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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27)화 (128/186)

127화 벗 (1)

벌레 인간 후삭은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아겔의 기척을 살폈다.

평안하게 앉아 있는 노인과 다르게 후삭의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다.

‘왕의 유일한 인간 친우.’

아겔이 고독에서 어떠한 명성을 날리고 있든, 후삭에겐 이 수식어보다 가슴을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건 없었다.

그의 왕이자 고독의 모든 벌레의 주인은 한참이나 아겔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가 찾아오기를.

그러나 아겔은 최근 들어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다.

이렇게 왕께서 직접 아겔을 부른 것도 주어진 시간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곁에서 자신의 왕을 지켜보는 후삭도 마음이 말라 가는 것만 같았다.

요동치는 후삭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아겔이 뒤에서 입을 열었다.

“궁금해지는구나. 그가 날 부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더냐.”

아겔은 현재 원탁을 상대하려 준비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 벌레들의 왕이 그를 호출한 것이었다.

후삭도 알고 있었다. 원탁이 봉기 중이란 것을.

아무리 폐쇄 구역에 살고 있지만, 바깥소식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복도의 어둠이란 요소와 시스템의 제재를 거의 완벽하게 피해 가는 벌레들.

벌레들을 이용해 보이지 않는 모든 곳에서 정보를 모은다.

벌레는 죄수가 아니니 제재를 가할 수도 없고, 완벽하게 박멸하는 건 불가능했다.

후삭이 고개를 숙였다.

“(먼저 이유를 말씀드리지 않은 무례를 용서하소서.)”

“되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침울한 마음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힌 후삭이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왕께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병은 아니었다.

그저 천수를 누린 벌레들의 왕이 곧 죽음을 맞이할 때가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자연스레 찾아오는 죽음.

그래도 곁에서 지켜보는 신하들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 친구가 나이는 많이 먹었지. 그런데?”

“(아겔 님께서 마지막으로 방문하시고 약 6개월이 지난 그때부터 건강이 날로 악화되셨습니다.)”

“흠.”

침음을 내뱉은 아겔이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마지막 방문이 1년 전이니 6개월 전부터 건강 상태가 악화된 모양이었다.

“(왕께서는 기다리고 기다리셨습니다. 아겔 님께서 다시 방문해 주시길 말입니다.)”

“나를 말인가. 나를 본다고 다해 가는 숨이 연장되진 않을 텐데.”

“(그런 걸 바라진 않으셨습니다.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하기 원하셨던 겁니다. 하나 왕께서는 역시 아겔 님을 존중하시고 굳이 억지로 자신의 곁에 두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폐쇄 구역의 한 구역을 차지할 만큼 어마어마한 괴물.

억지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만한 무력을 지녔어도.

한번 정도는 심술을 부릴 수 있는 친구 사이였어도.

그는 한 번도 아겔을 대함에 존중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이례적으로 아겔을 데려오라 명한 것이다.

왕조차도 곁에 아무도 남지 않는 죽음만큼은 두려웠기에.

매일 어둠을 걷는 아겔은 그 심정을 이해했다.

필멸자는 누구나 느끼는 공포. 미지에의 발걸음. 죽음.

아겔도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랬군. 자주 들리지 못해 미안하게 되었구먼.”

아겔의 사과.

그리 큰 목소리로 말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미 위에 타고 있던 자들 전원이 그 말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후삭의 몸이 굳었다.

아겔이 누구인가.

왕의 벗이며, 고독을 아우르는 어둠이라 일컫는 자다.

그런 그가 지금 이 자리에서 사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왕에게 직접 하는 것도 아닌 그 신하에 불과한 자신들에게.

“내 벗에게도 미안하지만, 그 곁에서 힘겨워했을 자네들에게도 사과하고 싶구먼.”

“(아앗…….)”

개미 등에 타고 있던 왕의 신하들이 화들짝 놀랐다.

아겔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기에.

그들은 과분한 것을 받았다는 듯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감정을 이겨 내지 못한 후삭은 그대로 일어나 아겔의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곁에 있는 신하들 전원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한 명 한 명이 왕의 측근이라 불리는 자들.

부들부들 떠는 그들은 전부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격정적인 감사와 기쁨. 왕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졌음에 대한 씁쓸하고도 영광스러운 마음.

“(감읍할 따름입니다. 왕의 벗이시여.)”

“사과하는 건 나인데, 왜 자네들이 무릎을 꿇는가. 일어나게.”

“(윤허해 주십시오. 신하 된 모습으로 이것이 옳습니다.)”

“허, 자네들의 왕은 내가 아닌데.”

