아겔 혼자 서 있었다.
‘거점 2개.’
아겔은 인듀라스가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다르키스가 행하려는 ‘백만 번제’는 거점 2개 이상이 파괴되면 의식 시행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거점 2개를 완파했으니,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이제 본거지만 습격하면 될 것이다.
꾸드드득…….
아겔은 주먹을 쥐었다.
아리스를 습격한 흑마법사들. 그 정점에 다르키스가 있을 것이다.
주동자는 모든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그러니 쉽게 죽여선 안 될 것이다.
“어, 어르신!”
저쪽에서 안톤이 급히 뛰어왔다. 안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맡겨 주신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고생하시게 했습니다.”
“무얼. 무사했다면 다행이다. 나도 욕심을 조금 부렸구나.”
“전혀 아닙니다. 모두 제 부족함 때문입니다.”
한없이 고개를 숙이는 안톤이었지만, 아겔은 그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1천의 흑마법사에 맞섰고, 거기에 예상치 못한 적이 둘이나 더 있었다.
곁에서 나는 그의 피 냄새만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면의 어둠으로도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이 느껴졌다.
“몸을 회복하거라. 그다음 움직이도록 하겠다.”
“예.”
안톤은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영감!”
저쪽에서 바를라와 쿠라스크도 걸어왔다.
쿠라스크는 바를라가 순식간에 치유해 준 오른팔이 낯선지 붕붕 휘두르며 감각을 회복하고 있었다.
“영감, 말한 대로 괴물을 해치우는 데, 손 좀 보탰다. 나 없었으면 곰탱이 뒤졌을걸?”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마라.”
안톤이 정색하고 일어섰지만, 쿠라스크는 전혀 위협이 안 된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거 자존심은. 내가 돕기 전까지 처맞고 있었으면서.”
“너도 저 고깃덩어리와 똑같이 만들어 줄 수 있다.”
“예예, 대단하신 곰탱이님. 그 뚱뚱한 몸뚱아리로 뭘 못하시겠습니까?”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사이 바를라가 아겔에게 다가왔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입은 열지 않고 아겔의 눈치를 보았다.
아겔은 한동안 거점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바를라.”
“아닙니다. 우선 쉴 곳을 찾아보지요. 그리고 뭐라도 좀 먹어야겠습니다.”
“그러세.”
아겔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바를라가 그 뒤를 따랐고, 안톤과 쿠라스크도 투닥거리면서 쫓아왔다.
.
.
.
해가 졌다.
개방이 시작된 지도 스무날이 되었다.
원래는 스무날이 되는 이때부터 악마숭배자들을 처단하려 했지만, 아겔은 홧김에 거점 파괴를 시작해 버렸다.
그러나 후회하진 않았다. 스스로 파멸을 앞당긴 건 그들의 업보였으니.
툭.
아겔은 나뭇가지 하나를 부러뜨려 이 사이에 낀 고기 찌꺼기를 빼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혼자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온 참이었다.
식사는 배가 부르면 만족스러운 것이다. 맛이 좋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제 미각은 거의 희미해지고 있었기에.
“후우.”
아까부터 아겔의 귀에 울리는 바키아의 비명.
이제 다시는 그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순 없을 것이다.
아겔조차 단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바닥의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갔으니까.
아겔은 공좌, 혹은 악마라 불리는 이들과 거래한 자들을 수도 없이 만나 보았다.
고독에 악마와 거래하는 자들이 악마숭배자들뿐이겠는가. 악마숭배자는 신생 흑마법사 집단일 뿐이다.
그 이전에도 흑마법사들이 이룬 무리는 많았으나, 결국 파멸로 치달았다.
그 목적과 목표는 조금씩 상이하더라도 수단이 똑같았다. 바로 악마와의 거래.
그것이 모든 흑마법사 집단이 스스로 망한 이유였다.
흑마법사 집단이 아니더라도 악마와 거래한 자들의 최후는 그리 밝지 않았다.
그들과 거래하려면 기본적으로 ‘영혼’을 걸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바키아는 깔끔한 최후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심하면 죽을 때까지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살다가, 영혼까지 빼앗기는 것이지.’
차라리 고독에서 잠자코 생을 마감하는 게 나으리라. 그래도 이 교도소는 육체의 편안함만을 빼앗는 곳이니.
