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끝섬 (4)
타락한 녹빛 바람이 휘몰아치는 제단.
줄리안은 아겔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안을 들여다본 줄리안은 입술을 씹었다.
“위령…….”
[아아…… 아아아아……!]
녹빛으로 물든 위령의 혼령.
그녀는 돌상 위에 무릎을 꿇고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이성을 잃었는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모습에 줄리안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섣부르게 행동하지 마라. 원혼을 자극하면 안 돼.”
돌상 쪽에 가까이 다가간 아겔이 줄리안에게 주의를 주었다.
줄리안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자신의 아내를 안고 싶었지만, 아겔의 말을 어기진 않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알다시피 원혼을 성불시키려면, ‘제사’를 지내야 한다.”
타락한 원혼은 신성력으로도 정화할 수가 없다.
다만, 성좌 교단은 원혼에게 신성력을 퍼부어 강제로 저승으로 돌려보낼 수는 있었다.
그 방법이 그리 온건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교단의 사제가 아닌, 일반인들도 위험하긴 하나 이론적으로는 원혼을 성불시킬 수가 있었다.
그 방법이 바로 제사였다.
혼과 넋을 기리는 과정으로 다른 준비물은 딱히 필요 없었고, 혼령이 원하는 것을 딱 하나 들어주면 되었다.
이승에서의 한을 풀고 저승으로 넘어갈 수 있게 말이다.
줄리안이 말했다.
“내 아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알고, 제사를 지내지.”
“위령은 월야곡의 음성으로 너를 불렀다. 그녀는 널 원하고 있다.”
정글에서 마피아 클랜이 월야곡에 당했을 때, 그들은 위령의 감정을 대변했다.
남편인 줄리안에게 가고 싶은 그 감정을 말이다.
“그런가.”
자신을 찾았다는 말에 줄리안의 눈이 조금 후회의 것으로 바뀌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빨리 올걸.
전쟁 따위는 뒤로하고 더 서두를걸.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아겔이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다.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 하니 귀를 막아라. 아무리 너라도 대화에 끼어들면, 위령이 화를 낼 게야.”
“당신, 귀어(鬼語)도 할 줄 알았군.”
“작은 취미 중 하나이지.”
귀신의 언어를 취미로 취급하는 말에 줄리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줄리안은 아겔의 말을 따라 귀를 막아,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했다.
“준비됐다.”
“그럼 시작하지.”
아겔이 메마른 목소리로 위령에게 말을 걸었다.
[성취될 소원을 들으러 왔노라. 들리는 말에 답을 청하노라.]
위령이 고개가 홱 들렸다.
눈동자가 없는 흐릿한 눈. 원한이 담긴 눈이었다.
[누구였나, 너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위령의 모습에 아겔은 쓴맛을 느꼈다.
원혼은 생전의 기억을 전부 잃어버리고 오직 하나의 욕망을 우선시한다.
망가지고 한(恨)만이 남아,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 존재가 바로 원혼이었다.
안타까움을 느끼는 아겔이었지만, 대화를 시작한 이상 끝은 봐야 했다.
[성취될 소원을 들으러 왔다. 들리는 말에 답을 청한다.]
누구냐고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묻자 위령은 고개를 저었다.
[나의 소원은 성취되지 않아.]
절망으로 가득 차 자신의 원조차 이루지 못하리라 짐작하는 위령.
[그 아이는 다시 날 찾아오지 않을 거야…….]
아이라는 말에 아겔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남편이 아니라, 딸을 보고 싶은 게로구먼.’
정글에서 월야곡에 당한 죄수들은 남편에 대해 부르짖었지만, 막상 대화를 걸어 보니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려홍을 만나는 것이었다.
‘하긴, 자신이 성물을 통해 강제로 빙의했으니 싫어한다고 생각했군.’
원혼이 된 위령은 려홍의 목걸이를 통해 빙의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지라도 미움을 살 만한 일이라 생각해 좌절에 빠진 것이렷다.
“홍아를 데려와야겠구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위령은 남편인 줄리안을 찾기보다 그녀의 아이인 려홍을 찾았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려홍도 같이 이 끝섬으로 왔으니.
데려오기만 하면 되었다.
“줄리안.”
그는 손수건과 왼팔로 귀를 막아 아겔의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아겔과 위령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품에서 단검을 꺼낸 아겔은 돌바닥을 긁어 의사를 전달했다.
당장 려홍을 데려오라는 말을.
