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14)화 (115/186)

114화 끝섬 (3)

줄리안이 흑마법사 보로의 짓이겨진 어깨를 붙잡자, 그는 자지러지듯 반응하며 무릎을 꿇었다.

피가 줄줄 흘러나올 정도로 쥐어짜듯이 잡힌 어깨.

보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는 쉽게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끄으으…… 네가…… 어째서 네가 여기에…….”

“버러지가 알 바 아니다.”

어깨를 잡은 손을 놓고 길쭉한 발을 든 줄리안은 구두로 그의 머리를 밟고 땅에 짓눌렀다.

“끄으으…….”

흙바닥에 얼굴을 짓눌러 준 줄리안은 다음 타깃을 잡았는지 발로 남아 있는 보로의 팔을 부러뜨렸다.

쁘각!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부러진 곳을 구두 뒷굽으로 헤집어 주었다.

“흡……!”

뼈가 부러지다 못해 으스러지고 있는데도, 보로는 숨을 참았다.

“끄으으…… 원하는 게 있으면 말로 해……!”

“아니.”

줄리안의 차가운 주황색 눈동자에는 온기 따위가 돌지 않았다.

“버러지 따위에게 원하는 건 없다. 비명이나 질러라.”

“으으, 제기라아아알…….”

두 팔이 못 쓰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보로는 그 와중에도 틈을 노려 줄리안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허공에서 찰나의 순간 뭉쳐지는 마기.

그러나.

휙.

그 앞에서 팔을 휘두른 아겔의 손길에 뭉쳐지던 마기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보로의 눈이 멍하게 되었다.

“아……? 어떻……게?”

분명 쉽게 대응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준비한 마기였다.

마기를 다루는 보로의 장기 중 하나.

그러나 아겔은 기다렸다는 듯이 보로가 마기를 뭉치는 순간에 파훼해 버렸다.

“마저 하거라, 줄리안. 나는 위령의 패를 살피마.”

.

.

.

아겔은 두 사람을 두고 떨어져 있는 위령의 패를 찾아 들었다. 바닥에서 주운 패는 흙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살살 털어서 흙을 걷어 낸 아겔은 패 이곳저곳을 만져 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금이 많이 갔구먼.’

패는 위령의 혼령이 거하는 거처와도 같은 것.

원래는 저승으로 가야 할 위령의 혼령이 이승에 머무를 수 있도록 마련된 혼의 집이었다.

이게 깨진다면, 위령은 길을 잃고 이승을 영원히 헤매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드넓은 우주에서 위령을 찾아 헤맬 순 없었기에, 패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령아야. 내 말 들리느냐.”

“…….”

아겔은 패에 담겨 있을 위령의 혼령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어두운 녹빛의 기운이 감돌았던 아까와 다르게 평범해진 패에선 위령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월야곡’ 또한 멈춘 지 오래였다.

위령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기운이 느껴졌기에 안에 있는 건 확실했지만, 대답이 없으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회복 중인 건가. 혼령이 정신을 잃을 리도 없고, 참.’

머리를 긁적인 아겔은 원래 패가 있어야 할 제단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입구.

허리 숙여 제단 안으로 들어간 아겔은 손으로 더듬어서 돌상을 찾았다.

“음? 이건…….”

패를 놓을 자리를 찾던 아겔은 돌상을 중심으로 설계된 흑마법진의 술식을 느낄 수 있었다.

섬 외곽 쪽에선 그저 힘이 도는 겉술식만 알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보로가 설치한 흑마법진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폭발 흑마법진. 섬을 폭파하려 했구먼.”

아겔이 흑마법진의 용도를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대체로 마법이나 흑마법을 사용하려면, ‘재료’와 ‘계산’이 필요하다는 건 기본 상식.

재료의 경우, 살아 있는 것은 ‘제물’이라 명명하고, 생에의 의지가 없으면 ‘원료’라 칭한다.

계산된 식을 완성하여 이처럼 그려 놓은 경우를 술식이라 했다.

그는 수없이 많은 흑마법사를 상대하면서 꽤 많은 술식을 접할 수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술식은 대부분 ‘기’를 통해 그려지니, 아겔이 느끼고 특징을 구분 짓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폭도 염두에 둔 건가. 폭발력이 세겠구먼.”

아겔은 위령의 패를 내려놓고 천천히 중심이 되는 돌상을 돌면서 흑마법진을 파악했다.

폭발 흑마법진엔 시간 기한이 적혀 있었다.

마치 시한폭탄처럼 이제 곧 폭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마도 이 시간이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려 했던 것 같았다.

“놈이 돌아갈 방법을 준비해 두었겠군.”

원탁의 흑마법사.

일 처리 하나 만전을 기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다만, 그도 아겔과 줄리안이 끝섬에 방문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줄리안은 원래 절지에 있어야 했고, 아겔은 행방은 누구도 쫓을 수 없었다.

