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76)화 (77/186)

76화 신호

“제기럴…….”

쿠라스크는 풀잎 하나를 씹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가 보고 있는 광경이라면, 누구나 욕 한 번 내뱉을 만했다.

아겔 일행은 높은 언덕 위에서 악마숭배자들이 포진한 평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본거지까지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놓고 정글 동부를 평원으로 싹 밀어 버리고 영역 삼았으니.

놈들이 주변을 정찰하긴 해도 멀리 떨어진 괜찮은 언덕이 하나 있어, 지켜보는 데 용이했다.

“자아, 성자 양반.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응? 우린 못 이겨. 아겔 영감이 떼쓰고 있는 거라고 생각이 들진 않아? 노망이 난 걸 수도 있다고.”

“어르신이 노망이 드셨다는 건 동의할 수 없군요. 걱정되는 건 맞지만…….”

“너도 눈깔이 삐었냐? 저걸 봐! 저 새끼들이 흑마법 하나만 쏴도 1만 개가 날아온다니까? 그거 너 혼자 다 막을 수 있겠어?”

“…….”

쿠라스크의 질문에 바를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만큼 악마숭배자들의 위상은 대단했다.

그들은 음습한 곳에 자리 잡지 않고, 오히려 정글을 평원으로 개간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정말 백만 명은 되어 보일 법한 시체가 평원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만 명이 넘는 흑마법사들이 제물의 상태를 감시하고 관리하고 있었다.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악마숭배자들이 부리는 몬스터들이나 괴수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마지막으로 평원 한가운데 어마어마한 크기의 피라미드가 있었다. 겉만 보아도 사람의 시체로 쌓아 올린 것이 분명한 끔찍한 건축물.

그 거대하고도 역겨운 모습에 습격하는 입장에선 사기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쿠라스크가 말했다.

“저 개미 떼 같은 놈들이랑 싸우느니, 차라리 폐쇄 구역에 기어들어 가는 게 낫겠어.”

쿵.

안톤이 불평을 내뱉는 쿠라스크 곁으로 걸어왔다.

“어르신만 믿어라. 어르신은 틀린 소리를 하는 법이 없으시다.”

쿠라스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야이씨……! 발소리 좀 죽여, 이 곰탱이 새끼야……! 저기까지 네 발소리가 다 들리겠다.”

“오두방정 떨지 말고 기다리기나 해라, 겁쟁이.”

안톤은 나무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어르신께서 분명 신호를 주신다고 하셨다. 그러니 잠자코 기다리면 된다.”

“신호는 개뿔이. 뭔 신호인지 알려 주지도 않고 갔는데, 우리 보고 어쩌라는 거야?”

아겔은 이곳에 없었다. 그는 몇 마디 말을 남기고 홀로 어디론가 향했다.

신호가 올 테니, 이 언덕에서 지켜보다가 공격을 시작하면 된다고.

일단 아겔의 말대로 일행은 비스트 서클과 함께 언덕에서 대기 중이었다.

안톤이 말했다.

“어르신은 분명 우리가 신호가 뭔지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싫다면 지금이라도 떠나면 된다. 막지 않겠다.”

“젠장…….”

쿠라스크도 딱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불만을 터뜨린 건 아니었다.

6급 죄수인 그조차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상대. 불평이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씨부럴, 벌써 영감이 혼자 나간 지 사흘이야. 이 빌어먹을 곳에서 뭔 일이 생겼는지 어떻게 알아? 게다가 근처에 먹을 만한 것도 바닥났어. 계속 기다리다간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쿠라스크의 서클은 수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당연히 먹성이 대단했다.

근처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긴 하지만, 이젠 몬스터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대기하며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선 더 멀리 나가야만 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꼬맹아. 영감이 너도 좀 아끼는 것 같던데.”

“아, 저는…….”

세로는 악마숭배자들의 본거지를 보고 나서 계속 멍한 얼굴이었다. 마치 자신이 이 거대한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게 실감이 잘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 빨리 싸우고 싶기도 하고…….”

“뭐?”

소년은 악마숭배자들의 본거지를 보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눈에 선한 것 같았다. 피륙을 찢고 살을 가르는 싸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치명적인 싸움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상상만 해도 마음이 그곳에 빼앗기는 듯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잖아요. 빨리 싸우고 끝내는 게 나은 것 같기도 하고요…….”

