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13)화 (114/186)

113화 끝섬 (2)

아겔은 숨을 거둔 흑마법사의 분신에서 손을 뗐다.

털썩.

쓰러진 흑마법사의 분신은 그 뒤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사람이었던 것처럼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신기한 분신술을 쓰는구먼. 마치 진짜 같아.”

“하하…… 그래 봤자지. 고독에서 너만큼 신기한 자가 또 있을까.”

긴장한 흑마법사의 기색이 아겔에게도 느껴졌다.

아겔은 그에게 주의를 거두지 않으며, 주변에 다른 기척이 있는지 살폈다.

낯선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해안가 주변에 쓰러진 전사들이 느껴졌다.

‘전부 당했구먼.’

아직 죽지 않고 숨을 쉬는 전사들. 그들이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흑마법사가 전사들을 가지고 논 것이리라.

“어르신……! 놈을 조심해야 합니다!”

뒤에서 려홍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려홍은 큰 상처를 입진 않은 모양인지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도 알고 있으니.”

아겔은 다시 고개를 돌려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지니고 있는 마기가 상당하구먼. 대륙에 있을 죄수가 아닌데.”

“그래, 잘 아네. 하긴 내가 여기서 이따위 것들이랑 놀고 있을 사람은 아니긴 하지. 당신과 만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말이야. 마침 이것들은 슬슬 질리던 참이었어.”

보로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리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활녀당의 전사들은 압도했지만, 눈앞에 있는 노인은 달랐다.

‘제기랄, 진짜 아겔이 나타나다니. 하필이면…….’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던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활녀당의 어리숙한 전사들만 온 줄 알았더니, 고독의 어둠에 숨어 있던 괴물, 아겔이 정말로 올 줄이야.

설마 활녀당과 아는 사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그 악명 높은 아겔을 만나게 되다니.”

상급 죄수의 땅, 절지에서도 아겔의 이름은 유명했다.

중하급 죄수들보다는 아겔의 이름은 상급 죄수들 사이에서 더욱 악명 높았다.

개방 시기가 아닌, 본관에 있을 때는 아무리 상급 죄수라도 아겔을 만나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부끄럽구먼. 내가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말일세. 그래, 날 만나게 되어서 기분이 어떤가.”

아겔이 천천히 흑마법사에게 걸어갔다.

보로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노인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압박감이 사방에서 사지를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보로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위령의 혼을 회수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원혼으로 타락시키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악한 힘이 최고조에 이르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최상의 상태로 확보하라는 주술사의 명령이 있었기에 보로는 싸움을 각오했다.

“뭘 어때. X 같지.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괴물이 나타났으니까.”

푸확!

보로가 갑작스럽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애벌레 몬스터가 해변의 모래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짤막한 다리가 수십 개가 달린 지네 같은 모습. 괴물은 모래를 털어 내며 해안가를 진동하게 했다.

쿠오오오오……!

몬스터를 길들이는 데 일가견이 있는 듯한 보로의 능력이었다.

원래라면 해안가인 이 주변에서 애벌레형 몬스터는 쉽게 볼 수 없었다.

“하하, 내가 주는 장난감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보로는 웃음소리를 내며 곧장 섬 중앙으로 달렸다.

웜 몬스터는 곧장 아겔을 향해 거대한 입을 쫙 벌리고 달려들었다.

“쿠오오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

타액이 줄줄 흐르는 입이 아겔 코앞까지 다가왔다.

쾅!

커다란 이빨이 검을 들고 있는 누군가에게 가로막혔다.

전사들과 다를 바 없이 아직도 전신이 물기에 젖은 려홍. 그녀는 이를 악물고 웜의 강력한 힘을 막아 내었다.

웜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려던 아겔은 려홍이 자신 앞으로 달려오는 기척을 느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려홍?”

“어르신…….”

가녀린 몸으로도 주술의 힘으로 강화된 신체는 거대한 웜 몬스터의 힘을 거뜬히 받아 내고 있었다.

아직 그녀는 힘이 남아 있었다.

