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추방 (1)
세상이 빛으로 환하게 물들었다.
누구나 바다를 밝히는 저 빛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달빛. 푸른색의 그것이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빛을 발했다.
아겔이 만들어 낸 초승달은 파도를 완전히 갈라 버렸고, 갈라진 파도는 정면을 향하지 못하고 양옆으로 밀려났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강ㅡㅡㅡㅡ!!!
소금기 가득한 바닷물이 튀는 데도 아겔은 올려 벤 그 자세 그대로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 아아…….”
철퍽…….
바로 뒤에 있던 안톤은 경탄해 마지않는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여러 무기에 능통해 달인처럼 사용한다 하여 무기술사로 불리는 안톤. 그가 보기에도 아겔의 올려 베기는 그 어느 참격보다 아름다웠다.
아겔이 만들어 낸 초승달 검기는 파도를 가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쭉 뻗어 나갔다.
바다를 양단할 듯 뻗어 나가던 검기는 아겔이 서 있는 곳과 수평선의 중간을 조금 못 가 사라졌다.
그 여파로 바다가 거칠게 출렁였지만, 항구 도시로 해일이 밀어닥치진 않았다.
아겔은 자세를 풀고 검을 살폈다.
월영검은 이제껏 찬란하게 내던 푸른 달빛이 사라진 모습. 아겔이 한 번 쓰고 나서 마치 어둠에 속한 것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달빛의 기운을 저장하는 주술이 걸려 있던 월영검. 그간 주술로 도시를 지켰지만, 아겔이 손을 대자 그 주술이 풀려 버린 것이다.
거기에 아겔의 어둠에 영향을 받아 검게 물들어 있었고.
쩌적…….
그 힘을 버티지 못해 검신(劍身)에 금이 갔다.
아겔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월영검을 쓰러진 려홍의 품에 두었다.
“미안하게 되었구먼. 내가 너무 세게 휘둘렀어.”
“아닙니다. 훌륭하게 쓰셨습니다. 어차피 그 검은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제대로 손질도 안 해 왔죠.”
안톤이 걸어와 쓰러진 려홍을 둘러멨다.
“검에 저장된 달의 기운을 모조리 사용하셨군요.”
“파도를 가르려면 다 사용해야 했다.”
아겔은 스스로 ‘기’라는 걸 만들어 내거나 모으진 못하지만, 타인이 건네준다면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지금 만들어 낸 초승달 검기는 바로 그 기술의 극한이었다.
안톤은 방금 그 검기를 자신이 막을 수 있을까 상상해 보았다.
아겔은 힘으로 검을 휘두른 게 아니었다. 그는 안톤의 눈에도 느리게 보일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허공에 새겨진 초승달 검기는 그 무엇보다 빠르고 막강했다. 바다 수면을 갈라 버리며 나가는 그 박력.
그 위력을 다시 떠올린 안톤은 고개를 저었다.
‘막으려 했다간 두 동강 났겠군…….’
안톤의 생각을 눈치챈 아겔이 말했다.
“너도 봉인만 아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힘이 봉인된 채로 너무 오래 살아와서 그런지, 지금의 모습이 저인 것만 같습니다.”
7급 각성자는 산을 부수고, 8급 각성자는 대륙을 부순다.
안톤도 봉인만 아니었다면, 8급의 무력을 소유한 괴물이었지만, 힘을 봉인당해 6급으로 살아온 지 오래되었다.
‘급수가 아니더라도 어르신처럼 아름다운 검기는 만들어 내지 못할 것 같군…….’
아겔이 고개를 저었다.
“봉인과 급수에 얽매이지 말거라. 마음과 생각이 거기에 묶이는 순간, 이길 수 있는 적에게도 무너지게 될 게다.”
아겔의 말에 안톤은 겸허하게 고개를 숙여 받아들였다.
기실 아겔이야말로 급수라는 기준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존재.
고독에선 1급 죄수로 분류가 되어 있었지만, 아겔이야말로 상급 죄수와 맞먹을 수 있는 무력의 소유자였다.
아겔은 엎드린 안톤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기에 대해선 재능이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한다. 안톤도 그 재능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해 7급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곰 수인은 지독한 노력광이었지만, 세상엔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게 수두룩했다.
‘각자의 길을 가는 게지.’
무수히 많은 선택과 노력의 기로에 사람은 서 있다.
그러나 아겔은 아니었다. 그에겐 선택할 기회도 방법도 없다.
이 뒤틀린 우주를 바로잡기 위해선 아겔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파도 앞에 섰던 오늘처럼.
‘살아남아 부순다.’
상념에 빠진 아겔에게 안톤이 말을 건네왔다.