“쯧쯧, 너도 영감이랑 다니더니, 미쳤구만. 머리만 멀쩡하면 내 수하로 받아 줄 법도 한데. 어째 여긴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냐?”

바를라가 말했다.

“세로 친구는 아겔 영감님의 상품입니다. 데려갈 수는 없을 겁니다.”

“아, 그래? 그건 몰랐네. 하여튼 너흰 다 미쳤다는 거야. 아니, 너희가 정상이고, 내가 미친 건가?”

쿠라스크는 구시렁거리며 슬쩍 바를라를 바라보았지만, 성자는 묵묵히 바닥만 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사흘 전, 아겔이 써준 글귀를 복기하는 데만 온 정신이 쏠려 있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라도 최악의 경우라면…… 악마숭배자들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아직 명확하지 않았지만, 바를라의 마음속에선 설마 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와 알고 지낸 지도 10여 년이 지났는데, 이런 식으로 그에 대한 의심이 자랄 줄은 본인도 알지 못했다.

성자는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마음을 흩어 버리고 눈앞에 있는 악마숭배자의 본거지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우선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일부터.’

악마숭배자들은 고독에서도 악명 높은 사악한 집단. 저들을 없애는 걸 우선으로 결심한 바를라였다.

조용히 기도문을 외우던 바를라가 눈을 떴다. 뒤쪽에 있던 서클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서둘러 언덕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언덕 가장 높은 곳엔 안톤과 쿠라스크, 세로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악마숭배자의 본거지를 쪽을 바라보는 쿠라크스는 입을 벌리고 있었고, 안톤과 세로는 묵묵히 싸움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를라도 평원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아겔이 말한 신호가 분명했다.

평원을 가득 메운 흑마법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 * *

아겔은 사흘간 한 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은 악마숭배자들의 평원 바로 곁에 있는 높은 산이었다.

그는 충분히 채운 가죽 부대를 아래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제 시작해야겠구먼.’

이곳은 산의 계곡에서 흐르는 물가. 사흘 동안 아겔이 행한 작업은 단순했다.

달칵.

아겔이 단검을 꺼내 물에 집어넣었다. 안쪽이 빈 단검은 물을 흡수하고 그것을 독으로 만들어 내었다.

그가 준비한 건 가죽 부대 열 개 분량의 독.

대적자로 인해 소환되는 괴물조차 30초를 견디지 못하는 극독이었다.

그의 친우가 준 단검으로 생성해 낼 수 있는 독은 아무나 견딜 수 있는 독이 아니었다.

아겔은 이걸 물가에 풀 생각이었다.

평원에 포진한 악마숭배자들은 이 산에서 흘러나온 물을 마신다.

정글은 더운 곳이고 반드시 물가를 장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수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다면, 결국 죽음을 맞이할 테니.

아겔은 독이 잘 흘러갈 만한 장소를 찾아서 가죽 부대를 옮겼다.

당연히 괜찮은 물가는 악마숭배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서로 눈에 보일 만큼만 떨어져 경계를 서고 있는 수십 명의 흑마법사.

잘못 건드리면 아겔이 위치가 발각될 수 있었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겔이 휘파람 소리를 냈다.

휘잇……!

그러자 수풀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정글에 사는 원주민들. 마치 얻어맞은 것처럼 전신에 멍이 든 원주민들이 아겔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 모두 한쪽 눈은 밤탱이가 된 모습이 두드러지는 점이었다.

“(시간이 되었다.)”

아겔이 원주민들의 언어로 말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긴장한 낯빛으로 바람총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원주민을 이끄는 지도자 같은 자가 아겔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정말 이 일만 끝나면 우릴 보내 주는 것이오?)”

“(약속은 어기지 않는다. 너희가 먼저 어기지 않는다면.)”

“(…….)”

아겔은 이 산에서 독만 준비한 게 아니었다. 물가를 지키는 흑마법사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근처에서 원주민들을 잡아다 왔다.

원주민들은 귀신과 같이 바람총을 쏘는 아겔에게 잔뜩 농락당하다가, 결국 목숨을 구걸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겔은 물가의 경비를 무력화하는 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그들을 살려 주기로 했다.

