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계획
개방은 끝났다.
우려와 다르게 아겔을 태운 배는 멀쩡히 항구 도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위령이 남겨 준 별빛 목걸이 덕분에.
아쉽게도 열닷새째 작은 만월과 큰 만월이 함께 자아내는 절경은 바다 안개 때문에 볼 수 없었지만, 그 누구도 불평은 하지 않았다.
아겔은 이전에 배정받았던 3-448 감방이 아닌 다른 감방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세로마저 고독에서 나간 뒤로, 3-448 감방엔 아겔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원칙상 죄수 혼자서는 감방을 쓸 수 없었기에, 다른 감방을 배정받았다.
‘언제쯤 날 부르려는 건지.’
고독의 주인이 부를 때까지 그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보관 일도 없으니, 이제 정말로 은퇴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품을 맡아 주는 것도 심심했기에 해 온 일이었다.
고독은 그의 집이나 다름없는 장소.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는 것보다는 가끔 몸도 풀어 주는 게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일에 간섭하고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면도 없진 않았다.
저벅저벅.
누군가 걸어왔다.
새로 배정받은 감방이기에 아겔과 함께 쓰는 다른 죄수들이 있었다.
물론 서열 정리 같은 건 진즉에 끝내 놓은 지 오래였다.
“무슨 일인가 짝다리 친구.”
“어, 영감님. 식사를 준비했는데, 같이 드시렵니까……?”
“오늘은 메뉴가 뭐지?”
“큰뿔뇌조입니다. 복도에 돌아다니던 걸 정말 운 좋게 2마리 잡았습니다.”
“두 손으로 모을 만큼만 떼 주게. 나머지들은 자네들이 먹고.”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3급 죄수는 아겔 앞에서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아겔은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새로운 감방에 배정받을 때마다 죄수들과 마찰을 빚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다행히 이번 감방은 우두머리 하나만 제압해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어디서 소문은 듣고 왔는지, 하급 죄수 주제에 원탁에 들어갈 거라 떵떵거리며 말하는 놈이었는데, 아겔 앞에서 개박살이 났다.
그 뒤로 감방의 실세를 잡은 2인자가 알아서 기고 있었다.
저벅저벅.
감방 밖에서 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고기를 받아 식사 중이던 아겔은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철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 타 감방 죄수는 들어오지 못하니, 지금 감방에 들어온 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히이익……!
-간수다…….
-무, 물러서. 잘못하면 죽는다.
감방 안으로 들어선 간수는 랜턴을 들고 커다란 감방 내부를 한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아겔을 향해 직선으로 걸어왔다.
“51번.”
아겔은 대꾸도 없이 벽에 기대앉은 채로 고기를 씹고 있었다.
“호출이다. 일어나라.”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 모르는가.”
“…….”
“조금 기다리게. 먹고 일어서야겠으니.”
간수를 기다리게 하는 그 모습에 죄수들은 기함했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간수는 섣부르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
간수 림몰은 정말 기다렸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고기를 다 먹은 아겔은 손에 묻은 기름기를 옷에 탁탁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세, 간수 양반. 기다려 줘서 고맙구먼.”
“따라와라.”
아겔은 림몰을 따라 복도로 나갔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두 사람. 이내 림몰이 먼저 말문을 열면서 적막이 깨졌다.
“51번.”
“왜 부르는가.”
“다르키스는 어떻게 죽인 거지?”
“음……?”
이제 못해도 10개월 전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신참 티를 조금 벗더니 이젠 죄수들과 말도 섞을 줄 알게 되었구먼. 그땐 너무 딱딱해서 기계인 줄 알았다네.”
“…….”
아겔은 기억하고 있었다. 림몰이 30일 독방형 마지막 날 자신을 꺼내 주고 감방으로 인도한 사람이란 것을.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림몰은 소름을 느꼈다.
“왜. 그게 궁금한가? 간수와 교도관들 사이에서 난리가 날 법한 일이긴 하지.”
웬 번호도 이상한 죄수가 정글을 차지하고 있었던 다르키스와 악마숭배자를 싹 쓸어버렸다.
갑작스러운 변화. 그건 죄수들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고독의 직원인 간수와 교도관들에게도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 일의 여파에 간수과 교도관들이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였다.
의문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너는…… 서류상으로 분명 1급 죄수였다. 그런데…….”
“숫자에 매몰되었다면, 질문은 왜 하는 겐가. 그 숫자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
“우주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네. 다 이해하려 하다간 머리가 터지고 말 테지. 그런데 나에게 그런 걸 묻는 이유가 뭔가.”
