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80)화 (81/186)

80화 악마숭배자 (4)

다르키스는 지금 이 상황에 부조리함을 느꼈다.

저 노망난 늙은이의 골통을 부수기 직전, 갑자기 이런 생뚱맞은 곳으로 끌려왔다. 이곳에서 아겔은 완전히 멀쩡한 모습이라는 게 더욱 불길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가 그의 심령을 잠식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분명 아겔은 ‘내면’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다르키스 자신의 마음속이란 말인가.

고개를 숙이니 바닥은 끝이 없는 어둠이었다. 마치 별빛이 말살된 우주 어딘가에 와 있는 것만 같은 느낌.

한 걸음 내디디면 저 어둠 속으로 추락할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다르키스는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다가오는 아겔을 향해 손을 들었다.

“가까이 오지 마……!”

흑마법조차 발현할 수 없었다. 그저 아겔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하는 자신.

다르키스는 아겔을 향해 뻗어진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내, 내가…… 이 다르키스가 두려움을 느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잠식한 감정이 두려움임을 깨닫고 분노했다.

“확인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지금 당장 널 죽이겠다……!”

다르키스가 겨우 발걸음을 떼 아겔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르키스의 몸을 통과해 버렸다.

다르키스는 아겔에게 아무런 상해를 입힐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했다.

“말도 안 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자네가 느끼는 부조리함을 이해하고 있다네. 늙은 몸으로 고독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재주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상대방 내면 속으로 침투하는 이 능력도 어둠에게서 받은 ‘권능’이었다.

세로에게 해 준 것과 똑같은 권능.

이곳에서 그는 어둠을 걷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도, 혹은 어둠 속에 영원히 상대방을 유폐할 수도 있었다.

강인한 영혼일수록 쉽지 않긴 하지만.

아겔이 덤덤하게 말했다.

“자네는 분명 악마와 거래했다고 말했지. 그럼 아래를 바라보게.”

다르키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닥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저곳엔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신을 영원히 집어삼킬 그런 어둠이.

“다, 닥쳐…….”

“정말 악마와 거래했다면, 저 아래에서 악마가 기다리고 있었을 걸세. 자네의 영혼을 포식할 때만을 기다리면서 말일세.”

아겔은 악마와 거래한 자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바키아의 경우만 해도 명확했다. 그녀는 악마와 거래했고, 그 대가로 영혼이 붙잡혀 저 아래의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

‘악마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던 시간도 얼마 되지도 않았지.’

악마와 거래하는 건 굉장히 비효율적이었다. 바키아는 악마에게 받은 힘으로 짧게나마 상급 죄수처럼 강한 힘을 내었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공좌는 인내심이 없다네. 강한 힘을 내어 준 만큼 금방 대가를 받아 가지. 저 어둠 속에서 기어 올라와 자네의 영혼을 사로잡고 다시 끝없는 어둠으로 끌고 갈 테야.”

“닥치라고!”

다르키스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아겔은 벌벌 떠는 다르키스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가 보기에도 다르키스는 한심해 보였다.

상급 죄수는 산 하나는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산을 무너뜨릴 만한 힘을 가지면 뭣하겠나.

저 가련한 영혼은 힘에 취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정신은 나약함의 극치였다.

‘하긴, 어둠 앞에서 모든 인간이 똑같을 테지.’

다르키스라 여태껏 버틸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라이칸스로프의 왕, 탈라할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보고도 멀쩡했다.

조금 공포를 느낄망정 탈라할을 주저앉게 만들 순 없었다.

‘그게 다르키스와 탈라할의 차이겠지.’

다르키스는 떨었고, 탈라할은 당당했다.

겨우 몇 급수 차이였지만, 두 사람이 가진 정신력의 고하를 여실히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아겔이 다르키스에게 다가갔다.

노인의 얼굴을 마주한 다르키스가 흠칫 떨었다.

“몇 가지 물어봄세. 지금 주술사는 어디에 있는가.”

“모……른다. 그분은 오직 목소리로만 속삭이신다.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쯧.”

아겔은 혀를 찼다.

역시 주술사는 철두철미하다. 교활하고 항상 고독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긴다. 수하들에게 자신의 거처를 알리는 법이 없었다.

주술사는 오래전부터 아겔의 목숨을 노려 왔다.

까마귀 코르브스가 주술사와 대치하고 있지만, 코르브스조차 주술사의 위치를 알지는 못할 정도였다.

아겔 또한 고독의 모든 길을 알고 있었지만, 주술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독은 행성 감옥인 만큼 굉장히 넓었고, 주술사는 자신의 거취를 감추는 데 이골이 난 놈이었다.

아겔이 이어서 질문했다.

“번제가 끝난 다음은 뭘 하라고 지시했지?”

“특별한 지시는 없었다…… 번제가 끝나면 확실하게 상급 죄수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지. 그럼 개방 때, ‘산 너머’로 찾아오라고 하셨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지…… 난 번제가 끝나면 널 잡아서 산 너머로 데려가려 했다.”

아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술사가 원하는 건 여전히 ‘제물’이었다.

자신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 줄 제물. 그 악귀 같은 인물은 강해진 다르키스가 찾아가면 흡수할 속셈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겔은 주술사를 방해하는 데 성공했다.

다르키스를 사로잡았고, 악마숭배자는 다르키스가 없다면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아겔은 이젠 ‘방해’ 수준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원흉을 처단한다.’

주술사란 고독의 한 기둥. 그 기둥을 제거해야만 오래된 갈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아겔이었다.

더 이상 어둠 속에 숨어 도망만 다니진 않으리라.

‘어차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생각에 빠진 아겔을 보고 다르키스가 입을 열었다.

