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악마숭배자 (1)
아겔은 한쪽에 숨어서 때를 기다렸다.
산에서 평원으로 이어지는 물줄기.
악마숭배자들은 이제 그 물에 흐르는 독을 마시게 될 것이다.
‘효과가 나타나려면 조금 기다려야겠군.’
물줄기는 보통 큰 게 아니라서, 가죽 부대 열 개 분량으로 독을 쏟았지만, 희석되고 희석되었을 것이다.
물 한 잔에 들어갈 독의 양은 이슬보다도 적을 것이다.
그러나 독을 마시면 죽는다는 사실 자체엔 변화가 없다.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뿐.
‘벌레임금의 단검’이 내뿜는 독은 그런 종류의 것이니까.
아겔은 자신의 단검을 매만졌다.
오래전, 친우가 전해 준 소중한 물건. 친우는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그가 만들어 준 이 단검만큼은 그 어떤 물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무기였다.
“이 일이 끝나면 한번 찾아가야겠구먼.”
그는 하찮게 취급받는 벌레 종족 중에서도 지혜롭고 온화하다. 대화를 나눌 때면 따스한 마음이 느껴지고 어진 생각에 감탄이 들 때도 있다.
우주의 비난을 받는 벌레 종족을 굳건히 지킬 만큼 단단하다.
그러나 거대한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던 가엾은 영혼이기도 하다.
벌레임금이 고독에 갇히게 된 것은 은하 정부의 횡포로 인함이었다. 우주의 평화를 해치는 해악으로 규정하고 고독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누가 ‘악’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뿌득…….
단검을 쥔 아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인의 친구가 되는 자들은 대부분 그랬다. 차별받거나 아무 이유 없이 무고를 당하는 자들.
세상은 악하다. 그런 것쯤은 고독에 들어오기 전부터 안 사실이다. 다만, 본인과 주변 사람들이 그 악에 억울함을 당하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오늘 악마숭배자가 고독에서 사라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 ……!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아겔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악마숭배자 본거지가 부산스러워지고,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
때가 왔다.
아겔은 나무 그늘에서 나와서 본거지 쪽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소리는 점점 명확하게 들려왔다.
-끄륵……! 끄르르르륵…….
-씨발, 얘네 왜 이래!
-나도 몰라! 어떻게 좀 해 봐!
동료들이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하나씩 쓰러져 간다.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며 몸의 근육이 하나씩 마비되어 가는 증상.
심지어 죽음에 도달하기까지 끔찍한 고통을 느끼는 건 덤이었다.
얼굴 근육부터 굳어 가는 이들은 그 고통조차 표현하지 못하고 죽어 갔다.
-도, 독이다! 이건 독이야! 누가 독을 풀었어!
-무슨 소리야, 독이라니……! 독을 어떻게 풀었단 말이야!
용케도 독에 의한 증상이란 걸 깨달은 흑마법사들이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이 독은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끔찍한 극독.
여기에 독을 다루는 자가 있더라도, 산에서 흘러온 물을 마신 흑마법사 수천 명을 동시에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겔은 독으로 악마숭배자들 멸망에 이르게 할 생각은 없었다.
독은 그저 혼란을 주기 위한 수단.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푸욱……!
아겔은 본거지 내부로 잠입해 혼란에 빠진 악마숭배자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져 남들과 떨어진 놈들부터 하나씩 죽였다. 기척을 파악하는 아겔은 누가 혼자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혼자 남았다면, 그리고 6급 죄수 혹은 그 이상의 죄수가 아니라면, 아겔에게서 5초 이상 살아남지 못했다.
노인은 하나씩 죽이는 데도 공을 들였다.
우선 목을 찌른 다음, 가슴의 심장을 확실하게 찔렀다. 그다음 단검으로 목을 베었다.
“아무래도 이놈들은 목이 붙어 있으면 불안하단 말이지.”
