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30)화 (131/186)

130화 벗 (4)

베르미스 메르시스.

벌레 임금.

그는 지금 정신을 되찾아 본 모습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의 눈이 섭섭함으로 물들었다.

“이 사람아. 그렇게 기다렸는데, 얼굴 한 번 비추기 어려운가? 내가 꼭 불러야 오는 게야?”

“끌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지금이라도 왔으니, 됐지 않은가.”

“예끼, 이 사람. 거기에 나만 두고 술까지 마시고 있었구먼. 저번에 끝을 내지 못했으니, 오늘은 끝까지 가 보세.”

“들어오게. 난 이미 13병 마셨네.”

“질 수 없지. 나도 13병 마시고 시작하세.”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재회하게 된 두 노인.

일어나자마자, 섭섭한 감정은 훅 날려 버리고 술을 마시겠다는 소리에 후삭이 대경했다.

“(와, 왕이시여……! 어찌 지금 술을…….)”

“아, 후삭이냐.”

후삭이 서둘러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이리 온전하게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왕이시여.)”

“(짐도 기쁘구나.)”

“(한데 옥체도 성치 않으신 지금 술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부디 옥체 보존하소서.)”

인자한 웃음을 한 베르미스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댄 후삭을 바라보았다.

“아니다. 오늘은 술을 좀 마셔야겠다. 오랜만에 기억이 돌아오기도 했고, 벗도 앞에 있으니 거리낄 게 뭐가 있겠느냐.”

아겔이 거들었다.

“다 늙어 빠진 노인네. 먹고 죽겠다는데 말리지 말게, 끌끌.”

“(아, 아겔 님!)”

얼굴이 파랗게 질린 후삭이었지만, 베르미스의 말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

“(…….)”

“너도 알지 않느냐. 짐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 무슨 짓을 하든 죽는 건 마찬가지야.”

“(하나…….)”

“지금이 아니라면, 짐이 언제 벗과 술잔을 기울일 수가 있을까.”

베르미스의 말에 후삭도 동의하긴 했다.

아겔이 언제 다시 찾아올 줄 알고.

베르미스가 죽기 전 잠시 기억을 되찾은 이 순간에,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만 해도 기적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내 고대했던 벗과의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구나.”

“(…….)”

“짐의 심정도 이해해다오.”

가히 성군처럼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어조에 후삭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겨우 이런 것으로 죽을죄까지야. 네가 죽으면 우리 종족은 누가 이끈단 말이냐. 일없으니, 일어서거라.”

베르미스의 말은 작은 토씨 하나도 조심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후삭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래그래.”

검은 수염을 부드럽게 쓸던 베르미스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술상이나 새로 봐 오거라. 내 벗에게 이딴 초라한 대접을 하게 할 셈이냐.”

“(……수라를 내오겠습니다.)”

후삭은 그대로 물러났다.

그가 새로운 술상을 봐 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었다.

아겔이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생긴 건 여전하구먼.”

“그건 내가 할 말일세. 겨우 1년 만에 보는 거라지만, 너무 바뀐 게 없는 것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었다. 아겔은 1년 전 보았을 때보다 더 늙지도 더 젊어지지도 않았다.

그 모습 그대로.

마치 언제나 푸른 상록수 잎과 같은 모습이었다.

베르미스가 말했다.

“그래.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리 늦게 온 건가.”

“그건 술상이 나오면 하도록 하지. 그것보다는 내 듣고 싶은 말이 있네.”

“뭔가.”

“자네 일부러 기억을 봉인한 건가?”

“…….”

아겔의 질문에 베르미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일부러 그랬지.”

“왜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어린아이 시절과 현재 노년의 기억.

그 중간 과정을 아예 깊은 의식의 표면 아래로 묻어 놓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베르미스처럼 한 종족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우선…… 기억을 봉인하기 전에도 이미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네.”

“치매구먼.”

“……가시가 있는 말이긴 한데, 부정할 수 없지.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네.”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은 생각보다 혼란스러웠다.

평소에 보내던 일상은 너무 잘 잊혔고, 과거의 격정적인 감정과 연관된 기억은 지워지긴커녕 더욱 선명해졌으니.

“기억이 뒤죽박죽되더니, 은하 정부가 우리 종족을 핍박하던 때만이 내 머릿속에 남더구먼.”

분노, 억울함, 부당함.

은하 정부와 싸웠을 때 느꼈던 기억이 베르미스의 육체를 지배해 버렸다.

아무리 격정적인 감정과 연관된 기억이라도.

사람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오면서 그 기억의 감정을 억누르게 된다.

