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위령 (1)
항구 도시 곳곳에 비릿한 피 냄새가 흘렀다.
요베의 단체 자살 명령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약탈자 무리.
치우는 데 고생 좀 하겠지만, 아겔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다만, 놈이 죽을 때 말했던 약탈자란 이름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약탈자.’
주술사와 더불어 고독의 기둥이 되는 거악.
수많은 약탈자 무리를 이끌며 고독의 정점에 선 그는 수십 년 전부터 확고부동한 위세를 세웠다.
아겔과 좋은 인연으로 엮이진 않았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많지 않지만, 약탈자는 주술사처럼 언제나 아겔을 노리고 있었다.
공동의 목표를 가진 두 거두는 동맹을 맺었고, 때로 협동하여 아겔을 잡으러 오기도 하였다.
단 한 번도 놈들의 손에 붙잡힌 적은 없었지만, 고독의 거두들이 작정하고 쫓아오는 건 아겔로서도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벗어나는 데 꽤 큰 힘을 소모해야 했을 정도이니.
‘주술사를 치면 약탈자, 그 녀석이 가만두고 보지 않을 테지.’
아무리 아겔이라도 독불장군처럼 홀로 주술사를 처치하러 갈 수는 없다.
산 너머, 절지(絶地)에는 상급 죄수들이 수두룩하고 하나하나 산을 부수는 힘을 가진 자들이니.
알약이란 보험이 있지만, 늙은 몸이기도 했고 적의 세력은 이제 막 자리 잡은 정글의 죄수들을 넘어설 정도로 막강하니.
그런 의미에서 활녀당의 도움이 있으면, 놈들을 상대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위령이 세운 활녀당은 그 전투력만큼은 알아주는 집단이니까. 약탈자들이 함부로 바다를 건드릴 수 없는 것도 활녀당의 무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위령을 중심으로 모인 활녀당은 고독에서 오직 여성 죄수들이 주축으로 모인 곳.
소탈하고 정이 많은 위령의 심성에 감복한 죄수들이 자진하여 충성을 바쳐 만든 집단이었다.
아겔이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런데 궁전은 왜 지었지.’
위령은 생전에 소박한 성격이었다. 화려하고 번쩍이는 삶이 아닌, 조금 밋밋하더라도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 걸 추구하던 여인.
그랬던 사람이 죽고 나서 혼령으로 남아 그 욕심을 채우려 할 리 만무하다. 혼령(魂靈)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위령의 혼령은 그런 욕심을 추구할 것 같진 않았다.
아겔이 앞서가는 이궁에게 질문했다.
“낙월궁이라고 했던가? 그건 언제 지은 것이지.”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위령 님의 지시였습니다.”
“그곳에 위령이 있나?”
아겔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이궁이 대답했다.
“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그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아겔을 안내했다.
아겔도 굳이 대답하지 않는 이궁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이궁은 도시의 작은 집 한 채로 아겔을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범한 가정집과 같은 내부가 드러났다. 궁이라고 말한 것치고는 조촐한 모습이었다. 평범했기에 오히려 위령이 거처할 만한 공간인 것 같았다.
아겔이 말했다.
“이곳인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궁은 한쪽으로 걸어가 짐승 가죽으로 만든 카펫을 걷었다.
그러자 지하로 향하는 문이 하나 나타났고, 이궁은 능숙하게 잠금장치를 풀었다.
철컥. 끼이이이…….
아겔은 턱수염을 만지며 흥미로움을 드러냈다.
“호오, 그건.”
“예, 주술을 걸어 놨습니다.”
이궁이 걷은 카펫과 문의 잠금장치에는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주술이라도 걸린 것처럼.
주술은 흑마법의 한 분류로 악질적인 마기뿐만 아니라, 다른 신묘한 기운으로도 펼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예를 들자면, 햇빛이나, 달빛과 같은 것.
아겔도 정확한 원리 같은 건 알지 못하지만, 주술은 분명 그런 것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궁이 조심스럽게 아겔에게 말했다.