후삭이 고개를 들었다.

“(왕의 벗이잖습니까.)”

“…….”

“(잊으셨습니까. 왕께서 아겔 님을 대하시길 자신을 대함과 다름이 없게 하라 하셨습니다.)”

“쓸데없는 말이지. 바란 것도 아닐세.”

후삭은 미소를 지었다.

가히 권능을 가진 자의 겸손이었다.

그의 말대로 후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정을 조금 추스른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편해 보였다.

평범한 사람의 얼굴은 아니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편해진 건지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

아겔이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성을 내진 않으려나 모르겠구먼.”

“(그렇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이리 찾아오시려 했다는 말씀을 전해드리면, 왕께서 반드시 기뻐하실 겁니다.)”

“나야 볼일이 있으니까. 일이 있어서 들르려 하는 건데, 그래도 좋아하겠나.”

“(당연합니다. 들르시는 이유가 있든지 없든지 오시기만 하면 반드시 기뻐하실 겁니다.)”

후삭은 마치 왕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기간 그의 곁을 보좌했으면.

굳건한 확신이 묻은 목소리였다.

“……자넨 여전히 충심이 강하군.”

후삭은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 * *

바람이 있을 수가 없는 이곳에, 아겔은 얼굴을 스치는 풍압을 느꼈다.

빠르게 이동하는 거대 개미 위에 앉아 있으려니, 폐쇄 구역이 도달하는 건 금방이었다.

복도 끝 마법 횃불도 없이 오직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폐쇄 구역.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곳은 아니었다.

이곳은 생각보다 많은 괴물이 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인가.”

“(거의 다 왔습니다. 이제부터 ‘요람’과 ‘무덤’을 지날 겁니다.)”

“알겠네.”

안쪽에 있는 벌레들의 구역, ‘고치’에 도달하려면 이 두 곳을 지나야만 했다.

폐쇄 구역 전체를 통틀면 따로 떨어진 한 구역이 더 있긴 했지만, 요람, 무덤, 고치는 나란히 있었다.

요람은 요괴들의 구역이었고, 무덤은 죽은 자들의 영역이었다.

아겔이 말했다.

“아직도 요괴들의 수가 제일 많은가.”

“(대요괴 로슉이 죽은 지 꽤 되었어도 요괴들의 수는 줄지 않았습니다. 벌레들과 딱히 큰 마찰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죽은 자는?”

“(루토리온의 권속들도 침묵할 따름입니다. 오히려 절지보다 이곳이 평화로울 겁니다. 찾아오는 손님도 적으니 말입니다.)”

한번 발을 들이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살벌한 말과 달리, 외부인이 아닌 폐쇄 구역에 사는 이들은 나름 화평을 누리고 있었다.

밖에서 건드리지만 않으면, 이곳에 가득한 괴물들이 밖으로 향할 일도 없었고.

만약 폐쇄 구역의 죄수들이 밖으로 향한다면, 고독의 본관은 현재보다 더한 살육의 장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꾸르륵. 꾸르륵…….

빠르게 나아가는 개미 곁으로 요괴들이 몰려들었다.

딱히 공격할 의사는 없는지, 그저 지나가는 개미를 유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가지각색을 한 요괴 죄수들.

한때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던 대요괴 로슉의 자손들인 그들은 개미를 구경하러 왔다가 아겔이 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화들짝 놀라 도망갔다.

상급 죄수도 만만케 볼 수 없는 요괴들조차 아겔에겐 덤벼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후삭이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평소엔 도망까지 가진 않는데, 역시 아겔 님이 계셔서 그런지 길이 빨리 트이는 것 같습니다.)”

“로슉과 친우까진 아니었어도 가끔 교류하곤 했네. 죽은 로슉의 의지가 남아 있어 날 피하라 일러두었을 게야.”

‘대요괴’인 로슉과 ‘죽은 자’ 루토리온은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실상 단순히 죽었다고 말하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대요괴의 본체는 아직도 썩지 않고 남아 움직이고 있었고, 루토리온은 언데드로 남아 있었으니.

그렇다고 몸만 남은 것들과 대화를 할 수는 없었다. 몸이 남아 움직일 수 있다고 정신까지 남은 건 아니니.

그와 달리 벌레들의 왕은 아직 살아 있었다.

…….

후삭의 말대로 요괴들은 별다른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

로슉의 직계 자손들도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가끔 아겔이 요람을 지날 때마다 마중 나와 인사를 건네곤 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겔의 감상은 간명했다.

“오랜만인데, 인사가 없구먼. 싸가지 없는 것들. 저번까진 그래도 마중 나오더니.”