지도자는 자신의 바람총에 들어가는 침을 살폈다.

아겔이 건네준 독을 묻힌 침. 그들이 사냥할 수 없는 몬스터도 순식간에 죽이는 것을 보고, 원주민들은 굉장히 놀라워했다.

무색의 독은 물과 같았지만, 분명히 극독이었다. 자세히 냄새를 맡아야 알싸한 향을 느낄 수 있을 뿐, 물처럼 마셔도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알기 힘들 것이다.

툭툭.

원주민들은 아겔의 신호에 침을 장전했다.

지도자는 잠깐 이 침으로 아겔을 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약속을 어길 기미가 보이면, 당장 너희 부락까지 찾아가서 아이와 여자를 전부 죽이겠다.)”

“(…….)”

마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말하는 노인 때문에 반란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 늙은 인간을 한번 놓치면, 정말로 자신의 부락이 초토화될 것 같았기에.

아겔이 수신호를 보냈다. 원주민들은 신호를 받고 산에서 넓게 퍼졌다.

그 상태로 물가를 지키는 흑마법사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접근하자, 흑마법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둘씩 짝지어 거리를 둔 채 물가를 지키고 있었다.

아겔은 타이밍을 기다렸다. 이들이 다음 근무자들과 교대하는 그 시간을.

이전에 언제 교대를 하는지 살폈기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아래쪽에서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고, 역시 그들은 교대하러 온 흑마법사들이었다.

노인은 조용히 교대가 바뀌길 기다렸다.

이 시간만 기다리면 적어도 2시간 동안은 이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리라.

이전에 근무했던 흑마법사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 들어온 흑마법사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하, 지겨워. 여길 지키는 것보다 의식을 보고 싶은데.

-사흘 전에 시작했는데, 왜 아직도 안 끝나는 거지? 이제 끝날 때쯤 된 거 아니야?

-야, 임마. 악마의 힘을 부르는 게 단순한 건 줄 알아? 이제 막 시작한 거나 다름없을걸.

-제길,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여긴 더워 죽겠어.

아겔은 지체하지 않고 신호를 주었다.

신호를 확인한 원주민들은 완벽한 합으로 물가에 넓게 퍼진 흑마법사들에게 독침을 쐈다.

퉁! 퉁! 퉁! 퉁! 퉁! 퉁! 퉁! 퉁!

-컥……!

-무, 무슨……!

-워, 원주민이다……! 끄, 끄르르륵…….

흑마법사들은 원주민들이 자신을 습격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거지에 연락하려 했다. 평소라면 절대로 본거지에 얼씬도 안 할 것들인데, 갑자기 습격받아 허둥지둥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겔이 건네준 독은 그들이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숨을 앗아 갔다.

흑마법사들은 전부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하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

아겔은 흑마법사들이 전부 쓰러진 걸 확인하고 다시 신호를 보냈다.

원주민들은 근처에 있는 가죽 부대를 가져와서 계곡에 풀었다.

“(……! ……!)”

그 과정에서 실수로 독이 몸에 묻은 원주민이 즉사했다.

원주민들은 동료의 시체도 챙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이제 이곳에서 흘러가는 물은 죽음만을 불러올 것이기에.

아겔이 원주민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라. 수고했다.)”

“(……무운을 빌지.)”

원주민 지도자는 몬스터에게서 달아나듯이 전사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아겔은 물가를 따라 천천히 본거지를 향해 접근했다.

놈들은 여전히 아무런 의심 없이 이 물가에서 흘러온 물을 마실 것이다.

그것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인지도 모른 채.

더운 정글에서 물을 안 마시고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백작과 같이 피로 수분을 섭취하는 특이 케이스가 아니라면.

아겔은 언덕에 두고 온 일행을 떠올렸다.

‘잘 알아듣겠지.’

물을 마신 흑마법사들은 곧장 쓰러질 테다. 그럼 그때부터 전쟁은 시작이다.

아겔은 먹이를 사냥하는 맹수처럼 조용히 기다렸다. 품에서 꺼낸 단검을 꽉 쥐고.

이번엔 독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피와 살을 가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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