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22)화 (123/186)

122화 가지치기 (1)

아겔과의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죄수들을 이끌던 대장 죄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미친…… 싸우면 안 돼.’

원탁에서 내려온 명령은 아겔과 부딪치라는 게 아니었다.

보부상 집단인 트롯을 공격하라는 것.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가 해야 할 것은 저 악귀 같은 노인네와 생사결단을 내는 게 아니었다.

‘괜찮아. 저놈들을 미끼로 내던져 주고 근처에 있는 놈들에게 알리면 된다……!’

보부상 집단 트롯을 사냥하는데, 겨우 6명의 인원으로 될 리가 없다.

적어도 수천, 아니 최대 만 단위 이상 되는 죄수가 원탁의 명령에 따라 복도의 보부상을 사냥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는 이상, 아무리 위험한 복도일지라도 조금만 뛰면 괴물이 아니라, 보부상을 사냥하는 다른 죄수 집단과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트롯을 사냥하는 죄수 중에는 이름을 꽤 날리는 죄수들도 있으니 거기까지만 뛰어가면 된다.

탓……!

대장은 아무런 미련 없이 수하들을 버리고 튀었다.

저 아겔은 중급 죄수 수천 명이 달려들어도 잡을 수 없던 존재.

마주치지 않는 것이 최선인데, 덤벼들기까지 했으니 수하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에서 싸우는 죄수들은 그들의 대장이 뒤로 도망간 줄도 모르고 아겔과 맞섰다.

피륙이 갈리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제 대장의 유무를 살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촤악!

“카학……! 이 새끼……!”

아겔은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슬슬 산보하듯 걷는 모양새였는데도 당하는 건 되려 달려들던 죄수들이었다.

죄수들이 뻗는 무기들은 마치 어디로 어떻게 지나갈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나비처럼 피해 버렸다.

“이건 못 막을 거다!”

아겔이 한 차례 공격을 회피하는 사이, 죄수 한 명이 기회를 엿봤지만.

챙……!

기이하게 생긴 벌레 단검에 가로막힐 뿐이었다. 마치 거기로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당연하게.

서걱.

단도를 내질렀던 죄수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팔을 부여잡고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날카로운 것이 목젖을 가르고 지나간다.

숨도 목소리도 뱉지 못하게 된 죄수는 바닥에 엎어져 꺽꺽거리다가 손을 떨구었다.

아겔이 고개를 돌리자, 그를 바라보는 죄수들이 흠칫했다.

그들이 겁에 질리든 두려움에 삼켜졌든 노인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마치 가축을 도축하는 도살자처럼 무정하게 뼈와 살을 갈라내었다.

촤악……!

-크아아아악……!

또 한 명의 죄수가 가슴에 단검이 박혀 피를 흩뿌렸다.

두려움에 찬 눈으로 그 모습을 보던 죄수 한 명이 악바리처럼 소리 질렀다.

-제기랄, 이 미친 노인네! 갑자기 우리에게 왜 이러는 거야!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자네들 쪽이 아니었나.”

-…….

“누군가를 죽일 마음을 먹었으면, 누군가에게 죽을 각오도 했어야지. 살고 죽는 문제가 장난 같은가.”

아겔은 죄수들의 떨려 오는 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시비를 걸지 않았다고 해도 죽일 생각이었다네.”

역수로 잡힌 단검이 죄수들을 겨누었다.

“내 친우를 죽인 대가는 받아 내야겠으니.”

촤악-!

죄수들의 뒤쪽 복도 벽이 날카롭게 갈라졌다.

언제 움직였는지도 모르는 사이 아겔은 그들의 뒤에 서 있었다.

나란히 서 있던 죄수 3명의 목이 깔끔하게 절단되더니, 몸과 분리된 머리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털썩.

아겔은 죄수들의 숨을 끊고 나서 복도의 어둠 쪽으로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한 놈이 사라지는 건 싸움 중에 눈치챘다. 어차피 어디로 갔는지도 감이 잡히니 천천히 추적해도 문제없었다.

제이콥을 죽인 놈들은 하나도 살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보다 우선은 제이콥의 시신을 제대로 처리해 줘야만 한다.

친우의 시신이 복도의 괴물들에게 씹어 먹히는 꼴은 별로 보기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단검을 갈무리하려던 아겔은 문득 손이 펴지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음?”

단검을 쥔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손등엔 핏줄이 터질 듯 솟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힘을 얼마나 주었는지, 손 근육이 경직되어 풀리지 않을 정도였다.

“부작용 같은 건 아닐 텐데.”