“(…….)”

요괴들에게 싸가지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노인의 중얼거림이라 후삭은 못 들은 척했다.

요람은 금방 지나칠 수 있었다.

올라탄 거대 개미가 정말 빠른 속도로 기고 있어서 꽤 먼 거리임에도 순식간에 지나갈 수 있었다.

그다음은 무덤을 지나쳤다.

죽은 자들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전신이 굳어 있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무덤을 지나치자, 곧 허물과 고치가 가득한 장소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성분으로 만들어진 실과 고치, 그리고 허물. 이 장소를 ‘고치’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방에서 벌레들이 한 무더기로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거대한 다리와 날개. 크기와 색깔도 각양각색인 벌레들.

그들은 아겔을 태운 개미가 다가오자, 빠르게 길을 터 주었다.

왕에게 바로 나아갈 수 있도록.

후삭이 개미를 멈춰 세우고 먼저 내렸다.

아겔이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왜 여기서 내리는가. 더 가야 하지 않나?”

뒤따라 내리는 아겔에게 후삭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저도 갈 수 없는지라…… 당부의 말씀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문제라도 있나?”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

후삭은 곤란한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왕께선 지금 기억이 흐려지셨습니다. 저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기억이 온전치 못하십니다.)”

“치매가 왔다는 말인가? 벌레들의 왕이?”

“(……그게. 하아.)”

한숨을 내쉰 후삭이었지만, 확고하게 부정하진 못했다.

“(감히 제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치매 걸린 노인이라. 재밌겠구먼. 그래도 아까는 정신이 온전했던 것 아니었나?”

“(확실히 저희에게 명령을 내리실 때는 기억이 온전하실 때뿐입니다. 그렇지만 이게 수시로 변하시는지라.)”

“유의하도록 하지. 더 없나?”

“(그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후삭이 잠시 머뭇거렸다.

“뭔데 그러나. 빨리 말해 보게.”

“(음.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왕께서 가끔…… 화를 내시기도 합니다.)”

아겔의 눈썹이 휘었다.

“공격한다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예. 왕의 진노로 다친 신하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치매에 걸렸는데 화도 내고 공격도 한다라. 완전 죽기 딱 직전이군. 그래 놓고 날 데려온 건가.”

경을 칠 말이었지만, 후삭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저흰 왕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쯧. 뭐, 다 자네 잘못이겠는가. 다 못난 왕께 충성을 바친 죄밖에 없지.”

“(…….)”

“하여간 알겠네. 가 볼 테니, 부르면 오게.”

“(……예.)”

아겔은 벌레 신하들을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친우가 치매에 걸렸다는 소식은 그리 달갑지 않았으나, 그래도 가야만 했다.

치매에 걸렸어도 친우란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

.

.

폐쇄 구역의 어둠은 고독 어느 곳의 어둠보다 짙었다.

아겔이 걸어가는 쪽으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많던 벌레들이 사사삭거리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고치의 가장 안쪽에 있는 구역.

왕의 거처로 구별된 이곳은 고치 초입 부근에서 본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한 허물과 고치들이 있었다.

슥.

앞으로 걷던 아겔 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였다.

아파트 크기만 한 무언가가 움직였음에도 아겔의 청각으로 잡아 낼 수 없을 만큼 은밀했다.

한참을 걸은 아겔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걸음을 멈췄다.

“베르미스. 자네인가.”

아겔과 비슷한 체구의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죽음의 문턱 바로 앞에 선 존재라고 보기엔 정정한 검은 턱수염을 가진 노인.

인간의 모습이라 치면 70대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외형과 달리 앞에 있는 자는 초월적인 이지(理智)와 권능을 가진 존재.

벌레 임금, 베르미스 메르시스.

암녹색 장포를 입은 그는 가는 눈으로 아겔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겔은 내면의 어둠을 통해.

노인은 본체의 날카로운 오감을 통해.

“날 기억하는가, 베르미스. 나일세, 아겔라스토스. 자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여기 왔다네.”

아겔의 말에 베르미스는 뭔가 떠올렸다는 듯이 몸이 움찔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반응에 아겔이 다가갔다.

“그래 바로 나일…….”

그때, 드디어 베르미스의 입이 열렸다.

그의 입으로부터 이 드넓은 폐쇄 구역이 울릴 만큼 낮고 그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

걸어가다 말고 아겔의 몸이 우뚝 섰다.

“베르미스?”

“누구시냐니까요.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제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예요, 할아버지?”

“세상에.”

아겔은 이마를 탁 쳤다.

수백 년도 더 산 괴물이 기억을 잃고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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