“호게스 선배가 실신했다. 너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다가 과로로 쓰러졌다.”
림몰이 그나마 고독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호게스였다.
간수 하나가 아예 전담으로 죄수 하나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업무를 하는 게 바로 호게스. 원래라면 지금도 호게스가 아겔을 데리러 와야 했으나, 쓰러진 그를 대신해 림몰이 온 것이었다.
“이런 병문안이라도 한번 가야겠구먼. 같이 갈 텐가?”
“……난 이미 다녀왔다.”
“잘 보살펴 주게. 그 친구가 죽지 않도록.”
“…….”
.
.
.
대화가 끝날 무렵, 두 사람은 어느새 소장실에 도착해 있었다.
서기관실과 똑같이 밋밋한 나무문이 하나 있었다. 크기는 훨씬 컸지만.
아겔은 노크도 하지 않고 바로 소장실로 들어갔다.
소장실에선 술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에 민감한 아겔은 인상을 찌푸리고 문을 닫았다.
“술 좀 작작 마시게, 슈리오센.”
“정신은 멀쩡하다. 자, 그럼 주인님께서 기다리실 테니 바로 통신을 시작하지.”
띠릭.
그가 홀로그램 장치를 조작하자, 곧바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었다고 봐도 무방할 외형이었다.
원래 나이는 수백 살을 먹은 괴물이었지만.
-이거이거, 금방 또 보게 되었군요, 아겔. 눈 깜빡할 새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될 줄이야.
“시간은 항상 빠르게 흘러가지. 내 생각엔 절대적인 기준이야.”
-동의합니다. 물리 이론가들은 부정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나저나 성과를 좀 볼 수 있을까요?
단도직입적인 성격의 기업가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겔은 말없이 품에서 위령의 목걸이를 꺼냈다. 그것을 본 고독의 주인이 탐욕스러운 눈빛을 했다.
-하아, 예쁜 아이군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아겔 영감.
아겔은 목걸이를 소장에게 넘겼고, 슈리오센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조그마한 목걸이를 받았다.
-조심히 다루세요. 정말 귀한 물건입니다.
“예, 주인님.”
-사람이 일생을 바치고 만들어 낸 역작.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거야말로 정말 가치 있는 물건이지요.
고독의 주인은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아겔은 약속을 확인할 뿐이었다.
“약속은 지켰으니, 두 사람은 건드리지 말게.”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아마넬과 쉬카가 정착할 수 있는 지원금과 보디가드들을 보내 놨습니다.
그 말에 아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들을 가둬 두려는 건 아니겠지.”
-전혀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두 사람은 고독에서 나온 이상 정부와 교단의 표적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곳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두 사람을 어떻게든 확보하려고 하겠죠. 그러니 저도 보험 정도는 필요한 법. 신분까지 세탁하고 숨기 좋은 곳으로 보내 놨으니, 안심하시길.
“알아서 하리라 믿네. 고독에서 나가면 내가 직접 확인할 테니.”
-크큭,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겔은 이번 개방에 대한 것을 떠올리고 말문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번 개방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는가.”
-아, 보고 받았습니다. 신입 교정관이 제대로 사고 쳤더군요.
“어떻게 할 셈이지.”
기업가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고의든 아니든 아쉽게도 우린 '대놓고' 그를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엄연히 성좌 교단 소속이라서 말이죠. 적절하게 조치했고, 징계로 근신 처분하였습니다.
“팔다리는 잘라 놔야 안심이 될 것 같은데.”
-후후, 영감이 그렇게 말하면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안 갑니다. 저야말로 위험한 싹은 제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조치는 했으니 안심하시죠.
“알아서 하리라 믿네.”
-그럼요.
슬며시 미소를 지은 기업가가 말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인데, 바깥이 이야기를 좀 해 드리죠.
“무슨 일이 있었나?”
-예. 사도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그가 누굴 지칭하는 건지 모를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빛의 사도들이 사람을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남은 자들은 어둠의 사도들밖에 없다.
-접촉 사고 같은 느낌이지만, 꽤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애초에 외계에 머물러 있던 그들이 정부의 영역을 침범했습니다. 3명이나 모습을 드러냈죠.
“어둠의 사도가 3명이나. 웬만하면 막아 내기 어렵겠군.”
