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사고 (2)
바다의 ‘항구’.
활녀당이 바다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은 거대한 도시였다.
항구는 근해에서 몬스터를 잡아 식량 삼을 정도로 활발한 곳이었다.
활녀당은 바다의 항구를 중심으로 근처에 있는 모든 죄수를 통제했다.
그들은 살인을 즐기진 않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날뛰는 죄수들을 보고만 있을 정도로 통제력이 약하지 않았다.
멋대로 바다에서 날뛰는 죄수들은 반드시 사살되었다.
그런 항구가 지금은 약탈자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바다에 소환되었어야 할, 활녀당 전사들이 각기 다른 곳에 떨어졌고, 다른 영역의 죄수들이 바다에 떨어졌으니.
항구를 점령한 약탈자 무리를 이끄는 요베는 썩은 이빨로 과즙 가득한 사과를 씹었다.
아삭.
그는 항구를 마음껏 뒤집어 놓는 약탈자들을 보며 씩 웃었다. 그들은 항구에 가득 비축해 놓은 말린 식량을 축내고 있었다.
‘천운이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화산’에 있던 약탈자 중 하나인 그는 바다에 떨어지게 되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활녀당 전사들과 싸워야 했지만, 적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아서 해볼 만했다.
한 번의 승리. 그리고 스멀스멀 풍겨 오는 정복의 냄새.
눈치가 빠르고 지도력이 있는 요베는 근처에 떨어진 다른 영역 죄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곳은 활녀당의 근거지이니, 허락 없이 들어온 것을 알면 사살당할 것이 분명했고, 그걸 모르는 죄수는 없었다.
요베의 설득에 죄수들은 하나로 뭉쳤고, 결국 항구를 습격해 점령하는 것까지 성공했다.
비록 남아 있는 활녀당 전원을 사로잡진 못했지만, 몇몇은 붙잡을 수 있었다.
여자에 미친 것들이 활녀당 전사들을 겁탈하려 했지만, 여전사들은 혀를 씹고 자살해 버렸다.
분노한 약탈자들은 도시를 마구 유린했고, 요베는 그런 수하들을 내버려 두었다.
욕정에 눈이 멀어 대의를 보지 못하는 놈들은 제 하고 싶은 일 하도록 내버려 두면 그만이다.
‘항구를 점령했다. 활녀당이 돌아오기 전에 화산에 연락한다.’
이건 기회였다. 활녀당의 바다를 집어삼킬 기회.
척박한 화산의 땅보단 당연히 풍요로운 바다가 낫다.
그간 동쪽 끝인 화산과 서쪽 끝인 바다 사이에 정글이 있었기에 움직일 수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 바다를 삼킬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약탈자님의 눈에 들 기회다.’
약탈자 무리를 이끌고 있는 진정한, 약탈자.
수십만이 넘는 약탈자 죄수들의 정점에 선 그는 가히 고독의 한 축이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그런 그의 눈에 띄어 곁을 보좌할 수만 있다면, 요베는 기꺼이 개방의 시간을 바다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타닷.
요베의 수하 중 한 명이 다가와 보고했다.
“형님. 밖으로 나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시선을 분산시키고 흩어져도 놈들이 전부 잡아내는 모양입니다.”
“쯧.”
사과를 씹은 요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항구에서 다 잡지 못한 활녀당 전사들이 아직 바다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점령할 때, 놈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퇴로를 차단했어야 했는데, 항구를 무너뜨린다는 생각에 들떠서 그건 생각지 못했었다.
“나갈 준비를 해라. 우리가 나가서 놈들을 사냥한다. 어차피 전력으로 보자면 우리가 우위야.”
요베의 말을 들은 수하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놈들은 이 근방 지리를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괜히 나갔다가 역공을 당하는 건 아닌지…….”
“한 점으로 돌파하면 놈들도 어쩔 수 없어. 만약 기를 쓰고 막겠다면, 전면전으로 가도 상관없고. 그러니까 준비나 해.”
“그래도…….”
수하의 간언이 태클을 거는 것처럼 느껴진 요베는 눈을 더욱 찌푸렸다.
그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그러자 염려스러웠던 수하의 표정이 한순간 멍해졌다.
“아…….”
마치 백치처럼 변한 수하는 방금까지 요베와 대화했던 이성이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네 목을 그어라.”
“예…….”
요베의 명령에 수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그었다.
촤학……!