개방 시기에 아겔을 쫓으러 대륙으로 내려올 정신 나간 상급 죄수는 없었고, 본관에서 아겔은 어둠과 같은 위상이었다.

그 어디에도 있고 어느 곳에도 없는 사람처럼 살아왔으니.

아겔은 위령의 패를 두고 제단 밖으로 나갔다.

밖에선 여전히 줄리안의 잔혹한 고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리 하나를 분지르고 있던 줄리안이 드디어 보로의 몸에서 발을 떼었다.

“헉헉…….”

“쉽게 무너지는 놈이 아니군.”

남은 사지가 분질러졌음에도 보로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더 이상 건드릴 곳은 생명에 지장이 갈 만한 곳.

만신창이가 된 보로는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씩 웃었다.

“크큭…… 내가 쉽게 굴복할 것 같아……? 나는 원탁의 일원이다……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래. 너희 원탁놈들은 항상 그랬지.”

줄리안이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품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그래서 나도 이걸 개발했다.”

그의 손에 있는 건 동그랗고 검은 손톱 크기의 알약.

줄리안은 강제로 보로의 입에 그 알약을 쑤셔 넣었다.

“어거걱……!”

“삼켜.”

줄리안은 입에는 알약을 넣고 목을 붙잡아 알약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도록 주물렀다.

보로는 본능적으로 그게 위험한 물건이란 것을 깨닫고 반항해 보려 했지만, 이미 짧은 시간 안에 행해진 가혹한 고문에 몸에 힘이 다 빠진 상태라 불가능했다.

꿀꺽…….

“어억…….”

보로는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신체 재생력이 빨라지는 느낌. 상처가 아물고 흐르던 피가 멎기 시작했다.

“이 무슨…….”

보로는 그와 동시에 신경이 과도하게 민감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회복되고 신경에 과부하가 작용되게 하는 알약.

짓밟힌 머리가 아까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고통이 배가 된 느낌.

“끄으으, 설마……?”

“그래. 앞으로는 좀 많이 아플 거다.”

복용한 자에게 더 끔찍한 고통을 주기 위해선 만들어진 약.

약 제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줄리안이 악마와 같은 심성으로 개발한 물건이었다.

아픔과 고통의 자극에 익숙해진 고독의 죄수들을 위해 개발된 약이기도 했다.

보로의 머리를 짓밟은 줄리안이 말했다.

“내가 왜 네 눈과 이빨을 아직 안 뽑았는지 알겠지. 고통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끄으으…… 의미 없는 짓이야…… 날 고문한다고 얻어 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닥쳐라.”

주황 눈동자가 차갑게 타올랐다.

“감히 내 여자에게 손을 댄 놈이 말이 많다.”

줄리안은 그대로 보로의 생니를 잡아 하나씩 부러뜨렸다.

우득우득 부러지는 이빨의 고통에 보로는 경련을 일으켰다.

“꺼어어억…… 크하아악……!”

참아 보려 하는 신음이 비명으로 바뀌게 된 지 조금 흐른 후.

그 모습을 잠잠히 지켜보던 아겔이 말했다.

“줄리안, 그만. 놓아주거라.”

“내가 왜.”

짐승처럼 눈을 뜬 줄리안이 홱 고개를 돌려 아겔을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인데.”

“놈이 섬에 폭발 흑마법진을 새겨 놓았다. 곧 있으면 폭발할 게다.”

“그 정돈 알고 있다. 섬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무리 내가 약해졌어도 이딴 흑마법진이 내 몸에 상처라도 낼 것 같나.”

“너와 나는 괜찮겠지. 그러나 네 딸은 아니다. 폭사하도록 놔둘 게냐.”

“…….”

“내게 좋은 생각이 있다.”

아겔이 다가가자, 줄리안은 인상을 찌푸리긴 했어도 순순히 조금 물러나 주었다.

아겔은 손을 뻗어 보로의 얼굴을 쓸었다.

그는 고문을 당해 기진맥진한 상태로도 아겔의 손길을 느끼고 기겁을 하며 버둥거렸다. 이빨이 죄다 부러져 제대로 된 말조차 하지 못하고 신음만 냈다.

“끄으으…….”

발버둥은 하찮은 몸짓에 불과했다.

아겔의 손길을 벗어날 순 없었다.

“꼬마야, 얌전히 있어라. 반항할수록 너만 아플 게야.”

“끄어어억…….”

아겔이 머리를 붙잡자, 보로는 눈자위를 드러내고 경련을 일으켰다.

경련으로 꿈틀거리는 몸은 줄리안에게 고문을 받던 때보다 더욱 심했다.

아겔은 그의 머리를 붙잡은 채로 그의 가슴에서 천천히 마기를 뽑아냈다.

“크허어억……! 끄아아아아아아악!!”

생으로 마기를 잡아 뜯기는 고통에 보로는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면서 발버둥 쳤다.

아겔은 끌어낸 마기를 이용해 섬 전체에 새겨진 흑마법진의 반응을 이끌어 냈다.

우웅…….

