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정글의 주인
려홍(旅紅).
그녀는 고독에서 태어난 몸이었다.
고독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누군가 임신하고 출산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교도관은 그런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곳은 평범한 사회보다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극악에 가까우니까.
남녀 간에 정이 생기는 것도 고통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교도관들도 있었다.
왜 내버려 두는지 아무도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진 못하지만.
그녀는 두려웠다.
려홍은 어렸을 적, 단 한 번 아겔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이자, 고독의 기둥인 활녀당(活女黨)의 주인, 위령을 따라 고독을 방랑할 때였다.
그녀는 아겔을 처음 만났을 때의 두려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소문으로 알음알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그를 만나고 어린 그녀의 가슴 속에 남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죄수들을 모조리 죽인 사람…….’
아겔이란 사람이 누군가 알기 위해 찾아갔던 죄수들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그녀는 그때의 악몽 같은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원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정글을…….’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그가 정글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은 이유가.
려홍은 긴장을 억누르고 말했다.
“그럼 정글은 이제부터 어르신께서 다스리시는 겁니까?”
“그래야지.”
가볍게 답하는 아겔.
려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 때마다 오게 되는 이 ‘대륙’에선 영역의 의미는 굉장히 중요하다.
특히 정글은 생명의 보고.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지만, 한 영역을 취했다는 건 고독의 기둥이 될 만한 위치에 올랐다고 볼 수 있었다.
‘산 너머’에 있는 상급 죄수들도 수하들을 통해 ‘대륙’에 영역을 두고 자원을 수급한다.
정글이란 어마어마한 규모의 영역이 아겔의 소유가 되었으니, 그가 상급 죄수의 위치와 다름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글을 영역으로 선포했으면, 지켜 낼 자신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어머니껜 일이 틀어졌다고 전해야겠구나.’
그녀는 자신을 따라온 수많은 여전사들을 돌아보았다.
이들은 모두 ‘바다’에 거주하는 활녀당의 전사들. 그동안 정글을 접수하고 있던 악마숭배자들을 몰아내고 이 땅을 차지해 보기 위해서 온 것이었지만, 이젠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아겔이 주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려홍은 애써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도록 하겠습니다. 이곳 정글은 어르신의 영역이란 것을 확인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었다는 걸 퍼뜨리든 말든 네 자유지만, 귀찮은 일이 일어난다면 너희 활녀당, 그리고 위령에게 책임을 묻겠다.”
“……알겠습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잘 처신하겠습니다.”
려홍은 고개를 숙이고 일어났다.
‘먼 길을 왔는데, 그냥 돌아가야 하다니…….’
허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려홍이 여전사들을 데리고 떠나려 할 때, 아겔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물 생각 없이 바로 떠날 건가?”
“예?”
“개방도 사흘 후면 끝나지, 다음 개방 때 돌아가는 게 어떠하느나. 어차피 다 도착하지도 못하고 감방으로 돌아갈 터인데, 쉬고 가도 상관없다.”
“아…….”
손님으로 대접하겠다는 말에 려홍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신경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런 시원하고 솔직한 성격이 위령을 닮았구나.”
“…….”
려홍은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도 없는 그가 딱 한 번 만났을 자신을 말이다.
아겔은 아는 죄수들 사이에선 워낙 유명했지만, 그가 자신을 알아보리라곤 생각지 못한 려홍이었다.
아겔이 말했다.
“대신 하나만 부탁하지.”
“말씀하십시오.”
“여기서 도망친 흑마법사들이 있다. 정리를 부탁하마.”
려홍이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갈 처지였지만, 아겔과 접점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라고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절도 있게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깔끔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시간은 사흘이니 쉬엄쉬엄하거라. 나머진 나를 좀 보지.”
아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곁에 서 있던 자들도 움직였다.
무기술사 안톤, 죄를 지은 성자 바를라 하돌라, 백작 인듀라스, 광신도 이오베, 송곳니 쿠라스크가 그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하나하나 걸출한 중급 죄수들. 려홍도 6급 죄수였지만, 저들 중 1 대 1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성자는 전투에 특화되진 않았다고 해도, 그 능력은 려홍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같은 급수라고 쉽게 비빌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려홍은 아겔을 필두로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독의 어둠이 활동을 시작했구나.’
이 행성 감옥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 태동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전하면 무슨 말을 들을지 기대되었다.
지혜로 모든 일을 꿰뚫어 보던 그녀가 이번에야말로 한 번쯤 말문이 막히지 않을까 하는 얕은 기대가 말이다.
