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29)화 (130/186)

129화 벗 (3)

복도의 어느 어둠 속.

조용히 정좌한 자세로 눈을 감고 명상하는 노인이 한 명 있었다.

근처엔 아무것도 없었다. 생명이라고는 노인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렁이는 마법 횃불의 불빛도 노인의 몸에는 제대로 닿고 있었다.

“주술사 님.”

누군가 나타나 노인 앞에 부복하자, 주름진 눈꺼풀이 열렸다.

보라색 안광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전신이 파충류의 비늘로 덮힌 자, 가우록.

그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말하라.”

“아겔과 관련된 두 사람을 붙잡아 왔습니다.”

“호오.”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주술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했구나.”

가우록 곁에 나타난 기괴한 괴물이 축 늘어진 성자 바를라와 송곳니 쿠라스크를 붙들고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주술사는 다시 가우록을 바라보았다.

“하나 부족하다. 아겔과 관련된 자들은 모조리 붙잡아 와야만 한다.”

“과학자가 마피아킹과 붙었고, 나머지 원탁의 일원들도 몇몇을 추적하는 중입니다.”

“전부 잡아 와라. 그리고 고문할 것이다.”

붙잡아 온 이들을 고문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겔과 관련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뿐. 다른 것은 없다.

놈의 동료들은 전부 붙잡을 생각이었다.

가우록이 말했다.

“그런데 아겔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소식을 들었다는 자조차 한 명도 없습니다.”

“그 노인네는 숨고 도망가는 것에는 도가 튼 놈이다. 초조해하지 말고 천천히 몰아야 하지.”

그는 절대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 번도 원탁의 손길에 붙잡힌 적이 없는 쥐새끼 같은 놈이었다.

“그래도 저와 관련된 놈들이 붙잡히면 안 나오고는 못 배길 거다. 계속하라.”

“알겠습니다, 주술사시여.”

가우록이 물러갔다.

다시 혼자 남게 된 주술사는 다시 명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둠 속에서는 그에게 힘을 더해 주는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막아야 한다…… 그를 막아야 해……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죽여야만 해…… 아겔이 어둠의 사도가 되도록 놔두면 안 된다…….]

반복되는 주문 같은 목소리에 주술사 카흘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뜻을 따릅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 * *

후룩.

어전.

왕이 거하는 곳에서 술을 들이켜는 불경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를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전에 있는 사람이라곤, 아겔과 후삭.

그리고 아겔의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노인, 베르미스뿐이었으니.

후삭은 아겔을 탓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도 술상 앞에서 술잔을 받아 대작하고 있었으니.

그가 말한 대로 술상을 가져오니, 그의 왕은 이미 아겔 곁에서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역시 맛이 좋군.”

다시 한잔을 비운 아겔은 알 수 없는 고기 안주를 씹고 다시 잔에 술을 따랐다.

이미 늘어져 있는 빈 술병 십여 개.

벌레들이 만드는 술이야말로 진미를 냈다.

어정쩡하게 마법이나 흑마법으로 만드는 밀주보다는 역시 벌레들이 빚는 술이 제일.

안주는 거들뿐이었다.

후삭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고, 그저 아겔과 속도를 맞춰 술잔을 들었다.

아겔이 입을 열었다.

“아까 본 건 잊어 줬으면 좋겠구먼.”

고독의 어둠, 혹은 사신이라고 불리는 자가 숨바꼭질하는 모습이라니.

아이가 된 벗을 위해 한 일이라지만, 남에게 보이기엔 불편함이 없진 않은 일이었다.

후삭은 확실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평소 눈이 안 좋은지라.)”

“고맙구먼. 마음이 좀 놓여. 한데 눈이 안 좋다면 비타민을 좀 먹어 보게. 난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자넨 아직 가망이 있으니.”

“(예……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그 뒤로 아겔은 말없이 술을 들이켜기만 했다.

후삭은 이를 악물고 날아가려는 정신을 붙들었다.

“(아겔 님. 무례를 용서하시고, 질의를 허해 주십시오.)”