머리를 잘라 내어 좀비로 만드는 것을 원천 차단하는 작업이었다. 조금 손이 가긴 했지만, 아겔에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혼란에 빠진 악마숭배자들은 아겔이 하나씩 죽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벌써 독에 의한 증상이 나타난 자만 1천 명이 넘어갔다. 더운 정글에서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었기에.
덧붙여 독에 당한 자들이 금방 죽지 않고, 적지 않은 시간을 생존해 있었기에 오히려 혼란은 가중되었다.
독이라면 어떤 독인가.
누가 한 짓인가.
어떻게 한 건가.
그리고 살릴 수 있는가.
차라리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면, 죽은 동료들을 수습하고 주동자를 찾겠지만, 환자만 늘어나는 꼴이라 그들은 허둥댔다.
혼돈이 그들을 집어삼킨 상황에도 아겔은 착실하게 흑마법사의 숫자를 줄였다. 짧은 시간, 그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자도 세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있었다.
-너, 넌 뭐야……!
몇 흑마법사에겐 모습을 들키기도 했지만, 늙은 죄수는 오히려 단검을 들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촤악……!
-끄아아악……! 치, 침입……!
숏소드로 그들을 참살한 아겔은 누가 오기 전에 자리를 떴다. 본거지에도 흑마법사들이 거주하는 움막과 목조 건물이 꽤 있어서 몸을 숨기기 용이했다.
-침입자가 있다……!
-주변을 경계해!
아겔이 해치운 흑마법사의 시체가 들통나면서 주변이 부산스러워졌다.
그는 소음을 듣자마자, 움막 하나에 들어갔다.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움막. 각종 토템의 재료와 썩은 살점이 가득했다.
아겔은 조용히 기다렸다가, 움막 내부를 살피러 들어온 흑마법사 하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단검으로 복부를 찔렀다.
푸욱……!
“끄윽……!”
아겔이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쉬이이이…… 조용히 하게. 여기서 한 뼘만 더 올리면 죽을 수도 있네.”
“……끄으으읍. 헉…… 헉…….”
눈에 붕대를 감은 노인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목을 잡자, 흑마법사는 그 기세에 눌려 억지로 숨을 참았다.
아겔이 말했다.
“다르키스는 어디에 있나.”
“제, 제사장님을 만날 수는 없다…… 끄흡…… 의, 의식이 진행 중이야…….”
“그건 나도 알고 있다네.”
아겔도 흑마법사들의 소굴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다.
기묘한 무언가가 이곳에 가득 차 있었다. 밖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으나, 안에 들어오니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불쾌하고 역겨운 기운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었다.
마치 악마의 것처럼.
흑마법사가 실소를 흘렸다.
“흐, 흐흐흐…… 이제 제사장님은 새롭게 거듭난다…… 우, 우리 악마숭배자들이 이 고독을 집어삼킬 그날이 곧……!”
쯔걱.
아겔은 단검을 움직여 흑마법사를 죽였다. 감정적으로 고조된 것이 소리를 지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쯧.”
단검의 피를 닦아 낸 아겔은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느꼈다. 흑마법이 그가 있는 움막을 폭발시켰다.
콰아아앙-!
아겔은 흑마법사의 시체로 터져 나가는 잔해를 막고, 밖으로 몸을 던졌다.
움막 밖으로 나오자 흑마법사들이 자신을 포위한 것이 느껴졌다.
-여깄다, 이 침입자놈……!
-어, 근데……?
흑마법사 중 몇 명이 아겔을 알아보았다. 하급 죄수만이 아니라, 중급 죄수도 있었기에.
눈에 붕대를 감은 늙은 죄수를 아는 것이었다.
-아겔라스토스다……!
-잡아야 해! 제사장님께서 경고했던 놈이다!
흑마법사들이 아겔을 향해 공격을 준비했다.
아겔은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단검을 고쳐 잡았다.
그 순간.
콰아아아앙……!
땅을 가르는 듯한 충격이 흑마법사들을 집어삼켰다. 악마숭배자 수십 명이 충격파에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어르신.”
