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31)화 (132/186)

131화 벗 (5)

아겔이 재빨리 단검을 뒤로 뺐다.

“절대로. 절대로 그럴 수 없네.”

친우가 준 단검.

그것으로 선물해 준 친우 본인을 찌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베르미스는 차분하게 아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지금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닐세, 아겔.”

그가 준 벌레 단검.

그것은 베르미스의 가장 단단한 외골격 부위를 떼어 ‘대장장이’에게 가져가 가공해 낸 것이다.

“난 본능적으로 알고 있네. 그 단검을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어. 나를 찌르기만 하면 말일세.”

지금 베르미스는 아겔을 도우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죽음의 문턱 바로 앞에 있는 이 상황에 나가는 건 위험하다.

지금이야 봉인했던 기억이 잠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뿐이지만, 언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갈지 모르니까.

혹은 언제 기억 속 감정에 휩쓸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할지도 모르기에.

그걸 알기에 아겔도 그의 도움을 반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미스는 아겔은 반드시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걸로 내 심장을 찌르면 나의 힘을 완전히 계승할 수 있을 걸세.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야.”

“무슨 소릴……!”

아겔이 처음으로 큰소리를 냈다.

베르미스는 말을 멈추고 잠자코 벌떡 일어난 아겔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보고 친우를 찌르란 말인가.”

“…….”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찌 친우를 찌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죽음을 앞둔 벗을.

아겔은 주름진 목에서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분노했다.

“어찌 그리 생각이 얕나. 자네를 죽이면 내 마음은 편할 것 같은가. 그렇게 너를 떠나보낸 내 심정은 어떻겠느냔 말이다.”

베르미스가 아겔과 이 끔찍한 교도소에서 보내온 시간만 해도 200년 이상.

지금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조차 심장이 메마르는 듯한데.

어떻게 직접 친우의 목숨을 끊을 수가 있을까.

베르미스도 아겔의 마음은 이해했다.

자신도 하나뿐인 벗, 아겔이 본인을 죽이라고 말한다면 똑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달랐다.

“자네 마음을 이해하고 있네. 하지만 아겔…… 우린 단순한 벗이 아닌 대의로 묶여 있는 사이일세.”

“나도 알지만……!”

아겔의 말을 끊은 베르미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감정 따위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막아선 안 되네.”

“…….”

베르미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나를 죽여서라도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아겔라스토스! 대의를 잊은 거냐! 네가 대의를 잊었다면, 우리 같이 핍박받는 종족의 앞날은 누가 돌봐 준단 말인가. 친구가 죽었으니 슬프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이렇게 말할 셈인가? 그럼 우주에 우리보다 더한 고통과 부당함을 겪으며 살아가는 자들은 외면할 셈인가?”

베르미스의 강력한 설토에 아겔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다 아는 사실이다.

누구보다도 대의를 잊지 않은 건 아겔이었다.

그러나 수백 년을 함께 살며 그 대의를 이해해 준 친우를 찌른다는 것은 그조차도 피해 가고 싶은 일이었다.

아겔은 답이 없었다.

베르미스는 한 차례 큰 목소리로 말을 하고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세, 이 친구야. 세상엔 이런저런 모양의 친구가 있는 법이야. 우리 관계는 조금 더 특별할 뿐이지, 안 그런가? 세상에 우리 같은 사이가 어디 있는가. 벌레와 인간이 만나 벗으로 지낼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같은 사람이지만, 우리 둘처럼 확실히 그 경계선을 지워 버린 자들은 없잖은가.”

“…….”

“슬프긴 나도 마찬가지야. 내 벗의 손으로 날 죽이도록 해야 한다는 게 어디 쉬운 결정인 줄 아나. 죽는 당사자는 나이니, 슬퍼도 내가 더 슬퍼야지.”

아겔의 눈을 감은 붕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붕대 아래로 떨어지는 진득한 핏빛 액체.

피눈물을 흘리는 아겔의 손이 떨려 왔다.

단검을 쥔 떨리는 손을 주름진 손이 감싼다.

