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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20)화 (121/186)

120화 진실 (2)

어둠 속을 걷고 있다.

복도는 일정 간격마다 마법 횃불이 걸려 있긴 해도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정글의 평야처럼 넓디넓은 복도도 있고, 쥐새끼 한 마리 지나다니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은 복도도 있다.

아겔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횃불 하나 없는 복도를 거닐었다.

‘멀다, 멀어.’

고독의 모든 구조가 바뀌는 시스템, 변환.

참으로 기이한 기관과 마법으로 이루어진 시스템 때문에 죄수들은 한 번 복도를 나서면 길을 찾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아겔은 구조가 어떻게 바뀌든 길을 찾는 데 문제가 없지만.

그렇다고 따로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니니 멀리 있는 목적지까지 가려면 직접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아겔은 특수 감방을 향해 가고 있었다.

먼저 풀어놓은 아피스토. 그는 지금도 훌륭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

원탁의 일원들이 사로잡혔던 아피스토를 아겔이 구해 준 일이 있었다. 특수 감방에서 풀어 준 것만으로 아피스토는 원탁과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씹어 먹고 다닐 것이다.

물론 그 말고도 아겔을 도와줄 자가 몇몇 더 특수 감방에 있었다.

지금은 특수 감방이 온전히 아겔의 몫이니 원하는 대로 풀어 줄 수 있었다.

통제는 아겔이 해야겠지만.

“한참 걸어야겠구먼.”

고독 본관의 일반 구역만 해도 거대하다. 꽤 시간이 걸릴 여정이니 아겔은 느긋하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급히 가다가 누굴 만날지도 모르니 항상 어둠을 주의하면서.

쿠워어어……?

복도에서 마주한 흰 피부의 오우거가 아겔을 향해 다가왔다.

아겔은 마치 개미라도 보는 것처럼 그냥 지나치려 했다.

쿠워어어억-!

화가 난 오우거가 주먹을 치켜들었고, 아겔을 향해 내리찍었다.

쾅!

아겔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우거의 주먹을 간단히 한 손으로 받아 내고 옆으로 슥 밀었다.

우워……?

두 걸음 밀려난 오우거는 방금 무슨 상황이 일어난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늙은 인간이 자신의 주먹을 막아 낸 것도 모자라 아무런 피해도 없이 멀쩡히 걸어가고 있었다.

오우거는 다시 아겔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쿵.

왠지 모르게 무릎에 힘이 풀려 버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오우거는 자신이 독에 중독된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

“육체의 힘이 돌아올 정도인가.”

언제 꺼냈었는지 벌레 단검을 들고 있던 아겔은 품에 잘 갈무리했다.

3급 몬스터 오우거. 급수는 여태 아겔이 마주한 자들보다 낮아 보일 수 있지만, 그 완력마저 조악한 건 아니었다.

알약의 효과가 육체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꾸준히 복용한 것이 몸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물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겔은 알고 있었다.

꼬르르르륵.

“이런…….”

배에서 굶주림의 신호를 보내왔다.

육체가 건강해지니 보내오는 신호도 강렬해졌다.

이전엔 배고파도 그냥저냥 참을 만했지만, 지금은 생각 외로 참기가 어려웠다.

“식사는 하고 움직여야겠구먼.”

당연히 때에 따라 식사를 참았을 뿐이지, 아겔은 밥을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불규칙적이라도 제때 먹어 두지 않으면 또 언제 식사할 수 있을지 모르는 곳이 고독이었으니.

정글이었다면 죄수들이 먹을 것을 대령했겠지만, 이곳 본관에선 혼자 해결해야 했다.

아겔은 뭔가 먹을 것이 없나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며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걷던 아겔은 들려오는 소란에 귀를 기울였다.

숫자가 많은 쪽이 누구 한 사람을 핍박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 새끼야, 얼른 안 내놔?

-힘 빼지 말고, 그냥 내놔. 뒤지기 싫으면.

-그냥 죽이고 빼앗자. 뭐 하러 쓸데없는 짓 하는 거야?

평소라면 그냥 지나쳐 갈 아겔이었지만, 그쪽에서 풍겨 오는 냄새 때문에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고기 냄새로군.”

걸음은 직선적이었다.

가까이 가 보니, 커다란 배낭을 들고 있는 보부상과 그를 둘러싼 죄수 몇 명이 보였다.

-뭐야, 넌.