억겁과도 같은 일상의 기억이 물결처럼 감정을 덮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상의 기억이 지워지니, 격정의 기억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내가 분노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 나도 모르게 말일세. 자칫하다간 내 동족을 해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기억에 잠식되어 동족도 식별하지 못했겠구먼.”

“정확하네. 결국, 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네.”

억지로 중간 과정을 의식 표면 아래로 밀어 넣은 것이다. 자신의 뇌에 상처를 주면서.

그렇게 하면 적어도 정신은 어린아이가 되었을지언정 내버려 두었을 때보다 동족을 해칠 확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하나 베르미스의 초월적인 육체는 뇌가 손상되었을지라도 저절로 회복했다.

그는 자신의 뇌에 타격을 주는 일을 반복해 왔던 것이다.

베르미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려면 자해를 해야 하지. 동족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말을 들은 아겔이 베르미스의 손을 확 잡아챘다.

놀란 베르미스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스스로 상처 주지 말게.”

“…….”

“내 가만두고 볼 수 없군. 자네가 계속 그런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겠네.”

베르미스는 가슴이 울컥하는 걸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다.

담담한 척 아겔의 손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을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랬지. 이 자는 나의 벗이었지.’

왕이란 지위도. 어마어마한 힘과 능력도. 괴기스러운 겉모습도.

자신과 벗이란 관계로 서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던 아겔이었다.

그 말고 어떤 벗이 있을까.

그는 벌레 종족이 인간에게 끔찍한 핍박을 받는 이 우주에서 역설적으로 만난 유일한 인간 친구였다.

베르미스가 슬며시 웃었다.

“말이라도 고맙군.”

그는 아겔의 손을 덮으며 말했다.

“근데 자넨 원래 눈이 없지 않은가. 장님 주제에 어떻게 본단 말인가.”

순간, 아겔의 미간에 주름이 팼다.

“……이 치매 걸린 노인이?”

“냄새나는 봉사가?”

“더럽게 못생긴 벌레가?”

“벌레보다 한참 작은 녀석이?”

커다란 술상을 들고 온 후삭은 방금 들려온 대화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난 아무것도 못 들었다. 아무것도 못 들었어.’

쿵.

상 앞에 앉은 베르미스가 술병을 들었다.

“내가 보니 아무래도 나보단 자네가 먼저 갈 것 같네. 오늘이 자네 제삿날일세. 술에 잠기는 게 뭔 뜻인지 가르쳐 주지.”

아겔도 지지 않고 술병을 들었다.

“호오, 어디 들어오게나. 오늘은 벌레 담금주를 만들어 봐야겠어. 벌레를 담그면 또 기가 막힌 술이 된다지?”

꼴꼴꼴꼴꼴.

동시에 술병 입구를 입에 처박는 노인들이었다.

후삭은 웃는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난 아무것도 못 보는 거야.’

* * *

두 사람의 술 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끄으으…… 볼일 보러 좀 다녀옴세. 아직 안 끝났구먼……”

아겔이 비틀비틀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갔다.

베르미스는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껄껄껄……! 기뻐하라, 동족들……이여. 지, 짐이 이겼다…… 여기서 끝이 아니야…… 난 하루…… 온종일도 마실 수 있지…… 꺼억……!”

후삭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벌레 종족의 멸망을 막고 활로로 이끈 전설적인 군주는 술에 취해 뒹굴고 있고.

이 악독한 교도소에서도 사신이라 여겨지는 노인은 이제 56번째 볼일을 보러 갔다.

바닥엔 수백 병 가까이 되는 술병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우주의 정상에 서려면 과연 술에 강해야 한다 이건가.’

후삭은 진지하게 고민해 보려고 해도 쉽게 몰입되지 않았다.

임금은 체통을 잊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자신은 절대로 왕좌에 오를 때, 술에 취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후삭이었다.

“끄으으응.”

다시 자리로 돌아온 아겔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볼일을 보면서 수백의 술병을 비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괴물들.’

서로 욕지거리 한번 뱉은 다음 한 병을 비우는 게 이들이 술을 마시는 방법이었으니.

후삭이었으면 시작부터 주독이 올라 사망했을 것 같았다.

“술은 작작해야겠구먼.”

“껄껄…… 그럼 내가 이긴 건가……? 심판 후삭은…… 판정을 내려라.”

후삭은 아무리 봐도 좀 더 멀쩡한 쪽은 아겔이라고 생각했지만, 아겔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그래. 자네가 이겼다네. 대단하구먼.”

그리고 베르미스 몰래 후삭을 보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입에 가져갔다.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쉰 후삭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께서 승리하셨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그 말에 베르미스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두 팔을 쭉 뻗었다.

