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09)화 (110/186)

109화 마피아킹 (3)

한밤의 고요한 정글.

줄리안은 주술사가 자신의 아내를 죽였다는 말 이후론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쓰읍…… 후…….

그저 궐련을 물고 검은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뿜을 뿐.

아겔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놈은 지금 분노하기보다는 회한의 감정이 담긴 숨을 내뱉고 있었다.

아마 위령을 지키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지.”

햇빛이 비치지 않는 밤이 되자, 줄리안이 아겔을 재촉했다.

궐련을 비벼 끈 그가 옷을 털며 일어섰다.

아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지만, 놈이 대답해 주진 않을 것 같았다.

‘원래도 과묵한 녀석이니.’

위령이 죽기 전에는 어땠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줄리안은 그런 걸 대답해 줄 놈은 아니었다.

찰칵…… 쓰읍…….

다시 궐련을 피우는 줄리안은 아겔의 뒤를 따르다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네가 먼저 물어볼 줄은 몰랐구나.”

“나도 신경은 쓰고 있다. 아니, 모른 체하는 게 더 바보 같은 일이지. 당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아.”

“2년 안 되게 남았구나.”

“그럼 10년 정도만 버티면 되겠군.”

“끌끌,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순 있겠느냐.”

줄리안의 수명은 이제 1년조차 남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환약을 씹어 먹다간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줄리안의 주황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날카롭게 빛났다.

“주술사, 그 새끼를 죽이기 전까진 절대로 안 죽을 거다.”

완강한 의지가 담긴 말투.

주술사를 향한 마피아킹의 적의가 드러나는 듯했다.

복수, 그리로 회한의 감정.

아겔은 그게 어떤 느낌인지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줄리안에 앞서 아겔도 똑같은 것을 경험했으니.

“그럼 너와 내가 가는 길은 비슷하겠구나.”

“……?”

“나도 주술사를 죽일 생각이다.”

아겔의 말에 줄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가 직접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말. 오랜만에 아겔을 만난 줄리안은 그 말이 너무도 생소하게 들려왔다.

아겔이 대놓고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선포한 적은 줄리안에겐 처음이었으니.

‘하긴…… 주술사는 오랫동안 아겔 영감의 목숨을 노려 왔다.’

상급 죄수들 사이에선 아주 유명한 이야기.

절지에서 아겔은 유명 인사였으니, 이 일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동안은 싸움을 피해 온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줄리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럼 내가 주술사를 죽이는 걸 도와라, 아겔. 당신과 나라면 충분히 주술사를 죽일 수 있다. 나와 협력하지 않으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힘들 테지. 홀로 주술사를 잡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아무리 아겔이라도 절지로 넘어가 주술사를 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주술사 하나만 죽인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기에.

놈이 속한 [원탁]이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순서가 조금 잘못되었구먼.”

아겔이 걸음을 멈추고 줄리안을 돌아보았다.

“내가 주술사를 죽이는 것을 네가 도와주는 것으로 하지.”

“……!”

줄리안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실상 둘은 같은 말처럼 보였지만, 다른 의미였다.

바로 주도성의 문제.

여태껏 직접 전면에 나서서 누군가를 살해한 일이 없던 아겔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나서서 누군가를 죽이려 한다면, 고독의 거두들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말이었다.

줄리안이 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럼 이제 숨지 않겠다는 거군.”

고독의 죄수들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아겔을 건드린 자는 죽게 될 것이라고.

절지엔 아겔을 노리는 자가 많다.

항상 조용히 숨어서 지내 온 아겔이었기에 그들은 아겔을 얕보았고, 몇 번 건드리기도 하였다.

고독에서 아겔만큼 신비하고 베일에 싸인 존재도 드물었으니까.

주술사는 그런 이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존재.

그를 죽임으로써 고독에 있는 죄수들에게 경고를 보내려는 것이다.

줄리안이 긴장감을 숨기며 말했다.

“짓밟고 올라서는 게 욕심이라고 했나. 나를 탓하더니, 너도 이제 고독을 발아래에 두려고 하는군.”

“잘못 알고 있구나, 줄리안. 난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려는 게 아니다.”

“그럼…….”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벌레들을 눌러 죽이려는 게지. 더불어 숨어 있는 벌레들에게 경고도 할 겸 말이다.”

“…….”

자신을 비롯한 상급 죄수들을 벌레 취급하는 말이었지만, 줄리안은 모독감을 느끼지 못했다.

순간 아겔과 자신의 격차가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고독을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건 힘들지 않나.”

줄리안의 말에 아겔이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고독은 나의 것이었다. 거래하고 얻은 나의 집이지.”

…….

잠시 찾아온 적막함.

긴장한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권총 홀더에 손을 가져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자신의 온몸을 기어올라 심연 속으로 가라앉히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에 있는 벌레를 죽이는 건 오로지 집주인의 마음에 달린 일이란다.”

* * *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볕. 소금기가 흐르는 공기.

이틀 뒤, 아겔은 줄리안과 함께 바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려홍이 말한 열흘보다 이틀은 앞서서 도착했지만, 기다리면 될 것이니 아겔은 느긋하게 항구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뒤에 따라오는 줄리안에게 말했다.

