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끝섬 (1)
아겔은 배가 출렁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저 밑바닥에서 다가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곁에 선 줄리안도 날카로운 눈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정말로 우리가 섬으로 오는 걸 꺼리는 친구가 있었나 보구먼. 바다 몬스터를 부리는 것을 보니, 허접한 실력은 아니야.”
뿌드드득.
가죽 장갑을 낀 줄리안이 강하게 주먹을 쥐는 소리가 들렸다.
끝섬에 누군가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누군가는 위령을 원혼으로 만든 장본인이 틀림없을 것이다.
아겔은 줄리안의 분노를 이해했다.
“줄리안.”
“왜.”
“네가 나서 줘야겠다.”
줄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보고 저 소금기 가득한 바다에 들어가라는 건가.”
“여기서 배가 침몰당하고 섬까지 헤엄쳐 가고 싶으면 그리해도 된다. 물론 바다 몬스터들의 표적이 되는 것도 당연하고.”
“…….”
줄리안은 려홍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무리 6급 죄수라도 물에 빠지면 본 실력을 낼 수 없고, 바다 몬스터들의 한 끼 식사가 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녀가 아끼는 이 배의 전사들도 마찬가지.
어차피 그들의 목숨 따위 줄리안은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했지만, 한 사람만은 달랐다.
“네 딸이 물고기밥이 되도록 둘 게냐.”
“흥…… 재촉하지 마.”
줄리안이 권총 홀더를 풀었다.
“어차피 내가 갈 생각이었으니. 당신은 옛날부터 이런 몬스터와 상성이 안 좋으니까.”
“끌끌, 그래. 잊지 않고 있었구나. 사람은 내게 맡겨라.”
코트를 벗은 줄리안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엇……!”
려홍이 바다로 뛰어든 줄리안을 보고 눈을 크게 떴지만, 아겔이 다독였다.
“괜찮다. 지옥에 떨어뜨려도 아득바득 기어 올라올 놈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하지만…… 바다 몬스터는 차원이 다른 괴물들인데…….”
“그것보단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나을 게다. 이제부터 조금 출렁일 테니.”
“엇…….”
아겔의 말대로 점점 파도의 출렁임이 커지기 시작했다.
쿵……! 쿵쿵쿠웅……!
수면 아래 바닷속에선 마치 대포를 쏘는 것 같은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줄리안이 바다 몬스터들과 격돌하면서 생긴 충격이 근처를 뒤흔들고 있었다.
촤아아악……!
“키에에에에엑-!”
배보다 몸통이 굵은 바다 몬스터가 근처에서 수면을 뚫고 솟아올랐다.
몬스터의 몸에는 줄리안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몬스터의 비늘 가까이 권총을 가져가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바다 몬스터의 몸통이 대포를 맞은 것처럼 뚫리고 생기를 잃은 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자리로 수없이 많은 바다 몬스터가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겔이 말했다.
“어서 끝섬으로 가자꾸나. 달빛이 있어도 몬스터들이 피 냄새를 맡았으니, 끝도 없이 몰려들 게야.”
려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속 전진……! 끝섬까지 속도를 늦추지 마라!”
배의 주술을 담당하는 전사들이 집중했고, 주술진이 강하게 빛났다.
세 척의 배는 위태롭긴 해도 뒤집히지 않고 쾌속하게 끝섬을 향해 나아갔다.
아겔은 선수에 서서 또 뭐가 있는지 기척을 살폈다.
“역시…….”
끝섬 쪽에서 마기가 느껴졌다.
뭔가 완성하듯이 점점 강해지는 마기의 기운.
아겔이 려홍에게 말했다.
“충격에 대비하라고 하거라.”
“아…… 전원 충격에 대비한다! 몸을 숙여라!”
그와 동시에 끝섬에서 녹색의 무언가가 하늘로 솟구쳤다.
솟구친 구체들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으로 변하더니, 녹빛을 유지하며 배를 향해 쇄도했다.
아겔은 날아오는 불꽃의 구체들을 단검을 휘둘러 소멸시켰다.
그러나 혼자서 막기엔 배의 면적은 너무 컸고, 떨어지는 구체의 수도 너무 많았다.
화륵!
“꺄아아아악……!”
여전사 중 몇 명은 불꽃에 맞고 그대로 타올라 재가 되었다.
사람을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버리는 위력.
