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81)화 (82/186)

81화 악마숭배자 (5)

아겔은 안톤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뛰었다.

아무리 싸움이 격하다곤 해도, 아겔을 따라오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괴륙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저, 저게 뭐야!

-다르키스 님의 괴륙이 미쳐 날뛴다!

통제권이 다르키스에게서 주술사에게 넘어간 괴륙은 거대한 몸을 움직여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오직 시체로만 이루어진 역겨운 피조물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흑마법사들도 괴륙의 희생양이 되었다.

-끄아아아악……!

괴륙이 다가옴으로써 안톤 일행과 흑마법사 간의 전투가 중단되었다.

흑마법사들은 사방으로 도망쳤지만, 안톤 일행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괴륙을 보고 있었다.

“어르신……!”

안톤이 아겔에게 다가왔다.

몸을 살피려는 것을 물리치고 아겔은 바를라에게 다가갔다.

성자는 무릎을 꿇고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런…… 성역을 선포하려는구먼.’

이렇게 긴 기도문을 외운다는 건 성역을 선포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어느새 수인 무리를 데리고 돌아온 쿠라스크가 소리쳤다.

“이런 씨발……! 아직도 기도 안 끝났냐? 거 성좌란 놈은 귓구녕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는 길길이 날뛰었다.

“저거 안 보여, 종교쟁이?! 여기서 부흥회 안 끝내면 전멸이야! 얼른 가자고!”

쿠라스크는 당장 도망가자고 주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흑마법사들을 마구 집어삼키는 괴륙의 모습은 장난이 아니었다.

크기만 해도 윌리엄이 소환했던 시체 골렘보다 2배는 더 컸다.

끔찍한 재생 능력을 갖추었고, 거기에 주술사가 통제권을 쥐고 있기도 했다.

쿠라스크의 외침에도 바를라는 잠깐 눈을 떠 괴륙을 살폈다가, 다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 모습에 쿠라스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야이, 새끼야! 내 말 안 들려?!”

슥.

쿠라스크가 더 날뛰기 전에 그를 제지하는 손길이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자, 아겔이 주름진 손으로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소란 떨 것 없네. 여기서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하는 건 바를라가 분명하구먼. 그가 기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게.”

아겔의 말에 쿠라스크가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뭐? 현명해? 우릴 저 괴물 아가리로 넣는 게 현명한 거냐?!”

“자넨 성역의 의미를 잘 모르니까 그런 게지.”

아겔은 신성력이 느껴지는 바를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 쏟아지고, 상황도 급한지라 쿠라스크는 잘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아겔은 바를라가 내뿜는 신성력의 힘을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주변 땅이 전부 새하얀 느낌이구먼.’

이 악마의 기운이 잔재처럼 남은 공간에서도 바를라가 서 있는 중심으로부터 땅이 신성력으로 가득 찼다.

얼마 안 있으면 성역이 선포될 것이다.

“바를라가 선포하는 성역은 불가침의 영역이라네. 반대되는 기운은 절대로 침범할 수가 없지.”

만약 다르키스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바를라가 선포한 성역을 깨뜨리려면 꽤 분투해야 할 것이다.

“믿고 기다리게.”

아겔의 말에 안톤이 침묵으로 긍정했고, 세로도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본 쿠라스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탱이가 없네…… 알겠어! 대신 성역이고 뭐고 저놈이 쫓아오면 난 도망칠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땅은 받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아겔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여기서 도망치면 정글의 땅을 내어 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쿠라스크가 부들부들 떨었다.

“자꾸 치사하게 나올 거야, 영감?”

“나이 먹으니 이런 게 재밌어서 말일세.”

“제기랄……!”

쿠라스크는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아겔 일행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들과 같이 있는 게 살아남을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을 말이다.

쿵……! 쿵……!

괴륙은 거대한 몸뚱이를 이끌고 평원을 돌아다니며 생명이 있는 건 무엇이든 집어삼켰다.

특히 살아 움직이는 건 끝까지 쫓아갔다.

흑마법사들의 능력으로는 괴륙을 쓰러뜨릴 수도, 놈에게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쿠오오오…….”

온몸에서 살점과 뼈로 이루어진 기다란 촉수가 흘러나와 흑마법사들을 집어 갔다.

놈은 한참이나 그렇게 흑마법사들을 섭취하다가, 이질적인 기운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겔 일행이 있었다.

놈이 자신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쿠라스크가 중얼거렸다.

-X됐네, 시발…… 그러게 도망가자니까…….

안톤이 말했다.

“놈이 우릴 발견했습니다, 어르신.”

“알고 있다.”

아겔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괴륙의 덩치에 비하면 흉기의 반열에 들지도 못할 크기였지만, 그는 왠지 단검을 들면 마음이 편해졌다.