피가 후두둑 쏟아지며, 수하가 쓰러졌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요베의 눈동자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그는 목이 반 정도나 잘려 죽은 수하를 보고도 잘만 사과를 씹었다.
“큭큭, 역시 약탈자님께서 주신 능력은 유용하단 말이지.”
세뇌.
약탈자의 능력 중 하나였다. 그것도 수하들에게 그 능력의 일부를 나눠 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요베는 약탈자 수장에게 받은 능력으로 이 항구를 점령한 죄수 2천가량도 ‘세뇌’한 참이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겠지만, 요베가 명령만 내린다면 이 수하처럼 당장 제 목을 자를 수도 있는 상태였다.
능력이 잘 통함을 보고 만족감을 느낀 요베는 죄수들에게 명령했다.
“우리가 직접 나간다! 남아 있는 활녀당놈들을 사냥하자!”
-예-!
-잡아서 전부 능욕하자!
죄수들이 의욕적으로 나서자, 요베는 씩 웃었다.
#$^#%&@!!
그도 직접 나서기 위해 준비하고 움직이려는 찰나, 숲 방향으로 난 항구의 동문 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수하 중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형님! 동문이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길게 휘어진 카타나를 허리에 패용한 요베는 소란의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수하 수백 명을 대동한 그는 동문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놈들이 쳐들어왔나? 그럴 리가. 전력 차이가 심하니 우릴 공격하러 오는 건 자살행위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항구 도시 전체에 강력한 주술이 걸린 목책이 둘러 있기에 방어를 뚫기도 어렵다.
요베는 곧 수하들과 동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뭐, 뭐야…….”
동문을 지키고 있던 약탈자 무리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살해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무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목책 사방이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너무나도 이상한 광경이었다.
활녀당이 쳐들어왔다면, 이리 적막할 리가 없고 놈들이 동문 병력만 습격하고 도망칠 리도 없었다.
항구 내로 숨어들 리도 없다. 마을 안쪽은 약탈자 무리가 사방에 퍼져 있으니, 아무리 소수의 인원이라도 들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요베가 수하들을 지휘하려고 했다.
“고브, 발 빠른 놈들을 추려서 목책 바깥을 수색해라. 야쿠, 항구 안쪽을 샅샅이 뒤져라. 놈들이 숨어들어 왔다면, 필시 집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찾아야…….”
지휘를 내리던 요베의 말을 끊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않아도 되네. 난 여기에 있으니.”
!
메마른 목소리에 약탈자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넓은 동문의 공터에 홀로 서 있는 한 노인.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들고 서 있었다.
요베가 빠르게 노인의 행색을 살폈다.
단검에는 끈적한 핏물이 흘렀고, 주변에 쓰러진 수하들은 딱 저만한 단검에 당한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홀로 서 있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기감을 넓혀 사방을 살펴도 오직 저 노인의 이질적인 느낌밖에 나지 않았다.
‘설마 혼자 동문을 뚫었다고? 어떻게?’
요베의 머리가 열이 나며 빠르게 돌아갔다.
그 정도 실력자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6급 죄수라도 이곳을 이리 간단히 뚫을 수는 없다.
주술이 걸린 목책은 적의 침입도 경고하고, 튼튼한 내구력으로 적을 방어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노인 하나가 안에 침입해 약탈자들을 살해하는 데, 몇 분조차 걸리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요베가 침착을 유지하며 말했다.
“넌 누구냐.”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건 내가 자네들의 적이란 사실이지.”
“……”
요베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다를 점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저런 이상한 놈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 없었다.
그가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죽여라.”
-우와아아악-!
-어딜 혼자서 와 가지곤!
-사지를 뜯어 주마, 노인네!
요베의 수하들이 미친 듯이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악몽이 시작되었다. 항구 마을에 있는 약탈자들 전원이 어둠에 잠겼다.
“……!”
눈이 보이지 않았다.
요베는 서둘러 몸을 땅에 닿을 정도로 낮추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누, 눈이 안 보여!
-뭐야! 저주인가! 흑마법사야!
-젠장, 호들갑 떨지 마!
시야를 잃은 건 요베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수하들도 어둠 속에 잠겨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푸욱……!
-커억……!
날카로운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뭐, 뭐야!
-놈이다! 놈이 우릴 공격하는 거야!
-제기랄, 놈을 죽여!
혼란에 빠진 수하들은 저들끼리 공격하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공격은 당연히 서로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동료인지, 적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
요베는 입을 쩍 벌렸다.