“무례는 무슨. 말하게.”

그는 쓴맛이 어린 얼굴로 질문했다.

“(혹시…… 아겔 님께선 주상의 기억을 되찾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질문을 받은 아겔은 술잔을 내려놓고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치매기를 없애 줄 수 있냐는 겐가?”

“(……주상께서 붕어하시기 전까지만이라도 온전한 정신으로 계신 것을 뵙고 싶습니다.)”

“허허, 생각이 잘못되었구먼. 다 죽어 가는 사람이 기억을 되찾았다고 제정신이겠는가.”

“(…….)”

“죽음의 공포 앞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냔 말일세.”

순간 후삭은 아겔이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눈을 붕대로 감고 있는데, 그 안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

어마어마한 어둠이 덮쳐 오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후삭은 진저리를 치고 벌떡 일어섰다.

가히 검은 파도 속에 휩쓸려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

그 가운데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죽음일세.”

“(헉헉…….)”

숨을 가다듬기도 어려웠다. 더 나아가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 건지조차 인지할 수 없는 심연이었다.

“정신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겠는가.”

후삭은 평생 베르미스를 모시며 전사로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언제나 사선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고, 죽음의 고비도 수십 번이나 넘겼다.

그러나 아겔이 보여 주는 실제 죽음은 차원이 달랐다. 뛰어난 전사인 후삭도 죽음 앞에선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삭이 덜덜 떨리는 얼굴로 아겔을 바라보았다.

아겔은 태연하게 술을 들이켰다.

“베르미스가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죽기 전까지 지금의 압박 속에서 살아갈 거라네.”

“(…….)”

“어쩌면, 공포를 이겨 내기 위해 기억을 전부 씻어 버린 걸지도. 그걸 우리가 되돌린다고 그가 좋아하겠는가.”

“(그런…….)”

왕이 직접 자신의 기억을 깊은 곳에 묻어 버리고 어린아이의 천진함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내려 했다는 것.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는 만큼 죽음은 두려워진다.

하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아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예 모르니까.

탁.

아겔은 빈 잔을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게다가 그의 기억을 되찾아 주는 건 아무리 나라도 불가능한 일이라네.”

아겔은 영혼에 간섭할 수 있을 뿐이지, 육체를 다루는 자가 아니다.

그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는 베르미스.

이렇게 노인의 모습으로 실체를 갖춘 건 베르미스의 정신이 형상화한 것이다.

정신은 육체로부터 나온다. 정신체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는 건 육체가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육체를 회복시켜 줄 만한 능력이 없어. 내가 가진 알약이 있지만, 그건 인간에게나 쓰는 것. 베르미스에겐 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네.”

“(그렇다면…… 주상의 혼은 어떤 상태인지 아십니까?)”

“쉬고 있지. 저승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면서. 베르미스의 영혼은 잠에 빠졌네. 강제로 깨우면 원혼이 될 게야. 육체와 정신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

아겔에겐 선연하게 보였다.

저 어둠 속에 있는 베르미스의 거대한 본체 안에서 쉬고 있는 영혼이.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그의 영혼은 저승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리고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네. 그저 가만히 지켜봐 주고 보내 주는 것. 그 이상은 욕심일세.”

“(이해했습니다.)”

그제야 후삭은 자신의 마음에 욕심이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온전한 정신을 되찾은 왕을 보고자 하는 것도 그의 욕심이다. 이제는 정말 그를 떠나보내기까지 지켜봐 주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자네 말처럼 말썽을 부리거나 하진 않더구먼. 화도 내질 않던데?”

“(가끔 기억을 되찾으실 때, 혼란스러움에 화를 내시곤 합니다.)”

아겔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월적인 육체라 몸이 자가수복을 하기 때문이지. 스스로 기억을 봉인했으나, 그것도 잘 안 되는 것이야. 하면 그런 일이 불시에 찾아오는 것이겠구먼.”

“(예. 주상의 공격에 중태에 빠진 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내 주의하겠네.”

