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파도 (1)
해가 천천히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시각.
아겔과 안톤은 숲을 지나, 바다에 있는 활녀당의 항구 도시를 향해 나아갔다.
안톤이 있는 곳까지 뛰어온 터라 무릎이 쑤시는 아겔은 안톤의 어깨에 올라앉은 상태였다.
‘무릎 쑤시는 데 좋은 약은 없나.’
온몸의 상처와 체력까지 순식간에 회복시켜 주는 알약이었지만, 사람을 초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알약이었으면 몸에 부담도 더 컸으리라.
그런데도 알약 하나에 행성값이 들어가는 건, 그 어떤 사람이 복용해도 충분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아겔과 같은 특이 케이스에게도 말이다.
죽은 자를 되살릴 만한 약은 아니지만,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아겔이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알약 때문이었다.
약통에 한가득 들었기에 부담 없이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었다.
알약 하나를 씹어 삼킨 아겔은 안톤에게 말했다.
“정글은 어땠느냐.”
아겔이 뭘 질문하는지 깨달은 안톤이 대답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오베를 제외한 영역을 맡은 자들이 정글이 아닌 다른 곳에 떨어졌습니다. 하이에나는 금방 제 수인들과 돌아왔지만, 성자와 흡혈귀는 여전히 연락이 안 되었습니다. 정글은 그들에게 맡기고 전 어르신께 바로 달려왔습니다.”
정글의 상황도 바다와 비슷했다고 한다.
대륙 남부, 찌는 듯한 더위만이 있는 사막에서 살던 죄수들이 정글에 떨어졌고, 기존 죄수들과 마찰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러나 쉽게 제압했다. 정글 지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막의 죄수들은 정글의 죄수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안톤도 아겔을 찾아오기 전에 손을 좀 빌려주기도 했다.
“하이에나 놈과 광신도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겔은 딱히 걱정한 적 없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정글이야 지금 빼앗겨도 나중에 되찾으면 그만이다.
애초에 정글을 습격할 만한 세력은 ‘화산’ 아니면 ‘창공’ 밖에 없는데, 그들도 꽤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그리 걱정이 되진 않았다.
쿵. 쿵.
안톤의 몸집이 큰 편이라 걸을 때마다 땅이 조금 울리는 소리가 났다.
기분 좋은 리듬감을 느끼던 아겔이 문득 어깨 옆자리에 걸려 있는 려홍에게서 신음을 들었다.
“끄으응…….”
안톤의 어깨는 사실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들쳐 맨 상태라 복부가 어깨에 압박이 되는지 신음을 흘리던 려홍은 이내 눈을 떴다.
“헉……!”
화들짝 놀란 그녀는 안톤의 어깨에서 휙 내려왔다.
안톤도 제 옆에서 갑자기 내려온 려홍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려홍은 한동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
“아겔 어르신?”
“또 정신을 잃었더구나. 이번엔 내가 위령을 쫓아냈다.”
“아…….”
려홍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귀찮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절 구해 주신 것, 그리고 어머니를 돌려보내주신 것도…….”
“일없다.”
아겔이 휘휘 손을 젓자, 안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려홍은 조심스럽게 옆에서 걸었다.
잠시 려홍의 걸음 소리를 듣던 아겔이 입을 열었다.
“려홍. 지도자의 자리는 잘 맞는 것 같으냐.”
아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려홍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생각을 다잡았다.
“잘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즐겁습니다.”
“즐겁다.”
“예. 전사들은 항상 제가 모든 결정을 내리고 모든 책임을 지는 것에 염려를 보내옵니다. 물론 많은 수의 죄수들 위에 선다는 건 확실히 부담될 때도 있습니다.”
려홍은 위령이 이끌어 온 활녀당이란 죄수 집단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그게 맞는 자리인지는 두고 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고독에서 하나뿐인 오직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집단.
부리는 노예 중에 남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전사들은 오직 여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도 왜 공동체가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활녀당의 반은 죄를 짓고 들어온 죄수였지만, 또 다른 무리는 고독에서 태어난 이들이었다.
려홍처럼 말이다.
흉악한 죄를 지었더라도 고독에선 홀로 생존할 수 없는 법이고, 집단의 형성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그 과정에서 이기적이었던 모습은 옅어지고 죄를 짓고 들어온 죄수들조차 위령에게 감화되어 올바르게 서기 시작했다.
려홍은 활녀당의 전사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 의미를 절절하게 느꼈다.
“결국,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부족한 지도자임에도 따라 주는 전사들 덕에 제가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훌륭하구나.”
위령의 의지를 이은 집단. 그녀가 상급 죄수가 되기 전부터 이끌어 온 활녀당.