“습격받을 것을 대비해, 궁은 지하에 건설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 헤아려 주십시오.”
“무릎 아픈 노인네는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가게.”
이궁이 앞서서 지하로 내려갔고, 아겔은 그녀를 따라 계단을 밟았다.
얼마나 아래쪽에 건설했는지, 지하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활녀당의 건축 기술력이 궁금해지는 아겔이었다. 이렇게 땅속 깊은 곳에 건축하려면, 자원과 기술이 한없이 들어간다.
‘하긴 각자마다 사연이 있는 법이지.’
활녀당에 소속된 죄수 중 건축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주술의 도움을 받기도 했을 테고.
어찌 보면, 활녀당이 지하에 궁전을 지을 만큼 힘 있는 집단이라는 뜻이 되기도 했다.
덜컹.
지하 끝에서 이궁이 강철로 된 문을 열었다.
그리곤 아겔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낙월궁(落月宮)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정글의 주인이시여.”
문 너머에 별천지가 펼쳐졌다.
커다란 대전이 나타났고 바닥은 하얀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다.
천장엔 각종 형형색색의 수정구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고, 다채로운 색감의 기둥이 서 있었다.
마치 왕이 걷는 길 같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겔에겐 대리석의 차가운 감촉이 먼저 느껴졌지만,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도 꽤 오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여기군.”
목소리가 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 두껍고 튼튼한 유리 벽을 통해 바닷속을 내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약탈자 무리도 알지 못했기에 침입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위령의 위임을 받아 활녀당을 이끄는 려홍이 이곳에서 집단 전반에 걸친 업무를 수행하는 모양이었다.
눈이 없는 아겔은 다른 감각으로 이곳의 향취를 느꼈다.
바다와 분리된 공간임에도 바다 냄새가 물씬 흐르는 궁이었다. 아겔이 평소 자주 접하지 못한 기운도 많이 서려 있었다.
화려한 궁전이었지만, 아겔은 이곳에 구경이나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위령은 어디에 있지?’
이젠 몸이 죽어 혼령으로 남아 있는 위령.
아직 한이 풀리지 않아, 이승을 떠나지 않은 그녀는 아직도 고독에서 위명을 떨치고 있다.
아겔은 그녀를 만나러 왔다. 당연히 성물을 받아 내기 위함이었다.
낙월궁 안쪽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겔의 생각과 달리 위령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혼령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아겔이 이궁에게 질문했다.
“위령은 어디에 있나.”
“…….”
잠시 침묵하던 이궁이 고개를 들어 아겔을 바라보았다.
아겔은 이궁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숨소리는 숨길 수 없고, 그녀가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들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아겔은 이궁을 따라 조금 더 걸었다.
몇 분 더 걸어가자, 옥좌와 함께 화려한 기둥이 세워진 곳이 나타났다.
백색 기둥에 각종 바다에서 자라는 희귀한 광물이 박혀 있는 공간.
둥그런 공간 끝 쪽에는 단 위에 금색 옥좌가 하나 놓여 있었다.
공간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옥좌. 지금 실질적으로 활녀당을 이끄는 려홍의 자리로 추정되었다.
‘흠…….’
잠시 공간에 서린 기운을 가늠하던 아겔은 이궁을 따라 옥좌 앞으로 나아갔다.
이궁이 돌아서서 말했다.
“이곳입니다.”
“여기가? 위령이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
이궁은 대답하지 않고 옥좌의 팔걸이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주술이 발동되었다.
윙. 파아아아앗……!
사방에 있는 백색 기둥과 박혀 있는 광물들이 주술의 기운에 공명했다.
분홍색 기운으로 빛나는 주술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아겔의 몸을 순식간에 가두어 버렸다.
아겔은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딱딱한 기운을 느끼고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오, 이건.”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궁은 자신이 아겔을 가두었음에도 예의 있게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입장에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다는 현재 위험한 상태이며, 정글의 주인인 아겔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그가 단신으로 항구 도시를 탈환해 주었다곤 하나, 2천여 명에 달하는 약탈자 무리를 순식간에 쓸어버렸다는 사실은 이궁을 두렵게 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항구 도시는 초토화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지금은 이대로 있어 주십시오. 도시의 안전이 확보되면 다시 돌아와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땐,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아겔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활녀당의 본거지, 항구 도시.