“제때 왔구나.”
주변을 자욱하게 물들인 흙먼지 사이로 붉은 외눈이 보였다.
안톤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로 세로와 바를라가 나타났다.
* * *
“맙소사.”
바를라는 안톤을 따라 악마숭배자들의 본거지를 습격했다.
안으로 입성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목책 주변에 있는 흑마법사들은 거품을 물고 경련하고 있었고, 가만히 두어도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혼란 속에 있었다.
“캬앗, 여긴 내가 맡는다!”
때를 놓치지 않은 쿠라스크는 수인들을 데리고 안쪽을 휘젓기 시작했다.
“사냥 시작해!”
쿠라스크의 비스트 서클은 자기 몫을 하기 위해 흑마법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독에 당한 것에 더불어, 수인들의 습격이 있으니 악마숭배자들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싸움이 시작된 혼란 속에서도 안톤은 아겔을 정확히 찾아내었다.
바를라는 전력으로 달려서 겨우 안톤을 따라잡았다.
그는 아겔의 곁에 다가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어르신, 이게 도대체……!”
안쪽으로 얼마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흑마법사의 시체가 셀 수 없이 땅에 흩어져 있었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아겔은 태연하게 말했다.
“나도 비장의 한 수를 좀 써 봤지. 그보다 길 좀 뚫어 보게. 아무래도 다르키스는 좀 더 안쪽에 있는 것 같으니.”
그 말에 바를라가 눈을 들었다.
“저곳에 피라미드가 보입니다. 불길한 기운도 느껴지고요. 다르키스는 아마 그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랬구먼. 그럼 미적거리지 말고 가도록 하세.”
아겔이 먼저 달렸다.
흑마법이 쇄도했지만, 아겔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달렸다.
쾅! 쾅! 쾅!
몸을 스치는 각종 저주와 사출 흑마법. 아겔은 멀쩡하기만 했다.
흑마법사들은 당황했지만, 이내 다양한 방법으로 아겔 일행을 막아 내려 했다.
데드 콥스 라이즈(Dead Corpse Rise).
콥스 익스플로젼(Corpse Explosion).
죽은 동료의 시체로 좀비들을 만들어 내거나, 시체를 폭발시키는 흑마법사들.
그때부턴 안톤이 앞장서기 시작했다.
쿵……!
철갑옷을 입은 안톤은 한 명의 거대 기사였다. 그는 아겔의 길을 막는 자들을 향해 전투 망치를 내리찍었다.
콰앙--!!
땅이 흔들리는 충격에 흑마법사들이 나동그라지고, 근처에 있는 좀비들이 터져 나갔다.
-절대로 제사장님께 가도록 놔두어선 안 된다!
흑마법사 한 명이 소리쳤다.
“리빙 세크리파이시스(Living Sacrifices)……!”
그 주변에 있는 살아 있는 악마숭배자들이 제물로 바쳐졌다. 그들의 몸은 미라처럼 마르고, 몸이 나뭇가지처럼 변했다.
-끄아아아악……!
-고, 공좌시여…… 제 희생을……!
수준이 뛰어난 흑마법사들은 자신의 수하들을 희생하고서라도 아겔 일행을 막아서려 했다.
많은 숫자로 생명력을 얻은 흑마법사들은 효과적으로 아겔 일행을 막았다.
쿵……!
“그오오오오…….”
키가 10미터 되는 시체 골렘이 열 마리나 모습을 드러냈다. 육중한 몸무게를 이용한 질량 공격.
안톤이 방패를 들어 시체 골렘의 주먹을 막아 냈다.
쾅-!
“…….”
외눈의 곰 수인은 주먹을 막아 내자마자, 전투 망치로 놈의 어깨를 후려쳤다. 피와 썩은 살점이 터져 나갔고, 그것들은 몸에 닿기만 해도 부정적인 작용을 했다.