“저 대신 흑마법사를 쫓아 주십시오.”

“어머니의 원수를 직접 상대할 생각이 아닌 게냐.”

“제 상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객기로 덤벼들었다가, 어르신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려홍은 자신이 흑마법사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겔이 오기 전, 쓰러진 수십의 전사.

그녀는 흑마법사의 장난스러운 공격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고 전사들이 농락당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려홍이 물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확실히 처리해 주십시오…… 직접 숨통을 끊어 주셔도 좋습니다.”

결연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에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놈을 죽여 주마.”

아겔의 확언에 안심이 되었는지, 려홍은 몸의 떨림이 점차 가라앉았다.

려홍의 전신에서 주술 문자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압……!”

그녀가 기합을 내지르며 웜 몬스터를 밀어냄과 동시에 아겔이 뛰었다.

몬스터는 아겔을 따라가려 했지만, 려홍의 검이 몬스터의 가죽을 헤집었다.

키에에에엑-!

거대 괴수의 끔찍한 비명을 뒤로하고 아겔은 숲으로 뛰었다.

달빛조차 숲의 그늘을 거의 뚫지 못했지만, 어차피 앞이 안 보이는 아겔에겐 숲을 지나치는 게 전혀 문제가 없었다.

얼마쯤 뛰어가자, 앞서가는 보로의 기척이 느껴졌다.

“정말로 다른 놈들은 없는 모양이로구먼.”

섬에서 느껴지는 낯선 기척은 보로의 것 하나였다.

홀로 왔긴 했지만, 놈이 얼마나 이 일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는지는 알 수 있었다.

원래도 끝섬은 활녀당 이외의 인물에겐 관심이 없는 곳.

활녀당조차 개방에 만월이 뜨는 시간이 아니면 갈 수 없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위험한 바다를 건너 끝섬에 가지 않는다.

한데 절지에서 흑마법사가 파견될 줄은 아겔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섬 전체에 흑마법진을 깔아 둔 이유는 뭐지.’

전사들과 려홍은 느끼지 못했지만, 아겔은 지금도 피부로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보로가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흑마법진.

흑마법진의 용도는 적의 침입에 대비한 결계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려홍의 여전사들이 해안가에 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적이 노리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차피 궁지에 몰린 건 놈이다. 천천히 몰아가면 된다.’

급할 것이 없는 아겔은 슬슬 보로의 뒤를 쫓았다.

보로는 전력을 다해 뛰었지만, 아겔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겔은 놈이 무엇을 하려는지 파악하기 위해 일부러 거리를 두고 보로의 기척을 살폈다.

그러나 아겔의 생각과 달리 보로는 그를 떼어 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곧장 위령의 제단으로만 뛰고 있었다.

마치 유도하듯이.

아겔은 적이 함정을 파 놓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굳이 도망칠 이유가 없었기에 쭉 따라갔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

제단과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곡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겔에겐 영향이 없는 주술이었지만, 왜인지 그녀의 곡소리는 아겔의 마음마저 흔들었다.

감정의 변동을 느낀 아겔은 입을 꾹 다물고 끝까지 보로를 추적했다.

결국, 두 사람은 위령의 제단까지 뛰어왔다.

아겔은 제단 앞에서 뜀박질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는 보로를 볼 수 있었다.

“크큭, 후우…… 역시. 여기까지 따라올 줄 알았다.”

의기양양한 보로는 이미 제단 안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손에 위령의 패를 들고 있었다.

“그거 이리 내놓게.”

“크큭, 협상하고 싶으면 가지고 있는 패부터 보여 줘야지. 내가 이 패를 부수면 위령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보로는 여유를 되찾았다는 듯이 위령의 패를 건들건들하게 흔들었다.

“내가 힘만 주면 이 패는 부서져. 그럼 위령은 성불하지 못하고, 영원히 이승을 떠돌겠지.”

“…….”

“자, 그럼 카드는 이쪽에 있다는 건 알았을 테고.”

“뭘 원하는가.”

