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97)화 (98/186)

97화 위령 (2)

낙월궁의 려홍의 방에서 그녀의 음성 일기를 확인하던 아겔.

그는 이어진 어둠에서 격렬한 반응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안톤?”

방금 려홍을 찾았다고 전해 온 안톤이 돌연 싸움에 돌입했다.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안톤이 어느 정도 긴장할 만한 강자인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맞수인지, 안톤의 답답함이 아겔에게 전해져 왔다.

“안톤. 누구랑 싸우는 게냐.”

[…….]

몇 번을 불러 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답할 새도 없이 위험한 싸움에 돌입해 집중하는 모양이었다.

아겔은 들고 있는 수정구를 만지작거렸다.

‘려홍의 상태가 이상하다 했지.’

그녀가 기록해 놓은 음성 일기엔 려홍의 몸에 위령의 혼령이 깃들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듯했다.

멀쩡한 육신 하나에 두 개의 혼령이 자리 잡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비록 공명하기 좋은 두 혼령이라 할지라도 특수한 대비가 없다면,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는 법.

려홍에게 무슨 일이 있음이 분명했다.

아겔이 수정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더 들을 게 없었다.

“직접 가 봐야겠구먼.”

려홍을 직접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 아겔은 곧장 방에서 나왔다.

이어진 어둠을 통해 안톤을 찾아가면 되니, 방향은 명확했다.

방에서 나와 다시 옥좌가 있는 대전에 걸음을 옮긴 아겔은 주변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이건.’

활녀당의 전사들. 그녀들이 기둥 뒤에서 나와 아겔을 포위하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 전사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낙월궁의 수호를 맡은 근위 전사들이었다.

“역시…… 이궁 님께서 우릴 보내신 건 현명한 판단이었군.”

여전사들을 지휘하는 전사장이 아겔 앞으로 나섰다.

“정글의 주인이시여. 어떻게 주술을 파하셨는지 모르지만, 얌전히 계십시오. 지금 활녀당은 손님을 모시기에 부적절한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겔을 포위하고 있는 전사들이 무형의 기운으로 아겔을 압박했다.

5급 죄수라도 숨쉬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을 보내는데도, 아겔은 담담하게 말했다.

“때가 부적절하다고 손님 대접하길 소홀히 하면 쓰나. 그것도 내가 너흴 도운 손님이거늘.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위령이 잘못 가르쳤어, 쯧쯧.”

위령을 언급하자, 전사들이 꿈틀했다. 그들은 역린이라도 건드렸다는 듯이 분노한 기색을 내뿜었다.

“훈계 없이 자란 아이들은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법이지. 위령이 너무 감싸고 돌았어.”

아겔은 조용히 품을 뒤져 단검을 꺼냈다.

그가 무기를 꺼내는 것을 보고 전사들이 시위를 당겨 아겔을 겨누었다.

“내가 위령 대신에 예의란 걸 가르쳐 주마.”

“쳐라!”

핑! 슈슈슈슈슈슉!

지근거리에서 화살이 발사되었다.

아겔은 보이지도 않는 화살을 재빠르게 피해 낸 뒤, 기둥을 향해 달렸다.

그가 기둥을 근거 삼아 엄폐하려는 것을 깨달은 전사들은 활을 버리고 검을 들었다.

기둥으로 접근을 막으려는 전사들과 아겔과의 접전이 펼쳐졌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두 세력에 활을 든 자들은 쉽사리 시위를 놓지 못했다.

아겔은 그걸 유도하고 기둥을 향해 달린 것이었다.

그는 몇몇 전사들이 검을 차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활쏘기가 특기인 전사들. 검을 쓰는 전사들 사이로 이렇게 뛰어드니, 그들은 전력에서 제외되어 버렸다.

아겔의 노림수를 읽지 못한 자들은 약 1분 동안이나, 그 사실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촤악……!

“끅……!”

전사 한 명이 팔을 조금 베였다. 그러나 전사들이 유지하는 합격진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합을 맞춰 온 듯한 여전사들의 합격술.

그들의 합격술은 적이 피할 수 없는 각도로 찔러 들어왔지만, 아겔은 오히려 피하지 않음으로써 전사들을 당황케 했다.

푸부부부북!

“……!”

아겔이 피하지 않고 검들을 그대로 몸에 맞자 여전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피하지 않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연약해 보이는 마른 몸에 단검을 들고 기민하게 움직이니 어떤 공격이든 피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아겔은 오히려 사방에서 찔러 들어온 검을 몸에 박은 채로 움직였다.

여전사들은 검을 쥔 채로 아겔에게 끌려갔다. 빼빼 마른 노인의 힘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

끌려가지 않으려면, 검을 놓아야 했는데 전사로서 검을 놓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전사들의 패착이었다.