또다시 어떤 놈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 아겔과 같은 위험한 인물을 가만히 둘 수는 없다는 뜻이었으니.
그러나 그녀의 방식은 아겔에게 그리 달가운 기분을 선사해 주진 않았다. 무엇보다 위령의 위치도 말해 주지 않았고.
“자네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겔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나를 홀대한 대가가 생각보다 더 참혹할 수도 있네. 감당할 수 있겠나?”
“…….”
이궁은 침을 삼켰다.
상대는 정글의 주인. 그 잔혹한 악마숭배자를 전부 쓸어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괴물이었다.
그가 벌을 내린다면,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활녀당의 재건에 대한 이궁의 열망도 만만치 않았다.
이궁은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숨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그녀는 아겔을 놔두고, 서둘러 궁 밖으로 나갔다.
.
.
.
아겔은 금방 사라지는 그녀의 기척을 느끼며 헛웃음을 지었다.
“끌끌,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청년들이 많구먼.”
죄를 지은 성자, 바를라 하돌라도 그렇고 왜 자꾸만 목숨을 주겠다는 건지.
늙은 그가 구미호처럼 남의 간을 씹어 먹는 것도 아니고, 딱히 목숨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누군가의 충성 또한 그에게는 부담스러웠다. 그는 군주의 성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니.
그저 친구로 지낼 수 있다면 족하다.
한동안 혀를 차던 아겔은 자신을 가둔 주술의 기운을 느꼈다.
‘주술이라.’
흑마법의 한 갈래인 주술.
여타 흑마법과 다르게 이 주술은 마기가 아닌, 달빛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마 이 공간 자체가 달빛을 받기에 최적의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미리 저장해 놓은 그 기운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속박하는 주술이 기둥마다 새겨져 있는 것이다.
당연히 ‘주술사’가 사용하는 주술과는 조금 달랐다.
궤는 비슷해도 주술사는 엄연히 정통 흑마법처럼 주술을 사용하니.
마기를 사용한 그의 주술은 끔찍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상대를 저주하거나, 타락시키는 데 특화되어 있는 주술이었다.
아겔은 잠시 주술의 기운을 가늠하였다.
그리고 기운을 뚫고 그대로 쑤욱 빠져나왔다.
“흐음.”
주술 따위가 아겔을 속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신성력과 마기조차 통하지 않는 몸인데, 그보다 하위 기운인 달빛의 기운 정도야.
물리력이 아니라면, 아겔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자유를 되찾은 아겔은 근처의 기척을 살폈다.
“나 혼자구먼.”
이 넓은 공간 안에 혼자 있었다.
뭐라도 건져야겠다는 생각에 아겔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그렇지. 려홍이 쓰는 방도 있으려나.”
활녀당의 우두머리, 려홍.
매일 옥좌에만 앉아서 명령을 내리진 않을 것이다. 따로 준비된 방에서 일을 보곤 할 테니, 아겔은 그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터벅. 터벅.
맨발인 아겔은 궁전 이곳저곳을 잘도 돌아다녔다.
딱히 경비 시스템 같은 게 없는지, 외부인인 아겔이 돌아다녀도 특이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느긋하게 돌아보던 아겔은 한쪽에서 문손잡이를 발견했다.
“여긴가.”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어차피 개방 기간이 끝나면, 모두 본관으로 이동되니 잠가 둘 이유도 없었으리라.
도둑이 들 리가 없으니까.
아겔은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달칵.
“흠흠.”
소리를 조금 내본 아겔은 이 방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 거처하는 듯이 침대가 있었고, 뭔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많았다.
거울이라든지, 끈적한 크림 같은 것이라든지, 옷이라든지.
여인이 쓰는 방은 맞았다.
‘려홍의 방이 맞으려나.’
방을 샅샅이 뒤진 아겔은 책상 위에 놓인 수정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주술이 걸린 수정구.