후삭이 아겔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친구를 돌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나. 나도 오히려 이곳에 있으니 안전한 셈이네.”

“(원탁이 설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트롯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저희와 상관없는 단체이지만, 원하신다면 폐쇄 구역 근처로는 놈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쉽지만, 폐쇄 구역에 있는 죄수들은 본관 복도로 나가는 걸 꺼리는 편이었다.

요괴들도, 죽은 자들도 좀처럼 이 외진 곳에서 나가지 않는다.

고치에 있는 벌레 수인들도 마찬가지.

현재 왕이 죽음의 문턱에 있는데, 어딜 나간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후삭은 아겔이 부를 때 달려와 주었고, 현 상황에서 원탁과의 싸움을 지원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무리가 될 일은 부탁하지 않겠네. 자네 말처럼 한다면 놈들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리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 평소처럼 행동하게.”

“(하지만…….)”

“난 베르미스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지, 자네들에게 명령을 내리러 온 게 아니네.”

단호한 아겔의 말에 후삭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진정한 벗이란 이런 자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가 원하지도 않는데, 벌레 수인들이 급작스럽게 나서서 싸울 명분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말은 신하로서 불경하지만, 주상의 붕어 이후 저희와 연을 끊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르게 볼 수도 있지. 베르미스 외에는 이곳에 내 벗은 없으니.”

아겔의 말에 후삭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와 척을 지게 되는 건 아니지만, 아겔이란 존재가 베르미스를 통해 미묘한 동맹 관계를 세우게 된 것은 후삭의 마음에 커다란 기둥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 그가 떠나게 된다면, 후삭으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를 떠올린 후삭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거래를 하시죠, 아겔 님.)”

“거래라. 내가 원하는 걸 자네가 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후삭의 눈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놈들이 아겔 님과 관련된 자들을 추적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역시 고독의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벌레 종족이었다.

CCTV로 사방을 감시하는 고독의 직원들과 비슷하게 벌레들은 어디에서든 전부 지켜볼 수 있으니.

후삭이 말했다.

“(혹시라도 붙잡힌 아겔 님의 친우분들이 있다면, 제가 반드시 구해 내겠습니다.)”

“대가는?”

아겔은 술잔을 입에 댄 채로 말했다.

조건이 나쁘지 않다는 의미였다.

긴장한 후삭이 조건을 말했다.

“즈아 버시 대어 주시수 이쓰읍니까.”

“…….”

어색하게 인간의 말로 입을 연 후삭.

그러나 거기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아겔은 눈치챘다.

“즈에가 부조칸 거슨 아르고 이쓰읍니다. 그으래도 여음치 부르구 하고 여쭈웁게씁니다.”

아겔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친구가 된다는 것. 이렇게 거래를 통해 벗의 관계를 요구해 오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당황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와 벗이 되고 싶다라. 그건 꽤 값이 비싼데. 자네도 알다시피 그런 건 환산하기가 어려운 일이니 말일세.”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겔과 같은 존재를 벗으로 맞이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 어마어마한 무게를 짊어지고서라도 후삭에겐 대의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동족의 생존을 위해서.

후삭은 타는 듯한 심정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고독에 남은 벌레 종족을 위해선 이게 최선이다.

자신은 모든 걸 던졌고, 이제는 아겔의 마음에 달렸다.

술잔을 내려놓는 짧은 시간. 고민을 마친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락하지.”

아겔이 벗이라 말하는 자들은 드물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자들을 구해 준다는 것.

그것 또한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기에 아겔은 수락했다.

한시름을 놓은 후삭이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때, 제3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겔라스토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아겔의 무릎.

천천히 몸을 일으킨 베르미스가 입을 벌리고 멍한 눈으로 아겔을 바라보았다.

“베르미스?”

“자네…… 자네가 이곳에…….”

“그래. 나일세.”

아겔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깨어난 노인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이 친구야. 왜 이리 늦었는가.”

벌레 임금 베르미스.

그는 말없이 아겔의 목을 감싸 안았다.

아겔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벗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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