“기도가 끝날 때까지 놈을 막도록 하지.”

아겔의 짧은 명령에 안톤과 세로가 전투를 준비했다.

쿠라스크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일단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씨부럴…… 근처에서 바위 좀 찾아와! 아니면 뭐든 던질 만한 거라도!”

“"예, 대장!"”

시작은 안톤이었다.

전투 망치를 움켜쥔 안톤이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한참 높이 떠오른 안톤을 땅에 전투 망치를 내리찍으며 땅을 박살 냈다.

콰아앙-!

연이은 전투로 힘이 빠질 법했지만, 안톤의 괴력은 땅을 가르기에 충분했다. 박살 난 땅은 괴륙의 이동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

세로는 안톤을 따라다니며 그가 땅을 박살 내는 것을 보조했다. 안톤을 향해 날아오는 촉수를 날카로운 손톱으로 잘라 내었다.

쿠라스크는 수인들과 함께 평원에 널브러진 움막의 잔해나 바위들을 던져 괴륙을 막았다.

“쿠오오오……!”

괴륙이 다가오는 속도가 느려지긴 했지만, 놈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아겔은 바를라의 곁에 서서 그를 보호했다.

살아남은 흑마법사 몇몇이 바를라를 노리고 공격을 가해 왔지만, 모두 아겔에게 역공당했다.

이제 평원에 남은 흑마법사는 채 수백을 넘기지 못했다. 그 많던 흑마법사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이다.

‘나중에 도망간 놈들을 잡긴 귀찮겠구먼.’

아겔은 정글에 흑마법사를 하나도 남겨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개방이 돌아올 때마다, 주기적으로 정글을 청소해야 할 듯했다.

괴륙과 안톤 일행의 대치는 길게 이어졌다.

놈은 신성력을 내뿜는 바를라를 향해 정확히 다가왔다.

“쿠오오오……!”

쿠라스크가 소리 질렀다.

“씨발, 이제 한계야! 더 이상 못 막는다고! 기도 안 끝났어?!”

아겔은 잠시 바를라의 신성력을 가늠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안 남았다네.”

“이런 제기랄……! 저 괴물 새끼는 진작에 식기도를 마쳤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기도할 생각이냐!”

슥.

쿠라스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를라가 눈을 뜨고 일어섰다.

더러워진 하얀 사제복이 비와 바람에 펄럭였다.

“기도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성자는 땅을 향해 손을 폈다.

“성역이여. 우릴 보호하라. 프레디카티오 생츄어리.”

그 순간, 바를라의 손이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새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아앗……!

그의 손으로부터 발생한 빛은 땅에 가라앉은 신성력을 자극했고, 곧 그를 중심으로 흑마법사의 평원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에 어둠의 기운을 내뿜는 흑마법사들이 타올랐다.

-끄아아아아아악……!

-누, 눈이! 눈이 안 보여……! 내 누우우우우운!!

-사, 살려 줘! 너무 밝아……!

악마숭배자들은 눈이 멀고 몸에 품은 기운이 정화의 화염으로 타올랐다.

괴륙도 예외는 없었다.

악마의 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는 괴륙은 고통스러운 듯 그로테스크한 전신을 꿈틀거렸다.

“쿠오오오오오……!”

놈은 이전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안톤과 쿠라스크가 막아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바를라의 외침에 안톤 일행이 돌아왔다.

안톤은 바를라 가까이 도달하자마자 답답한 숨을 골랐고, 세로는 무릎을 꿇었다.

“끄응…….”

“헉헉…… 다, 답답해요…….”

아겔의 어둠을 이어받은 그들은 답답함을 호소했지만, 늙은 죄수는 멀쩡하게 서 있었다.

쿠라스크와 수인들도 돌아와 자신의 몸이 저절로 치유되는 기적을 보았다.

“이, 이게 성역이란 거냐?”

“예. 늦은 만큼 가치가 있는 권능이죠.”

“지, 진짜네…….”

빛과 어둠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수인들은 성역 안에서 회복을 경험했다.

지친 그들에게 새로운 활력이 느껴졌고, 다시 싸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젠장, 그래도 저놈은 안 죽잖아.”

쿠라스크의 말에 괴륙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괴륙은 성역 선포에 의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아직 소멸된 건 아니었다.

바를라가 입술을 씹었다.

“대신 놈도 우릴 건드릴 수 없을 겁니다.”

“도망치면 어쩌려고. 저거 도망치면 답도 없어.”

“그건…….”

말문이 막힌 바를라에게 아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이 도망칠 일은 없네. 뒤늦게 도착한 친구가 있어서 말일세.”

“예……?”

아겔의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발사하라……!”

