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가지치기 (3)
콰앙……!
보호 주문을 외운 바를라는 가우록의 주먹을 막아 냈다.
전신을 뒤흔드는 듯한 주먹. 이렇게 가볍게 휘둘렀어도 바위 정도는 우습게 부술 위력이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쿠라스크보다 머리통 2개는 더 큰 몸집. 비늘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폭력적인 근육. 일견 안톤보다도 덩치가 큰 것 같았다.
그런 괴물의 주먹질에도 신성 보호막이 깨지지 않은 건 단순히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강한 주먹이었다면, 보호막이 깨지고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파아아앗……!
바를라는 이를 악물고 신성력을 내뿜었다. 밝은 빛을 내는 그의 신성력이 복도의 어둠을 한순간에 몰아냈다.
-끄아아악……!
-너무 밝아!
-눈을 뜨면 안 돼!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던 죄수들이 난리를 치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마치 불을 켜면 도망가는 바퀴벌레처럼.
“흠……”
가우록도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뒤로 물러섰다.
환한 빛이 점점 사그라들었고 어느새 바를라는 벽에 부딪혀 쓰러져 있던 쿠라스크의 곁에 서 있었다.
신성력으로 빛을 발해 한순간 틈을 얻은 것이다.
파아아앗!
바를라의 회복 주문으로 순식간에 회복을 마친 쿠라스크가 타격당했던 배를 붙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끄응, 변비가 다 나을 것 같네.”
멀쩡히 일어서는 쿠라스크를 보며 가우록의 눈이 조금 커졌다.
“호오, 그만한 부상도 금방 치유하는 건가.”
내장이 으스러져 파열되고 허리뼈가 부러질 만한 부상이었지만, 바를라의 신성 치유로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쿠라스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릴 얕보지 마라, 도마뱀아. 이딴 상처쯤은…… 끄응, 그래도 아프긴 하네.”
몸은 회복되었지만, 받은 충격은 몸이 기억한다. 고통에 움츠러드는 것은 당연한 일.
그 고통을 일상처럼 살아온 쿠라스크가 아니었더라면, 참지 못하고 쇼크에 다다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머리만 날아가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다만, 바를라를 지키지 못하면 무조건 패배할 것은 자명했다.
상대는 중급 죄수가 아니라 상급 죄수이니.
가우록은 7급 죄수였다.
“재밌구나. 겨우 중급 죄수 주제에 그만한 신성력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군.”
“성좌의 가호 덕분이죠.”
바를라는 긴장한 얼굴로 가우록을 바라보았다.
회복과 동시에 쿠라스크에게 활력의 힘도 불어넣었지만, 승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쿠라스크.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전신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그 어느 때보다 전력을 낼 수 있는 상태.
쿠라스크는 작게 말했다.
-절대로. 절대로 못 이겨.
-그럼……
두 사람의 조용한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가우록의 몸이 앞으로 쇄도했다.
“잡담은 저승에서 실컷 하게 될 테니, 지금은 날 재밌게 해 다오.”
쿵!
이를 악문 쿠라스크는 곧장 그를 막아서기 위해 정면으로 맞부딪쳤고, 바를라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면서도 패배하리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상대는 상급 죄수. 감히 중급 죄수 따위가 맞설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바를라는 온 신성력을 쿠라스크에게 쏟아부었다.
“흡……!”
빛이 쿠라스크의 몸을 감싸고 치유와 보호의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쾅! 쾅! 쾅! 쾅!
쿠라스크는 짧은 사이에 전신을 얻어맞고 연신 뒤로 밀리고 있었다.
바를라의 지원에도 가우록의 무력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크크, 이 정도냐?”
“끄으으으…….”
주먹을 맞을 때마다 몸의 어딘가가 부러지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쿠라스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바를라의 회복 주문이 없었더라면, 당장 무릎을 꿇었을 텐데 그는 상처가 치유되자마자 가우록을 막으려 달려들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내면서.
“쿠와아아악-!”
“크크크, 흥을 돋우는구나. 그래, 싸움은 이래야지.”
그러나 저지하기 위한 쿠라스크의 발악이 가우록에겐 그저 애들 장난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쿠라스크의 손톱이나 주먹을 전혀 피하지도 않고 맞서고 있었다. 눈이나 급소로 향하는 것만 피하고 대부분 일부러 맞아 주는 모습.
가우록의 몸에 몇 번 상처가 나기도 했지만, 도마뱀 수인인지라 상처가 나자마자 씻은 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퍼억!
“커흑……!”
또다시 복부에 주먹을 맞고 날아간 쿠라스크는 겨우 바닥에 착지했다. 아려 오는 고통에 복부를 잡는 쿠라스크.
가우록은 피식 웃으며 주먹을 풀었다.
“성자여, 주문이 더디면 이 녀석이 죽는다.”
“크윽……!”
