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벗 (2)
아겔은 당황스러웠다.
난생 이런 일은 아겔도 처음인지라.
“이예이~”
신이 난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참담하게 만들었다.
‘이걸 어찌해야 할까.’
커다란 자신의 허물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한 사람.
얼굴은 해맑기가 짝이 없을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
문제는 미끄럼틀 놀이를 하는 녀석이 검은 턱수염을 휘날리는 늙어 빠진 노인네란 사실이었다.
행동은 완전히 어린아이 하는 짓에서 벗어나는 게 없었고, 목소리도 노인의 것인데 하는 말투도 아이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전에 내보낸 세로가 더 어른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당황스러운 한편 정말 안타까움도 든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친우가 기억을 잃고 어린 시절의 아이로 돌아가 있다니.
고독에서만 100년이 가까운 시간을 보낸 친구의 아픈 모습을 지켜보는 건, 꽤 끔찍한 일이었다.
탓.
어느새 베르미스는 미끄럼틀 놀이를 끝내고 아겔 앞에 서 있었다.
“저기요, 할아버지. 왜 멍하니 서 있기만 하세요. 저랑 같이 안 놀 거예요?”
“응?”
언제 왔는지 작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노인의 모습을 한 베르미스는 정신체였기에 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눈이 보이지 않는 아겔에게 말을 걸며 천천히 움직였을 베르미스였겠지만, 지금은 그런 배려 따윈 없다.
아이가 되어 버린 그는 아겔을 모르니까.
“할아버지가 허리가 아프구나. 조금만 더 쉴 시간을 주련?”
“약속했어요. 이따가 같이 노는 거예요.”
노인은 억지로 아겔의 손을 붙잡아 새끼손가락 깍지를 끼더니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그리곤 한쪽으로 달려가 혼자서 숨바꼭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겔은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허리가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회복될 시간이 필요했다.
베르미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계속 한숨만 쉴 것 같았기에 아겔은 조용히 베르미스를 두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이를 어찌할꼬…….”
상황이 쉽지 않았다.
밖에선 원탁의 죄수들이 아겔과 관련이 있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내려 혈안인데.
도움을 청하러 온 친우가 저 모습이니 아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 다시 특수 감방으로 향한다고 해도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코르브스의 말에 따르면 원탁 죄수의 반절이나 특수 감방을 점거하고 아겔의 접근을 막고 있으니.
무기 없이 늑대 무리 사이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충돌해 본다면?
‘특수 감방을 지키고 있는 놈들과 싸워도 내가 놈들을 이길 확률은 3분지 1도 안 될 테지.’
다시 말해 그들과 단신으로 부딪칠 경우 66% 확률 이상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었다.
특수 감방까지 아무 일 없이 도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베르미스의 도움이 아니고서야 현 상황을 ‘안전히’ 타개할 방법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끄응, 일이 복잡하게 되었구나.”
일단 베르미스를 지켜봐야 한다.
어쩌면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폐쇄 구역은 오히려 아겔에겐 안전 구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까지 뚫고 들어오려면 요괴들이 득실거리는 요람과 죽은 자들이 가득한 무덤을 지나쳐야 하니.
다만, 밖에서 사냥당할 자들이 조금 걱정될 뿐이었다.
“코르브스를 믿는 수밖에.”
안톤도 줄리안이 구해 주었다고 했다.
아무리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라도 은혜는 아는 모양이니 아겔을 위해 움직여 줄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아겔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할아버지 이제 허리 괜찮아요?”
“…….”
“같이 놀아요!”
베르미스가 다가와 아겔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 나는…….”
아겔은 머뭇거렸다.
꺼리는 기색을 보이자, 베르미스가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안 놀아요……?”
“…….”
“여기선 아무도 나랑 안 놀아 줘…….”
노인의 목소리.
하나 어린아이의 마음이 담긴 그 말에 아겔의 가슴이 턱 막혔다.
찢어질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그는 왕의 자리에 앉아 홀로 고독함을 견뎌 왔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돌아간 지금도 외톨이.
죽기 직전이라곤 해도 신하들과 힘의 격차가 천지 차이일 것이다.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신하들이 어떻게 베르미스를 대했을지 상상이 갔다.
아마 벌레 수인들은 그저 이곳을 벗어나지 말아 달라고 간언하고 물러났을 것이다.
물론 기억을 잃은 왕을 홀로 둔 것을 죄라고 말하기엔 과했으나.
혼자 남은 베르미스의 마음엔 외로움만 켜켜이 쌓였으리라.
‘그래서 날 부른 건가.’
잠시 정신을 되찾았을 때의 베르미스는 깨달았을 것이다.
