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00)화 (101/186)

100화 파도 (2)

아겔은 항구 도시를 향해 뛰면서도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의문을 던졌다.

‘나는 왜 저곳을 향하는가.’

생각으로 판단하기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위령이 중급 죄수였을 적에나 들리곤 했던 항구 도시였다.

그 이후론 발길을 끊은 지 오래. 어느새 그녀가 죽어 혼령이 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이후, 아겔은 항구 도시에 방문한 적이 없었다.

아겔은 위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독은 참 끔찍한 교도소이고, 파도는 사람을 삼키는 재해일지라도 넓은 바다만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이곳에 살아가는 자들이 자신과 같은 평온함을 누리기 원한다고.

-이 지옥 한구석에 살 만한 공간 하나 만드는 게 제 소원입니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목숨을 빼앗기는 건 일도 아닌 이곳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간 하나 마련하고 싶다는 소망.

특유의 여린 목소리로 말하던 그녀였지만, 깃들어 있는 힘은 단단했고 결국 이렇게 이루어 냈다.

물론 두 번에 이은 파도에 도시는 박살이 났다.

누군가는 이미 항구 도시는 끝났다고,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겔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 조각조각 나 버렸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직 숨 쉬고 있으니.

활녀당이 살아 있는 한, 위령의 소망은 아직 불씨가 꺼진 게 아니었다.

아겔은 그녀의 유산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고 싶진 않았다.

어쨌거나 위령은 그의 친우였으니.

지금은 원혼이 되어 아겔의 말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는 것보단 도와주는 게 나중에 할 말도 있을 것 같았다.

“려홍.”

아겔은 옆에서 뛰는 려홍에게 말했다.

“파도를 막고 싶다면, 월영검을 사용해라.”

“월영검을…… 사용하라고요?”

전사들을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뛰고 있던 려홍은 아겔의 말을 듣고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허리에 있는 월영검을 바라보았다.

“위령이 중급 죄수였을 때, 그녀는 직접 월영검을 휘둘러 파도를 막았다.”

한밤에 그림자를 만들 정도로 밝은 달빛을 내는 검. 위령이 애용하는 무기.

커다란 파도를 막을 만큼 막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거기에 주술까지 능통한 위령은 처음 상급 죄수로 올라섰을 때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강자였다.

려홍이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건 알지만…… 저는 어머니만큼 주술에 능하지 않아요.”

“위령은 주술로 파도를 막은 게 아니다.”

아겔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고개를 드니, 가장 미약한 빛을 내는 초승달이 떠 있었다.

“아주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파도를 갈랐지. 그건 주술의 힘이 아니었다.”

주술은 지식이 필요한 능력이었지만, ‘기’는 다르다. 재능이 차지하는 영역이 더 컸다.

려홍은 위령의 딸. 그녀가 기에 능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했다면 너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론하려던 려홍은 입을 꾹 닫았다.

해 보지도 않고 불가능을 논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전사들을 구해야 하는 이 촉박한 상황에.

거기에 더해 그녀는 아겔의 판단을 믿었다.

그는 정글의 주인이며 고독의 최장기 죄수. 그의 격려에 용기가 나는 듯했다.

려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게요.”

“그래야지.”

스릉……!

려홍이 월영검을 뽑았다.

달빛에 반응한 월영검이 희미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주인이 뽑은 순간부터 월영검은 그 빛을 발했다.

아겔은 달빛의 기운이 모이는 것을 느끼고, 앞서 나가는 려홍의 뒤를 따랐다.

월영검을 뽑아 든 려홍은 아겔을 돌아보았다.

“근데 어르신…… 제가 실패한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려홍의 입장에선 자신을 따라오는 아겔이 의아했다.

그녀가 실패하면 아겔도 물살에 휩쓸려 죽을 테니까.

안톤을 포함한 세 사람은 이미 도시 안으로 진입한 상태였다. 여기서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제가 실패하면 어르신의 생명도 장담할 수가 없는데…….”

려홍이야 전사들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아겔은 아닐 테니까.

늙은 죄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실패해도 괜찮다.”

“……?”

“위령도 처음엔 실패했었으니.”

아겔은 위령이 처음으로 파도를 막아선 날을 기억했다.

그때의 위령은 지금의 려홍과 전혀 다른 점이 없었다. 아겔이 곁에 있었다는 점까지 말이다.

당연히 아겔은 그때도 죽을 생각은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큰 실패로부터 사람은 단단해진다.’

