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23)화 (124/186)

123화 가지치기 (2)

쿠라스크는 조용히 감방 안에서 몸을 추슬렀다.

“끄응…….”

지난 개방 때, 정글을 포함한 대륙을 집어삼킨 주술, ‘월야곡’.

그것 때문에 미쳐 버린 쿠라스크는 마피아 클랜의 후계자, 피에트로와 싸웠었고 아겔의 주먹에 정신이 날아가 버렸다.

“미친 영감탱이.”

자신이 어떻게 누웠는지는 나중에 수하들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광신도 이오베는 아겔에게 초크를 당해 기절했고, 자신은 완벽한 카운터 펀치에 턱주가리가 날아갔다고 말이다.

아겔에게 기절을 당하고 개방이 거의 끝날 때쯤이 다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쿠라스크였다.

아직도 그에게 맞은 턱이 아려 오는 듯했다.

턱을 주무르고 있던 쿠르스크 앞에 수인들이 먹을 것을 갖다 바쳤다.

“대장. 이거 밥…….”

“무슨 덩치도 쬐그만한 노인네가 왜 이리 센 거야?! 시발, 밥도 못 먹겠네!”

“…….”

괜히 승질을 내는 쿠라스크 앞에서 수인들은 뻘쭘한 얼굴로 슬슬 물러섰다.

쿠라스크가 돌아 버리면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젠장, 노인네와 엮인 게 잘못이지. 잘못이야.”

그의 입장에선 아겔과 만나게 되는 모든 과정이 정말 어쩔 수 없음의 연속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후회되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각종 기이한 일과 위험한 일은 전부 겪었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겪고도 제정신을 유지하긴커녕 살아남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닌가. 그래도 먹을 건 풍족한데…….”

정글은 대륙에서 바다와 견줄 정도로 자원이 풍부한 곳. ‘창공’이나, ‘사막’, 이전에 있던 ‘화산’은 지옥 같은 식량난이 일상인 곳이었다.

과연 아겔의 밑으로 들어간 게 이득인지 아닌지 고민하던 쿠라스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겠다, 쉬벌. 그냥 밥이나 처먹자.”

수하들이 가져온 고기를 맛보던 쿠라스크는 다른 수하가 다가오는 걸 느꼈다.

“뭐야. 뭔 일 있어?”

“대장. 누가 밖에서 대장을 부르는데요?”

“어떤 새끼가 날 불러.”

“성자요. 그 작자가 무리를 끌고 왔어요.”

쿠라스크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놈이? 살아 있었네?”

“보니까 멀쩡하던데요?”

“그래?”

성자는 흡혈귀놈과 함께 저번 개방의 혼란 속에서 정글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분명 다른 곳으로 떨어졌을 텐데, 그래도 살아는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쿠라스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같이 정글의 한 영역을 담당하는 자리에 있는데, 명분도 없이 꺼지라고 말하기도 좀 그랬다.

성자 같은 놈이 허튼소리를 하려고 부르는 것도 아닐 테고.

“가 보자. 애들 밥은 다 주고 온 거지?”

“예, 대장. 먹느라 정신없어요.”

쿠라스크는 수하 한 명을 대동하고 감방의 철창살을 향해 걸어갔다.

다가가 보니, 꽤 힘을 쓰는 죄수 가운데 성자가 있었다.

여전히 깨끗한 하얀색 사제복에 젊은 청년의 얼굴은 흠집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쿠라스크. 오랜만이군요. 다시 보게 되어 기쁩니다.”

“모가지 붙어 있었네. 난 또 정글에서 안 보이길래 뒤진 줄 알았더니.”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사막에 떨어져서 정글로 올라오는 중이었습니다. 다음 개방 때는 만날 수 있겠죠.”

“그래. 것보다 뭐 때문에 날 부른 거야? 복도까지 돌아다니면서.”

“그게…….”

안타까운 얼굴을 한 성자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트롯의 보부상들이 습격당하고 있습니다. 암묵적인 룰이 깨졌어요.”

“뭐? 어떤 병신 같은 놈들이 보부상을 공격해?”

쿠라스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트롯이 뭐 하는 집단인가.

이 거지 같은 교도소에서 그나마 물류를 담당해서 사람 사는 모양을 만들어 주는 놈들이다.

물론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 만큼 싸가지 없게 바가지를 씌우기도 하지만, 그 어떤 집단이라도 트롯을 공격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사라지면 트롯을 통해 누려 왔던 모든 것 또한 사라지니까.

쿠라스크의 비스트 클랜도 비정기적으로 트롯과 거래하는 사이였다.

“미친 거 아니야? 트롯의 수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트롯의 수장마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대입니다.”

“……그게 누군데.”

“원탁입니다.”

쿠라스크가 눈을 크게 뜨고 침을 삼켰다.

고독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원탁. 그들이 움직였다면, 과연 트롯조차 기를 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미친…… 진짜 전쟁이구나.”

