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25)화 (126/186)

125화 가지치기 (4)

쾅! 쾅! 쾅!

푸른 불꽃의 폭력적인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일반인이 근처에 있기만 해도 전신이 으스러질 만한 충격.

그런 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안톤은 생각보다 고전하는 중이었다.

‘괴물놈들이……!’

처음 일격으로 죽인 놈과 달리 다음부터 나오는 놈들은 쉽게 죽어 주지 않았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놈들은 일반적인 생물이 아니었고, 마물에 가까운 놈들이었다.

괴물들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안톤에게 연속적으로 합공을 가했고, 아무리 안톤이라도 손쉽게 파훼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전투 망치를 거세게 휘둘러 공격을 하나씩 쳐 내는 것뿐이었다.

쾅! 쾅! 쾅!

‘내 망치를 맞고도 멀쩡하다니…….’

괴물들의 외피가 단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이놈들을 물리치려면 아무래도 뒤에서 조종하는 녀석을 잡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기감을 넓혀 봐도 그 어디서도 괴물들을 조종하는 녀석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거냐! 내가 두렵나!”

거칠게 포효한 안톤은 정면으로 달려드는 괴물의 머리통을 전투 망치로 내려찍었다.

콰앙-!

단단한 외피는 부서지진 않았지만, 안쪽으로 전달된 충격 때문에 괴물의 뇌가 곤죽이 되었다.

“푸흐흐, 두렵긴. 굳이 내가 직접 상대할 가치를 못 느낄 뿐이야.”

쓰러진 괴물을 놔두고 안톤은 옆으로 망치를 휘둘렀다.

콰직! 푸욱……!

“큭!”

망치가 굉장한 위력을 내는 건 맞지만, 그만큼 허점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안톤의 철갑옷을 뚫고 괴물의 기다란 촉수가 어깨에 상처를 입혔다.

다른 한 손에 대검을 든 안톤이 촉수를 잘라 버렸다.

다시 사방에서 날아오는 촉수를 망치의 커다란 머리로 막아 내는 한편, 대검으로 서걱서걱 난도질했다.

촉수가 잘리면서 튄 산성 피가 안톤의 몸에 붙었지만, 푸른 불꽃이 순식간에 태워 버려 안톤에게 피해를 주진 못했다.

“신기하네. 그 푸른 불꽃은 참 희귀한 기운이야. 내가 갖고 싶을 정도로.”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화륵……!

안톤의 두 병기가 완전히 불꽃에 감싸였다.

불꽃의 감싸인 병기는 괴물들의 단단한 외피도 두부처럼 썰고 부수기 시작했다.

촤악! 쾅!

한순간 승기를 잡은 안톤은 서둘러 푸른 불꽃이 꺼지기 전에 괴물들을 압도했다.

갑자기 거친 기운으로 당하기 시작하자, 괴물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연신 물러났다.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피하는 괴물들을 따라가던 안톤은 문득 섬찟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쾅!

거대한 주먹 하나가 안톤의 앞을 지나갔다.

망치로 막았지만, 그 충격까지 온전하게 흘려 내진 못했다.

“쿨럭……!”

겨우 바닥에 착지해 자세를 잡은 안톤은 타오르는 눈으로 어둠 속에서 나타난 괴물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르르르…….

어마어마한 덩치.

이전에 보았던 윌리엄의 시체 골렘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힘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안톤조차 쉽게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한 괴물이 등장했다.

“아끼는 놈인데, 네놈이 이것도 상대할 수 있는지 보겠다.”

입이 쩍 벌어진 괴물은 주먹을 내려놓고 마구 촉수를 내뿜었다.

3미터 되는 덩치의 안톤도 어디서 꿇리는 몸집이 아니었지만, 괴물이 내뿜는 촉수는 하나하나가 안톤의 허벅지보다 굵었다.

날카로움은 둘째치고 스치기만 해도 몸이 으스러지는 충격을 맛보게 될 것이다.

안톤은 막을 생각을 버리고 몸을 움직여 회피했다.

“푸흐흐, 덩치도 산만한 게 미꾸라지처럼 잘 피하네. 아주 상태가 좋은 실험체가 되겠어.”

서걱!