아겔이 첫 실패를 지켜봐 준 이후, 위령은 단 한 번도 파도를 가르는 데 실패한 적이 없었다.

.

.

.

려홍의 명을 받아 다시 도시에 진입했던 이궁.

도시를 두 번이나 휩쓴 파도가 두려울 법했지만, 그녀는 활녀당의 재건이라는 일념으로 공포를 극복했다.

‘절대로 무너지게 둘 수는 없다.’

려홍이 태어나기 전부터 위령을 따랐던 이궁이었다.

그녀에게 위령은 지옥 같은 고독 생활에서 발견한 한 줄기 구원의 빛과 같은 존재.

그런 존재가 일구어 낸 터전이 이대로 무너지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사들의 시신을 우선으로 하고 그다음에 중요한 물자들부터 챙긴다! 서둘러 움직여!”

이궁은 명령을 내리면서도 전사 중 누구보다 솔선수범한 모습을 보였다.

아직 도시에 물이 차 있기에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기력을 짜내어 누구보다 앞서서 행동했다.

근처를 뒤지다가, 낙월궁의 입구를 확인한 이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낙월궁은 피해가 없다. 다행이야.’

이젠 활녀당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 낙월궁. 거기에 더해 려홍이 죽지 않았으니, 아직 활녀당에겐 희망이 있었다.

전사들이 죽은 자의 시신과 물자를 확보하는 임무를 지휘하던 이궁은 문득 발밑에 찰랑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닷물. 아까보다 수위가 낮아져 있었다.

움직이기가 이전보다 수월해졌지만, 이궁의 직감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뭐지…… 불길하다.’

아직 물자 확보가 한창이었다. 파도에 휩쓸리긴 했어도 커다란 도시인 만큼 멀쩡한 물자들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이궁은 불길한 감각을 무시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올라갈 곳을 찾아봐야 한다.’

항구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등대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을 찾아서 이궁은 발을 박찼다.

도시 건물들은 거의 잔해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그나마 몇 미터 오를 수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위로 올라간 이궁은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친.”

파도가 다시 오고 있었다.

두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파도는 기어이 세 번째까지 분노를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크기로 보면 두 번째보다도 더욱 큰 것 같았다.

“파도가 온다-!”

이궁의 공력이 담긴 목소리에 전사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들도 해일이 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미 물자를 들고 물러서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다.

해일이 다가오는 타이밍을 보면 전사 중 반은 도망치지 못하고 물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낙월궁으로 후퇴한다! 모두 이쪽으로 집결해라!”

도시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해일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전사들은 이궁의 명령에 복종했다.

철컹!

이궁은 주술이 걸린 낙월궁 입구를 열고, 전사들을 먼저 내려보냈다.

도시에 전사들의 시신과 물자를 확보하러 투입된 전사들은 가히 300이 넘는 숫자. 좁은 입구로 하나씩 내려보내는 데도 시간이 조금 걸렸다.

초조할 법했지만, 이궁은 꿋꿋이 불안을 이겨 내며 전사들을 내려보냈다.

몇 분의 인내 끝에 전사들이 전부 입구 안으로 들어갔고, 이궁은 지하 입구를 닫으려 했다.

텅.

마지막으로 들어선 전사가 화들짝 놀라 닫히려는 철문을 막아섰다.

이궁을 보좌하는 부관인 호고였다.

“전사장님!”

“내려가! 누군가 닫아 줄 사람이 필요해!”

낙월궁의 입구는 두 개의 잠금장치가 있었다.

안과 밖. 양쪽에 있는 잠금장치를 작동시키면 입구는 더욱 견고하게 닫을 수 있었다.

호고가 울상을 지었다.

“안 돼요! 전사장님까지 잃으면…….”

“어서. 시간이 없어. 파도가 거의 다 왔다……!”

이궁의 말대로 파도는 1분이면 도시를 집어삼킬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철문을 들어 올리고 있던 호고의 팔이 떨려왔다.

“어, 언니…….”

이궁이 활짝 웃으며 호고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제1전사장은 호고 너다. 나 대신 려홍 아씨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보필하거라.”

“언니……! 언니!”

쿵……! 철컥!

철문이 닫혔다.

바닥의 잠금장치를 작동시킨 이궁은 거의 탈진한 모습으로 무너진 가정집에서 물러났다.

이궁은 근처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기왕 죽는다면, 자신을 휩쓸고 갈 파도를 제대로 보고 싶었다.