“전쟁은 예전부터 이어져 왔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또 처음이군요.”

“시발…… 그 미친 것들이 도대체 뭘 하려고…….”

머리를 두 손으로 박박 긁던 쿠라스크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근데 그 얘길 나한테 해 주는 이유가 뭐야?”

성자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이 끔찍한 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손을 빌려주시겠습니까, 쿠라스크?”

“뭐?”

쿠라스크는 또 얼탱이가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성자와 자신을 가리켰다.

“너랑. 나랑. 둘이?”

“예.”

“너 미쳤냐?”

“……끔찍한 학살을 막자는 게 미쳤다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거군요.”

쿠라스크가 두 주먹으로 허벅지를 치며 어이없음을 표현했다.

“야 이, 멍청아! 우리 둘이서 어떻게 막아! 원탁을! 그 원탁이라고! 우리 같은 버러지들은 나댔다가는 바로 골로 가는 거야!”

“괜찮습니다. 보부상을 공격하는 자들은 원탁의 일원이 아니니까요.”

“……그건 또 뭔 소리인데.”

“원탁으로부터 시작된 일은 맞지만, 보부상을 공격하고 있는 건 다른 죄수들입니다. 우린 그자들만 막으면 됩니다.”

“젠장, 그런 고귀한 일을 하려면 광신도 놈이나 끌고 가지 왜 하필 나한테 온 거야?”

“이오베 씨는 이미 인듀라스와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한 조를 이뤄서요. 이제 저희 둘이 조를 이룰 때입니다.”

“이미 싸우고 있다고? 구라 아니고? 그 모기 새끼랑 광신도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쿠라스크는 바람 빠지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겔에게 정글의 관리를 위임받은 자들이 모두 움직이는 데 자신만 안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중에 또 아겔에게 무슨 질책을 받을지 모르니까. 쿠라스크는 정글의 영역권을 절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쿠라스크는 항복했다.

“제기랄……! 알겠어, 알겠다고! 또 미친 짓 한번 해야 한다는 거지? 그 노인네를 따라다니니, 이젠 일상이구나. 준비할 테니까 기다려!”

하이에나 수인이 씩씩거리는 모습으로 발을 구르며 감방 안쪽으로 돌아갔다.

성자는 미소를 지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서 죄수 하나가 물어 왔다.

“저, 성자님……? 광신도와 백작은 이 일에 전혀 관련이 없지 않습니까? 왜 거짓말을…….”

바를라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손가락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쉬잇. 거짓말이란 건 비밀입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신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닐 텐데…….”

“형제님.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것. 둘 중에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아……!”

“율법 조문의 고하를 나누는 건 사람의 연약함이지만, 소망은 허물을 덮는 법이죠.”

깨달음을 얻은 죄수가 고개를 조아리고 뒤로 물러섰다.

바를라는 다시 고개를 돌려 쿠라스크의 감방 안을 바라보았다.

‘어르신이었어도 이렇게 하라 말씀하셨을 테지.’

트롯엔 어르신이 아끼는 고블린 보부상도 있으니 말이다. 그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겔은 바를라가 봐 온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다웠으니.

‘어르신. 부디 이 혼란 속에서 무사하시길.’

* * *

“헥헥…….”

복도에서 전신을 피로 물들인 하이에나 수인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주변은 완전히 피로 물든 학살의 장.

트롯을 공격하는 중급 죄수들과 싸운 결과였다.

“젠장, 트롯을 공격하는 놈들이 뭐 이렇게 많아?”

“숫자도 그렇지만, 어중이떠중이들도 아닙니다. 다들 이름 있는 죄수들이었어요.”

중급 죄수 중 힘깨나 쓴다는 죄수들이 전부 트롯 사냥에 동참하고 있었다.

원탁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에서 말이다.

성자와 페어를 이룬 쿠라스크는 지금까지 몇 명과 싸웠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죽은 적의 시체를 발로 차 버리면서 성질을 냈다.

“하여간 존나 많네!”

파아아앗…….

성자의 손에서 흘러나온 초록빛 기운이 쿠라스크의 전신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친 그의 수하들도 기운을 북돋게 해 주었다.

바를라가 숨을 가다듬었다.

“후, 예상은 했지만, 역시 쉽지 않군요.”

“진짜 얼마나 이를 갈았으면 이렇게 작정하고 트롯을 공격해?”

성자는 입술을 씹었다.

원탁이 이렇게 움직일 정도라면 아예 칼을 빼 들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아겔을 죽이기 위해서 말이다.

“조심해야겠습니다, 쿠라스크. 최대한 상급 죄수들은 피하면서…….”

쉬이이익……!

빠른 속도로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바를라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던 길쭉한 칼날은 쿠라스크의 손톱에 부딪혀 허공으로 튀었다.

깡!

“어떤 새끼야!”

쿠라스크가 소리를 지르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어둠 속에서 죄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비스트 클랜과 성자의 무리에 공격을 가했다.