사악한 흑마법의 기운도 그렇고, 구체의 사정거리를 보아 상대는 강한 실력자가 분명했다.
려홍은 재빨리 전사들을 구체가 닿지 않는 곳으로 모았고, 아겔만이 선수에 서서 적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이런…… 배가 못 견디겠군.’
아겔은 직감적으로 배가 무너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양옆에 있는 배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끝섬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아겔이 소리쳤다.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라!”
아겔의 외침에 전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다로 몸을 던졌다.
전부 수영에 숙달된 전사들이라 바다 몬스터의 공격이 아니라면, 문제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배에서 불꽃의 구를 막아 내던 아겔도 이내 바다로 몸을 던졌다.
풍덩……!
“어르신……!”
려홍이 아겔을 향해 소리쳤으나, 그는 이미 부서져 산산조각이 난 배의 잔해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가 전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끝섬으로 헤엄쳐라! 여기에 남아 있으면 죽는다!”
려홍과 전사들은 서둘러 끝섬을 향해 헤엄쳐 갔다.
* * *
끝섬 해안가에 도착해 전사들을 추스른 려홍은 암담함을 느꼈다.
돌아갈 배도 없거니와 함께 온 전사 중 3분의 1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활녀당의 최정예 전사 50명을 학살한 자.
그가 끝섬 중앙에 있었다.
으득.
이를 악문 려홍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섬 중앙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타락시킨 자가 중앙에 있을 테지만, 지금은 아겔과 줄리안이 없었다.
그들의 초월적인 강함이 없다면, 전사들을 이끌고 섬 중앙으로 진입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려홍은 전사들에게 부상자를 돌보고 휴식을 명했다.
그녀는 따로 전사들 사이에서 떨어져 나와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펑……! 퍼버버버벙-!
줄리안이란 자는 아직도 바다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지, 저 멀리서 대포 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괴물 같은 자가 틀림없었다.
폭풍우와 해일을 갈라냈을 때부터 그 무력은 인정했으나, 바다 괴물들과도 저만큼 우악스러운 전투력을 낼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어르신…….”
줄리안은 둘째 쳐도 아겔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전사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배를 지키다가 홀로 바다에 뛰어들었던 아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부서져서 바닷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배의 잔해들을 아무리 살펴도 아겔은 없었다.
려홍을 주먹을 쥐었다.
둘의 생사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겐 어머니의 안위도 중요했다.
이대로 포기한다면, 두 사람의 희생을 헛되이 만드는 것.
그녀는 이후 섬 중앙으로 진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절대로 두 분의 수고를 헛되게 할 수 없다.’
려홍은 서둘러 전사들이 모여 있는 해안가로 향했다.
“전사들아, 휴식은 끝났다. 나를 따라 섬 중앙으로 진입하자.”
려홍의 명령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던 전사들이 결연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 있는 자 중에 위령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자는 없었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위령을 구하기 위해 모인 전사들.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사를 준비가 된 자들이었다.
전사들이 움직이려는 찰나.
해안가에서 섬 중앙으로 이어지는 숲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핫, 이 달밤에 좋은 장난감들이 도착했네. 반가워, 장난감들아.”
려홍은 놀라는 대신 서둘러 자세를 낮추고 전투 준비를 했다.
전사들이 검과 방패를 꺼내 들고, 숲에서 나온 청년을 바라보았다.
“기세가 좋아. 그래야 가지고 노는 재미가 있지.”
눈살을 찌푸린 려홍이 말했다.
“너는 누구냐…….”
“대답해 주는 게 맞겠지? 어차피 가지고 놀다가 다 망가질 테니까. 나는 보로야.”
“네가 어머니를 원혼으로 만든 장본인이냐?”
“어머니?”
흑마법사 보로가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눈이 조금 커지더니 손뼉을 쳤다.
짝!
“아하! 너, 위령의 딸이구나! 어쩐지 얼굴이 낯익다 했더니!”
“어머니를 어떻게 한 거야!!”
려홍은 소리를 지르면서도 이성을 잃고 달려들지 않았다.
청년의 얼굴로 보였지만, 저 보로라는 자는 겉모습과 달리 강대한 마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최소한 자신보다 몇 배는 오래 살아온 괴물이리라.
보로가 귀를 파면서 말했다.