하루의 대부분 기억을 잃고 죽음의 문턱 앞에서 홀로 고독을 삼켜야 하는 자신을.
누구도 진정으로 자신을 대해 줄 수 없다.
아겔을 제외하곤.
뿌득.
주름진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부드럽게 풀린 손이 베르미스의 손을 잡았다.
“어…….”
침울해 있던 베르미스가 동그란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겔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이 놀자. 나도 놀고 싶었다.”
환하게 변한 노인 베르미스의 얼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 * *
후삭은 안절부절못하고 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벌레 수인 신하들이 부복해 있었다.
“(늦어진다.)”
그는 불안한 심정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등에 달린 투명한 날개가 수시로 붕붕 소리를 내는 게 그 증거였다.
“(아겔 님밖에 없는데…….)”
벌레 임금의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건 ‘고치’에 있는 모든 벌레가 알고 있었다.
충신인 그는 자신의 주군이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내도록 해야 할지 끝없이 고민했다.
정신이 어린아이로 돌아가 버린 왕.
신하 된 자로서 마음 편하게 어린아이인 왕과 놀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도가 없진 않았다. 다만, 가끔 흐트러지는 기억에 혼란스러워하는 베르미스가 폭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후 누구도 왕께 나아가는 자는 없었다.
“(설마 두 분께서 싸우고 계신 건……?)”
불안한 마음으로 하는 상상은 언제나 최악으로 치달았다.
후삭의 말을 들은 신하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랬다면 소음이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아겔 님이 걱정이다.)”
후삭은 다음 대 벌레들의 왕좌에 오를 후계.
비록 지금 벌레 임금인 베르미스의 직계 자손은 아니지만, 그만한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런 후삭도 죽기 직전인 베르미스와 육탄전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베르미스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아무리 힘을 봉인 당하셨어도 주상은 주상이시다. 그대들도 알지 않는가.)”
“(전성기 때보다 훨씬 쇠약해지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아겔 님에 대한 걱정은 그만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후삭 공.)”
후삭은 도리어 자신의 주군이 아닌, 아겔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를 건드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너무 유명한 빛과 어둠에 대한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모르는 자는 없었다.
“(아겔 님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을 텐데, 화를 당하진 않을까 걱정한 것뿐이야.)”
신하 한 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히려 주상을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후삭 공. 그 아겔 님이신데.)”
“(…….)”
자신의 주군과 그의 벗인 아겔. 둘 중 누굴 걱정해야 맞는 건지 이젠 헷갈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털어 버린 후삭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내가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아무렴 두 분이 어디 평범한 존재들일까. 하찮은 내 걱정이 도움이 될 만큼 작은 분들이 아니시다.’
마음을 조금 정리한 후삭에게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뎅.
징 같은 배를 가진 벌레 하나가 자신의 배를 쳤다.
시간이 되었다는 뜻.
그에 따라 벌레 죄수들이 그쪽으로 몰려갔다.
후삭과 신하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벌써 경배 시간인가.)”
“(그런 듯하옵니다.)”
“(방해되지 않게 우리가 비켜 주도록 하지.)”
“(예.)”
신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후삭을 따라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폐쇄 구역 ‘고치’에는 따로 구별된 장소 같은 게 없다.
그저 허물이 많이 쌓여 있는 곳과 그렇지 않아 광장처럼 쓰이는 곳.
그리고 벌레 임금이 머무는 광대한 어전(御前)이 구분되어 있을 뿐.
후삭과 신하들은 성좌와 공좌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자들을 위해 넓은 광장에서 비켜 주었다.
걸어가는 후삭의 등 뒤로 신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삭 공.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하라.)”
“(인간들은 성좌와 공좌를 믿는 자들이 각기 다투고 서로 싸운다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평생을 고독에서 태어나 이 폐쇄 구역에서 살아온 벌레 신하.
인간과 마주치는 것도 아겔이 전부이니, 확실히 궁금해질 법한 사안이었다.
후삭이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사실이다, 으두크 공. 인간들은 신과 악마를 믿는 자들이 편을 갈라 싸우는 게 일반적이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이다.)”
“(어찌 그런 야만적인 짓을…… 제 종족의 살을 까먹는 짓 아닙니까.)”
“(야만이라……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로군.)”
인간들과 다르게 벌레 종족은 서로 다른 존재를 믿는다고 싸우는 짓은 하지 않는다.
물론 성좌와 공좌가 서로 적대하는 건 당연히 알고 있고, 그들을 믿는 벌레 수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 오기도 한다.
그러나 벌레 종족은 제 종족을 죽이란 명령 앞에 자결할지언정, 절대로 동료에 대한 신의를 놓지 않는다.