“날 놓아 줘라. 그리고 해안가에 있는 버러지들은 전부 죽여. 바다에서 내 몬스터를 도륙하고 있는 놈까지.”

보로는 아겔 일행에 활녀당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도 바다에서 그가 테이밍한 몬스터와 싸우는 자.

줄리안이 따라왔다는 걸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단신으로 몬스터들과 싸울 정도로 강자라는 건 아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놈은 도대체 누구야? 어떤 놈이길래 내 몬스터들을 학살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말할 것 같은가.”

“헤헤, 말 안 할 거야?”

보로가 손에 있는 패를 강하게 쥐었다.

그러자 위험해 보이는 녹빛이 더욱 활발해지며, 패 안에 있던 위령의 원혼이 밖으로 끌려 나왔다.

아름다운 혼령의 모습은 녹빛에 의해 타락했고, 심히 상처 입은 모습이었다.

아겔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혼령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위령…….”

그녀는 고통스러운지 머리를 감싸고 신음을 내었다.

[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대답해. 바다에 있는 놈이 누구냐니까.”

잠시 침묵하던 아겔이 입을 열었다.

“마피아킹.”

“……?”

보로는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주술사가 마피아킹이 절지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떠올림과 동시에.

“절지의 도시 크라이미넬의 주인, 마피아킹일세.”

“……!”

아겔이 재차 말함으로 경악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마, 마피아킹? 놈이 왜 여길…… 아니, 말도 안 돼. 절지에서 자리를 비우고 대륙으로 넘어왔다고?”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거짓말하지 마! 놈이 여길 왜 와!”

마피아킹이 대륙으로 넘어왔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 보로는 소리 질렀다.

그와 엮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마피아킹은 알 수 없는 약물로 끝까지 사람을 괴롭히다가 죽이는 잔인한 죄수라고 알고 있었다.

사람의 비명을 들으며 숙면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아무리 같은 급수의 죄수라도 마피아킹은 보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보로는 믿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손에 있던 패를 들어 아겔로 하여금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흔들었다.

“그럼 그놈도 니가 죽여. 할 수 있지?”

“……”

“안 할 거야? 그럼 위령은 영원히 이승을 떠도는 거지. 영원히.”

보로는 쥐고 있는 위령의 패를 압박했다.

패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점점 깨질 듯한 기미를 보였다.

그런데도 아겔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끝까지 버틴다고 생각하는 보로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보다 잘 버티는데, 젠장.’

패를 깨면 보로도 위령의 원혼을 흡수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살아남는 게 급선무.

그는 자신의 발밑에 설치한 포탈 마법진과 섬 전체에 새겨 넣은 폭발 흑마법진을 작동시킬 생각이었다.

‘깨고 도망간다. 주술사님껜 실패했다고 보고해야겠어.’

이 일을 위해 공을 들인 시간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주술사는 아겔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좋아할 수도 있으니 위안 삼았다.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지은 보로가 아겔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웃는 건 보로뿐만이 아니었다.

‘웃어……?’

아겔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노인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죽이진 마라.”

그와 동시에 대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이 들리며, 위령의 패를 들고 있던 보로의 오른팔이 어깨부터 없어졌다.

잘려 나간 것도 아니고, 폭발하듯이 터져 나간 어깨와 오른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리는 검은 기운이 총알을 지나간 궤적을 따라 스파크를 튀겼다.

보로의 눈이 커졌다.

위령의 패를 들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으니.

“……!”

용하게도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고통을 참도록 훈련받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뒤에서 걸어오는 남자의 실루엣을 보고 경악의 감정은 숨기지 못했다.

“재밌군. 비명을 안 지르다니.”

소금기 가득한 물을 전신에서 뚝뚝 흘리며 걸어오는 장신의 남자.

숲과 어울리지 않는 검은 구두를 신은 흑발의 남자는 야수와 같은 주황색 눈을 하고 나무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밤 내내, 네 비명은 어떤지 듣고 싶구나.”

줄리안이 긴 팔을 뻗어 피가 흐르는 보로의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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