글씨를 읽은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제단에서 나갔다.
아겔은 다시 고개를 돌려 위령의 말을 들었다.
[감옥에서 태어난 아이였지만, 누구보다 자유를 사랑했다. 사람들을 이끌어 고통으로부터 해방해 줄 만한 지도자로 크길 바랐다. 그러나 아이가 다 크기도 전에 나는 죽고 말았다. 주술사, 그놈 때문에.]
위령이 주먹을 쥐었다.
두 손에서 핏물이 흘러나오는 듯했고, 점점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녹빛 바람이 더욱 거칠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감정이 위험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이…… 놈이 나와 내 남편을 공격했다. 남편은 나를 지키려다 팔을 잃고, 나는 죽었다. 그놈…… 그놈을 반드시 죽여야…….]
‘이런.’
아겔은 상황이 위험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원혼의 소원은 단 하나로만 성취되어야 한다.
위령이 줄리안과 재회를 원하지 않았더라도, 다행히 려홍을 만나길 원했기에 지금 성취될 수 있지만, 그녀의 소원이 주술사의 살해라면 제사는 너무 긴 시간 치러지게 된다.
‘그럴 순 없지.’
그게 위령의 마지막 소원이 되어선 안 된다.
아겔은 위령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올바르게 자랐다. 심지어 더없이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고 있다.]
[……?]
[려홍. 그 아이는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딸을 보고 싶지 않나.]
[아아, 내 아이, 려홍…….]
아겔이 옆에서 다독여 주자, 위령이 다시 무릎을 꿇은 채로 두 팔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
불길한 녹빛과 함께 그녀의 위험한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시간을 번 아겔은 조금 물러나 위령을 바라보았다.
혼령을 다루는 일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다.
저승에서 뛰쳐나온 사령(死靈)이야 타격을 줘서 다시 돌려보내면 그만이지만, 저승에 발을 디디지 못한 혼령은 자칫 잘못하면 이승을 영원히 떠돌게 된다.
아겔은 그런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숱한 혼령들을 지켜봐 왔다.
생면부지 남일지라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
.
.
저벅.
잠시 후, 제단 밖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눈가에 물기를 머금고 들어오는 한 여인.
려홍은 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어……! 업……!”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줄리안이 재빨리 려홍의 입을 막았다.
아직 아겔과 위령의 대화는 끝난 게 아니었기에.
그제야 줄리안이 말해 준 것을 떠올렸는지, 려홍은 잠자코 아겔과 위령을 지켜보았다.
아겔이 위령에게 말을 걸었다.
[려홍이 왔다. 고개를 들어라.]
[…….]
말을 걸어도 위령은 반응하지 않았다.
아겔은 재차 말을 걸었다.
[네 딸이 왔다, 위령.]
휘잉…….
다시 녹빛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변 공기가 불길해지기 시작했고, 놀란 려홍과 줄리안은 물러섰다.
아겔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위령에게 다가갔다.
[대답하라, 혼이여.]
아겔의 부름에 위령이 고개를 들었다.
[내 딸은 죽었다.]
위령의 눈에는 피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술사…… 그가 나의 남편과 딸을 앗아갔다. 죽여야 해…… 그놈을 죽여야 해……!]
‘이런…… 또다시 분노에 빠진 것인가.’
괜찮은 줄 알았더니, 위령의 증세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완전한 원혼이 되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보로가 걸어 둔 저주가 꽤 강력한 모양이었다.
‘아니야. 이건 허접한 저주가 아니다. 최소한 주술사가 설계한 게야.’
생각해 보니 보로의 실력으로는 위령의 혼령을 타락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급수라도 위령과 보로의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최소한 주술사의 도움이 있어야 위령을 타락시킬 수 있으리라.
아겔이 침착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라. 네 딸이 앞에 있다.]
손가락으로 려홍을 가리키자, 위령의 원한 가득한 시선이 그를 따라 려홍에게 향했다.
그러나.
[아니야…… 내 딸은 죽었어. 내가 애지중지 키운 딸은 죽었단 말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고개를 저으며 소리 질렀다.
쾅……!
바람이 위령을 중심으로 세차게 몰아쳐 돌로 쌓인 제단을 날려 버렸다.
주변의 나무가 순식간에 꺾일 정도의 광풍. 세찬 기운에 섬이 진동하는 듯했다.
“제길……!”
