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진실 (3)
아겔은 쓰러져 있는 제이콥 주변을 더듬어 가면서 상황을 파악했다.
완전히 찢어진 커다란 배낭은 그 안에 있던 물건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제이콥을 습격한 놈들이 다 훔쳐서 달아난 모양.
복도 한구석에 덩그러니 사지가 짓이겨진 고블린과 찢어진 배낭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겔은 다시 돌아와 제이콥의 상태를 살폈다.
팔다리가 전부 커다란 망치에 짓눌린 것처럼 퍼져 있었다. 보지 않아도 끔찍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인 상태.
“……겔겔, 바가지 씌운 대가인 거죠. 심려치 마십쇼……”
다 죽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농을 던지는 얕은 여유를 보인다.
죽음이 두렵겠지만, 제이콥은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곧 죽는다.
아겔은 한쪽으로 걸어가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모아 제이콥의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크으…… 감사합니다.”
물을 마신 제이콥의 목소리가 조금 살아났지만, 여전히 죽음의 기운이 감겨 있는 건 똑같았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원탁입니다. 놈들이 죄수와 마물을 풀어서 트롯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제이콥을 만나기 전 뚱뚱한 보부상도 똑같은 말을 했다. 원탁이 보부상 집단 트롯을 공격하는 중이라고.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조심하십쇼, 영감님. 위험합니다.”
“나도 준비는 하고 있다네.”
아겔이 잠시 생각에 빠진 얼굴이 되자, 제이콥이 그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영감님은…… 저희가 밉지 않으십니까?”
“음?”
“원탁은 영감님을 죽이려고 하는데, 우린 그들을 도와준 꼴이잖습니까.”
확실히 트롯은 원탁과도 거래하고 있다.
그러나 아겔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이었다.
“그런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트롯이 원탁을 도왔지.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죽었는가?”
“…….”
“자네들이 돕든 말든 난 멀쩡하게 살아 있다네. 그럼 무슨 문제인가.”
원탁은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집단. 수없이 많은 강자를 품고 있었다.
오직 아겔을 죽이려는 목적 하나로만 모인 이들은 아직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트롯에게 원한은 없네. 자네 같은 친구도 거기서 일할 수 있는데 미워할 이유가 없지.”
고블린이 한껏 웃음을 터뜨렸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과 함께 피도 흘러나왔다.
“쿨럭…… 쿨럭……! 흐으…… 죄송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그만.”
“웃을 기력은 남아 있는 걸 보니 좋군.”
아겔이 품에서 알약을 꺼내려 했다.
그걸 보고 제이콥이 고개를 저었다.
“말로만 듣던 소생의 알약이군요. 영감님이 드실 거 아니라면 집어 넣으십쇼.”
“…….”
“어차피 그거 먹어도 전 못 삽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알약을 먹으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까지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없었다.
아겔에게 폐를 끼칠지언정 그냥 죽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저 소생의 알약을 살 돈도 없고.
“한 알에 행성 값인데, 염치도 모르고 달라고 할 수 없죠.”
“친우로서 주는 거라면?”
“마음만 받겠습니다, 겔겔. 여태껏 영감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갚지도 못할 지경입니다.”
“내가 언제 자네에게 은혜를 베풀었단 말인가.”
“겨우 고기와 빵 따위에 고독의 지도를 그려 준 것만으로도 은혜입니다. 영감님이 그려 준 지도가 없었으면 이미 한참 전에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은혜로 살아 있던 거죠.”
“…….”
잠시 침묵하고 있던 아겔이 제이콥의 옆자리에 앉았다.
“말동무나 좀 해 주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게.”
“겔겔, 영광이군요…….”
제이콥의 눈에서 점점 총기가 흐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영감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항상 즐거웠습니다. 당신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죠. 고독의 죄수는 대부분 돈으로 살 수 있는데 말입니다.”
고독에도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는 교도소를 감시하는 은하 정부와 성좌 교단도 묵인한 사항.