-교단의 대응도 빨랐습니다. 매머드급 전함 30기가 포함된 정부 함대 5개 규모의 병력을 지원받았죠. 빛의 사도가 무려 6명이나 전선으로 투입되었습니다.
“11명 중 여섯 명이면 초장부터 사활을 걸겠다는 건가.”
-아마 기선 제압이 목적이겠죠.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자넨 어떻게 하기로 했나.”
-어떻게 하긴요.
기업가가 씩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무기를 팔아야죠. 더 비싼 값에 말입니다.
“어둠의 사도 쪽에선 자네에게 연락을 해 오진 않던가.”
엄밀히 말해서 기업가는 정부나 교단과 동맹 관계는 아니었다.
말이 기업가이지,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왕이나 다름없었으니. 물론 은하 정부의 영역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안타깝게도 그쪽은 절 이용할 생각이 없던 모양입니다. 그들도 금전은 떨어지지 않겠지만, 제가 정부와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걸렸나 봅니다.
“아쉽겠구먼. 그쪽도 자네의 고객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빙긋 웃은 기업가가 아겔에게 질문했다.
-저야 앞으로의 방향성은 말씀해 드렸고. 영감은 이제 뭘 하고 지내실 겁니까.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야 별것 있겠는가. 이제껏 해 왔던 대로 해야지.”
아겔의 메말랐던 목소리가 한순간 명료해졌다.
“주술사를 죽이려 하네.”
-예?
기업가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기댔던 의자에서 등을 떼었다. 그는 조금 아쉬워하는 표정이 되었다.
-놈들이 설마 선을 넘었습니까?
“그런 셈이지.”
-저런…… 안타깝게 되었군요. 돈으로 환산하면 꽤 가치 있을 놈들이었는데.
기업가는 아겔을 막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주술사가 속한 원탁은 아겔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
그와 협력하는 기업가 입장에서는 제거해야 할 암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나보다 비쌀까.”
아겔의 말에 기업가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물론 아니죠. 그러니 막지 않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대신 원탁을 제외한 다른 죄수들은 건드리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다 돈이거든요.
“내가 알아서 하겠네.”
-그럼 믿고 있겠습니다.
다시 영업용 미소를 지은 기업가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파슷.
그것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소장이 통신 장치를 끄고 아겔을 바라보았다.
“아겔, 내 도움은 필요 없나.”
소장의 말에 아겔은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소장의 도움을 받는다면, 원탁의 죄수들 따위야 먼지 쓰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슈리오센은 무려 능력 등급이 무려 10급인 괴물이니까.
라이칸스로프의 왕, 탈라할보다도 한 급수가 더 높다.
하지만 소장이 직접 나선다면 형평성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고독의 방침에 위배되는 일이라 정부와 교단의 검열 기간에 덜미가 잡힐 수도 있었고.
소장도 그걸 몰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네가 나설 정도라면 이 행성이 무너질 상황은 되어야 할 것 같다만.”
“그냥 해 본 말이었다. 요즘 몸이 근질거려서 말이야. 업무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거든.”
“이해하네. 그럼 라만과 붙지 그러나.”
“그놈은 쓸모가 너무 많아. 몸 풀다가 죽이면 큰일 난다.”
동료이자 같은 10급의 각성자 봉인술사였건만, 슈리오센은 손쉽게 죽인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겔은 소장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자네가 도와줄 만한 일은 딱히 없을 것 같네.”
문손잡이를 잡은 아겔이 말했다.
“필요한 사람은 특수 감방에 있으니 말일세.”
쉬카가 떠난 이후 특수 감방은 온전히 아겔의 몫이 되었다.
* * *
원탁.
낡고 더럽고 넓은 원탁에 수 명의 죄수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로브를 뒤집어쓰고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턱수염을 쓸며 말했다.
“사도께서 말씀하셨네. 이제 시작해도 좋다고.”
주술사 카흘탁.
원탁의 대원로. 이 집단을 창설한 설립자. 사도의 종.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오래 기다려 주어서 고맙네. 다들 이날만을 기다렸을 테지. 며칠 전에는 우리 본거지가 공격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
폭발 마법이 새겨진 보로가 원탁의 중심부에 떨어져 큰 피해를 입은 사건이 있었다.
“계획은 성공할 것이야. 아니,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지.”
그의 눈은 보는 것만으로 주눅이 들 법한 형형이 빛나는 음산한 눈빛이었다.
거기엔 분노와 살의, 집착이 들어차 있었다.
“이제 아겔라스토스를 죽이러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