안톤도 시체 골렘 한 기를 쓰러뜨리려면 1분간 혈투를 벌여야 했다. 그리고 전장에서 1분은 꽤 치명적인 시간이었다.
콰앙……!
“큭……!”
바를라가 쏟아지는 흑마법으로부터 일행을 보호했다. 아겔은 보호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으나,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을 지키는 데만 해도 신성력 소모가 극심했다.
독에 당하지 않은 흑마법사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 역시…… 역부족이었나……?’
바를라의 시선 안으로 사투를 벌이는 수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1천에 달하는 짐승 인간들도 수적으로 우세한 흑마법사들에게 하나씩 쓰러져 갔다. 그들의 육체적인 장점은 흑마법에 의해 퇴색되고, 강인한 전사라도 저주에 걸려 쇠약한 상태로 죽어 갔다.
바를라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는 한쪽에 서서 뭔가 중얼거리는 아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 어르신……?”
짧은 순간, 그의 입술을 통해 무슨 말을 하는지 읽을 수 있었다.
어둠이여.
말이 끝나는 순간, 바를라의 세상이 온통 까맣게 변해 버렸다.
* * *
“쯧.”
아겔은 혀를 차며 흑마법사의 목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될 수 있으면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길을 뚫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주변에 있는 전원의 시야를 어둡게 만드는 기술. 딱히 이름이 있진 않았지만, 아겔은 이것이 ‘권능’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악마만이 가질 수 있는 권능 말이다.
거점을 공략할 땐, 그 자리에 있는 전원의 시야를 어둡게 했지만, 지금은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약 기운도 거의 없으니, 아겔의 체력이 허락하는 한 반경 100미터 정도에만 권능이 적용된 듯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파멸적이었다.
-아, 안 보여……!
-쏘지 마! 아군을 공격할 수도 있다!
-끄아아아악……!
권능에 당한 자들은 사방으로 흑마법을 날렸고, 눈이 멀지 않은 자들은 당황한 기색으로 자신에게 날아오는 흑마법을 피해야만 했다.
“할아버지……?”
아겔의 곁으로 세로가 다가왔다.
세로 또한 권능에 시야가 어둡게 물들었지만, 더듬거리거나 비틀거리지 않았다. 아직도 눈이 보이는 것처럼.
“오냐.”
“세상이 어두워요…… 그, 근데…… 보여요.”
“그래. 앞이 보이면 길을 뚫거라.”
세로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앞으로 달려 나가 흑마법사들을 해치우면서도 따라오는 아겔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보여요……?”
세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모르지만, 주변에 있는 자들이 시야를 잃은 건 아겔이 한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아겔이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어둠을 걷는 자들. 그들은 앞이 어딘지 알고 있다. 소년의 마음속에 궁금증이 솟아나는 것도 당연했다.
눈에 붕대를 감았지만, 아겔이 사실 앞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 말이다.
전장의 소음 가운데에 있었지만, 세로는 아겔의 메마른 목소리를 선연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난 아주 오래전에 빛을 잃었단다.”
“…….”
“빛을 잃은 사람은 앞을 볼 수 없는 법이지. 하나 볼 수 없다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중요한 건 보느냐, 못 보느냐가 아니란다.”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아겔이었지만, 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모르겠지만, 언젠간 이해할 날이 오리란 걸 알았기에.
두 사람이 앞으로 내달린 짧은 순간.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의문이 들 때쯤, 세로가 입을 열었다.
“거의 다 왔어요……! 피라미드가…… 우웁……! 우웩……!”
세로는 달리다 말고, 허리를 숙여 구역질했다.
아겔도 멈춰 서서 피라미드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역겨운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에 피라미드가 있단 걸.
그리고 악마의 힘을 불러들이는 다르키스도.
아겔이 단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먼저 가 보마. 안톤과 함께 있거라. 몸조심해야 한다.”
“하, 할아버지!”
늙은 죄수는 소년을 두고 피라미드를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