섬 전체가 보랏빛으로 물들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 요동쳤다. 그리고 천천히 수축되기 시작한 흑마법진의 술식이 아겔의 손바닥에 들어왔다.

“끄응, 오랜만이라 어설프구먼.”

앓는 소리를 하던 아겔은 허리를 폈다.

주름진 손안에서 보라색 빛을 발하는 흑마법진.

아겔의 손에서 온전히 유지된 그 모습에 줄리안이 의문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흑마법도 할 줄 알았나?”

“그럴 리가. 그저 남의 것에 손을 좀 댈 수 있을 뿐이야.”

“마법이나 흑마법이 신체에 닿는다고 무조건 무효화되는 게 아니었나 보군.”

“그런 셈이지.”

줄리안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겔과 아는 사이였다.

적지 않은 시간을 봐 왔기에 그의 능력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겔의 능력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뛰어난 것 같았다.

“……하긴. 곧 악마가 될 자가 못하는 게 있을 리가.”

“끌끌, 비유하는 게냐. 나는 사람이다만.”

“예나 지금이나 당신은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른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혼 좀 나 볼 테냐.”

“헛소리하지 말고 하던 거나 계속해.”

줄리안과 대화를 주고받던 아겔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손을 뻗어 폭발 술식이 담긴 흑마법을 그대로 보로의 입에 집어넣었다.

“꼭꼭 삼켜라. 내 오랜 악우에게 보낼 선물이니까.”

“어억…….”

폭발 흑마법진의 술식을 보로의 뱃속에 심은 아겔은 주변에 다른 게 없나 살폈다.

“역시.”

마기를 빼앗아 확인해 보니, 바로 옆에 포탈 마법진이 하나 있었다.

아겔은 그 마법진을 활성화했다.

우웅…….

마법진이 활성화되는 걸 보고 줄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망칠 준비까지 해 놓고 있었군.”

“당연한 일이지. 이놈들이야, 항상 말썽을 일으키고 내빼는 게 주특기였으니.”

아겔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내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주술사에게 안부 전해 주거라.”

“웁……! 우웁……!”

마치 입이 막힌 것처럼 보로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겔은 거의 넝마나 다름없는 보로를 들어 포탈 마법진을 향해 집어 던졌다.

보로의 몸을 삼킨 마법진은 그대로 사라졌다.

슈우우우욱!

* * *

절지.

죽음의 땅. 상급 죄수들조차 언제 목숨을 잃어버릴지 알 수 없는 곳.

수백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전쟁은 3개의 세력 그 어느 곳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 이어져 왔다.

그 거대한 세력 중 하나인 [원탁].

사악하고 강대한 존재들이 고독에서 결성한 집단으로 이들의 원대한 목적은 단 하나였다.

아겔을 죽이는 것.

그러나 그 궁극적인 목표를 이해하지 못한 버러지들이 전쟁을 일으켜 원탁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

개미굴처럼 만들어진 원탁의 본거지에는 수뇌부를 위한 방이 각각 따로 있었다.

적막한 한 구덩이에서 종이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노인.

다 낡은 로브를 입고 있는 그의 추레한 겉모습과 달리 구덩이는 정갈한 모습이었다.

고독에서 '주술사'라고 불리는 존재.

노인은 묵묵히 종이와 가죽에 글을 쓰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보로가 돌아왔나.”

귀신이 말하는 것 같은 거슬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뭔가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로에게 끝섬으로 가 위령의 혼령을 취하라고 지시한 것도 바로 주술사.

자신이 설치해 준 포탈 마법진의 기척을 모를 수가 없었다.

쿠궁…….

“……?”

구덩이를 나서려던 주술사는 별안간 지하가 울리는 진동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로브의 후드에 가려져 있던 타락한 보랏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서둘러 구덩이를 나선 주술사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흙과 바위 더미를 막아 내고 폭발이 일어난 근원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 *

폭탄을 심은 보로를 돌려보낸 아겔.

줄리안이 말했다.

“아겔, 위령은 어떻게 되었지.”

“위령은…… 나도 잘 모르겠구먼.”

“모른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당신이 상태를 모를 정도인가.”

“위령의 혼령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상태였다. 완전하진 않지만, 조금만 더 놔두면 끝까지 타락한 원혼이 되겠지.”

“되돌릴 방법은 없나.”

아겔은 고개를 저었다.

“원혼을 다시 평범한 혼령으로 돌릴 방법은 없다.”

“당신조차도……?”

“…….”

아겔이 대답이 없자 줄리안은 입을 꽉 다물었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겔이라면 혹시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그 아겔조차도 원혼을 되돌릴 방법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후웅…….

바람이 불었다.

제단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원혼이 된 위령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

제단 쪽으로 돌아선 아겔이 말했다.

“이제 작별할 시간이다. 준비하거라.”

“…….”

줄리안이 고개를 숙이고 이를 갈았다.

아겔이 먼저 제단 안으로 들어가고, 줄리안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를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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