“딸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먼저 할 텐가.”

팔을 들어 햇빛으로부터 얼굴을 가린 채로 말했다.

“이야기는 무슨…… 그냥 얼굴이나 보려고 온 거다.”

줄리안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보고 싶지 않았다면, 굳이 아겔을 뒤쫓아 올 이유가 없는 놈이었다.

위령만 만났을 거였다면, 저 혼자서 왔을 테지.

아직 혼자서 딸을 만나는 게 어색한 게 분명할 것이다.

아겔은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바다로 걸어갔다.

항구 도시는 파도에 휩쓸리고 난 뒤로 꽤 많이 복구가 된 모습이었다.

바다에 휩쓸린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복된 모습.

느껴지는 기척을 보니, 사방에 흩어졌던 활녀당의 전사들도 꽤 많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활녀당의 도시에 거주하며 노동력을 제공하는 죄수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항구 도시에 와 본 건 이번이 처음인가.”

“그래.”

줄리안은 한 번도 항구 도시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상급 죄수가 되기 전에도 ‘화산’에 거주하였으니, 바다와는 인연이 없었다.

“네 아내가 세운 도시다. 감상이 어떤가.”

“작군.”

마피아킹은 짧게 대답했다.

확실히 활녀당의 항구 도시는 그의 눈에는 차지 않을 정도로 좁았다.

수만의 죄수가 거주하는 도시일지라도 절지에 있는 그의 도시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았다.

도시의 겉을 빠르게 훑어본 줄리안이 말했다.

“시스템은 우리와 비슷하군. 이곳도 죄수들을 잡아 와 노동력으로 쓰는 건가.”

“대우는 네 도시보다 나을 게다. 적어도 사람 취급은 해 주니까.”

줄리안이 코웃음 쳤다.

“그래 봤자, 노예일 뿐이지.”

고독에 있는 도시들은 대개 죄수들을 붙잡아 노예로 만들어 노동력을 확보한다.

마피아킹인 줄리안이 있는 도시도 마찬가지.

그래야만 도시가 존속할 수 있다.

아겔과 줄리안이 항구 도시 동문을 향해 걸어가자, 그들을 알아본 전사들이 마중 나왔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제1 전사장이 된 호고였다.

그녀는 깍듯하게 한쪽 무릎을 꿇어 아겔에게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든 호고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려홍 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내가 신분을 보장하는 친구다.”

줄리안에게서 느껴지는 음험한 기운 때문에 잠깐 흠칫했던 호고였지만, 아겔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제없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호고가 두 사람을 데리고 항구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는 활발했다.

며칠 전에 파도에 휩쓸렸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생기가 가득 차 있었다.

위령이 세운 도시는 그녀의 정 많고 온화한 분위기를 닮아 있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대개 웃는 얼굴을 한 사람들.

이곳을 과연 교도소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이 갈 만한 모습이었다.

밝은 분위기가 껄끄러운 줄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쓸데없이 시끄러운 곳이군.”

“고독엔 조용한 도시만 있는 건 아니지.”

아겔도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웃는 소리를 들었다.

언제든 파도가 들이닥칠 수 있는 위험한 항구 도시였지만, 그런 위협 따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만큼 이곳의 사람들이 지도자인 려홍을 신뢰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마 려홍은 아겔이 잠깐 떠나가 있을 때, 파도를 성공적으로 막아 온 모양이었다.

호고를 따라온 아겔과 줄리안은 해안가에 홀로 서 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20대의 시기를 지나는 외형.

그러나 나이답지 않은 강인함이 겉으로 보이는 듯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줄리안의 눈이 커졌다.

마치 위령이 서 있는 듯했다.

아겔이 말했다.

“저 아이가 네 딸이다.”

“…….”

“그리 가만 보고만 있지 말고 가서 인사하자꾸나.”

“자, 잠깐…….”

줄리안이 아겔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겔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러냐.”

“……천천히 가지.”

아겔이 미소를 지었다.

“설마 딸 아이를 만날 준비가 아직도 안 된 게냐? 그럼 난 왜 따라왔느냐.”

“…….”

“꾸물거리지 말고 가자꾸나.”

아겔이 어깨에 올려진 줄리안의 손을 툭 치고 다시 나아갔다.

“아겔……!”

줄리안이 아겔을 불렀지만, 아겔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려홍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는 결국, 이를 악물고 아겔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겔이 려홍에게 다가갔다.

“잘 지냈느냐.”

“어르신? 벌써 오셨군요.”

려홍은 웃는 낯으로 아겔을 맞이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그래. 난 건강하다. 배는 어떻게 되었느냐.”

“배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 정박할 항구를 복구하는 중이라서요. 물자도 준비 중입니다. 그래도 이틀이면 다 될 테니, 그동안 도시에서 쉬고 계세요.”

“그래, 알겠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아겔과 대화를 나누던 려홍은 줄리안을 바라보았다.

얼굴엔 흉터가 많았지만, 잘생긴 외모는 어디 가지 않았다.