“넌…… 도대체 누구냐. 누구냔 말이냐. 누구길래 이런 힘을…….”

“나 말인가.”

다르키스가 애원하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나도 네 질문에 답했다. 그러니 너도 답해라. 부디 말해 다오. 너는 누구냐…….”

아겔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수지가 맞지 않네. 자네가 답해 준 것 따위론 내 정체를 말해 줄 순 없다네.”

“빌어먹을…….”

감정이 격해진 다르키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냐……!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당장 너의 머리통을 부숴서……!”

다르키스의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아겔은 발작하며 격정을 터뜨리는 다르키스를 바라보다가, 문득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어둠 너머에서 느껴지는 사이한 기운. 아주 오래전부터 느껴 봤던 익숙한 불쾌함이었다.

‘이런…….’

화륵……!

다르키스의 몸 전체가 푸른 불꽃으로 확 타올랐다.

“커헉……! 끄아아아악……! 아, 아파……! 꺼 줘……!”

불꽃에 타는 영혼이 어둠 속을 뒹굴었다.

아겔은 말없이 그 장면을 보고만 있었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저 영혼 하나가 스러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르키스가 타오름에 따라 주변을 감싸고 있는 어둠에도 불이 붙었다.

푸른 불꽃은 모든 것을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탐욕스럽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갔다.

불꽃은 무참하게 다르키스의 기억, 감정, 그리고 빛바랜 색채들을 짓밟고 태웠다.

아겔은 자신을 향해 타오르는 불길을 피해 발걸음을 옮겼다.

곧 재조차 남기지 아니하고, 다르키스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

“…….”

아겔은 사라져 가는 다르키스의 내면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다르키스의 육체는 혼이 떠나 피라미드 위에 쓰러져 있었다.

“쯧.”

곧 피라미드가 요동쳤다. 주인을 잃어버린 괴륙은 피라미드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쿠르르르르르르르……!

아겔은 무너져 내리는 피라미드에서 살점을 타고 안전하게 땅에 착지했다.

솨아아아아아…….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 사이로 아겔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엔 누군가의 얼굴과 같은 먹구름의 형상이 있었다.

아겔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먼.”

[…….]

아겔은 느끼고 있었다.

저 먹구름을 통해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이번에도 실패한 기분은 어떤가.”

[아겔라스토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직 아겔에게만 전달되는 목소리였다.

* * *

“이번에도 보험을 들어 놨구먼. 다르키스의 영혼에 수작질을 부려 놨어.”

[그거야 당연하다.]

주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오직 아겔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 저쪽에서 아직 싸우고 있는 흑마법사들과 안톤 일행에겐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목소리조차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아쉽게 되었구먼. 자네가 먹을 건 내가 부숴 버렸다네.”

아겔은 일부러 주술사를 도발하려는 것처럼 말했다.

[날 자극하려는가.]

쿠르릉……!

하늘의 먹구름을 뚫고 번개가 쳤다.

번개를 통해 그의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아겔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화가 난다면 날 찾아오지 그러나.”

[애쓰지 않아도 곧 죽여 줄 테니 재촉하지 마라.]

“산 너머의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나 보구먼. 전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

아겔이 있는 이 정글은 ‘산 너머’와 거리가 있는 곳이었지만, 그는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주술사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곧 네가 아끼는 까마귀도 찢어 죽이고, 너도 죽일 테니.]

“허세가 심하구먼. 그 말만 25년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일세. 이쪽 입장에선 애송이가 나불거리는 것도 지겨울 지경이야.”

[입 닥쳐라…….]

콰릉……! 콰르르릉……!

자줏빛 번개가 정글을 울렸다.

주술사의 감정을 대변하는 번개는 한동안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아겔은 번개 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닥쳐야 할 건 내가 아닌 것 같구먼…….”

[네가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2년? 1년? 아니, 3개월만 있으면 넌 시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겔은 주술사의 저주 섞인 말을 듣다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괴륙에게서 얻은 구슬의 파편이었다.

“이건 아마 자네가 다르키스에게 준 것이겠지. 고독의 물건이 아닌 듯한데, 어디서 가져온 겐가.”

먹구름이 웃음소리를 내었다.

[너를 막고자 하는 게 나 하나뿐이겠느냐. 그건 외계(外界)의 분들이 내어 주신 물건이다. 너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분들이지.]

“그거야 자네가 고독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만.”

[그분들은 이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하셨다. 고독에도 개입을 시작하셨지. 넌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어둠 깊숙한 곳까지 널 찾아오실 테니 말이야.]

“밖에 있는 양반들이 날 어떻게 잡는다는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젠 고독 내부에서만 그를 노리는 자들이 있는 게 아니었다. 외부에서도 그를 노리는 자들이 있었다.

아겔은 주먹을 쥐었다.

“시간은 가고 있다네, 주술사.”

쿠르르르르…….

땅이 흔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평원 위로 퍼져 버린 피라미드의 썩은 살점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너는 절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내 선물이다.]

꾸르르륵……! 꾸륵……!

살점들이 모여들었다. 다르키스의 시체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

이내 고개를 들어 쳐다보기도 힘들 만한 거대한 덩어리가 완성되었다. 덩어리는 이내 거대한 4개의 다리를 만들어 우뚝 솟았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

괴륙이 울부짖는 소리에 아겔은 혀를 찼다.

선물치고 너무 더러운 것이었다. 크기도 너무 컸고.

“선물이 아니라 쓰레기를 주고 가는구먼.”

어느새 주술사가 만들어 냈던 먹구름의 얼굴 형상은 사라져 있었다.

아겔은 안톤의 어둠과 바를라의 신성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이걸 혼자 치우긴 귀찮을 것 같았다.

노인은 그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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