바를라의 눈이 커졌다.

“원탁의 노예들……!”

“젠장, 적이다! 맞서 싸워!”

바를라가 보호 주문을 외웠고, 수인들과 죄수 무리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기세는 좋았으나, 몇몇 죄수들은 어찌 된 일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목이 잘려 나가야 했다.

촤악!

원탁의 노예들 가운데 길쭉한 칼날의 팔을 지닌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는 쿠라스크를 노려보았다.

“오랜만이다, 송곳니.”

“쿠르반…… 너였냐.”

“큭큭, 같은 처지의 친구를 만나니 오랜만에 즐겁군.”

쿠라스크는 쿠르반을 알아보았다.

그 또한 일전에 약탈자 소속이었던 인물. 쿠라스크가 그곳에서 나오기 전에 먼저 나와 원탁으로 들어간 죄수였다.

“우리 귀염둥이 하이에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

“그 젓가락 같은 팔로 되겠냐?”

하이에나 수인이 근육을 부풀렸다.

“캬아아앗……!”

쿠라스크가 날카로운 포효를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쿠르반은 두 팔을 교차해 십자로 그를 베어 갔다.

촤악!

두꺼운 가죽 때문에 쿠라스크의 몸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여전히 낯짝이 두껍네!”

“젓가락으론 안 된다니까!”

하이에나의 날카로운 손톱이 허공을 갈랐다.

직접 맞지 않았어도 쿠르반은 재빨리 몸을 굴렸고, 뒤에 있던 노예들이 바람 칼날에 맞아 조각이 나 버렸다.

쿠르반이 오른팔로 몸통을 찔러 들어왔고, 관통될 수 있다고 판단한 쿠라스크는 몸을 회전시키며 회피하는 동시에 손틉을 휘둘렀다.

공방이 일체가 된 쿠라스크를 보고 쿠르반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손톱을 막아 냈다.

“너…… 좀 세졌다?”

“X밥아, 난 네가 상상도 못 하는 일들을 겪었어, 어떤 노친네 때문에.”

악마숭배자와 싸우고, 약탈자들과도 싸우고.

월야곡의 주술에 당해 보는 등, 목숨이 위험한 일은 몇 가지나 있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쿠라스크는 이전보다 더 날카롭고 짐승처럼 변해 있었다.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본능에 더욱 정신을 맡겨야 했으니까.

파아아앗……!

쿠라스크의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솟아났다.

성자의 주문.

위기감을 느낀 쿠르반이 먼저 칼날의 팔을 찔렀다.

쿠라스크는 피하지 않았고 칼날이 몸을 꿰뚫었다.

푸욱……!

“끄응…… 존나 아프잖아!”

쿠르반의 팔을 한 손으로 붙든 그는 남은 한 손으로 그의 팔을 내리찍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칼로 이루어진 쿠르반의 팔을 잘라 버렸다.

서걱!

“끄아아아아악……!”

“캬앗, 어딜 깝치고 있어!”

한쪽 팔이 잘린 쿠르반이 땅을 구르다가 뒤로 물러나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끄으으으…… 너 이 새끼!”

“난 쟤가 회복시켜 주는데, 넌 쟤 같은 놈 없지?”

몸을 관통하고 있던 칼날을 빼내자, 구멍이 뚫려 있던 복부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바를라의 회복 주문은 머리가 잘리지 않는 이상, 웬만한 부상은 전부 치유할 수 있었다.

쿠라스크가 쿠르반을 향해 다가갔다.

뒤에서 바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끝내야 합니다, 쿠라스크! 이들은 보부상을 습격하는 자들과 달라요. 원탁의 노예들이니 얼른 끝내고 물러가야 합니다!”

저 앞에 있는 쿠르반조차 원탁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그들 밑에서 일하는 노예들인 건 확실했다.

이들은 트롯을 공격하는 자들과 달랐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원탁의 일원이 근처에 있을 수 있으니 서둘러 물러나는 게 좋아 보였다.

“금방 끝낼 테니까, 기다리고 있…….”

말을 하던 쿠라스크는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주먹을 볼 수 있었다.

피하려고 했지만, 거대한 주먹은 피할 시간을 주지 않고 쿠라스크의 복부를 강타했다.

콰앙!

굉음을 내며 날아간 쿠라스크가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그를 쓰러뜨린 괴물. 앞에서 나타난 거대한 파충류의 피부를 지닌 죄수는 바를라를 내려다보았다.

“흐흐, 죄를 지은 성자, 바를라 하돌라.”

“당신은……! 가우록!”

“호오, 내 이름을 알고 있었구나.”

커다란 도마뱀 수인 같은 그의 커다란 꼬리가 흔들렸다.

송곳니가 올라온 입은 무엇이든 박살 낼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아겔의 수하들. 잠깐 나 좀 봐야겠다.”

가우록의 주먹이 성자의 얼굴을 향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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