쉽지 않은 고독 생활이긴 해도, 이렇게 잘 버티고 있었다.
희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죄수들이 한데 모여 살 의지와 삶의 이유를 찾아 나가고 있었으니.
그러니 이젠 반대로 그들이 위령을 도울 차례였다.
려홍이 주먹을 쥐었다.
“어머니를…… 반드시…….”
“…….”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 려홍.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겔은 알고 있었다.
잠시 그녀의 감정이 가라앉도록 기다린 아겔이 입을 열었다.
“현실은 혹독한 법이지. 무언가를 이루어 내려면 실제로 움직여야만 한다. 이 참혹한 현실에서 말이다.”
아겔의 고개가 바다 쪽을 향했다.
아직은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대화 몇 번이면 도착할 듯했다.
“’파도’가 몰려올 게다. 그것에 대한 대응책은 있겠지?”
“물론입니다.”
려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독의 살인적인 시스템에 가장 노출된 해변에 항구가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그 시스템을 막아 내고도 남을 힘이 있다는 뜻.
려홍은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파도가 거세어도 항구는 안전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항구는 파도로부터도 안전합니다.”
바다의 시스템, ‘파도’.
그것은 말 그대로 저 먼바다로부터 해안가를 휩쓸어 버리는 파도가 밀려오는 시스템이었다.
바다 근처에서는 도망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한 번 파도에 휩쓸리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자연재해나 마찬가지.
거기에 해안가를 휩쓰는 파도가 잠잠해지면, 한참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생전에 위령이 사용하던 검인 월영검(月影劍). 그것에 담긴 달의 기운이 파도로부터 항구를 보호해 주기 때문이었다.
위령은 7급 죄수. 산 너머 절지에서 생활해야 하는 몸이었다.
그때는 바다에 있을 수 없었기에, 파도로부터 활녀당을 보호하려 월영검을 전해 주었다.
“어머니의 검이 도시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파도가 몰려와도 문제없습니다. 이제껏 항구 도시가 파도로부터 무너진 적은 없었습니다.”
“…….”
려홍의 장담에도 아겔은 묵묵부답이었다.
과연 항구가 안전할까.
아겔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았다.
‘위령의 검, 월영검.’
그는 당연히 그 검이 뭔지 알고 있었다.
위령이 다루는 달빛의 기운을 담을 수 있는 검.
밤에 적과 맞서 싸울 때, 달처럼 환한 빛이 그림자를 만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사실 달빛뿐만 아니라 어떤 기운이라도 담아내는 검이었다. 단지 위령이 달의 기운을 다루었을 뿐.
아겔도 휘둘러본 적이 있는 검이었다.
‘월영검이 파도로부터 도시를 보호해 준다니.’
검에 무슨 주술이라도 걸어 놓은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검 따위가 시스템의 재해를 간단히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바다의 시스템, 파도는 만만하지 않다. 이들이 모르는 시스템의 규칙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래도 위험하지 않겠느냐. 평범한 파도가 아닐 텐데.”
“직접 확인하시는 게 빠르겠군요.”
려홍이 말했다.
“때가 공교롭네요. 마침 파도가 옵니다.”
먼바다에서부터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흐릿하게 보면 그저 바다 너머 산이라고 착각할 정도.
려홍은 이번에도 파도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해일이 가까이 올 즈음에 그녀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어?”
아겔이 말했다.
“원래 파도가 저리 컸느냐.”
“……”
려홍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파도보다 먼저 도달한 소리. 그 해일의 소리마저 평범하지 않았다. 이번 파도는 그 어느 때보다 2배는 커진 상태로 밀려오고 있었다.
* * *
-파도가 온다-!
등대에서 파수꾼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려홍이 자리를 비운 지금 활녀당을 지휘하는 건 이궁이었다.
그녀는 활녀당 전사들에게 말했다.
“항상 있는 파도다! 소란 피우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위령님께서 우릴 보우하신다!”
바다의 시스템, 파도가 밀려왔다.
이궁은 서둘러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전사들을 도시 각 구역으로 파견했다.
파도로부터는 안전해도 가끔 약한 지진이나 땅의 갈라짐이 발생하기도 했다. 큰 어려움은 아니었지만, 전사들을 보내 각 구역을 지키도록 조치했다.
이궁은 서둘러 측근들과 함께 등대로 올라갔다. 등대에는 월영검과 파수꾼이 있었다.
등대 위의 파수꾼들은 바다를 향해 빛을 비추고, 파도를 관측하면서 월영검을 지키는 일도 맡고 있었다.
이궁이 파수꾼 중 하나를 불러 물었다.
“월영검의 상태는 괜찮나?”
“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등대 상층, 한가운데 꽂혀 있는 월영검.