아겔은 수정구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작동시켜 보았다.
딸칵.
수정구가 열리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3월 12일. 어머니의 부름이 잦아졌다. 요즘 들어 나를 자주 찾으신다.]
려홍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말하는 어머니는 당연히 위령이었다.
‘3월이면, 저번 개방 때였구먼.’
아겔은 주의 깊게 수정구에 녹음된 음성을 들었다.
[3월 18일. 어머니께서 정글의 주인이신 아겔 어르신을 언급하셨다.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고 자꾸만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강박이 더 심해지시는 것 같다.]
[3월 20일. 어머니의 감정이 내게도 전달된다. 분노와 회한의 감정. 그것 때문에 전사들에게 예민하게 굴게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께선 언제 화를 푸실까.]
두 개의 음성 녹음을 들어 본 아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정이 동조화한다?’
아겔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수정구에 녹음된 음성을 더 찾아보았다.
[3월 30일. 정신을 잃었었다. 전사들에게 설명을 들어 보니, 어머니께서 내 몸에 강림하셨단다. 아니야. 그건 강림이 아니야. 어머니는 이미 내 몸에 있어…….]
아겔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려홍의 음성 녹음.
거기에 위령의 위치가 나와 있었다.
“려홍의 몸에 기생해 있던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딸의 몸에 붙어 있는 어머니의 혼령.
두 영혼은 서로 공명하기도 좋으니, 혼령이 머물 다른 자리가 필요하지 않다.
려홍을 찾아야 한다.
수정구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아겔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어디에 계십니까!]
안톤의 목소리.
아겔이 대답했다.
“나는 바다의 항구 도시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거의 도착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아니다. 날 찾는 게 아니라, 려홍을 찾아라.”
[려홍…… 악마숭배자를 쓸어버리는 데 도움을 주겠다며, 전사들을 이끌고 왔었던 그 여인 말입니까.]
“그렇다.”
아겔의 말에 안톤은 살짝 머뭇거렸다.
그를 먼저 찾아오고 싶은 감정이 느껴졌지만, 또 아겔의 말을 거부하진 않는 안톤이었다.
[알겠습니다.]
안톤의 연락이 끊겼다.
‘려홍은 안톤이 찾을 테니 그럼, 나는.’
아겔은 수정구에 녹음된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감정이 동조화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긍정적인 것도 아닌 분노나 회한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라니.
위령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달칵.
아겔은 한동안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들었다.
* * *
아겔을 찾아 바다 근처까지 뛰어온 안톤.
갑자기 일어난 재해나 다름없는 사태에 안톤은 분노했다.
다행히 아겔의 상태는 무사한 것 같았지만, 안톤은 그가 곁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안톤은 불안했다. 그렇기에 거대한 정글을 단번에 가로질러 바다까지 온 것이었다.
“갑자기 려홍이란 인간을 찾으시는 이유가 있으신가.”
이 넓은 대륙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명령이지만, 안톤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말하면, 안톤은 순종한다. 영혼을 바친 자는 응당 그래야만 한다.
안톤은 거침없이 바닷가에 있는 숲에서 수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파삭. 파사사삭.
수풀을 헤치고 나가던 안톤은 앞쪽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신음을 흘리고 있는 한 여성의 기척.
그는 나무 너머에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려홍?”
“끄으으…….”
그 사람은 공교롭게도 활녀당의 우두머리, 려홍이었다.
이전과 같이 깔끔하게 철릭을 입고 허리에 검을 패용한 여인. 쉽게 넘볼 수 없는 기운이 려홍의 주변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배를 잡고 있었다.
뭔가 상태가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얼마 걸리지도 않아서 운 좋게 그녀와 마주한 안톤은 기쁨을 느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르신. 찾았습니다. 그 여인을 만났습니다.”
“끄으으으…… 끄륵……!”
순간, 려홍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악귀처럼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이 드러났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안톤은 걸음을 멈추었다.
“근데……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끄으으으으…… 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듯이 온몸을 비틀던 려홍은 안톤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