아무리 이곳이 지옥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곳이라지만, 사람이 사는 곳에 약속된 경제적 개념인 돈이 없을 수가 없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영감님은 왜 보잘것없는 제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겁니까.”
제이콥은 2급 죄수이다. 왼쪽 목에 새겨진 숫자는 빨간색 2.
중급 죄수만도 못한 그의 힘은 고독에서 미약하기 그지없다.
도망치고 길을 찾는 재주와 그래도 상행을 좋아하여 두려움을 이겨 내는 강단이 있어 보부상으로 살아온 것이다.
고블린 중에서도 별난 검은색 고블린이며, 지능도 여타 고블린보다 뛰어나 생각 외로 질시와 멸시를 많이 받은 제이콥이었다.
고독의 보부상 집단 ‘트롯’에 다른 보부상도 많은데, 왜 하필 자신이었냐는 말이었다.
“전 여기서 미물이나 다름없는데 왜…….”
“그거야…….”
잠시 생각하던 아겔이 입을 열었다.
“나도 자네에게 은혜를 입었으니까.”
“……?”
제이콥의 눈이 커진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은혜를 베풀었단 말인가.
아겔이 말했다.
“자넨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지.”
고독의 지도를 받으러 올 때마다 해 주었던 고독에서 있었던 이야기들.
제이콥의 입장에선 어떻게라도 아겔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보를 풀어 준 것이었지만, 아겔은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매달, 길이 완전히 바뀌는 이 어두운 교도소에서 항상 그를 찾아와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 주는 자는 제이콥이 유일했으니까.
“그냥 정보였을 뿐이었는데…….”
“참 재미있었네. 난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면, 귀로 듣는 수밖에 없으니.”
“그렇습니까.”
그저 단순히 환심을 사기 위한 주절거림이었으나,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된다.
제이콥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겔과 거래한 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간다. 10년 동안 봐 오면서 여전히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론 이해하지 못해도 가슴은 왜인지 시큰거려 왔다.
조금 흐른 적막 뒤에 제이콥이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당신은 언제나 제 눈엔 신처럼 보였습니다. 제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분이 저를 친우로 여겨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당치 않은 말일세. 친구 사이에 영광은 무슨.”
“겔겔, 그러니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던 제이콥이 돌연 조용해졌다.
“……기도 한 번만 해 주십시오. 저를 위해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의지할 것을 찾는다.
죽음 이후의 미지가 두렵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성좌를 찾는다.
저승에서도 편안한 안식을 얻으려면 성좌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했다.
아겔은 제이콥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믿는 성좌가 있나.”
대개 기도를 부탁하는 자는 신을 믿는 자들이다. 사후세계를 위해 악마에게 기도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저승에서 악마와 대면하기 원하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제이콥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신이 아니라 당신을 믿습니다.”
“…….”
“누구에게 기도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고블린의 눈이 감겼다.
아직 미약하게나마 가슴이 들썩이고 있었지만, 초연히 죽음을 기다리는 자세였다.
이제 다시는 그 눈을 뜨지 못하리라.
아겔은 남은 한 손으로 눈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 제이콥을 위해 기도했다.
.
.
.
스슥.
붕대를 다시 감은 아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이콥은 말하지 않았다.
기도가 끝날 때쯤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다.
아겔은 찢어진 그의 배낭 가죽으로 시신을 가려 준 후, 거리를 두었다.
“저승에서 안식하기를.”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아겔은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또 한 명의 친우가 죽었다.
몇 번째인지 셀 수조차 없다. 그러나 이 죽음들 모두 아겔이 감당해야 할 무게 중 하나였다.
아니, 아겔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함께 걸어가던 사람을 잃곤 한다.
몸에 휘감긴 쇠사슬 같은 그 죽음의 무게는 종종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전신을 짓누르기도 하지만.
망각이란 축복, 그리고 참담한 현실은 그 무게를 잊게 해 준다.
원하든 원치 않든.