그들이 포위했던 진이 흐트러지자, 아겔은 놓치지 않고 전사들을 공격했다.

어느새 몸을 뚫고 있던 검들이 빠져나왔고, 다시 자유를 되찾은 아겔은 단 한 번의 주먹과 발길질로 전사들을 무력화했다.

퍼버버버벅!

-끄악!

-컥…….

-끄우으으으…….

다시 움직이기 힘든 간이나 폐를 얻어맞은 전사들이 침을 흘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기를 이용해 방어했는데도 아겔의 주먹질은 그 방어를 뚫고 데미지를 주는 듯했다.

전사들을 쓰러뜨리자,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핑!

화살을 쳐 내던 아겔은 날카로운 기운이 응집된 검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꽤 은밀하고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아겔의 기감을 벗어날 순 없었다.

쨍!!

단검을 들어 올려 검을 막아 냈다.

그러자 아겔을 내려친 전사장이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검에 기(氣)를 덧씌워 무엇이든지 갈라 버리는 검기. 그것으로 아겔의 단검은 갈라지지 않고 멀쩡했다. 날 하나 나가지 않았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평생을 단련해 온 힘이 겨우 마른 노인에게 막혔다는 부당함이 전사장의 마음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노인이 말했다.

“’기’는 나에게 통하지 않는단다, 아가야.”

아겔의 몸이 그 자리에서 회전하더니, 전사장에게 발길질을 선사해 주었다.

복부를 세게 얻어맞은 그녀는 기둥에 부딪히곤 바닥에 쓰러졌다.

전사장을 쓰러뜨리고, 활을 든 전사들을 무너뜨리는 데까지 3분이 걸리지 않았다.

아겔은 바닥에 나뒹구는 전사들을 돌아보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전사장에게 다가갔다.

“크윽…… 당신……!”

“많이 배웠으리라 생각한다. 손님은 홀대하지 말고, 어른에겐 대들지 말 것. 내가 주는 교훈이다.”

아겔은 거침없이 한 갈래로 묶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꺄아아악……!”

“오늘의 수치를 잊지 말거라.”

서걱.

아겔은 단검을 휘둘러 단숨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잘려 나간 머리칼이 바닥에 퍼졌다.

그렇게 전사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 그는 자리를 떴다.

낙월궁 대전엔 여인들의 머리칼이 바닥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

.

캉! 캉-!

철문의 잠금장치를 단검으로 부숴 버린 아겔은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아겔은 지상으로 올라가며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활녀당의 전사들이 꽤 모였을 텐데.’

치이이익.

아겔의 몸은 검에 꿰뚫린 부상도 모조리 아물고 있었다. 알약의 효과였다.

그러나 알약과 별개로 아겔은 그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려홍의 안위였기 때문이다.

‘려홍이 죽으면, 위령에게 성물을 받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고독의 주인과 약속했는데, 물건을 가져가지 못한다면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한시가 급한데, 활녀당 전사들과 투닥거릴 시간은 없었다.

철컹.

아겔은 지하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와 그 가정집에 돌아왔다.

그는 곧장 집에서 나가 도시로 들어왔던 동문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도시의 거리에는 전사들이 많지 않았다. 피해서 다닐 수 있을 정도.

아겔은 전사들이 동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쳐들어온 놈들이 있었나 보구먼.’

활녀당의 영역인 바다는 풍요로운 공간이다.

아무리 한 번 토벌된 죄수들일지라도, 아까까지 항구 도시를 점령하고 있던 요베와 생각이 비슷한 자들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글도 지금쯤이면 이런 식이려나.’

대륙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든 것 같았다. 개방 소환 위치가 랜덤이라는 작은 변화 하나 때문에.

어차피 살아남을 놈은 살아남으리라 생각한 아겔은 걸음을 옮겼다.

혼란스러운 고독의 대륙이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걸음을 옮기던 아겔은 전투가 한창인 동문에 접근할 수 있었다.

약탈자들이 주술이 걸린 목책을 향해 거센 공격을 퍼부었고, 목책 위에 서 있는 활녀당의 전사들도 그들에게 화살을 쏟아부어 대응했다.

아겔은 바쁜 전사들을 지나쳐 목책 위로 올라섰다.

문을 통과할 수는 없으니, 목책을 넘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런 아겔을 발견하고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아겔 님……?!”

선두에서 전사들을 이끄는 이궁이었다. 그녀는 아겔이 주술에서 풀려나 전투 중인 동문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자네들을 방해하러 온 것은 아닐세. 나도 바빠서 가 봐야 하는구먼. 갔다 와서는 못다 한 계산을 마저 하도록 하지.”

“…….”

계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이궁의 얼굴이 굳었다.

“욕보게.”

노인은 그렇게 훌쩍 목책을 뛰어넘어 약탈자들이 가득한 땅으로 떨어졌다.