쉴 시간을 주지 않고 가우록이 다시 달려들었다.
바를라는 이를 악물었다.
척 보아도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쿠라스크는 방어를 굳히고 물러서는데도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고 있었고, 바를라가 회복시켜도 피해는 늘어만 갔다.
반면 가우록은 바를라에게 시선을 줄 정도로 여유로웠고, 그 와중에도 비늘 덮인 주먹은 자유분방하게 쿠라스크를 몰아쳤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복도 저쪽에선 죄수들끼리 피 터지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 한쪽이 잘리긴 했지만, 쿠르반은 아직도 선두에서 서서 싸우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라!”
바를라가 이끄는 죄수 무리와 쿠라스크의 수인들이 연신 원탁의 노예들에게 패퇴하고 있었다.
의지가 없고 오로지 명령에만 복종하는 원탁의 노예들은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적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듯 악독한 공격을 퍼부었다.
분명 살아 있긴 하나, 그 모습은 네크로멘서가 부리는 시체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바를라는 전신에서 땀을 흘리며 신성력을 뽑아내고 있었다.
역시 상급 죄수인가.
중급 죄수는 넘볼 수 없는 무력을 가진 이들. 단 한 급수 차이이지만, 그들과 가우록의 차이는 마치 어른과 아이 그 이상 같았다.
이대로는 바를라의 넘치는 신성력이 바닥날 때까지 시간 끌기밖에 되지 않았다.
역전할 방도가 없다면, 이 자리에서 패퇴하게 될 것이다.
쿠라스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바를라의 푸른 눈에 결의가 서렸다.
‘내 목숨을 바치면 쿠라스크는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우록의 태도를 보아 그는 쿠라스크와 바를라를 당장 죽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전력을 낸다면, 단숨에 죽일 수 있는데도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슬슬 몸을 움직였으니까.
‘아겔의 수하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역시 저 도마뱀 수인의 목적은 어르신이 틀림없다.’
어르신께 폐를 끼칠 수 없다.
라는 생각이 한순간 성자의 머리를 지배했다.
바를라가 결심을 굳히고 지팡이를 들어 바닥에 쿵 내리찍었다.
“메우스 에스 투 보툼(Meus Es Tu Votum). 도 비타 메아(Do Vita Mea). 아치페 미(Accipe Me).”
목숨을 바쳐 외우는 기도문.
가공할 만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고, 주변이 환하게 물드는 것을 넘어 흰색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파아아아앗……!
이전보다도 더 밝은 빛. 이번엔 원탁의 노예들도 격하게 반응하며 눈을 가리고 연신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었다.
-비, 빛이…….
-눈이……!
-으아아아악……!
과연 목숨을 바친 기도 주문은 어마어마한 효과를 냈다.
악에 물든 원탁의 세력을 밀어내는 동시에 아군의 상처를 전부 단숨에 치유하는 힘.
다만, 대가는 참혹했다.
안색이 파리해지고 성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생명을 대가로 쓰는 신성력이었기에 힘은 탁월했으나, 시전자는 죽음이란 결과만을 맞이해야 했다.
입술을 콱 꺠문 바를라가 힘을 쥐어짜 내며 소리쳤다.
“쿠라스크……! 어서 도망을……!”
전력을 다한 신성력. 거룩한 빛 가운데서라면 도망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원탁의 일원들은 전부 악마와 계약한 자들이니 상극인 신성력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틈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어둠은 성자의 예상보다 짙었다.
쿵!
발을 박차는 소리.
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를라의 앞에 거대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컥……!”
두꺼운 손이 그의 목을 홱 붙잡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이내 성자의 몸에서 발하던 빛이 점점 사그라들고 다시 주변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를라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신성력이……!’
목숨을 바쳐 올린 기도문의 효과가 마치 실패한 것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우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이 신성력의 빛을 타락시키고 전부 지워 버린 것.
그 때문에 바를라는 죽지 않았지만, 오히려 죽는 것보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크크큭, 그래도 반딧불이보다는 밝은 빛이었다, 성자. 내 인정해 주지.”
매서운 파충류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바를라를 직시하고 있었다. 옆에는 쿠라스크도 목이 붙잡혀 있었다.
“끄으으…….”
벗어나고 싶었지만, 점점 조여 오는 숨통에 바를라는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안 돼…….’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가우록의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보였다.
“한숨 자 둬라. 다시 눈을 뜨면 즐거운 고문 시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를 악물고 버텨 봤지만.
결국, 바를라는 의식을 잃었다.
* * *
복도의 한쪽 어두운 감방.
고요함과 적막함이 채운 곳에 마법 횃불의 빛을 따라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안톤은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명상 끝마쳤다.
“으음…….”
내면을 걷다가 다시 돌아온 안톤은 신음을 냈다.
끝없는 공포.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는 것조차 영혼을 잃을지 모르는 공포를 가져온다.
