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11)화 (112/186)

111화 항해 (2)

려홍의 눈은 갈라지는 해일을 바라보았다.

해일뿐만 아니라, 배 앞에 있는 바다가 갈라지는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재해와도 같은 위력.

줄리안의 파괴적인 기의 특성에 기인한 힘이었다.

쿠우우우……! 쏴아아아아…….

-으읏……!

-떨어지지 않게 뭐라도 붙잡아!

-난간은 붙잡지 마!

갈라진 바다가 출렁여 배도 심하게 요동쳤다.

위험해 보였지만, 다행히 배가 뒤집히는 일은 없었다.

솨아아아…….

출렁이던 수면이 점차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비를 내리던 먹구름조차 갈라지고, 곧 달빛이 다시 바다를 비추었다.

려홍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제 어머니의 검술을 알고 계시죠?”

“…….”

려홍은 줄리안이 휘두른 검술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 위령의 검술이란 걸 단박에 알아보았다.

줄리안이 검을 휘두를 때, 마치 자신의 어머니가 휘두른 것처럼 환상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마치 어머니라면 반드시 저렇게 휘둘렀을 것이라는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줄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저 가쁜 숨을 애써 숨기고 출렁이는 바다를 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열었다.

“그냥 몇 번 곁에서 본 적이 있을 뿐이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지켜본 것만으로 따라 할 수가…….”

줄리안은 그에 관해선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검을 돌려주려 선수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파삭…….

줄리안의 거친 기운을 견뎌 내지 못한 검이 모래가 무너지듯 깨져 버렸다.

인상을 찌푸린 그는 검을 내밀었다.

“쓰레기 같은 검이군.”

“아…….”

잠시 먹먹한 얼굴을 하던 려홍은 손잡이만 남은 검을 받아들었다.

“어머니께서 선물해 주신 건데…….”

“…….”

줄리안은 속으로 조금 당황했지만,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려홍이 조금 붉어진 눈으로 줄리안을 노려보았다.

“쓰레기라고 말할 정도의 물건은 아닙니다. 취소해 주세요.”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하지. 그럼 뭐라 부르지?”

“당신……!”

“끌끌, 싸우지들 말거라.”

어느새 나타난 아겔이 두 사람 사이에 섰다.

“남의 검을 깨 먹은 주제에 아주 당당하구나, 줄리안.”

“내 탓이 아니다. 내 힘을 견디지 못한 검의 문제지.”

“그럼 내가 네 권총을 한번 써 봐도 되겠느냐.”

“…….”

“권총을 박살 낸 다음에 돌려주기 전에 네 잘못을 자각해라. 무기는 그 주인과 한 몸인 법이란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아겔의 말에 줄리안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가 자신의 권총을 부순다면 극도의 분노를 느낄 것 같았다.

이 권총은 한 사람에게 단 하나의 무기만 만들어 주는 '고독의 대장장이'가 만들어 준 무기이니.

“네 무기에 너만의 가치가 있듯이, 려홍의 무기에는 홍아만의 가치가 있는 게다.”

“무려 ‘대장장이’가 만들어 준 내 권총이 이따위 검과 가치가 같을 것 같나.”

“끌끌, 그렇게 속물적으로만 보는 눈은 언제쯤 변할꼬.”

아겔이 려홍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무기는 내가 더 좋은 것으로 가져다줄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대장장이가 만든 무기로 말이다.”

“저, 정말입니까?”

려홍의 눈이 커졌다.

고독의 대장장이는 꽤 유명한 편이었다.

3개의 세력으로 나뉜 상급 죄수들의 땅, 절지에서도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사람.

누가 되었든 평등하게 무기를 하나씩만 만들어 주며, 죽어도 한 번 더 무기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절지에 살고 있었기에, 대륙에 사는 중급 죄수들은 그에게 무기를 받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장장이와는 내가 아는 사이다. 부탁하면 아마 들어줄 게다. 위령을 성불시키고 바로 부탁해 보마.”

“저야 감사하지만…….”

려홍은 그럼에도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줄리안을 노려보았다.

아겔이 슬며시 다가와 말했다.

“사람 대하는 데 서투른 면이 있는 놈이라 그런 게야. 속이 조개껍질보다도 작은 놈이다. 바다 같은 마음씨를 가진 네가 이해하거라.”

아겔이 그렇게 말하자 려홍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고맙구나.”

아겔의 말을 엿들은 줄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 조개껍질이라고 했나.”

아겔이 기침을 했다.

“흠흠, 쓸데없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지. 중요한 건 해일이 왜 왔냐는 게야.”

잔잔했던 바다의 수면.

그런데 갑자기 해일이 몰려왔다.

원래라면 파도가 출렁이는 전조라도 있어야 하는데, 해일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다음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도가 출렁이는 부자연스러운 현상.

아겔의 말대로 뭔가 이상하긴 했다.

“확실히…….”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 아무리 이곳이 만들어진 교도소라고 해도.”

줄리안의 말에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끝섬으로 가는 걸 방해하는 놈들이 있는 것 같구나.”

“……도대체 누가.”

“가 봐야 알겠지.”

아겔은 앞이 보이지도 않건만, 마치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처럼 얼굴이 바다 끝을 향하고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곱게 죽이고 싶지는 않구나.”

* * *

끝섬.

바다에서 갈 수 있는 가장 서쪽에 있는 섬.

그 이후로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끝없이 몰아치기 때문에 배로는 더 갈 수가 없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는 섬은 크기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야자수와 작은 수풀, 그리고 섬 중앙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제단 하나가 있었다.

위령을 기리기 위한 패가 놓인 제단.

그 제단의 바위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었다.

“언제쯤 오려나. 해일 따위에 죽어 버린 건 아니겠지. 그럼 너무 심심한데.”