새로 나타난 괴물이라고 촉수가 잘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 있던 놈들보다 힘이 배로 들어가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를 완벽하게 운용하며 대검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그 위협적이던 촉수가 모조리 잘려 나갔다.

쿠웨에에에엑!

모든 촉수를 잃어버린 괴물은 위압적인 덩치로 안톤을 찍어 누르려 했다.

그러나 안톤은 노련하게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하고 전투 망치로 몬스터의 몸에 착실하게 충격을 쌓았다.

아무리 철옹성 같은 외피라도 충격을 안으로 하나씩 쌓으면 내부가 버티질 못할 테니, 언젠가는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쉬익! 콰직!

어디선가 또 날아온 촉수가 안톤의 등을 가격했다.

“……!”

가까스로 신음은 참아 냈지만, 끔찍한 격통이 등을 타고 흐르는 건 쉬이 견뎌 낼 수 없었다.

의지와 반대로 쓰러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다시 두 병기를 들고 자세를 잡은 안톤은 어둠을 노려보았다.

두 마리의 똑같은 괴물이 새로 등장해 있었다.

목소리도 여전히 들려왔다.

“아끼는 놈이 꽤 많아서 말이야. 시간도 없으니 빨리 포획해 가야겠군.”

“……감히 누가 날 포획할 수 있단 말인가. 잡혀가느니 죽겠다.”

화륵……! 화륵 화르르륵!

안톤의 전신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전과 달리 어둠의 기운이 천천히 스며든 새로운 불꽃이었다.

“어둠의 기운. 역시 아겔의 직속이라 그 힘을 쓸 수 있구나. 하지만 너무도 옅어. 그 빌어먹을 노인네에 비하면 말이지.”

안톤의 눈이 커졌다.

상대는 이 어둠의 힘에 대해서도 잘 아는 듯했다.

말하는 것을 보아 아겔이 그 힘을 내뿜는 모습도 직접 본 모양이었다.

“넌…… 누구이기에 어르신의 힘을 아는 거지?”

“그 빌어 처먹을 노인네에게 팔 한 짝이 뜯긴 가엾은 사람이지.”

저벅. 저벅.

누군가가 천천히 복도의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습격자.

오른쪽 어깨부터 해서 팔이 전부 기괴한 괴물의 것으로 교체된 인간이었다.

외눈 안경을 쓰고 있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비뚤어진 치아를 내보였다.

“과학자……!”

그 외견을 아는 안톤이 눈을 부릅떴다.

과학자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급 죄수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가 아는 바와 달리 목에는 7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애초에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설마 과학자가 자신을 습격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안톤이었다.

“푸흐흐, 이렇게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야, 안 그래?”

“……어떻게 상급 죄수가 된 거지.”

“그거야 어렵지 않지. 원탁의 힘을 빌렸다.”

과학자는 일전에 아겔을 습격한 중급 죄수 무리에 끼어 있던 자였다.

패퇴한 중급 죄수 무리 중 팔과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심각한 부상에 몰락했다고 들었지만.

지금 그는 멀쩡하다 못해 이전보다 더 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원탁의 존재 의의가 아겔을 죽이기 위함인데 내가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

원탁은 대부분 악마의 힘을 사용하는 자들.

모습을 감춘 기간 동안, 그들의 힘을 빌려 7급 죄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악마숭배자를 이끌었던 다르키스도 악마에게 제물을 바쳐 상급 죄수로 올라서려 했으니.

“내 팔을 가져간 빌어먹을 노인. 난 그놈을 반드시 붙잡아야겠어. 죽기 전까지 실험하다가 고문한 뒤 죽일 거다.”

“…….”

등이 으스러질 것 같다.

더 무리하게 움직이면 반드시 몸에 후유증이 남는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안톤은 다시 대검과 망치를 들고 일어섰다.

쿵……!

타오르는 눈으로 고개를 든 안톤이 말했다.

“내가…… 그렇게 하도록 놔둘 것 같나.”

“푸흐흐, 실험체가 발악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야. 더 발악해 봐. 심장은 펄떡일 때 꺼내는 게 제맛이니까.”

두 다리를 굽혀 달릴 준비를 한다.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강력한 힘을 모은다.

안톤이 발을 박차고 달려들려는 순간.

거대하고도 어두운 기운이 그가 목표로 한 괴물의 머리를 단숨에 소멸시켰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에 안톤은 달려 나가려는 자세 그대로 휘청였다.