그러나 안톤은 아겔과 잠시 거리를 둔 이후로 오직 이 과정만을 반복해 왔다.
자신의 한계를 넘고 아겔이 보여 줬던 힘을 쟁취하기 위해서.
‘지금 나로서는 어르신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정글에서 약탈자들이 가져온 골렘과 싸우던 아겔.
안톤의 힘을 빌린 것이긴 했지만, 그가 보여 준 압도적인 힘은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것이었다.
기를 활용하는 숙련도부터가 안톤보다 훨씬 뛰어난 아겔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칫 열등감을 느낄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안톤의 마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활활 붙는 의욕으로 내면을 걷기 시작했고, 이전 개방보다도 더욱 기의 활용이 능숙해진 안톤이었다.
내면의 어둠을 더 깊이 걸을수록 자신의 근원과 가까워지고 힘을 활용하는 능력이 강화되었다.
“이대로만 가면 된다. 어르신께 반드시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제 아겔이 상대할 자들은 상급 죄수.
아직 중급 죄수에 불과한 안톤이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도 상대하지 못할 텐데, 절지에는 상급 죄수가 차고 넘친다.
아겔을 살해하려는 자들이 우글거리는데, 짐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겔을 살해하려는 자들이 무슨 이유로 그런 건지 자세히 알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 어떤 놈들이 오더라도 박살 낼 것이다.
‘지금까지 내 힘은 어르신을 돕기에 일천했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왔다. 이대로 더 정진한다면 곧 7급으로 올라설 수 있으리란 직감이 왔다.
고독에 처음 수감되었을 때부터 여전히 유지해 왔던 6급이란 급수.
이제는 한계를 돌파할 때가 왔다.
꼬르륵…….
허기를 느낀 안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면에 집중하느라고 몸을 돌보지 못했다. 육체가 나약하면 강한 내면은 아무짝에도 소용없기에 그는 움직였다.
배낭에 보관해 둔 꿀이 바닥났기에 직접 사냥에 나서야 했다.
끼이이익.
철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안톤은 거침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감방을 나서는 건 매번 위험한 일이지만, 이젠 익숙한 일이 되었다.
주변의 기척을 유심히 살피며 걷던 안톤은 문득 앞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을 감지했다.
‘신선한 피 냄새.’
고독의 복도야 항상 썩어 버린 피 냄새와 각종 오물의 냄새가 났지만, 이렇게 신선한 피 냄새가 난다면 주의해야 했다.
앞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안톤은 마법 횃불 아래에 살해당한 죄수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죄수가 죽는 건 너무나도 일반적인 일이지만, 안톤은 이번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보부상……?”
트롯의 보부상이 죽어 있었다. 짊어지고 있던 배낭의 물품을 전부 빼앗긴 채로.
감히 고독에서 보부상을 건드리는 미친놈들이 누굴까 생각하던 안톤은 이내 자신의 무기를 잡았다.
“한두 놈이 한 짓이 아니군.”
시체의 상태를 살피자, 여러 놈이 공격한 것이었고 기습적이었다.
우발적이지 않고 계획적인 것. 보부상이 알아채지도 못하게 습격한 것이었다.
주변에 보부상을 습격한 범인들이 있을 수도 있었기에 안톤은 긴장을 끌어올렸다.
“어떤 미친놈들이 보부상을 공격한 거지.”
전투 망치를 꺼내 든 안톤은 시체를 두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안톤 웨이크.”
흠칫 놀란 안톤은 전투 망치를 휘둘렀다.
쾅!
부웅 소리를 낸 전투 망치는 어느새 다가와 있던 괴물의 머리통을 박살 내고 피를 흩뿌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 있었구나. 드디어 찾았다.”
“누구냐.”
목소리의 주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놈이 부리는 듯한 기괴한 몬스터 몇 마리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기어 나올 뿐이었다.
상대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놈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톤을 찾아온 것이다.
“무기술사, 안톤 웨이크. 아겔라스토스의 심복.”
“…….”
“위대한 원탁 앞에 무릎을 꿇을지어다.”
“원탁……?”
절지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원탁. 그곳에서 왔다면, 놈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닐 것이다.
‘상급 죄수……?’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안톤은 전투 망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가 상급 죄수일지라도 고분고분하게 대해 줄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원탁은 아겔을 살해하기 위해 결성된 집단이니.
“순순히 따라온다면 죽음만은 면하게 해 주마.”
안톤의 붉은 외눈이 일순간 푸른 불꽃으로 물들었다.
“어르신께 대항하는 너희에게 내가 무릎 꿇을 것 같나. 이 자리에서 쳐 죽여 주마.”
“……중급 죄수인 너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상관없다.”
쿵!
바닥을 찧은 전투 망치가 푸르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을 거다.”
부웅……!
거대한 전투 망치가 복도의 괴물들에게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