죄수 중 한 명이 아겔이 다가온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겔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지금 배고파서 그런데, 그냥 가 주면 좋겠구먼. 나는 저 보부상 친구에게 관심이 있어서 말이야.”

-뭐?

-이 노인네가 뭐라는 거야?

척 보아도 그리 급수가 높지 않은 죄수 몇이 아겔에게 다가왔다.

아겔은 충돌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 한번 말해서 안 듣는데, 굳이 대화로 해결할 이유는 없었다.

저들이라고 말로 해결하고 싶은 눈치도 아니었고.

-뒈질라고, 이 노인네가!

부웅!

주먹을 피한 아겔은 단검을 꺼내 남자의 겨드랑이에 찔러 넣었다.

-크학!

가랑이 사이를 걷어차 하나를 완전히 무력화한 아겔은 다른 죄수들에게 다가갔다.

죄수들은 순식간에 제압당한 동료를 보고 벙찐 얼굴이었다.

“뭐 하는가. 하루 종일 그렇게 보고만 있을 텐가?”

-이, 이 새끼가……!

-감히……!

죄수들이 한꺼번에 아겔을 향해 달려들었다.

방금까지 겁박을 받던 보부상은 창백해진 얼굴로 벽 쪽으로 물러났다.

“히이이익……!”

촤악……! 푹푹푹! 서걱!

손속이 과하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타난 노인이 죄수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빼앗기 시작했다.

달리고 숨는 데 재능이 있어 보부상 일을 시작한 그였지만, 지금 당장은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저 노인이 다가오면서 했던 말에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싸움이 일어나자마자 도망을 가도 금방 따라잡히리란 걸 깨달았기에 벽에 물러나 참상을 지켜보았다.

‘자, 잠깐만…… 눈에 붕대에 봉두난발 흰머리……?’

왠지 바로 앞에 있는 노인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들었던 설명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보부상은 이내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겔……! 아겔라스토스다……! 나, 난 죽었다…….’

그는 절망했다.

보부상 일을 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겔의 소문은 몇 번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최근엔 대륙 정글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까지.

알 만한 죄수는 다 알고 있었고, 중급 죄수 중에선 모르는 자들이 없었다.

지금 아겔과 붙고 있는 죄수들은 그를 모를 정도로 고독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놈들이 분명했다.

아니었다면 당장 아겔을 알아보고 꽁지 빠지게 도망쳤을 거다.

‘아, 어차피 도망친다고 살아남을 수도 없겠구나.’

푸욱.

생각을 마치는 그 짧은 순간, 아겔에게 달려들었던 마지막 죄수까지 죽었다.

아겔이 보부상 쪽을 바라보고 걸어오자, 그는 무릎을 꿇은 채로 허리를 숙였다.

“살려 주십시오. 가지고 있는 건 뭐든지 드리겠습니다.”

“음? 방금까지 안 빼앗기려고 기를 쓰던 친구가 다 주겠다니, 그게 뭔 소리인가.”

“그건…….”

그건 저 쓰레기 같은 죄수들이었지, 앞에 있는 아겔이 아니었다.

심하면 끔찍한 고통을 주고 죽기를 바랄 때가 되어서야 죽여 버린다는 소문까지 도는 아겔인데, 저 건달 죄수들에게 했던 것처럼 배를 내밀고 있을 순 없었다.

“됐네. 목숨값으로 고기 몇 덩이만 주게.”

“무, 물론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뚱뚱한 보부상은 얼른 배낭을 열어 보존된 고기를 꺼내 주었다.

아겔은 그가 맡았던 보부상의 입에서 나는 고기 냄새와 일치하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베어 물었다.

“음, 훌륭하군. 미안한데 친구가 아닌 자와는 겸상을 안 하니 조금 떨어져 줄 수 있겠나? 딴 데로 가진 말고.”

“……알겠습니다.”

보부상의 생명은 시간을 죽이지 않고 바쁘게 복도를 돌아다니는 데 있지만, 그는 기꺼이 기다리기로 했다.

그건 아겔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서가 아니라,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숨을 앗아 갈 저승사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조용히 식사를 마친 아겔은 허기가 지워졌음을 느끼고 보부상을 불렀다.

“좀 오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으니.”

“아, 예!”

보부상만큼 고독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 또 없었다.

이들은 소문을 빠르게 퍼뜨리거나 정보를 사고파는 일까지 하고 있으니, 현재 이 교도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선 보부상을 만나는 게 두 번째로 좋은 방법이었다.