“나는 기대하고 있다네. 질서란 이름으로 구속되어 부당함으로 물들여진 이 세상을 공평히 평정할 어둠을. 비록 그 모습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저승에서 보면 될 게 아닌가.”

“……저승은 그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겔의 짓씹는 듯한 말에도 베르미스는 온화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살 만큼 살았습니다. 그러니 어서 날 찌르소서. 빌어먹을 은하 정부와 성좌 교단에게 무지와 오만의 대가를 가르쳐 주소서, 혼돈의 왕이시여.”

“나는…….”

아겔은 들끓는 감정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머리를 냉정하게 식혔다.

베르미스의 말은 구구절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감정만큼은 편하지 않았다.

확……!

아겔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는 걸 깨닫자, 베르미스는 그의 손에 있던 단검을 빼앗았다.

“베르미스……?”

“시간이 얼마 없네. 어차피 죽을 몸. 내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눈을 감은 베르미스는 생각했다.

‘200년간의 우정. 그것은 바로 지금을 위해서이다.’

대의를 위해 타오르는 불꽃을 키우는 장작.

자신의 삶은 그것으로 족하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아겔은 당황하여 단검을 회수하기 위해 손을 뻗어 봤지만, 왠지 모르게 몇 발자국 물러났을 뿐인 베르미스가 너무도 멀어 보였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지도.

정신체인 베르미스의 기척이 실체는 있어도 감각으로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막을 수 없는 벗의 결의가 담긴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이 세상을 속박한 왜곡된 질서를 태울 혼돈의 불꽃이여. 나의 생명을 삼켜 더욱 환하게 타오르소서.)”

말을 마친 베르미스는 곧바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찔렀다.

푸욱……!

“끄으윽……”

피륙을 뚫고 들어가는 무정한 소리가 들렸다.

“베르미스……!”

아겔이 황망한 얼굴을 하고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갔지만.

베르미스의 심장을 관통한 단검은 막을 새도 없이 영롱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아아…….”

아겔은 쓰러진 그의 목을 가슴팍으로 안았다.

베르미스의 입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크윽…… 이 친구야…… 어찌 이런 일을…….”

베르미스는 입가에서 피를 뿜으면서도 덜덜 떨리는 손을 들었다.

“나…… 의 심장은 두 개…… 남은 하나는 자네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정신체의 심장이 꿰뚫렸으니, 남은 건 본체의 심장.

베르미스는 일단 시작하면 아겔이 그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결국 본체의 심장을 뚫을 수밖에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심장의 빛을 전부 흡수한 단검이 다시 빛을 잃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베르미스…….”

“잘할 수 있…… 으리라…… 믿네…… 자네는 내 벗이…… 니까.”

마지막 노인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화평이 깃들어 있었다.

[항상…… 고마웠소.]

사아아아아…….

챙그랑.

방금까지 손에서 느껴졌던 무게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정신체인 베르미스의 모습이 사라져 버리고, 심장을 꿰뚫고 있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겔은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부여잡았다.

그의 주름진 손에는 과하게 핏줄이 솟아 있었다.

정말 과할 정도로 말이다.

“베르미스…….”

쿠우우우우우우우우…….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는 아겔에게 거대한 소음이 들려왔다.

어전을 가득 채운 허물 뒤에 있던 무언가.

거대한 그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아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 않지만, 친우의 모습을 눈에라도 담고 싶다는 마음에.

눈앞 어둠 속에는 수십 미터가 넘어가는 크기의 벌레 괴물이 서 있었다.

기척을 느낀다. 너무나도 작다.

전성기의 그라면 이 고독 행성과 맞먹을 정도의 본체로 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힘이 봉인되었고, 정신체마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너무나도 작은, 그래도 아겔을 개미처럼 보이게 하는 베르미스의 본체.

그것이 울부짖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폐쇄 구역 전체가 진동하는 듯했다.

고막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아겔은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친우를 잃은 고통에 비견될 수 없다.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너의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

조그맣게 중얼거린 아겔의 눈에선 더 이상 피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말라붙은 핏자국을 슥 닦아 내고, 아겔은 괴물을 향해 뛰었다.