* * *
아겔은 5명의 중급 죄수와 자리를 가졌다.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가져야 했다.
아겔이 말문을 열었다.
“자네들을 불러 모은 이유는 간단하네. 큰일을 마쳤으니, 논공행상의 자리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네.”
기다리던 이야기가 나오자, 쿠라스크가 눈에 띄게 반응했다.
“나 안 도망쳤어, 영감. 나와 거래한 것 잊지 않았지?”
그는 끝까지 아겔을 따라 싸웠음을 어필했다. 아겔은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도 아니었으니까.
아겔은 구차한 말은 건너뛰고 바로 본론을 말했다.
“맡기는 형식으로 하지. 쿠라스크, 자넨 정글 동쪽을 다스리게.”
팔짱을 끼고 있던 쿠라스크의 팔이 풀어지며 눈이 커졌다.
“무, 뭐……? 설마 동쪽 전체 말하는 거야?”
아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지, 진짜?”
“속고만 살았는가. 하긴 약탈자였으니.”
“어…… 어어…….”
쿠라크스는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보상에 잠시간 어버버했다.
정글은 넓다. 아니, 넓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광활하다. 정글에 처음 떨어진 죄수는 길조차 알 수 없는 미로로 느껴질 것이다.
그만큼 넓은 정글의 동쪽 구역을 통째로 비스트 클랜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그, 그럼 동쪽이 우리 구역이란 거야?”
“거기서 살도록 하게. 문제 있나?”
“아, 아니……! 전혀 없어! 너무 좋아! 진짜 오랜만에 좀 행복한 것 같네.”
어마어마한 크기의 땅을 맡게 된 쿠라스크는 희희낙락했다.
사실 그가 희생한 바도 적지 않았다. 악마숭배자와 싸우느라 수하들이 희생되었고, 하나하나 쿠라스크가 아끼는 녀석들이었다.
수하들의 목숨값이라고 말하긴 뭐했지만, 아겔이 생각했을 땐 이 정도가 알맞았다.
아겔의 고개가 다음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곳엔 이오베가 앉아 있었다.
“자네의 공은 그리 크지 않구먼.”
“인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주지 않으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럴 수야 없지. 이 넓은 땅을 나 혼자 어떻게 간수하겠나. 자네가 북쪽을 맡지.”
원래 이오베는 아겔이 정글을 영역으로 삼으리라곤 알지 못했다.
활녀당의 도움을 받아 악마숭배자들을 몰아내려 한 것이었지만, 정글은 아겔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전혀 부정할 생각도, 이 과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도 없었다.
아겔이 한다면 그는 당연히 따를 생각이었다. 애초부터 이오베는 아겔과 한배를 탄 사이였으니.
미소를 지은 광신도는 앉은 자리에서 한껏 허리를 숙여 아겔에게 감사를 표했다.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그러게. 그리고 남은 두 사람.”
성자 바를라와 백작 인듀라스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지는 상황상 바를라도, 인듀라스도 정글에서 살게 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서로를 껄끄러워하는 사이였다.
하나는 성좌를 따르고, 하나는 공좌를 따르니.
바를라가 말문을 열었다.
“흐흠…… 어르신. 백작에게도 땅을 주실 셈이십니까?”
성자의 말에 백작이 바로 입을 열었다.
“내가 영감에게 땅을 받는 게 못마땅한가? 난 충분히 값을 치렀다.”
“…….”
바를라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탐식의 공좌를 따르는 인듀라스는 바를라와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자이니.
그가 맡게 될 땅의 죄수들이 고통스러워할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겔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강요하는 것보다 허접한 일이 없지. 내 말 이해하는가, 바를라.”
“물론…… 입니다.”
“각자 맡은 구역에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하지. 이의가 있는가.”
“없습니다.”
아겔의 말에 다른 죄수들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토를 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묵묵히 생각하던 성자도 나름의 결론을 내리긴 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여 바를라는 남쪽, 인듀라스는 서쪽을 맡게 되었다.
아겔이 말했다.
“이제 정글은 내 땅일세. 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이에게 허투루 대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네.”
아겔의 말에 땅을 맡은 죄수들이 각자 말을 덧붙였다.
“이상한 거 들어오면 찢어 먹을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영감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르신.”
“침입자는 골수까지 빨아먹겠다.”
아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야기는 마치는 것으로 하지.”
자리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워낙 직설적인 아겔의 성격 때문에 구차하게 공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각 죄수는 자신의 서클을 데리고 맡은 구역을 향해 돌아갔다.
안톤만이 아겔의 곁에 남았다.
아겔이 물었다.