목에 줄리안처럼 검은색 6이라는 낙인이 새겨진 청년이었다.

원래는 대륙에 있을 수 없는 상급 죄수. 그러나 지금은 '원탁'의 명령을 받아 끝섬에 와 있었다.

“매일 아줌마 곡소리 듣는 것도 지겹고. 언제쯤 흡수할 수 있으려나.”

청년이 받은 임무는 끝섬에 있는 위령의 혼령을 타락시키는 것.

원혼으로 만들어 때가 차면 그녀의 혼을 흡수해 절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폭주하는 위령의 주술은 막을 수 없었지만, 청년에게 해가 끼치는 일은 아니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심심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바다 쪽에 있는 중급 죄수들이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닫고 이쪽으로 와도 재밌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우웅…….

그의 품속에 있는 수정구 하나가 떨려 왔다.

청년은 급히 수정구를 한쪽에 잘 쌓아 올린 바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숙였다.

“위대한 주술사시여, 부름에 응합니다.”

이제껏 지루해하던 모습과 달리 지금은 극도의 예를 보이는 청년.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로.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음침한 목소리.

수정구 너머 말하고 있는 자는 보로와 같은 급수의 죄수였지만,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큰 차이가 나는 괴물이었다.

보로가 이제 막 상급 죄수가 된 반면, 그는 백여 년이 넘게 상급 죄수로 활동하고 있었으니.

“위령의 혼을 타락시키는 데 거의 성공했습니다. 사흘 후면 흡수해서 절지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에 차질이 있어선 아니 된다. 위령의 혼만큼 강력한 혼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물론입니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바다 쪽에선 움직임이 없나?]

보로가 사실대로 고했다.

“배 세 척이 이쪽으로 향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바다 몬스터를 부려 해일을 만들어 보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만전을 기하라. 마피아킹이 절지에서 자리를 비웠다는 확실한 정보가 들어왔다. 놈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항상 주의해라.]

마피아킹.

약탈자의 3개의 세력 중 하나를 이끄는 고독의 거두.

아무리 보로라도 그와 1 대 1로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세간에서 평하길 그는 ‘약탈자’와 맞먹는 무력을 지녔다고도 했으니까.

그래도 보로는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완벽히 준비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마피아킹이 온다 하더라도 일을 마무리하고 빠져나갈 확신이 있었다.

“염려치 마십시오. 아겔라스토스가 직접 오지 않는 이상, 문제없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널 원탁의 중급 간부로 추천할 것이다. 수족으로 삼을 터이니 확실히 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주술사이시여!”

수정구가 잠잠해졌다.

보로는 수정구를 회수했다.

“후후, 이제 나도 중급 간부인가. 중급 간부가 되면 강해질 기회가 있을 거야.”

원탁.

고독의 사악한 자들이 모여 결성한 특수 목적 집단.

이들이 목표로 하는 일은 단순했다.

바로 이 지독한 교도소, 고독에서 나가는 것.

원탁은 고독에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위령을 원혼으로 만들어 그 힘을 흡수하는 것도 그 원대한 목표의 일환이었다.

“언젠간 이 지긋지긋하고 심심한 교도소에서 나가고 말 테다.”

혼자 중얼거린 보로는 제단 안으로 들어갔다. 원혼이 된 위령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제단의 입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키 작은 보로가 허리를 굽혀야 할 만큼.

안으로 들어선 보로는 돌로 이루어진 제단 안에 작은 돌로 된 받침을 바라보았다.

그 돌 받침에 위령의 패가 박혀 있었다.

흑수석으로 만들어진 패는 타락한 녹빛 기운에 휘감겨 있었다.

보로는 그 기운을 손으로 이리저리 흐트러뜨렸다. 그러자 패 안에 있던 위령의 혼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으으으으…….]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는 혼령. 원혼이 되었어 타락했어도 그 아름다운 모습은 쉽게 변질되지 않았다.

원혼이 된 위령은 붉은 눈물을 흘리며 보로를 쏘아보았다.

“하, 이 아줌마 아직도 포기 안 했네. 포기하면 편해. 이쯤 했으면, 그냥 버티지 말고 편해지는 게 어때?”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무리 네가 날 타락……! 끄으으…….]

“진짜 생전엔 대단한 주술사이긴 했구나. 그래도 카흘탁 님의 주술은 못 푸나 보네.”

보로가 씩 웃었다.

원탁의 주술사, 카흘탁.

위령은 그의 마기 가득한 주술로 인해 타락한 상태였다.

“그만 버티고, 오늘도 실컷 울어 보라고.”

[아, 안 돼……!]

보로가 손을 휘두르자, 녹빛 기운이 억압하듯 위령의 혼령을 붙잡았다.

그러자 조금이나마 총기가 남아 있던 그녀의 눈이 흐려지고, 곧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위령을 타락시키는 과정이었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악-!]

“어휴, 시끄러우니까 나가 있어야겠다.”

제단 밖으로 나온 보로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배가 해일로부터 살아남아 이쪽으로 오진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이, 바다 쪽에서 다가오는 세 척의 배가 있었다.

“그래. 심심했는데, 잘됐네.”

대륙에 상급 죄수는 없다. 모두 보로보다 약한 자들.

약자를 괴롭히길 좋아하는 보로는 심심함을 이길 즐길 거리가 생겼음에 기뻐했다.

해안가로 걸어 나간 보로는 세 척의 배를 바라보았다.

“어떤 놈들이 왔는지, 면상 좀 볼까. 애들아.”

쿠릉…….

땅이 진동했다.

바닷속에 있던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좀 놀아 주고 와. 다 죽이면 안 돼, 알겠지?”

커다란 물살이 끝섬에서부터 배가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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