그가 고전한 괴물조차 단숨에 죽여 버리는 위력.

깜짝 놀랄 폭음과 연기 사이로 누군가 걸어왔다.

또각또각.

정갈한 구두 소리. 그러나 음울한 기운이 차오른 발소리는 그 주인이 범인(凡人)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멍청한 곰탱아.”

기다란 권총을 든 남자는 새빨갛게 가열된 총열로 물고 있던 궐련에 불을 붙였다.

쓰으으읍. 후.

몽글몽글한 환약의 향기가 복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과학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야수보다 날카로운 주황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 * *

“나설 자리는 구분해야지.”

궐련을 피운 남자는 과학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안톤만을 노려보았다.

“한동안 잠자코 있었던 게 그 쥐뿔만 한 힘을 얻기 위해서였나. 어쩐지 그 노인네 곁에서 안 보인다 했더니.”

“…….”

“곰탱아, 저놈이 나타난 이유를 정말 모르는 거냐.”

마피아킹 줄리안 카바로.

그가 나타났다.

안톤의 눈이 꿈틀거렸다.

“나를 노려?”

“그럼 누굴 노리지. 저놈들이 날 노릴까.”

“…….”

“원탁이 아겔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면, 그 수하인 너는 몸을 사릴 줄 알아야지. 상대도 되지 않으면서 말이야.”

뿌드드득…….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안톤은 내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리다.

아무리 이전에 중급 죄수였던 과학자였을지라도, 지금은 상급 죄수로 탈바꿈하고 온 상태.

그를 상대하는 건 안톤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드시 패배한다.

그러나 아겔을 노리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놈들이 노리는 게 그거다. 네 알량한 충성심을 알고 아겔이 아닌 널 잡는 게 일 순위.”

“…….”

“원탁, 개자식들은 절대로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아. 아겔라스토스를 잡기 위해 백수십 년을 기다린 놈들이다.”

말을 듣고 있던 과학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흐흐, 이런. 갑자기 그쪽이 나타날 줄은 몰랐는 걸, 마피아킹. 그런데 너야말로 자리를 구분해야 하지 않아?”

약탈자는 지금 원탁의 횡포에도 침묵하고 있었다.

아마 아겔과 원탁이 싸우는 동안 일어날 격전을 피할 생각, 혹은 어부지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약탈자 소속인 줄리안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줄리안의 눈이 맹수처럼 빛났다.

“아가리 닥쳐라, 버러지야. 난 이곳에 약탈자로서 온 게 아니다.”

“…….”

줄리안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빚.

아니, 그걸론 설명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짐.

노인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지나치던 줄리안이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빌어먹을. 애새끼 처지나 봐줘야 하는 건가.'

지금 당장이라도 딸은 무사한지 달려가서 확인하고 싶은 줄리안이었지만, 눈앞에 마주한 일이 더 급했다.

안톤은 아겔과 어둠으로 이어진 자. 죽으면 그리 좋은 꼴을 보게 되진 않을 것이다.

그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눈에 선한 줄리안이었다.

“결국, 원탁이 이빨을 드러낼 줄은 알았지만, 치졸한 수를 쓰는구나.”

“푸흐흐, 약탈자들만 할까. 너희야말로 비겁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 아닌가.”

“우리 마피아 클랜은 아니지.”

쓰으으읍. 후우.

궐련에 담긴 환약의 성분을 깊게 들이마신 줄리안이 눈을 떴다.

“입만 움직일 거라면 꺼져라, 버러지.”

“그럴 순 없지. 어떻게 잡은 아겔의 수하인데!”

과학자의 몸이 즐겁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는 더욱 기괴한 괴물들을 내보냈다.

“어디 마피아킹의 실력 좀 볼까?”

“죽어도 상관없다면.”

우우우우웅…….

검은 기운이 줄리안의 권총에 담기기 시작했다.

악마와 거래하고 얻은 어둠의 기운. 아겔의 것과는 달랐지만, 충분히 악한 기운은 복도의 분위기를 삭막하게 만들었다.

“분열! 분열의 냄새! 악마의 힘을 내게 보여 줘!”

과학자의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권총의 탄이 발사되었다.

콰아아앙-!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