‘미친. 이러다간 다 죽는다.’
처참한 살육이 시작되기 전에, 요베가 소리쳤다.
“그만! 공격하지 말고, 꼼짝 마라!”
우뚝.
그의 명령에 그의 모든 수하가 마치 돌덩이가 된 것처럼 굳어 버렸다.
요베는 감각을 날카롭게 해 적의 기척을 찾으려 무던히 애썼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그 이질적인 노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요베는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넌 도대체 누구냐. 흑마법사인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자네도 잘 알 텐데.”
“……”
약탈자들과 동맹 관계였던 악마숭배자는 6개월 전, 한 노인에 의해 전멸했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정글에서 지워진 것이다. 그 소식을 요베도 알고 있었다.
요베의 몸이 덜덜 떨려 왔다.
“그럼 당신은…….”
“날 아는가.”
아겔의 텁텁한 입 냄새가 귓가에서 느껴졌다.
요베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그저 왜 자신이 이 괴물과 맞닥뜨려야 했는지 신을 원망할 따름이었다.
‘젠장…….’
왜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했을까. 아니, 그가 누군지 처음부터 알았다고 해도 뭐가 다르긴 달랐을까.
어차피 그가 마음먹은 이상 여기에 있는 자들은 모조리 죽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요베는 침을 삼키고 노인의 이름을 말했다.
“아겔라스토스…….”
“자넨 약탈자 출신이구먼. 쿠라스크는 내 동네에서 잘살고 있다네.”
약탈자 무리에서 탈퇴한 쿠라스크.
그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아겔의 비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쿠라스크라도 고독에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으리라.
약탈자는 배신자를 가만두지 않으니까.
요베는 속으로 한없는 절망을 느꼈다.
‘다 끝났어…….’
단 한 사람의 등장으로 모든 게 뒤집혔다.
바다를 점령할 계획도, 약탈자 무리에서 수뇌에 들 기회도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들어주겠네. 생각을 정리하게.”
“……”
요베는 이를 꽉 물었다.
어차피 죽는다. 그렇다고 여기서 반항하자니,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소문으로는 아겔은 약탈자의 수장과 버금갈 정도로 악마적인 면모를 지닌 자라고 들었다.
고독의 하급 죄수로 위장하며, 감방의 죄수들을 전멸시키기를 즐기는 살인마.
요베는 마음을 결심하고 아겔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큭큭, 아겔라스토스…… 네가 정글의 주인이 되었다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
“약탈자께서 널 지켜보신다. 언젠간 네 목숨도 약탈하러 오실 테지. 그분이 움직이면, ‘대륙’은 우리 약탈자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요베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얼굴에 비열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말을 마친 요베는 카타나를 뽑아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
“자살해라.”
푹푹푹푹푹푹푹푹푹……!
항구 마을 전반에 있는 그의 세뇌에 걸린 자들이 전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요베도 카타나로 자신의 배를 가르며 창자를 뿜어냈다.
“끄으으으…… 큭큭큭, 이제 너의 긴 명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풀썩.
요베는 말을 마치고 혼이 떠나가 쓰러졌다.
아겔은 차라리 죽음을 택한 요베를 보고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쯧, 오랜만에 운동 좀 하나 싶었더니만.”
그는 어둠의 권능을 사용한 대가로 알약 하나를 씹고 몸을 풀었다.
직접 몸을 움직이고 싶었는데, 자살해 버려서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아겔이 스트레칭이 끝나 갈 무렵, 이궁과 호고가 동문 안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안쪽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방에 깔린 수천 명의 시신. 마치 단숨에 목숨을 잃은 것처럼 기이한 광경이었다.
노인 한 명이 해낸 일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이궁은 처참한 광경을 보고 침묵했고, 호고는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때마침 잘 왔구먼.”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아겔은 이궁과 호고가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궁이 호고에게 말했다.
“전사들을 불러와라.”
“아…… 네, 언니.”
호고가 서둘러 동문 밖으로 나갔다.
이궁은 성큼성큼 걸어가 몸을 푸는 아겔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직 활녀당의 주인인 위령에게만 꿇었던 무릎이 아겔에게도 꿇려졌다.
그는 이궁이 고개를 조아릴 만한 사람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낙월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궁궐도 있는 줄은 몰랐구먼. 알겠네.”
아겔은 몸을 다 풀었다는 듯이 손을 털었고, 이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는다는 듯이 이궁을 따라 슬슬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