줄리안은 려홍을 지키면서 물러났고, 아겔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파편들을 단검으로 쳐 냈다.
려홍이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어머니……! 접니다! 려홍이 왔어요, 어머니!”
그녀의 외침에 위령이 잠깐 멈칫한 듯 보였으나.
[아니다…… 넌 내 딸이 아니야!!]
위령은 소리를 내지르며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원혼이 된 위령은 그 상태로도 바람을 다루는 주술을 능숙하게 사용했다.
그녀는 주술을 사용해 려홍과 줄리안을 붙잡았다.
“커헉……!”
“……!”
바람이 려홍과 줄리안의 목을 휘감아 허공으로 띄웠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을 잡은 바람을 걷어 내려 했지만, 손가락은 허공만을 스쳤다.
“어, 어머…… 니!”
려홍은 목이 붙잡힌 상태로도 위령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위령은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에 려홍은 한가득 눈물을 흘렸다.
아겔이 소리쳤다.
[분노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이도 못 알아보는가.]
[나의 분노는 정당하다. 방해하는 이들은 모조리 죽일 테다.]
[그게 네 딸과 남편을 괴롭히고 있음에도?]
위령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두 사람을 옥죄는 바람을 더욱 강하게 할 뿐이었다.
[그만! 영원히 이승을 떠돌고 싶은 건가.]
[주술사를 죽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게 아니잖나. 자네가 바라 왔던 건.]
[아니, 나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혼령으로 남아 있었다. 주술사를 죽이기 위해!]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
아겔은 잠시 한걸음 물러나 위령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원한이 강해지는구먼.’
시간이 막바지에 달했다. 더 이상 그대로 두면 위령은 완전히 타락한 원혼이 되어 이승을 영원히 떠돌게 될 것이다.
절체절명의 상황, 뭔가를 떠올린 아겔은 품을 뒤졌다.
‘이게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써 보지 못하는 것보단 낫겠지.’
주름진 손에는 수정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낙월궁, 려홍의 방에서 찾아낸 수정구. 이것은 려홍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음성 일기였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수정구를 작동했다.
[어머니의 감정이 내게도 전달된다. 분노와 회한의 감정. 그것 때문에 전사들에게 예민하게 굴게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께선 언제 화를 푸실까.]
[아……!]
음성 일기의 목소리를 듣자, 위령이 크게 반응했다.
[들어라. 네 딸의 목소리다.]
아겔의 말에 격한 감정을 보이던 위령이 기세를 가라앉혔다.
그녀가 휘몰아치던 광풍이 점점 잦아들고, 음성 일기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또렷이 들려왔다.
[어머니는 화가 많은 분이 아니셨다. 하지만 긴 시간은 사람을 바꾸기도 하는 걸까.]
[…….]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머니는 말씀해 주시지 않으신다. 왜 내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는 걸까.]
려홍은 절지에 있던 위령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도 못했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슬픈데, 혼령으로 남으신 어머니는 나보다는 활녀당에만 모든 관심을 쏟으시는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프다.]
[아. 아아…….]
혼령으로 끝섬에 남아 활녀당의 재건에 여러 조언을 해 주던 위령이었다.
그런 그녀의 열심이 사랑을 받기 원했던 려홍에게는 아픈 무관심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 수 있었으면…….]
뚝.
음성 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려홍의 솔직한 마음이 모두 담겨 있는 일기. 그것은 온전하게 위령의 마음을 이끌어 내었다.
아겔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분노는 때론 본래의 목적을 흐리는 것. 사랑이 분노로 변질되기 전에 자네가 진정으로 원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게.]
[으윽…….]
머리가 아픈 듯 위령은 신음했다.
아겔은 바람의 속박에서 풀려난 려홍과 줄리안을 뒤로 물렸다.
지금만큼은 그 어떤 방해도 용납되지 않는다.
혼이 생전 기억을 수습하는 이 시간. 아겔은 차분하게 위령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내 딸…… 우리 딸…… 려홍. 줄리안, 내 남편. 내 사랑.]
후웅…….
이윽고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멈추고 녹빛 바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완전한 원혼화가 멈춘 위령.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주름진 얼굴은 늙어 가는 자의 것이었지만, 세월조차 혼령으로 남은 그녀의 미모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방금까지 흔들리던 눈빛이 바뀌어 정확하게 아겔의 얼굴을 직시했다.
[아겔 영감님……?]
“위령. 돌아왔군.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네.”
한시름 놓은 아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