마치 고양이처럼 땅에 착지한 아겔은 야속하리만치 아무런 위해도 받지 않고 약탈자 사이를 걸어 나갔다.

약탈자 무리 사이로 조용히 빠져나가는 아겔의 모습을 보고 이궁이 입술을 씹었다.

자신의 힘으론 도저히 가두어 둘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궁은 이를 악물고 약탈자 무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신경을 돌렸다.

.

.

아겔은 항구 도시에서 나와 숲을 향해 뛰었다.

안톤이 있는 곳은 생각보다 먼 곳이었기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정글과 바다의 경계가 되는 곳. 그곳에서 안톤이 아직도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안톤이 고전하는가.’

아겔에게서 내면의 어둠을 걷는 법을 배운 안톤이 고전할 정도의 상대.

원래 려홍이라면 안톤을 압도하진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녀의 몸에 빙의했다는 위령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젠장! 여기가 어디야!

-나도 몰라. 난 분명히 사막에 있었는데…….

대륙의 사막 출신 죄수 몇 명이 앞쪽에서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근처에 다른 죄수들의 기척이 종종 느껴졌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자들에게 그리 친절한 죄수들이 아니었으니.

-뭐야, 이 노인네는.

-야, 어딜 그리 뛰어가냐! 여기가 어딘지 알아?

-저 자식 잡아! 길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죄수 몇 명이 아겔을 쫓기 시작했고, 그 무리는 순식간에 불어났다.

아겔은 자신을 따라오는 수십이 넘는 죄수들의 발소리를 듣고 혀를 찼다.

-거기 서라!

안톤에게 달려가는 아겔이 길을 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아겔은 정글로 돌아갈 길을 모르진 않지만, 죄수들과 다툴 시간은 없었다.

그는 나무 위로 올라타 나뭇가지를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 위로 올라갔다!

죄수들은 아겔처럼 나무 위로 올라가려 했다.

나뭇가지를 밟고 이동하다가 떨어지는 죄수들이 많았다.

그 반면에 아겔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나무 위에서 앞으로 나아갔다.

지치지도 않는 아겔의 체력에 죄수들이 떨어져 나갔다. 나무 위에서 1시간 이상 달리자, 죄수들은 더 이상 쫓아갈 기력이 없는지 멀어지기만 했다.

아겔은 안톤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근처에 거슬릴 만한 것은 없구먼.’

괴물이나 특이할 만 한 게 있다면 처리하고 가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요했다.

커다란 나무들이 그늘을 세워 조금은 음침한 숲. 새 지저귀는 소리나, 벌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 거처하는 곳이라도 된 것처럼.

적막함이 숲을 채웠다는 건, 위험한 존재가 머물고 있다는 뜻이었다.

탓!

나무 위에서 내려온 아겔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수풀 너머로 안톤이 느껴졌다.

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쓰러져 있는 안톤이 나타났다.

“어르…… 신……?”

“그래, 나다.”

아겔이 안톤의 몸을 살폈다.

몸 이곳저곳에 화살이 박혀 있었고, 커다란 검상이 몇 개나 그의 가죽을 갈라놓았다.

하나 같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중한 상처였지만, 그런데도 안톤은 숨을 쉬고 있었다.

“어르신께서 찾으시는 인간이기에…… 상해를 입히진 않았습니다…….”

안톤은 아겔이 올 때까지 려홍을 상대했다.

공격하지 않고 오로지 수비만 하면서. 아겔이 려홍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안톤은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다.

안톤은 지금까지 그녀는 죽이지 않고 붙잡아 둔 것이었다.

려홍도 6급 죄수.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다. 거기에 위령까지 빙의했으니, 그 전투력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겔은 안톤의 몸에 박힌 화살을 부러뜨렸다. 곰 수인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미련했구나. 그래도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여자는 근처 개울가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목이 마르다면서…….”

“그래. 되었으니, 이제 쉬려무나.”

아겔이 안톤의 외눈을 덮었다.

곰 수인은 곧 잠에 빠져들며 회복에 들어갔다. 죽진 않았지만, 상처가 큰지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아겔은 굽혔던 허리를 펴고 주변을 살폈다.

집중해 보니 물 흐르는 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왔다. 개울가가 분명했다.

아겔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졸졸졸…….

조용히 물이 흘러 내려오는 개울가. 그곳엔 여인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안톤과 싸우고 다친 흔적은 없었지만, 기진맥진하여 기절한 듯한 려홍.

그녀가 개울가 근처에 쓰러져서 잠들어 있었다.

아겔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쓰러진 려홍에게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겔은 턱수염을 쓸었다.

‘위령의 기운이 느껴지진 않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

그는 보지 못했지만, 쓰러진 려홍의 목에는 목걸이 하나가 걸려 있었다.

아름다운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지만, 그것은 빛을 잃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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