* * *
고독의 복도 한쪽.
약탈한 고기와 빵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중급 죄수가 몇 있었다.
-크하, 이게 얼마 만에 고기야.
-그러게. 진작 트롯 소속 녀석들을 털었어야 했어.
대장으로 보이는 놈 하나와 죄수 다섯.
그들은 일전에 트롯의 보부상을 약탈한 전리품들을 취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트롯을 건드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부상 집단이라곤 하나 그들의 전력이 약한 건 아니다. 멋모르고 보부상을 습격했다가 된통 반격을 당해 죽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대장처럼 보이는 덩치 큰 죄수는 즐겁게 고기를 뜯었다.
‘원탁이 보증하는 일이다.’
원탁은 중급 죄수 중 이름이 있는 놈들 몇에게 접근해 이렇게 트롯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만한 대가도 약속하고 말이다.
그의 수하들은 모르지만, 대장은 원탁이 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알고 있었다.
원탁이 하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독의 죄수, 아겔을 죽이기 위한 것.
트롯을 친다는 건 아겔을 죽이기 위함이리라.
‘그게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몰라도 우린 상관없어. 돈도 받고 보부상도 털고 심지어 아겔의 타겟이 될 수도 없지. 이만한 일이 없다.’
괜찮은 건수를 잡게 되었으니, 이번 일이 끝나면 최소 1년 이상은 조용히 잠수를 탈 생각이었다.
보부상을 털고 얻은 식량이나 아티팩트의 값어치는 충분했다.
-크으, 보십시오, 대장! 이거 좀 간지나지 않습니까?
죄수들은 약탈한 무기들을 보고 희희낙락했다.
이 위험한 곳에선 무기가 생명과도 견줄 수 있는 가치를 지녔으니 좋아할 만했다.
쓸 만한 무기를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을 이끄는 대장도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바가지 씌우고 돌아다니는 보부상 새끼들 꼴 보기 싫었는데, 마침 잘됐어!
-우리가 씨를 말려 버리자고!
-다 털어 버리는 거야!
“크크큭, 우린 적당히만 하면 된다. 물론 좀 길게 쉴 수 있을 정도로.”
-켁켁켁, 역시 대장! 이런 좋은 일을 가져오시다니.
고기를 우물거린 대장은 복도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방금 약탈한 고블린 새끼가 조금 귀찮게 굴었어도 결국, 보부상은 보부상일 뿐이다.
습격하면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많다.
“이제 트롯은 멸망이야.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니까, 얼른 먹고 또 움직이자.”
-예, 대장!
-오케이!
또 약탈할 생각에 의욕이 활활 타오른 죄수들이 우걱우걱 식량을 입에 쑤셔 넣었다.
탁. 탁.
신나게 식량을 먹던 죄수들에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맨발로 복도를 걷는 소리. 죄수들의 기세가 한순간 차갑게 가라앉았고, 각자 무기를 들었다.
복도에선 뭐가 나올지 모르니 항상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힘깨나 쓴다는 중급 죄수들이라도 예외는 없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노인이었다.
허리에 뒷짐을 지고 나타난 노인은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수하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대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겔……?!’
-뭐야, 이건.
-무슨 똥폼을 잡고 걸어오네. 누가 보면 고수인 줄 알겠다.
대경한 대장은 서둘러 수하들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겔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저 뒤에 고블린 보부상을 죽였나.”
“…….”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내뿜는 고요한 기세만으로 대장은 자신의 몸이 덜덜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수준이 낮은 그의 수하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뭐라는 거야, 이 노인네가.
-너도 그 새끼처럼 팔다리 찍어 줄까?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구먼.”
아겔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원탁과 한패가 된 걸 후회하게 해 줌세.”
-이 새끼가 어디서 그딴 꼬챙이를 꺼내 들어!
-죽여!
“멈……!”
대장이 소리치려고 했으나, 이미 사달이 났다.
다섯의 수하들이 아겔에게 달려들자마자, 피륙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