저 멀리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평원에 흑마법사와 아겔 일행이 아닌 다른 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전부 바를라와 비슷한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바를라는 그들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과, 광신도?”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찾았건만, 이제야 나타나는구먼.”

평원 한쪽에 나타난 광신도 집단. 그들은 모두 광신도 이오베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이오베는 사제 수백 명을 데리고 괴륙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피로 물든 하얀 사제복을 입은 이오베는 손에 메이스를 들고 있었다.

“담나시오 피데이.”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핏자국이 선연한 메이스가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수백의 사제는 그를 보조하기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에 이오베의 몸에서 성역을 선포했을 때와 비슷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있어선 안 될 끔찍한 피조물아. 무로 돌아가라.”

이오베는 무릎을 꿇은 괴륙을 향해 뛰어올랐다.

빛과 피를 가득 머금은 메이스가 괴륙의 머리를 산산조각을 냈다. 그와 동시에 빛이 어두운 기운을 불태우며 평원이 진동했다.

쿠구구구구……!

* * *

싸움이 끝난 악마숭배자의 평원.

평원은 엉망진창이 된 모습이었다. 비가 그친지도 얼마 되지 않아 근처가 피와 진창으로 범벅이었다.

흑마법사들이 살던 움막은 하나도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더럽고 역겨운 괴륙의 잔해는 잿더미가 된 모습이었다.

숲 사이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평원에 가득한 피 냄새를 실어 날랐다.

아겔은 평원 한쪽에 앉아 안톤이 해다 준 고기를 뜯고 있었다.

으적.

쿠라스크는 그게 넘어가냐는 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겔은 개의치 않고 식사했다.

저벅.

평원에 가득한 어두운 기운을 전부 말살한 이오베가 아겔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앉게.”

이오베는 부러진 통나무에 걸터앉았다.

“우선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이번엔 저희가 처리하고 싶었지만, 어르신께서 선수를 치셨습니다.”

“나이를 먹더니 이 늙은이보다 굼떠진 겐가, 이오베?”

“허허, 그런 셈이죠.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알면 되었다네.”

이오베가 넉살 좋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겔은 손을 휘휘 저을 뿐이었다.

쿠라스크는 눈이 땡그래진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오베는 말 그대로 미친 신자. 성좌를 믿지 않거나 그들의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자들은 무참히 학살하는 살인마였다.

그런 그가 아겔에겐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쿠라스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광신도라고 했지?”

“그런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더군. 그쪽은 약탈자 소속의 ‘송곳니’가 아닌가.”

“이젠 약탈자 아니야…….”

이오베는 조금 놀랐다는 듯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군…… 그래서 영감님과 함께 있었던 거였군.”

쿠라스크는 이오베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이오베는 큰 몸집은 아니지만, 중후한 느낌을 내는 남자였다. 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쿠라스크는 껄끄러운 감정을 느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

“난 그닥 반갑진 않은데…….”

“내 소문을 들으신 모양인데, 걱정하지 마시오. 영감님의 지인에게 손댈 생각은 없으니.”

쿠라스크는 이오베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하는 이오베의 눈이 무언가로 번들거렸기 때문이다.

‘그럼 영감이 아니었다면 건드렸을 거란 소리인가?’

이오베와 쿠라스크는 같은 6급에 수백의 수하를 거느리고 있는 집단의 수장이었다.

부딪치면 곱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아겔이 말했다.

“왜 이리 늦은 겐가.”

“사정이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찾아온 분들이 있었습니다.”

“바다라.”

이오베의 손짓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엔 검은 갓을 쓰고 더운 정글에서도 홍색 철릭을 입고 있는 한 여자였다. 그 펄럭이는 장복은 마치 규율을 상징하는 듯했다.

어깨엔 죽(竹)으로 만든 활을 메고 있었고, 잘 만들어진 검을 들고 있었다.

“강녕하십니까, 어르신. 려홍(旅紅)입니다.”

그녀는 아겔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행동과 말에는 강직한 절도가 있었다.

거친 고독에서 살아온 태가 나는 여자였다.

아겔은 그녀를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령(威領)이 보내서 왔느냐.”

“예. 광신도를 따라 정글에서 악마숭배자들을 몰아내는 것을 도우라 하셨습니다.”

아겔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정말 도우라 했느냐.”

“그렇습니다.”

“내 땅을 탐하러 온 게 아니고?”

려홍의 고개가 들리며 커진 눈망울이 드러났다.

“내 땅…… 말씀이십니까? 설마…….”

아겔이 앉아 있던 통나무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려홍에게 다가가 쓰고 있는 갓에 주름진 손을 올렸다.

“이제부터 정글은 내 땅이다. 알겠느냐. 누구도 나의 땅에 간섭할 수 없다.”

“…….”

려홍은 잠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벼운 손길에서 무거운 정적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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