“기념할 만한 날이로다……! 아겔라스토스를 이긴 영광스러운 날이야! 동족에게 고기와 술을 베풀어라!”

“(예…….)”

왕은 동족들이 잔치를 벌일 때쯤에는 곯아떨어질 기세였긴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가 하라면 해야 하는 거다.

후삭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제야 베르미스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흐릿하고 멍했던 그의 눈에 곧 총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끌끌, 신하 앞에서 맘대로 술도 못 마시는 처지라니.”

아겔의 말에 베르미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반면교사가 되고 싶었을 뿐일세. 한데, 아겔. 혹시 나를 찾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날카로운 통찰력이었다.

아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도 눈치챘구먼.”

“내가 자네랑 200년 지기인데 그것도 모르겠는가.”

“하긴 그럴 만하군.”

벌레 임금은 그 권능과도 같은 힘뿐만 아니라 총명한 지혜도 빛나는 자였다.

현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가 친구의 불편함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원탁이 움직였네.”

“……그놈들이 결국엔.”

원탁을 이끄는 주술사와 아겔의 관계는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죽이려는 자와 피하는 자.

여태껏 조용히 있기 위해 아겔이 피해를 감수하고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베르미스도 알고 있었다.

“아예 작정하고 움직인 건가.”

“그렇다네. 방해하는 이라면 교도관도 찢을 기세 같았지.”

“정신 나간 놈들. 누가 봐주는지도 모르고.”

베르미스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힐끗 아겔을 바라보았다.

고독의 진정한 어둠.

어둠의 길을 걷는 아겔이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원탁을 지워 버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어둠의 길을 끝까지 걷지 못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유력한 죄수들이 아겔 한 명에게 몰살당하면, 고독을 감시·감독하는 은하 정부와 성좌 교단에서 태클이 들어올 수 있었다.

숨어 있는 입장에선 달갑지 않았다.

아겔도 술잔을 들었다.

“다행인 건, 무슨 일인지 정기 시찰이 없었다네. 그 덕분에 내가 움직이기도 용이했고.”

“움직여? 자네가?”

베르미스의 눈썹이 들렸다.

어둠 속에서 숨어 있던 아겔이 움직였다라.

처음 듣는 말이었다.

“짜증 나게 구는 놈들을 몇 손봐 줬지.”

“……자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거군.”

“내가 원래부터 자비로운 성격은 아닌 거 알지 않는가.”

“물론 알지. 잘됐네, 잘됐어. 진작 그리했어야지.”

이제껏 아겔을 답답하게 봐 왔던 베르미스는 청량함마저 느끼는 듯했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아겔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놈들을 전부 쳐 죽일 생각인가?”

“마음 같아선.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어.”

다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은 베르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힘을 빌리러 온 것이군?”

“정확하네.”

베르미스가 안타까운 표정이 되었다.

“내가 이런 상태라 정말 아쉽게 되었어.”

“상관없네. 자네 힘을 빌리지 않아도 어찌해 볼 방도가 없는 건 아니니.”

“하지만 쉬운 길을 놓고 돌아가는 것도 아쉬운 법이지.”

아겔 단신으로 원탁과 부딪치는 건 부담이 있는 일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원탁은 그리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니까.

폐쇄 구역에 있는 벌레 종족도 베르미스라는 비대칭 전력이 없다면, 원탁과 쉽게 맞설 수 없을 것이다.

돕고 싶은데.

하나뿐인 벗을 도와야 하는데.

지금 이 상태로는 도울 수가 없다.

죽기 직전에 와준 벗인데도 나서서 원탁과 싸워 줄 수가 없었다.

입안에 술을 머금으니 비통한 씁쓸함만이 느껴졌다.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베르미스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지 않네.”

“그 몸으로 도와주겠다는 말인가. 아서게. 다 죽어가는 노인이 돕는다고 더 나아지지 않을 게야.”

웃음으로 넘어가려던 아겔이었으나, 베르미스는 진지하기만 했다.

그가 웃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겔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내가 죽어서도 자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일세.”

“…….”

“자네에게 내가 준 그 단검.”

베르미스의 말에 아겔은 품을 뒤적여 그것을 꺼냈다.

녹빛과 적빛이 섞인 화려한 단검.

베르미스의 눈이 그 단검에게 갔다.

“그것은 내 외골격 중 외골격. 가장 단단하고 가장 신비로운 부분이지.”

“알고 있네. 이걸로 어쩌란 말인가.”

베르미스가 단검을 잡은 아겔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단검을 자신의 심장 쪽으로 가져갔다.

“이걸로 나를 찌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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