첫 번째는 그냥 고독 전체를 감시하는 소장이나 서기관에게 묻는 게 제일이고.

“몇몇 죄수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네만.”

“아,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성자와 백작은 살아 있나?”

보부상은 곧바로 배낭에서 뭔가 적혀 있는 큰 종이를 꺼냈다.

“죄를 지은 성자, 바를라 하돌라. 백작 인듀라스 말씀이시군요.”

그는 종이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신중하게 그 이름을 찾아내었다.

이내 이름을 찾아낸 보부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3일 전에 최신화한 주요 인물 생사 확인서입니다. 3일 전까지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렇군.”

고독에서 보부상 집단은 꽤 크고 이렇게 주요 죄수들의 생사를 확인할 정도로 치밀했다.

그들을 이끄는 자가 상급 죄수였으니.

그가 이끄는 보부상 집단은 절지의 3파 세력전에 끼진 않았다.

대신 관심을 가지고 돈을 벌고 있긴 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구먼.”

직전 개방에 랜덤으로 대륙에 떨어졌을 텐데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정글을 돌볼 자가 둘이나 없는 건 아겔의 입장에서 달갑지 않았다.

정글엔 요양 중인 아리스가 있었으니.

아직 그녀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겔은 곧 감정을 지워 버리고 다음 것을 물었다.

“원탁에 대해 말해 보게. 최근 동향을 알고 싶구먼.”

“원탁…… 말씀이십니까.”

보부상이 침을 꼴깍 삼켰다.

괴물들만이 구성원으로 존재한다는 원탁. 복도를 돌아다니는 보부상들에겐 여간 위험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후우, 안 그래도 최근 대대적인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원탁이 보부상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보부상을?”

“예. 이제 복도 돌아다니는 것도 못 할 지경입니다.”

“흐음…….”

아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묵적으로 보부상 집단 [트롯]은 건드리지 않는 룰이 있다.

트롯은 세 세력에게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배달부. 각 세력과 거래하면서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들이니까.

굳이 건드려 봐야 좋을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원탁이 트롯을 공격하고 있다면, 뭔가 그럴 만한 목적이 있다는 의미였다.

‘물자 공급을 차단하려는 겐가. 그럼 저들도 전쟁에 쓸 물자가 부족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일 터인데.’

아마 원탁이 결단을 내린 것 같았다.

전쟁을 끝내고 절지를 집어삼키기로.

그리고 원 목적인 아겔 살해를 실행하려는 듯했다.

“완전히 미친놈들입니다…… 직접 나서서 트롯의 보부상을 죽이기도 하고, 몇몇 질 나쁜 죄수들을 고용하여 일을 맡기기도 합니다.”

보부상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맘고생이 심했겠구먼.”

“예…….”

“하여튼 좋은 정보 고맙네. 자네 덕을 좀 봤어.”

“아, 별것 아닙니다. 지불하실 값은 금화 79닢입니다.”

“?”

아겔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야 자신의 실언을 인지한 보부상의 얼굴이 창백하게 되었다.

“크핫……! 스, 습관적으로 그만……!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해하네. 죽이지 않을 테니, 안심하게.”

“가, 감사합니다!”

“복도에선 항상 조심하게나.”

아겔은 그대로 복도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보부상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후다닥 반대쪽을 향해 뛰었다.

.

.

.

뚱뚱한 보부상과 마주하고 이틀 뒤.

아겔은 여전히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 특수 감방까지 가려면 최소 1달은 걸릴 듯했다.

이렇게 멀리 떨어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겔은 급하지 않았다.

“급하면 탈 나는 법이지.”

자리를 잡고 남은 고기로 허기를 지운 아겔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느지막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겔은 앞에서 밀려오는 비릿한 피 냄새를 느끼고 멈춰 섰다.

‘얼마 되지 않은 피 냄새.’

생생한 냄새였다.

아겔은 천천히 그쪽으로 접근했다.

미약한 숨소리. 이제 곧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소리는 쉽게 멎지 않았다.

복도 구석 쪽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제 몸보다 커다란 배낭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은 다 갈취당한 모습.

아겔은 그쪽으로 다가가 쓰러져 있는 조그마한 고블린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제이콥.”

목소리를 들었는지, 검은 고블린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억지로 열었다.

“영…… 감님…….”

“그래. 오랜만이구먼. 몰골이 말이 아니야.”

“겔겔……”

트롯의 소속, 제이콥이 팔다리가 전부 짓이겨진 채로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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