“네게 땅을 주지 않아서 속상하진 않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 어르신 곁에 남아 있는 것으로 차고 넘칩니다.”
“끌끌, 예나 지금이나 그릇이 소박하구나.”
“꿀 담을 크기만 되면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안톤의 농담에 아겔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안톤이 배낭을 가져와 꿀단지를 꺼내 챱챱 먹었다.
곰 수인은 욕심이 없었다.
아겔은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생길 일들에 대처하려면 안톤과 같은 사람을 곁에 두는 게 알맞을 것이다.
‘귀찮은 일이 많겠지만, 내가 선택한 것이니.’
고독의 거대한 영역인 ‘정글’을 차지했으니, 날파리들이 하나둘 꼬이기 시작할 것이다.
정글은 약자에겐 지옥이나, 강자들에겐 정말 꿀과 같은 곳이니까.
‘어떤 놈이 걸려들지.’
상급 죄수들은 고독의 영역을 탐한다. 그 중 아겔을 적대시하는 놈들도 있다.
정글을 차지한 것은 놈들을 끌어들이고, 반격을 가하기 위한 발판이나 다름없었다.
아겔은 비가 그친 정글의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비의 비린내가 나는 정글이었지만, 하늘은 화창했다.
‘바빠지겠구먼.’
사흘 뒤, 길고 긴 개방이 끝났다.
* * *
“세상에 맙소사…….”
5급 간수 호게스는 자신이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닌가, 눈을 싹싹 비볐다.
그러나 기계는 거짓말하지 않는 법. CCTV로 그가 보고 있는 건 선명한 현실이었다.
“내가 죽을 때가 다 되었나……?”
호게스는 간수 중에서도 아겔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렇기에 그는 겨우 5급 간수임에도 불구하고 꽤 다양한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아겔을 감시하는 일조차도 그에겐 즐거운 일이었다.
이 노인은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만 보여 주니.
그런데 이번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겔 영감이 정글을 차지했으니, 이제 어떻게 한담…… 진짜 피바람이라도 한번 부는 거 아닌가……?’
원래는 상급 죄수인 주술사가 부리던 악마숭배자들의 영역이 아겔에게 넘어갔다.
상급 죄수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개방 때에는 ‘산 너머’에 있긴 하지만, 그들은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산을 넘어 정글을 향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미치려 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불순한 의도로 손을 뻗는 자마다, 그 손이 잘려 나갈 것이다.
손이 뭔가.
아겔이 그 목숨을 사냥할 것이다.
호게스는 머리를 박박 긁으며 이를 갈았다.
“으으…… 이건 바로 보고 드려야 된다. 제기랄…….”
원래 CCTV 근무자인 림몰이 의자에 앉은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다 봤습니까? 감상이 어떠십니까.”
“어. 아무래도 X된 것 같아.”
“그럼 빨리 나가십시오. 일지 기록해야 합니다.”
“잘 적어 놔라. 다이렉트로 서기관님께 갈 거니까.”
“하아…….”
림몰은 선배인 호게스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해야 하는 이 거지 같은 연공 서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 자체는 의외로 그를 들뜨게 했다.
처음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노인이 모르는 죄수와 간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고독에서 어떤 삶을 보내고 있는지, 어느 정도 엿본 림몰은 괜히 아겔이 신경 쓰였다.
림몰이 볼 때 아겔은 언제나 상식을 벗어나는 사람이었으므로. 특출난 사람은 항상 관심 혹은 질투 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림몰의 경우, 전자였다.
CCTV 근무를 설 때마다 아겔을 향하는 카메라를 확인하는 게 은근한 즐거움이 되었다.
요즘엔 싸우고 싸우는 나날을 보내는 아겔이었으니, 림몰의 입장에선 보는 맛도 있었다.
“하여튼 얼른 나가십시오, 선배.”
“젠장, 알겠다. 오늘 근무 끝나고 맥주 한잔?”
“일지 다 쓰면 갈 테니까 딱 기다리십시오.”
“오케이.”
달칵.
호게스가 CCTV실에서 나갔다.
한숨을 쉬고 잠시 멍하니 있던 림몰은 이내 모니터에서 일지를 불러왔다.
“다 좋은데, 일지 쓰는 건 귀찮네…….”
그는 독수리 타법으로 천천히 일지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죄수명: 아겔라스토스, 성별: 남]
[급수: ?, 죄수번호: 51]
[복역 기간: 64년]
[특이사항(6/4)]
[악마의 종, 다르키스를 살해하고, ‘정글’의 실질적인 주인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