죽어서 편히 쉴 자리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면, 살아생전 의욕 하나 나지 않을 것이다.
투둑.
이를 쑤시던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떨어지고, 손의 떨림이 느껴졌다.
‘약 기운이 또 얼마 남지 않았구먼.’
약의 의존하는 건 좋지 않다. 하지만 악마숭배자들을 토벌할 때까지만이라도 약은 필요했다.
프슷.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겔은 잠자코 나무에 기댄 채로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기다렸다.
역시 소년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수풀 가운데서 나왔다.
“할아버지…….”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느껴지는 세로의 분위기가 우울했다.
“식사 더 안 하시나 해서요. 아직 쿠라스크 형하고 안톤 형은 밥 먹고 있는데…….”
세로는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아겔은 소년이 하고 싶은 말이 그게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내면의 어둠으로 이어졌기에 소년의 감정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난 충분하구나. 그보다 다른 이야기를 하러 온 것 같은데.”
“…….”
세로는 잠시 머뭇거렸다.
꼬마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아직…… 제가 부족한가 봐요…….”
세로는 거점 전투를 떠올렸다.
1천에 달하는 흑마법사. 그들 사이로 돌진한 용기는 좋았으나, 소년이 실질적으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바키아가 나타나 손가락을 뽑는 고문을 했을 때도, 타고난 종족성이 아니었다면 손쉽게 살해당했을 것이다.
성역을 선포하는 바를라를 지키는 일은 세로에겐 과분한 임무였다.
“자꾸 짐이 되는 것만 같아서요…… 다들 강하신데, 저만 부족한 느낌이에요.”
세로가 제대로 말하지 못해도 아겔은 이어진 어둠을 통해 세로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네가 몇 살이지?”
“음…… 열 살이요.”
“그 나이대 라이칸스로프는 인간이나 다름없지. 종족의 본능조차 느끼지 못하고 평범하게 살아간단다.”
“…….”
“그런 평범한 라이칸스로프와 다르게 넌 강하다. 다만, 좀 유별난 사람들을 만났을 뿐이야.”
조금 유별날까.
안톤은 이제껏 세로가 만난 사람 중 누구보다 단단한 전사였다.
바를라의 치유력은 상식을 뛰어넘었고, 쿠라크스마저 수천의 수인을 이끄는 한 집단의 대장이었다.
아겔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사이에 있으니, 왠지 자꾸만 스스로 작아 보이는 것이었다.
아겔이 말했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마라. 오직 스스로 서는 것이다. 이미 넌 라이칸스로프 중에서도 특출난 존재.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럼…… 언젠가는 할아버지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
아겔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세로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소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곳을 나갈 수 있으리란 것을.
복잡한 정치나 거래에 관해선 잘 모르는 꼬마였지만, 이 일이 끝나면 아겔과 헤어지게 될 것이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그 빚을 갚지도 못하고 말이다.
세로의 귀에 아겔의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강해지는 걸 넘어서, 다시 만날 날엔 네가 날 도울 수도 있겠지.”
“…….”
“그땐 잘 부탁하마.”
아겔이 주름진 손을 내밀었다.
세로는 그 모습에 처음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아 준 날을 떠올렸다.
내면의 어둠 속으로 자신을 이끌어 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그 날을.
세로는 단단한 눈빛을 했다.
아직 연하지만 점점 커가는 전사의 손이 주름진 손을 맞잡았다.
“저도요.”
이야기를 마친 세로는 뒤돌아보지 않고 한쪽으로 걸어갔다.
혼자 내면의 어둠으로 들어갈 모양이었다.
아겔은 꼬마가 사라진 수풀 쪽으로 고개를 두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건 고약한 취미라네.”
나무 뒤에서 멋쩍은 얼굴을 한 바를라가 나왔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여전히 따뜻하게 말씀하시는군요.”
“어린아이들은 따스함을 좋아하는 법이지. 그보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나?”
바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백작의 연락이 있었습니까?”
“없었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아겔은 악마숭배자의 본거지를 치기 전, 백작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유비무환이라고 따로 가더라도 준비 정도는 하고 가고 싶었는데, 백작은 아무런 연락을 보내오지 않았다.