이만한 감정을 느낀 건 오랜만이다.

분노.

감정에 휘둘려 손에 과한 힘이 들어갔다는 사실에 아겔은 실소했다.

“요즘 따라 마음이 참 마음대로 다스려지지 않는구먼.”

남은 손으로 마사지를 하며 천천히 걸어가던 아겔은 제이콥의 시신 쪽에서 기척을 감지했다.

시신 쪽에 서 있던 자들이 아겔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고독의 어둠, 정글의 주인을 뵙습니다.”

“자네들은 누군가.”

“트롯 소속 전투원들입니다. 현재 본관에서 공격당하고 있는 저희 일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순찰을 돌던 중이었습니다.”

트롯의 일원들은 죄수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보랏빛이 감도는 특수 복장을 한 모습이었다.

자신을 트롯 소속이라고 밝힌 죄수들 사이에서 가장 키 큰 죄수가 나아왔다.

그의 목에는 7이란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는 상급 죄수임에도 아겔에게 극도의 예를 잃지 않았다.

“정글의 주인이시여. 이 아이를 살해한 놈들을 대신 처리해 주신 것입니까?”

“아겔이라 부르게. 여섯 중 다섯은 내 손으로 끝냈네. 아직 한 놈이 남아 있으니, 시신을 처리하고 추적하려 했네.”

키 큰 죄수는 당장 길쭉한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했다.

“트롯을 위해 수고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이콥의 시신은 트롯이 맡겠습니다.”

“그러게. 내가 하는 것보단 자네들이 하는 게 낫겠지.”

제이콥이 트롯 소속이니, 그의 시신을 홀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키쟁이 죄수의 손짓에 수하들이 제이콥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키쟁이 죄수는 아겔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항상 제이콥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건 트롯이 아닌 제 개인적인 감사입니다.”

그가 품에서 시원한 음료를 꺼내 아겔에게 건넸다.

죄수는 그가 돈을 받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음료를 꺼낸 것이었다.

아겔은 거부하지 않고 음료의 병을 따 그대로 들이켰다.

“별거 아니네. 제이콥도 내게 그만한 일을 해 주었으니.”

키쟁이 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트롯에서도 제이콥만큼 열성적이고 훌륭한 보부상이 없었습니다. 그를 잃은 것은 우리 트롯의 큰 아픔. 저희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셨으니,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말했잖은가. 제이콥이 내게 해 준 것이 있으니, 자네들이 딱히 내게 해 줄 것은 없네.”

죄수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웬만한 고독의 죄수라면 트롯에게서 뭐든지 앗아가려고 안간힘을 썼겠지만, 역시 눈앞에 있는 노인은 달랐다.

“하지만…….”

“그리 마음이 쓰인다면. 지금 본관 상황이 어떤지 이야기나 해 보게.”

고개를 끄덕인 키쟁이 죄수가 말했다.

“예. 우선 트롯은 막대한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원탁의 지시를 받은 죄수들이 보부상을 습격하고 빼앗긴 물품도 꽤 많습니다. 상급 죄수들도 다수 복도에서 포착되었습니다.”

“전부 원탁의 일원들인가.”

“그렇습니다. 원탁이 움직였지만, 의외로 운동 연합과 약탈자들은 조용합니다.”

3개의 세력.

그중 운동 연합과 약탈자들은 이번 원탁이 벌인 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일과 상관이 없다는 입장 표명을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키쟁이 죄수가 조금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이리 도와주셨지만, 실상 저흰 원탁에 맞설 힘이 없어서 아겔 옹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보부상들을 보호하는 게 한계입니다. 한데 옹께선 역시 원탁과 맞서 싸우실 생각입니까?”

“그럴 생각이네. 그리고 날 돕지 않는다 하여 자네들을 비난할 생각도 없고.”

“송구합니다.”

“죄송할 일이 아니네. 트롯의 존재 의의는 날 돕는 게 아니잖은가.”

“…….”

“나 또한 트롯을 위해 놈들을 죽인 게 아니라네.”

단검을 쥐고 있는 아겔의 손은 여전히 펴질 생각이 없는 것처럼 굵은 핏줄이 도드라진 채였다.

“이제 거슬리는 놈들을 한 번에 정리할 때가 왔어.”

말의 의미를 깨달은 상급 죄수는 우수수 돋아나는 소름을 감추기 위해 떨려 오는 몸에 무던히 힘을 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한껏 허리를 숙였다.

“부디 하시는 일에 만사형통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보중하소서.”

“욕보게.”