오래되어 조금은 빛바래었다. 투박한 생김새였지만, 새것이었을 때는 단선적인 아름다움이 있을 법한 색깔이었다.
화려한 자태는 없지만, 달빛을 받을 때 가장 빛나는 이 검은 아직 빛을 발하고 있지 않았다.
“파도가 오고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해라.”
“예!”
파수꾼들은 밀려오는 파도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을 이끄는 파수장이 핼쑥한 얼굴로 이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전사장님…… 파도가 너무 큽니다.”
파수장의 손가락이 가리키기도 전에 이궁의 시선은 이미 파도로 향해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궁도 알고 있었다. 이번에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그녀가 느낀 감상은 간단했다.
‘크다.’
이전과 비할 수 없이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고 있었다.
예전에도 단숨에 도시를 삼킬 정도로 밀려오긴 했지만, 지금만큼 커다란 모습은 아니었다.
충격에 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이궁이 목에 공력을 담아 등대 위에서 소리쳤다.
“모두- 숙여라-! 거대한 파도가- 온다-!!”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도시로 퍼져 나가자, 전사들도 눈을 감고 바닥에 엎드려 충격에 대비했다.
이궁은 자세를 낮추고 파도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위령, 우리의 지도자시여. 부디 마을을 보우하소서.’
그녀의 기도에 응하는 것인지, 월영검이 갑자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달빛을 닮은 푸른빛으로 빛나는 월영검. 등대로부터 흘러나온 아름다운 빛이 도시를 감쌌다.
‘됐다……!’
결계가 발동되는 것을 확인한 이궁은 그 우악스러운 재해가 들이닥치는 걸 바라보았다.
그녀가 끝까지 응시한 파도는 거칠게 마을을 집어삼켰다.
쿠우우우우우……! 쿠우우우우우웅-!
한순간 마을의 결계가 바닷물로 뒤덮였다. 강렬한 진동이 도시를 뒤흔들었고, 엎드렸는데도 바닥을 뒹구는 사람이 있을 지경이었다.
-세상에……! 무슨 파도가 이렇게……
-말하지 말고 고개 숙여!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쿠우우우우웅-!!
파도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적으로 결계에 몸을 부딪쳤다.
등대에서 바라보면 항구 도시 너머에 있는 숲은 완전히 초토화되고 있었다. 엄청난 물살에 휩쓸린 나무들이 뿌리까지 뽑혀 쓸려 가고 있었다.
바위와 자갈들, 모래도 한껏 파도와 하나가 되었다.
저 한가운데에 쓸린다면, 6급 죄수라도 절구로 찧은 것처럼 되거나 온몸이 으스러지고 갈릴 것이다.
다행히 이궁이 있는 등대는 안전했다. 바다의 튼튼한 광물로 지어진 등대는 쉽게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3분 동안 도시 위를 휩쓸던 파도는 점차 가라앉았다.
이궁은 재해가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 등대에서 일어나 도시를 둘러보았다.
‘이전보다 피해가 크지만, 시간을 들이면 복구할 수 있는 수준이다.’
건물 몇 개가 무너졌다. 몇몇 깔린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 같기도 했다.
이전과 다른 파도라 안심하고 있던 자들은 예상치 못한 충격에 큰 상해를 입은 것 같았다.
이궁이 전사들에게 외쳤다.
“우선 부상자를 돌본다! 건물과 갈라진 땅은 나중에! 서둘러…….”
“전사장님.”
이궁을 부르는 파수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어쩔 줄 모르는 파수꾼의 안색이 보였다.
“워, 월영검이…….”
“……!”
이궁이 등대 한가운데 꽂힌 월영검 가까이 다가갔다.
빛이 흐려졌다.
도시를 보호하고서도 30분 동안은 빛을 발하던 월영검이 어두워진 모습이었다.
도시를 감싸던 결계도 흐릿한 모습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이궁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알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지라, 그녀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마을을 돌보는 게 우선이다.
“전사장님!”
그때, 다른 파수꾼이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
“파, 파도가……! 또 옵니다!”
이궁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다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그녀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두 번째 파도.
방금 지나간 것보다 더 거대한 모습을 한 파도가 도시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맙소사……!’
평생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두 번째 파도. 갑자기 왜 파도가 두 번이나 밀려오는지 이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번 파도는 월영검이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월영검에서 나온 빛이 이전과 비할 수 없게 흐려졌기에.
가만히 있다간 도시 전체가 물살에 쓸려 나갈 수도 있는 상황. 이궁은 짧은 시간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마을은 다시 복구하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안 된다.’
이번 파도는 월영검이 막아 줄 수 없다. 판단이 서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행동했다.