이어진 어둠을 통한 감정 전이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아…… 난 괜찮다. 오랜만에 힘 좀 썼더니, 어깨가 결리는구나.”
“마사지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주변을 수습한 뒤에.”
아겔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활녀당 전사들의 기척을 느꼈다.
그들은 마치 신이라도 본 것처럼 경외하는 눈빛으로 아겔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 *
려홍이 깨어나기까지 활녀당은 무너진 도시에서 물자와 전사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번 일로 죽은 전사가 꽤 많았지만, 다시 바다로 돌아와 합류한 전사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활녀당이 근처 약탈자들에게 습격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였다.
려홍은 깨어나자마자, 이궁을 찾았다.
활녀당 전사들이 이궁의 시신을 찾긴 찾았으나.
“훼손이 심합니다…….”
“…….”
이궁의 몸은 파도에 쓸려 거의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상태였다. 목에 걸린 그녀를 증명하는 패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이궁인지도 몰랐을 터였다.
려홍은 해변에 가지런히 정렬된 전사들의 시신을 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가 파도를 막을 수 있었다면…….’
바다가 아닌 다른 곳에 떨어졌다.
어머니 위령의 혼이 자신의 몸을 빼앗았다.
그런 변명 따윈 전사들의 목숨을 되살리지 못한다.
려홍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자, 전사들도 죽은 동료들을 추모하듯이 한쪽 가슴을 부여잡고 울었다.
슬픈 새벽이었지만, 동은 터 오고 있었다.
눈물을 훔친 려홍은 곧바로 아겔을 찾아가 두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니, 우린…….”
바위에 앉아 안톤에게 마사지를 받고 있던 아겔은 손을 들어 휘저었다.
“되었다.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느냐?”
“아…….”
위령은 처음 파도를 가르는 데 실패하고 난 이후,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는 말.
려홍은 그 말을 떠올렸다.
“이제 다음 파도를 상대할 때는 네 검에 실려야 할 무게가 얼마나 무거워야 할지 알겠지.”
“…….”
려홍은 월영검을 붙잡았다.
검신에 금이 갔지만, 그것을 가지고 아겔을 핍박할 생각은 단연코 없었다.
월영검이 아니더라도 검에 달빛을 담아내는 일은 가능했으니.
려홍은 자신만의 월영검을 만들어 내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 무게. 이제 알겠습니다.”
“잊지 말거라.”
아겔은 려홍에게 다른 걸 물었다.
이제는 위령의 혼령을 성불하러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위령이 있는 곳이 끝섬이라고 했지.”
아겔도 위령이 죽기 전에 딱 한 번 가 본 섬이었다.
서쪽인 바다에서도 더 서쪽으로 가야 나오는 섬.
위령은 그곳을 자신만의 장소로 삼고, 마음이 복잡해지면 끝섬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고 알고 있었다.
“배가 있어야겠구먼.”
려홍이 대답했다.
“배는 저희가 준비하겠습니다. 근처 동굴에 숨겨 둔 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 보름달이 뜨는 날이 아니면 끝섬에 가지 못하지?”
“아시고 계셨군요.”
끝섬으로 가려면 반드시 보름달이 뜬 날에 출항해야 한다.
바다엔 수많은 해양 몬스터들이 있고, 그들은 달빛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평범한 빛이라면 마구 달려드는 놈들이지만, 위령이 휘두르는 달빛에 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해양 몬스터들은 달빛을 싫어하게 되었다.
위령을 만나면 죽어야 하니까.
“나도 한 번 갔다 왔었다. 그땐 네가 말했던 제단 같은 건 없었지만.”
“제단은 어머니께서 육신을 벗으시고 난 이후에 쌓아 올린 것입니다. 혼령이 머물기 편하게 지은 것이죠.”
특별한 주술이 걸린 제단은 혼령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영원히 가능하진 않지만, 인간의 수명을 기준으로 하자면 차고 넘치게 머물 수 있다.
아겔은 턱수염을 만지면서 생각했다.
‘위령이 원혼이 된 건, 제단에 오래 머물러서가 아니야.’
이룰 수 없는 소망에 감정이 격해져 원혼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아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갑자기 그 현명하던 여인이 원혼이 될 이유가 없다.
누군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말이다.
‘주술사가 개입한 게 분명한데…… 혹시 끄나풀이 있어 골라내면 좋으련만.’
문제는 아겔의 신묘한 기감으로도 활녀당 전사 중에 주술사의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아마 위령을 원혼으로 만드는 게 개입한 녀석은 활녀당 내부 인원이 아닐 수도 있었다.
위령의 제단이 끝섬에 있다는 것조차 려홍밖에 알지 못하는 사실이니.