150살이 넘었어도 40대의 미남형 얼굴을 가진 줄리안은 눈에 띄었다.

그의 칙칙한 분위기도 한몫하긴 했지만.

“인사해라, 려홍. 이 녀석은…….”

서둘러 다가온 줄리안이 아겔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소개는 내가 하지. 내 이름은 줄리안이다. 줄리안 카바로.”

이름을 들은 려홍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설마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일까 생각했던 줄리안이지만, 그의 이름은 상급 죄수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고 속으로 안도했다.

려홍이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줄리안 님. 저는 려홍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활녀당을 이끌고 있습니다.”

“…….”

그녀는 줄리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존대했다. 그가 반말해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아겔과 함께 있는 자 중에 평범한 사람이 없었기도 했고.

줄리안은 잠시 말없이 멍한 얼굴로 려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빤히 바라보자, 려홍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제 얼굴에 뭐라도…….”

“아, 아니다…….”

소개를 마친 줄리안은 어정쩡하게 뒤로 물러났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그는 눈을 돌려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

“바다가…… 생각보다 멋있군.”

그에 려홍이 미소를 지었다.

“제 어머니와 취향이 비슷하시군요. 어머니는 바다를 좋아하셨거든요.”

“……그랬던가?”

상급 죄수가 되어 줄리안과 절지로 함께 넘어온 위령.

그녀는 줄리안과 살 때, 한 번도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저 취미 삼아 바다 그림 몇 점을 그렸을 뿐이었다. 항구 도시가 그려져 있는.

그때는 몰랐다. 전쟁에 몰두하느라 위령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줄리안이었다.

줄리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미묘한 대답에 려홍이 질문했다.

“혹시 제 어머니와 아는 사이셨습니까?”

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다.”

“어머니의 지인분이셨군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그래…….”

려홍이 조금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다가 말을 꺼냈다.

“줄리안 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다음에 얘기하지. 지금은 조금 쉬고 싶군.”

“아, 그럼요.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려홍이 먼저 앞서갔고, 줄리안과 아겔이 뒤를 따랐다.

햇빛 때문인지.

장성하여 죽은 아내와 똑같은 딸과 만나서인지.

줄리안은 그녀를 따라가는 동안 휘청이려는 몸의 중심을 몇 번이나 바로 잡아야 했다.

.

.

.

아겔과 줄리안은 려홍의 배려로 편하게 이틀 동안 항구 도시에서 쉬었다.

줄리안은 혼자서 어두컴컴한 방에서 생활했고, 아겔은 도시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서였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아겔은 줄리안이 있는 방으로 다가갔다.

식사 시간이 되었기도 했지만, 줄리안은 이틀간 단 한 번도 방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아겔은 그가 안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줄리안. 왜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게냐. 방에 처박혀 살 생각이냐?”

-…….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가겠다.”

아겔은 잠겨 있지 않은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안에는 줄리안이 침대에 걸터앉아 궐련을 피우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방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는지, 촛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겔은 물끄러미 줄리안의 기척을 살폈다.

뭔가 충격을 받았는지, 줄리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겔은 그가 앉아 있는 침대 곁으로 걸어갔다.

“려홍에게서 위령의 모습을 봤느냐.”

“…….”

“그게 자식이다. 려홍은 죽은 어미와 똑 닮았지.”

“눈도 안 보이면서 어떻게 알지?”

“눈이 없어도 볼 수 있는 건 있다. 려홍과 위령은 걸음걸이부터 똑같지.”

“…….”

“네가 아비라는 걸 알리지 않을 생각이냐.”

“……그럴 생각이다.”

“왜지?”

잠시 숨을 멈춘 줄리안이 호흡을 고르고 말했다.

“그냥. 이유는 없다.”

없을 리가.

속으로 중얼거린 아겔이 말했다.

“그럼 위령을 만나고 나면 홍아와는 이제 만나지 않을 테냐?”

“……”

“뭐, 네게 달린 일이니 알아서 하거라.”

아겔이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기 전, 그가 말했다.

“그래도 이건 알아 두거라. 내가 알기로 홍아는 제 아비를 꽤 오랫동안 찾아 헤맸다. 위령도 제 아비가 누군지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

“…….”

“나는 홍아가 고아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달칵.

문을 닫은 아겔은 밖으로 나왔다.

.

.

줄리안과 대화를 마친 아겔은 거실로 나왔다.

딸에 대해선 더 말해도 줄리안이 듣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지적받는 걸 그리 좋아하는 놈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겔은 그가 려홍에게 자신이 아비임을 밝혔으면 했다.

‘아버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꽤 큰 법이니.’

생각을 떨쳐 낸 아겔은 식사나 할 요량으로 부엌을 향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려홍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르신.”

“그래. 식사하러 왔느냐? 조금 늦었구나.”

“아, 식사는 했습니다. 다른 걸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려홍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배가 준비되었습니다. 당장 출발할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출발은 언제로 하시렵니까.”

아겔이 햇빛이 쏟아지는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오늘부터 작은 달이 뜨겠구나.”

“예.”

“그럼 오늘 밤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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