이궁이 큰 목소리로 등대에서 소리쳤다.
“도망-쳐라-! 두 번째 파도가- 온다--!!”
도시 안에 있던 자들도 두 번째 파도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마을 밖에서 숲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궁은 먼저 전사들을 내려보내고 등대에 남은 월영검을 바라보았다.
챙…….
그녀는 서둘러 월영검을 챙겼다. 그러자 도시를 감싸던 결계가 완전히 사라졌다.
파슷……!
이궁은 검을 들고 이를 악물 채 등대에서 뛰어내렸다.
탓!
지붕에 고양이처럼 착지한 그녀는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이궁이 항구 도시에서 나갈 수 있는 동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거대한 재해가 도시를 덮쳤다.
* * *
아겔은 초토화된 항구 도시 근처 숲에 서 있었다.
도시 밖 숲은 완전한 혼란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겔이 있는 곳까지 후퇴한 전사들과 려홍이 재회했지만, 기쁨은 없었다.
터전이 완전히 쓸려 나갔기에.
려홍조차 넋이 나갔는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쑥대밭이 된 항구 도시만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에 휩쓸린 전사도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톤은 조용히 전사들을 둘러보다가, 아겔에게 말했다.
“분위기가 침울하군요. 전사들이 죽고 도시가 쓸려 나가 대부분 감정이 가라앉은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자들은 거의 평생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수감되어 활녀당에 들어온 자들도 적지 않은 시간을 항구 도시에서 보내면서 정이 들었을 것이다.
그 장소가 한순간에 쓸려 나갔으니, 상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테다.
“가자, 안톤. 그들만의 시간이 필요할 게다.”
아겔과 안톤은 전사들 사이에서 나와 거리를 두었다. 그들끼리 시간을 갖도록 내버려 두려는 배려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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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나뭇가지 위에서 나무껍질을 씹던 아겔이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확인했다.
경계할 것도 없이, 찾아온 상대는 려홍이었다.
“어르신. 식사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지친 목소리.
전사들을 돌봐야 하는 이 바쁜 시각에도 그녀는 정글의 주인인 아겔을 찾아왔다.
아겔은 나무껍질을 씹으며 손을 휘저었다.
“배가 고프진 않다. 헌데 바빠야 할 네가 내게 할애할 시간이 있느냐.”
“활녀당이 오직 저 하나로만 굴러가는 집단은 아닙니다. 전사장들에게 맡겨 두었으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전하러 왔습니다.”
아겔은 오늘 낮에 항구 도시를 약탈자들로부터 구해 주었다.
파도로부터 겨우 목숨을 구한 이궁이 전해 준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우리 도시를 구해 주셔서…….”
비록 지금은 거친 물살에 도시는 황폐해졌지만,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감사 인사는 되었다. 근데 이제 뭐부터 하려느냐.”
아겔의 질문에 려홍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대답했다.
“재건해야죠. 지금은 무너졌지만, 다시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전사들을 보내 놨습니다.”
“전사들을 보내 놨다고?”
“예, 아직 어머니의 상징 중 하나인 월영검이 있으니, 전사들의 사기도 곧 회복을…….”
“이런…….”
려홍의 말을 끊고 아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려홍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무너진 항구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려홍은 그가 갑작스럽게 움직이자, 당황한 얼굴로 따라왔다.
“어르신?”
“오판했구나. 전사들을 다시 마을로 보내면 안 되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
아겔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바다’의 파도는 이곳에서 죽은 사람이 몇 명인가로 그 기준이 정해진다. 오늘만 해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이 근처에서 죽었지. 많은 사람이 죽을수록 더 큰 파도가 더 빈번하게 밀려오는 게다.”
“맙소사…….”
려홍이 입을 벌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평생 개방 때마다 이곳에서 지낸 려홍마저 알지 못했던 사실.
전사들에게 들은 바로는 이번 개방의 첫째 날인 오늘만 해도 전투로 인한 사망자가 셀 수 없다고 했다.
“파도가 한 번 더 오고 있구나.”
“……!”
깜짝 놀란 려홍은 눈을 들어 바다 저편을 바라보았다.
멀어서 잘 안 보이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왔던 파도보다 훨씬 큰 놈이.
려홍은 경악했다.
‘아, 안 돼…….’
파도가 밀려오면 마을에 보내 놓은 전사들이 쓸려 나가 죽을 것이다.
그 이후, 또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다시 파도가 밀려올 것이다.
끔찍한 살육의 재해가 반복되는 것이다.
아겔이 말했다.
“위령이 만들어 놓은 낙원에 눈이 가리워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원래부터 여긴 지옥이었다. 정신 꽉 붙들어 매거라.”
그는 더 이상 걷지 않고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