마음만 먹었더라면 박쥐라도 보냈을 터인데.
“설마 배신한 걸까요?”
“흐음.”
아겔은 자신의 손을 맞잡던 인듀라스의 손길을 떠올렸다.
차가운 감촉. 살아 있는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딱딱한 손이었지만, 분명 그는 살아 있었다.
배신.
아겔과 거래한 그가 배신했다면, 그로선 한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게 된다.
“만약 배신했다면, 내가 직접 죽일 터이니 안심하게.”
“그건…… 든든한 말씀이시군요.”
성자는 백작이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백작은 다르키스처럼 악마를 따르는 자. 성좌(聖座)의 반대에 선 그를 달갑게 여길 순 없다.
“이토록 연락이 없는 이유는 혹시 아직도 거점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 아니면…….”
거점엔 흑마법사가 그득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괴륙’의 존재도 있고.
바키아처럼 강인한 흑마법사 한 명이 또 있을 수도 있다.
“졌을 수도 있지.”
“백작이 말입니까?”
“자네도 내가 오기 전까지 쉽지 않은 싸움을 했잖은가.”
“그건 그렇지만…… 인듀라스는 자신의 권속이 있지 않습니까?”
인듀라스는 평범한 사람을 흡혈귀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수하들을 만들고 세력을 키운 자. 그의 수하에 있는 흡혈귀만 수천 마리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측근이 되는 흡혈귀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도 했다.
아겔이 고개를 저었다.
“싸움은 숫자가 많다고 이기는 게 아닐세. 그랬다면 오늘 우린 졌겠지. 어떤 변수가 있었을지 알지 못하네.”
“하긴 그렇군요.
“내일이 되어도 그쪽에서 연락이 없으면 본거지로 출발하도록 하지.”
“불안하긴 하지만…… 알겠습니다.”
바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질문했다.
“오늘 바키아를 혼자 잡아 내셨죠.”
“뭐 그런 셈이지.”
“어땠습니까. 악마와 거래한 자의 최후는.”
바키아는 평범한 6급보다 강했다.
그것은 악마와 거래로 얻은 힘 덕분이었다. 1천 명이 주둔할 정도로 넓은 거점을 단신으로 초토화 해버렸으니.
그러나 얻은 힘만큼 대가는 무시무시할 것이 틀림없었다.
바를라의 물음에 아겔의 귓가엔 다시 그녀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끔찍했지.”
저 아래의 어둠 속으로 끌려간 바키아.
내면 세계에서 그녀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대가는 영혼이었다네.”
“역시…… 시체도 남지 않은 걸 보면 육체까지 추가로 거래한 것이겠군요.”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키아가 악마에게 잡혀갔을 땐,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남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바를라가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악마와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겔은 잠시 침묵했다. 어둠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것.
그것은 분명 악마였다.
악마와 대면하여 본다는 건 꽤 의미가 컸다.
그래서 아겔은 이걸 말해 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바를라는 끈기 있게 아겔의 말을 기다렸다.
침묵을 지키던 아겔이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없지 않지.”
“그렇군요…….”
“자네도 있나?”
“예. 저도 악마와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생김새가 끔찍했죠. 만나자마자 토를 했습니다.”
바를라는 악마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공좌(空座)라 불리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그들은 절대로 다수가 있는 자리에 찾아오지 않는다. 오직 개개인에게. 다양한 모습과 방법으로.
때론 그게 악마라고 생각지도 못할 만큼 은밀하게 다가왔다.
처음 악마와 만났을 때, 바를라는 형용할 수 없는 갈증과 텁텁함을 느꼈다.
“백작이 따르는 악마였죠. ‘탐식’이었습니다.”
“용케도 버텼구먼. 악마와 대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그렇긴 했죠.”
바를라는 아겔도 그러한 감정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악마와 대면하면서 느꼈던 그런 욕망을.
성자는 ‘소망’을 따랐기에 악마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지만.
아겔은 성좌를 믿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거래’를 좋아한다.
“또 질문이 있구먼. 말하게.”
바를라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아겔이 말했다.
손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성자는 침을 삼키고 침착하게 질문했다.
“혹시 악마와 거래하셨습니까?”
아겔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의 침묵은 이전보다 더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