이것이 약소 종족인 벌레 종족이 억겁의 시간 동안 무리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 중 하나였다.
신과 악마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
오히려 그들은 바로 옆자리에서도 각자 믿는 존재들을 경배한다.
“(신과 악마를 믿지만, 충성은 오직 왕께 바치는 것. 인간들은 그게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도 우주를 호령하는 우두머리가 있지만, 충성을 바치는 것은 아니지.)”
“(그런…… 덜 자란 종족이군요.)”
“(동의한다. 가끔 아겔 님처럼 특출난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지만.)”
“(확실히…… 제가 인간이었으면, 제 충심을 아겔 님에게 바쳤을 것 같습니다.)”
벌레 수인들에게 충성은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
자칫 위험할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 신하의 말을 트집 잡는 자는 없었다.
그들도 마음속으론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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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 신하들과 짧게 대화를 나누던 후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되겠다. 어전을 살피고 와야겠다.)”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한 게 더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어전에 대한 불미스럽고 사적인 접근은 금지 사항이었으나, 측근 신하들은 말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왕이 그런 상태에 빠져 있으니, 어쩌겠는가.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번처럼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후삭은 고독에 남은 벌레 종족을 이끌 다음 대의 희망. 베르미스의 눈먼 공격에 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전에 슬쩍 살피고 오려다가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
“(빠르게 갔다 오겠다. 공들은 여기서 대기하도록 하라.)”
“(예, 후삭 공.)”
후삭은 측근 신하들 사이에서 나와 어전을 향해 걸어갔다.
어전이라고 대단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저 왕인 베르미스가 그 거대한 본체로 있을 수 있도록 거대한 공간 하나를 구분해 놓은 곳일 뿐.
하나 왕에 대한 극도의 충성심을 가진 벌레 수인들은 절대로 어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왕의 허락이나 특별한 용무 외에는 어전에 대한 접근은 금지되어 있기도 하고.
후삭은 목숨을 걸고 걸어가는 것이었다.
‘부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터인데…….’
왠지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드는 후삭이었다.
순간 한 생각이 후삭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이 맞붙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왕의 신하로서 불경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이었지만, 무인이기도 한 후삭은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아겔이 싸우는 장면을 몇 번 보긴 했으나,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가 벌레 임금에 뒤처지지 않는 권능의 소유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주상께서는 고독에 들어오시고 한 번도 제대로 싸워 본 적이 없으시다.’
베르미스는 8급 죄수.
힘이 봉인되기 전에는 무려 10급에 달하는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고독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를 모셨던 후삭은 당연히 베르미스의 전성기 힘을 알고 있었다.
행성을 두부처럼 으깨고 쏟아지는 은하 정부 전함의 포격에도 거뜬하던 그 위엄.
결국, 붙잡히긴 했어도 당시 베르미스가 종족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구역은 주변에 별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완전한 폐허가 되어 버렸다.
무력의 화신 그 자체를 보는 듯했다.
‘반면 아겔 님은 오로지 힘이라고 말하긴 어렵지.’
아겔의 능력은 베르미스가 가진 힘과 결이 달랐다.
상대방의 목숨을 앗아 가는 능력. 마치 사신과도 같은 기세가 있었다.
후삭은 고독에 있었던 수많은 죄수가 그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떤 죄수라도 예외는 없다. 그에게 찍히면 죽는다.
사신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으면 무엇이 그를 대변할 수 있을까.
척. 척.
거대한 허물.
어전으로 가는 통로가 되는 이 허물은 베르미스의 본체가 벗은 허물의 일부였을 뿐이다.
작은 일부임에도 크기가 웬만한 건물보다 컸다.
후삭은 허물의 입구를 통과해 어전으로 접근했다.
‘어디에 계시는 거지.’
긴장한 후삭은 허물 사이로 몸을 숨기며 더 안쪽으로 접근했다.
그렇게 나아가던 후삭은…….
“헤헤헷, 10초 세는 거야!”
“허허, 꼭꼭 숨어라. 잡히면 혼쭐을 내줄 게다.”
드넓고도 어두운 어전을 뛰어다니는 노인 한 명과 이미 붕대로 감고 있는데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리는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베르미스의 것과 다르지 않은 해맑은 얼굴을 하던 아겔.
그는 문득 후삭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겔의 해맑은 얼굴이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
“(…….)”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 이제 찾아요!”
저 멀리서 베르미스가 꺄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후삭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아무 말도 하지 말게.”
“(…….)”
“후우…… 술이 있으면 좀 가져오게.”
“(예…….)”
후삭은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자신은 아무것도 못 본 것이라고 셀 수 없이 되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