고개를 숙인 상급 죄수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다시금 복도가 고요해졌다.

제이콥의 시신이 사라진 복도. 그러나 그가 흘린 피 냄새까지 지워지진 않았다.

언젠가는 그의 피 냄새조차 썩어 문드러진 이곳의 악취와 같이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비릿했다.

남은 한 놈을 추적하기 위해 아겔이 발을 박찼다.

눈 깜짝할 새에 마법 횃불 아래에 서 있던 노인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 * *

가우록.

원탁의 일원 중 하나인 그는 노예들과 함께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가.”

원탁이 세워진 목적은 아겔을 죽이기 위함.

어둠의 사도들의 명을 받아 고독에 수감된 이들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뭉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다른 세력들. 운동 연합과 약탈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원탁은 백수십 년의 시간 동안 다른 두 세력의 견제를 막아 내기 위해 세를 불려 왔다.

두 세력이 아겔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절지의 이권 때문에 원탁을 견제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아겔만 이득이 된 셈이 되었다.

쓸데없는 힘 싸움에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지만, 이제라도 원 목적으로 돌아왔으니 괜찮았다.

원탁을 이끄는 주술사도 그를 위해 꾸준히 힘을 길러 왔고 이제는 결단을 내렸다.

이제는 숨겨 온 힘을 마음껏 표출할 시간이었다.

가우록의 곁에 서 있던 죄수 하나가 입을 열었다.

“가우록 님.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하나 있습니다.”

“뭐지.”

그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양팔이 칼날로 되어 있는 죄수였다.

“그냥 아겔을 직접 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번거롭게 주변 죄수를 모조리 치는 건 효율이 나쁜 것 같습니다.”

트롯의 보부상뿐만이 아니었다. 칼날 죄수의 말대로 원탁은 모든 죄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탁은 노예들을 부려 모든 죄수를 공격하게 하고, 트롯과 같은 고독의 큰 집단은 따로 지시한 죄수들에게 맡겼다.

모든 책임은 원탁이 진다는 뜻 하나에 죄수들이 움직였다.

이렇게 번거롭게 움직이는 이유는 진정한 원탁의 일원들만이 알고 있었다.

가우록도 마찬가지로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원탁의 결정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나야말로 지금 당장 아겔을 찾아내서 죽이고 싶은 마음이다. 나의 주인께서 그럴 원하시니. 하지만 원탁에서 나온 결정은 절대로 어길 수 없다. 주술사께서 모든 죄수를 공격하라 했으니, 그에 따를 뿐이다.”

“어쨌든 아겔을 치는 과정이 이만큼 쉽지 않다는 뜻이군요.”

“그래.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칼날 죄수는 더는 묻지 않고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가우록은 수백의 노예 죄수들을 앞세우고 복도를 이 잡듯이 뒤졌다.

혹 살아 있는 사람이 나오면 곧바로 죽여 버릴 수 있도록 준비하고 말이다.

‘아겔을 알고 있는 모든 자를 죽인다.’

고독에서 아겔의 이름을 아는 자는 다 죽이기로 결심한 원탁이었다.

그야말로 말살.

아겔과 관계가 없든 한 번 만나 본 적도 없든 그건 원탁이 알 바가 아니었다.

죽인다.

그러다가 아겔과 관계가 있는 놈을 잡아 내면 된다.

아쉽게도 고독의 직원들을 건드리면 소장이 찾아올 테니, 아겔을 죽일 동안은 그들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특수 감방. 그곳만 차지한다면.’

고독의 직원을 살해한 죄수는 특수 감방에 갇힌다. 거기엔 아겔에게 호의를 지닌 죄수뿐만 아니라, 악의를 지닌 자들도 존재한다.

특수 감방만 차지한다면, 아겔을 잡는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리게 될 것이다.

쿵……! 쿵!

앞쪽에서 진동이 들려왔다.

가우록이 고갯짓을 하자, 칼날 죄수가 빠르게 전황을 살피고 왔다.

“지나가던 죄수들과 충돌 중입니다. 하나는 성자가 이끄는 무리이고, 하나는 송곳니 쿠라스크의 클랜 같습니다.”

“성자와 송곳니?”

그 둘이 중급 죄수이며 정글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가우록이 미소를 지었다.

아래에서 위로 뻗은 그의 송곳니 달린 입이 쭉 벌어졌다.

가우록이 타고 있던 뼈 마차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차를 옮기던 노예 죄수들이 신음했다.

“내가 가지. 놈들을 사로잡는다. 따라와라, 쿠르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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