건물 잔해를 밟고 올라간 그녀는 희미한 달빛에 반짝이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파도에 반사된 달빛이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죽음이 다가온다.

파도는 마을 초입부터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며 이궁에게 밀려왔다.

[email protected]#%!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던 이궁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홱 돌렸다.

반대쪽 점과 같이 작은 려홍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궁은 허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아씨…….”

그녀와 이궁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제1전사장으로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그녀는 달려오는 자신의 지도자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전사의 예를 표했다.

그리고 파도가 잔해 위에 있는 이궁을 속절없이 집어삼켰다.

쿠과가가가가가가각--!!

.

.

.

“이구우우웅--!!”

달려가던 려홍의 눈가에서 눈물이 휘날렸다.

그녀는 파도를 향해 월영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며 휘두른 월영검.

달빛을 머금은 검이 커다란 파도를 갈랐다.

촤아아악-!

그러나 갈려 나간 건 앞부분뿐이었다. 파도는 여전히 기세를 늦추지 않고 려홍과 아겔이 서 있는 곳까지 밀려 들어왔다.

려홍은 아겔과 안톤이 멈춰 섰다는 것도 모른 채, 앞으로 나아가며 휙휙 검을 휘둘렀다.

쾅-! 쾅쾅!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달빛의 검기가 쏘아져 나가 파도를 갈랐다. 그러나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은 여전했다.

아겔은 려홍을 지켜보듯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다.

안톤이 말했다.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습니다. 저 여인이 시간을 벌 때, 빠져나가시죠, 어르신.”

려홍의 달빛 검기가 파도를 막아서긴 했어도 잠시뿐이었다.

악바리를 써서 기세를 조금 늦추는 데 성공했지만, 뒤에서 밀려오는 파도의 기세는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러나 아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죽어 가던 너를 두고 갔더냐.”

“…….”

“려홍을 죽게 내버려 둘 셈이었다면, 쓸모없는 격려 따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을 게다.”

아겔은 절대로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 안톤도 그의 심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잠자코 보기나 하거라. 아직 려홍은 완전히 실패하지 않았다.”

아겔의 말처럼 려홍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 월영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전보다 밝게 빛나기 시작한 월영검은 거대한 칠흑의 파도 앞 한줄기 반딧불과 같았다.

그와 동시에 려홍의 두 눈도 푸른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달빛의 기운이 한껏 차오른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파도를 향해 검을 수직으로 내려 베었다.

“ㅡㅡㅡㅡㅡㅡㅡ!”

자신이 무슨 비명을 지르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려홍은 갈라지는 성대로 한껏 울분을 토했다.

건물을 단숨에 양단할 법한 검기가 앞으로 쏘아졌다.

달빛의 검기는 파도와 부딪치고 충돌하여, 주변을 부술 듯 강렬한 충격과 흔들림을 만들어 냈다.

콰아아아아앙---!!

숨을 헐떡이는 려홍은 빛이 꺼져 가는 눈으로 파도를 바라보았다.

쿠과가가가가가각---!

파도는 마지막 검기에도 불구하고 조금 기세가 늦춰졌을 뿐, 똑같이 밀려왔다.

산처럼 높이 솟은 거대한 해일.

그것은 이제 려홍까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아아…….”

힘을 다한 려홍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월영검만은 끝까지 쥐고 있었다.

세상의 소리가 파도 소리로 뒤덮일 지경이 되고 나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실패했구나.’

그래도 죽는 순간까지 려홍은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죽음을 기다릴 때.

거친 피부의 손이 그녀가 쥔 월영검을 부드럽게 빼 갔다.

‘아……?’

아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흰 봉두난발의 작은 사람 하나가 보였다.

그는 월영검을 쥐고 있었다.

바로 앞까지 도달한 파도를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파도 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파도가 둘을 삼키기 전, 아겔이 월영검을 휘둘렀다.

‘아…….’

아름다웠다.

이제껏 보아 온 그 어떤 검의 궤적보다 더.

그저 검을 아래에서 위로 베어 냈을 뿐인데.

월영검의 달빛은 한순간 초승달과 같은 모양을 만들었다.

그 초승달은 파도를 갈라 버렸다.

쿠화아아아아아아아아ㅡㅡㅡㅡ!!!

려홍은 눈을 감았다.

지금 본 초승달의 빛이 어둠 속에서도 선연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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