* * *

어전에서 물러 나온 후삭은 왕의 명령대로 벌레들에게 잔치를 베풀려 했다.

그러나 어전에서 들려온 어마어마한 굉음에 잔치를 준비하던 벌레 수인들이 전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를 수가 없었다.

저것은 벌레 임금 베르미스의 울부짖음이란 것을.

‘설마 주상께서 다시 기억을 잃고 폭주를……!’

아겔과 함께 있는 상황. 위험해질 수 있었다.

후삭은 서둘러 투명 날개를 펴고 어전을 향해 날아오르려 했다.

“(후삭 공! 위험합니다!)”

고위 신료들이 후삭을 붙잡았다.

“(전하께 공격을 받으면……!)”

“(말리지 마라!)”

후삭의 투명 날개는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토록 처절한 울부짖음은 처음이었기에.

“(모두 어전 앞에서 대기하라! 전하의 상태가 위중한 것 같다!)”

신하들이 말릴 틈도 없이, 후삭은 어전으로 날아갔다.

커다란 벌레 허물 사이를 지나친 후삭은 어둠 사이로 내려앉았다.

사방이 어둠이지만, 그의 눈은 어둠을 뚫고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맙소사……!)”

쿠오오오오오오--!!

어마어마한 덩치의 베르미스 본체가 아겔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벌레 임금의 본체에 비하면 개미와도 같은 크기인 아겔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거대한 지네의 형상을 한 베르미스의 본체는 사방을 향해 돌진했다.

“(아겔 님!)”

쿠드드득……!!

전신의 몸이 부풀어 인간의 형상이 아닌, 본체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후삭.

아겔을 구하기 위해선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

“(키에에에에엑……!)”

이내 아파트 건물보다도 커다란 사마귀의 모습이 된 후삭은 아겔에게 날아오던 지네 몸통을 팔로 쳐 냈다.

쾅!

“(무례를 용서하소서, 왕이시여!)”

후삭의 타이밍 좋은 세이브에 아겔은 그의 머리 위로 가뿐히 착지할 수 있었다.

아겔이 착지하자마자 말했다.

“후삭. 지금 자네 왕은 말이 들리는 상태가 아닐세.”

“(…….)”

“난 지금부터 베르미스를 죽이려 한다네. 도와줄 수 있겠나.”

“(왕을…… 죽이시겠다고요……?)”

“그의 유언일세.”

“(…….)”

후삭은 심장이 떨려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벌레 종족은 서로의 마음을 모르는 인간들과 달리 어느 정도 감정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저 거대한 지네 형태의 베르미스 본체에서 느껴지는 설움.

그것이 아겔의 말이 진실이라는 근거가 되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 후삭은 올바른 길을 택했다.

“(전하를…… 부디 평안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믿어 줘서 고맙군.”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겔은 베르미스의 본체를 바라보았다.

본체는 아겔과 후삭은 신경 쓰지도 않고 사방으로 머리를 박아 대고 있었다.

“심장. 심장을 꿰뚫어야 하네.”

“(왕의 심장…… 어렵겠습니다. 전 왕의 본체에 생채기 하나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베르미스 다음으로 강한 자가 후삭이라곤 하지만, 그는 본체로도 베르미스의 몸에 상처 하나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힘의 격차.

베르미스의 외골격은 은하 정부 전함의 포격을 수십 시간이나 거뜬히 견딜 정도로 튼튼하니.

하나 어려울 뿐, 후삭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겔이라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불가능한 건 아니지. 큰 상처도 아니야. 내가 녀석의 몸 안으로 들어갈 구멍 하나면 족하네.”

“(방법이 있겠습니까?)”

“있지. 우리가 했던 거래 말일세.”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자넨 나와 벗이 되고 싶다고 했지.”

후삭은 아겔과 했던 거래를 떠올렸다.

종족의 미래를 위해 아겔의 벗이 되게 해 달라고 조건을 건 후삭.

대신 자신은 아겔과 관련이 있는 사람 중 원탁에게 붙잡힌 자들을 구출해 주겠다는 요건을 걸었다.