‘놈이 대륙으로 넘어왔었나?’
상급 죄수들이 거하는 ‘절지’와 중하급 죄수들이 거하는 ‘대륙’은 나뉘어 있다.
거대한 ‘산’을 넘으면 오갈 수 있지만, 상급 죄수들은 넘어오는 순간, 중급 죄수로 급수가 격하되는 페널티를 받는다.
중하급 죄수들도 넘어갈 수 있지만, 미쳤다고 상급 죄수들이 득실거리는 지옥에 제 발로 걸어갈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살을 원하는 자는 종종 있었지만, 대륙만으로 죽기엔 충분히 위험했다.
모르는 게 많았다. 그간 조용히 지내느라 위령이 죽었다는 사실만 알았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까마귀 코르브스’가 절지의 소식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그라고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었으니.
절지는 대륙보다 넓은 황량한 광야였다.
“어르신?”
려홍이 심각한 표정을 한 아겔을 보고 우려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래.”
아겔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주술사를 죽이려면 절지로 넘어가야 한다. 그건 차근차근해 나갈 일이니, 모르는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배를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느냐.”
“지금 당장이라도 준비할 수 있지만…… 사실 도시 물자를 수습하고 전사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얼. 시간이 되는대로 부르거라.”
“열흘 안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저희가 모셔도 될까요?”
“아니다. 난 잠깐 주변이나 둘러보마.”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려홍이 자리에서 일어나 숲을 나갔다.
그녀가 준비되는 대로 아겔은 끝섬으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원혼이란 건 오래 놔둘수록 그 원한의 감정이 강력해져서, 나중엔 손도 쓸 수 없는 상태로 변해 버리니.
오랜 친우가 그렇게 변하는 꼴은 아겔로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안톤. 우린 정글로 간다.”
아겔은 정글의 상태가 궁금했다.
가뜩이나 대적자 시스템 때문에 정글 구성원들이 골치를 겪고 있을 텐데, 거기에 랜덤으로 떨어진 약탈자들이 존재한다면 난장판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겔이 절지로 넘어갈 때는 정글을 지켜 줄 인원이 필요한 만큼 지금부터 잘 관리해야 했다.
안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바다와 정글 간에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었지만, 6급 죄수인 안톤은 그 거리를 단숨에 좁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출발하자.”
“예.”
아겔을 어깨에 태운 안톤이 발을 박찼다. 곰 수인은 화살보다 빠르게 숲속을 지나쳤다.
.
.
.
치직. 치지직.
특수한 마법을 걸어 만든 송수신기에서 잡음이 들려왔다.
정글과 화산의 중간 지대.
그곳에는 때아닌 정장을 입은 자들이 몰려 있었다.
그중 선글라스를 쓴 자가 손가락 하나로 입을 가렸다.
“쉿. 연결되었다.”
각자 사시미와 강철 몽둥이를 들고 있는 남자들. 개중엔 조악했지만, 기관총을 들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모두 고독에서 자체 생산된 것들이었다.
그들은 선글라스 남자의 말에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기기 앞에서 말했다.
“형님. 들리십니까? 말씀하시죠.”
송수신기에서 잡음이 들려온다는 건 절지에 있는 형님께서 연락을 걸어왔다는 뜻.
선글라스 남자는 조심스럽게 송수신기에서 들려올 대답을 기다렸다.
-들리나.
“예, 잘 들립니다. 송수신기에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준비는 되었겠지.
“물론입니다.”
선글라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 같이 정장을 입은 남자들.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숫자가 모여 있었다.
기기에서 말하고 있는 오직 한 남자의 명령으로 인해.
선글라스 남자가 우려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형님. 아겔라스토스가 정글의 주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저번에 네가 말했잖아.
“예. 그게…… 이번 개방은 좀 문제가 있었는지, 중하급 죄수가 대륙에 랜덤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약간의 분노와 짜증이 담긴 목소리.
선글라스 남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물론 형제들은 다 집결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겔, 그 남자가 바다에 떨어진 모양입니다. 어제 가져온 정보입니다.”
-…….
아겔이 바다에 있다는 말을 듣자, 수신기는 잠시 조용했다.
그리고 남자가 말했다.
-내가 대륙으로 직접 넘어간다. 계획에 변동은 없어. 바다를 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변동 없이 그대로 가겠습니다, 형님.”
뚝.
송수신기가 꺼졌다.
선글라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못이 한가득 박힌 각목을 붙잡았다.
살벌한 인상을 가진 그는 주변에 있는 정장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출발한다.”
“““예!”””
황량한 숲이 진동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소리였다.
이윽고 서쪽을 향해 움직이는 그들. 처음 관문은 정글이었다.
마피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