“어휴, 시끄러워라.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줘야겠네. 그년 딸이라 그런지 목청이 아주 좋아.”
“어머니를 모욕하지 마라! 돌격!”
려홍이 명령을 내리자, 전사들이 빠른 속도로 보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보로는 씩 웃으며 말했다.
“풀크라필리아. 어여쁜 딸아. 어머니 달이 떠오르기 전에 망가뜨려 주마.”
.
.
.
아겔은 바다에 떠 있었다.
그는 슬슬 몸을 움직여 끝섬이 있는 쪽으로 헤엄쳤다.
“수영도 참 오랜만이구먼.”
배가 완전히 부서지기 전에 안전하게 바다로 뛰어든 아겔이었다.
소란스러운 난파에 바다 몬스터들이 몰려들었지만, 아겔에게 관심을 주는 놈은 없었다.
놈들은 나무로 된 배를 뜯어 먹기 바빴다.
아겔은 끝섬 해안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섬 전역에 펼쳐진 흑마법의 기운을 읽었다.
“이런. 흑마법진이 섬 전체를 감싸고 있나.”
꽤 준비를 오랫동안 한 모양이었다. 놈이 공을 들이고 있다는 뜻.
위령을 타락시켜 원혼으로 만드는 일을 중히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떤 놈이려나.”
감정에 지배되기보단 아겔은 왜 그랬는지 추론하기 시작했다.
범인은 아마 [원탁] 소속의 흑마법사일 것이다. 주술사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잠입한 게 틀림없다.
이 정도 세밀한 흑마법진을 펼칠 실력이면 절지에 사는 상급 죄수가 분명했다.
“상급 죄수를 파견해 혼령을 원혼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그냥 분란을 일으키려는 건 아닐 테고.”
상급 죄수들의 전쟁이 한창인데, 괜한 대륙을 건드려 봐야 돌아올 것이 없었다.
놈들이 원하는 것을 이참에 밝혀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아겔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내버려 두었구나.”
그는 새삼 자신이 정말 긴 시간 고독의 어둠 속에 잠잠히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진작에 움직일 수 있었지만, 마음의 분노를 삭이느라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짓밟고 무너뜨리고 잔혹하게 부수는 것으로 분노를 풀지는 않는 아겔이었다.
그딴 하찮은 일로는 분노가 풀리지 않을 테니.
그래도 마음을 가라앉혔으니, 이제부터 움직여도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고독은 그의 집이요, 때가 도래할 때까지 머물 안식처이니.
아겔은 해안가에서 섬 중앙의 숲을 향하여 걸어갔다.
“호오. 저쪽이구먼.”
숲을 향해 걷던 아겔은 옆쪽 해안가에서 전투의 소음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마 활녀당의 살아남은 전사들과 위령, 그리고 이 일의 범인이 격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겔은 신속하게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숲을 통해 은밀하게 돌아온 아겔은 흑마법사의 뒤를 잡았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역시 줄리안과 똑같이 절지에서 넘어온 상급 죄수가 틀림없었다.
이만한 흑마법 실력을 가진 자는 대륙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하하하! 조금 더 발악해 줘! 이 정도로 부서지면 너무 아쉽잖아!”
젊은 목소리의 흑마법사는 마구 전사들을 공격하며 유린하는 듯했다.
아겔은 단검을 들고 빠르게 흑마법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푸욱……!
“엇…….”
흑마법사는 자신의 등을 관통하는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단검이 그의 척추를 부수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넌 뭐야……?”
아겔은 고개를 홱 돌렸다.
분명 찌르는 감각이 있었고 지금도 느껴지는데, 목소리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마치 아겔이 찌른 건 분신이었던 것처럼.
“호오, 분신술을 쓸 줄 아나?”
“그냥 술법이 아니라, 흑마법이긴 해. 그런데 다 늙은 노인이 여긴 왜…….”
청년이 말을 흐렸다.
아겔의 겉모습을 그제야 찬찬히 살펴본 그는 침묵했다.
“자네도 내가 누군지 아는가 보구먼.”
“…….”
푹푹……! 푸부부부부북!
아겔은 아직 살아 있는 보로의 분신을 단검으로 마구 찔렀다.
아무리 분신이라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
“자네인가. 위령을 타락시킨 자가.”
분신의 목을 확실하게 잘라서 죽여 버린 아겔이 손에 묻은 피를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