아겔이 후삭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자네의 벗이 되어 주지. 베르미스도 나와 이렇게 하진 않았네.”

“(무슨……?)”

“지금부터 자네의 영혼을 취하겠네.”

순간, 후삭의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

쾅! 쾅! 쾅! 쾅!

베르미스의 본체는 사방을 기어 다니며 이곳저곳을 커다란 머리와 뿔로 박아 댔다.

그가 벗은 허물이 마구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비산했다.

아겔은 후삭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로 그를 통제했다.

부우웅!

날개를 펴 커다란 파편들을 피하게 한 아겔은 냉정하게 베르미스의 본체를 바라보았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겠구먼.”

아겔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대.

후삭의 영혼을 취해 그의 몸을 통제하고 있지만, 본체로 변한 후삭도 베르미스의 본체에 비하면 길가에 굴러다니는 자갈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몸통에 찍히면 곧바로 온몸이 으스러질 것이다.

아겔은 곧바로 자신과 이어진 후삭의 몸에 어둠의 힘을 불어넣었다.

곧 후삭의 몸 주변에서 어두운 기운이 솟아나더니, 특히 낫 같은 팔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끄으으응…….”

힘을 소모한 아겔은 숨을 몰아쉬며 품에서 알약 3개를 꺼내 씹었다.

벌레 종족의 최강자와 싸우는 데 이 정도 대가라면 싸다 못해 바가지 수준일 것이다.

죽기 직전의 베르미스라 다행이었다.

“흡……!”

아겔의 통제에 따라 하늘로 떠오르는 후삭의 몸.

오래 날 수 없는 사마귀의 형태였지만, 아겔이 원하는 만큼은 비행할 수 있었다.

베르미스의 본체는 어둠의 힘이 다가옴을 느끼고 기민하게 반응했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거부하는 육체가 다가오는 사마귀로부터 달아났다.

그와 동시에 머리로 들이받기 위해 돌진했다.

아겔은 돌진을 피해 내고 지나치는 몸통을 향해 사마귀의 팔을 내려치도록 했다.

콰앙!

정확히 심장이 있는 곳 근처에 박히는 충격.

굉음이 들리며 베르미스의 본체가 진동했다.

[키에에에에에엑--!!]

본래였다면, 생채기 하나도 나지 않았을 텐데 베르미스의 외골격이 우그러졌다.

어둠의 힘으로 강화된 후삭의 파괴력을 확인한 아겔은 곧바로 물러섰다.

‘몇 번만 같은 곳을 내리치면 구멍을 뚫을 수 있다.’

신체 내부로 들어가기만 하면 심장에 도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둠의 인장이 새겨져 거대 식물로 변해 버린 쉬카와의 싸움과 비슷한 형태의 전투가 될 것 같았다.

.

.

.

[키에에에엑--!]

후삭을 뒤로 물린 아겔은 그 후로 내리쳤던 부분을 공격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다.

베르미스의 본체는 쉽게 기회를 내어 주지 않았다.

3시간의 접전 중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서너 번 낫으로 내려친 게 전부.

수천 개의 다리, 아파트보다 굵은 몸통은 사방을 헤집고 다니면서 회피할 자리조차 내어 주지 않으려는 듯 발광했다.

‘조금만 더……!’

이제 충격을 한두 번만 더 준다면, 외골격을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흡……!”

머리 위로 날아드는 다리와 몸통을 피한 아겔은 계속 후삭의 날개를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심장 부근으로 접근하려는 순간.

“이런……!”

커다란 지네의 발이 날아와 사마귀 후삭을 비껴 쳤다.

쾅!

지나치는 다리에 얻어맞은 후삭의 팔이 부러졌다.

“키에에에에에엑!!”

다행히 팔이 잘려 나간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심한 고통 때문에 후삭의 본체가 인간 형태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겔은 인간 형태로 돌아가는 후삭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지네의 기다란 몸통 틈 사이를 뚫고 낙하한 아겔은 두 손으로 단검을 쥐고 치켜들었다.

어둠으로 물든 단검이 베르미스의 심장 부근 외골격을 뚫고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