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32)화 (133/186)

132화 벗 (6)

복도의 한쪽 어둠.

원탁의 죄수들이 자리한 그곳에 누군가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노예 죄수들은 한없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 길을 터 주었다.

앞서 걷는 노인의 눈에는 황량한 보랏빛이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오는 7급 죄수 가우록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지만, 선두에 선 주술사 카흘탁의 어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곁에 서 있기만 해도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아우라를 내뿜는 그 모습에, 노예들은 벌벌 떨 뿐이었다.

카흘탁은 자신의 노예들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복도의 한쪽 벽에 도달은 주술사는 걸음을 멈추었다.

벽에 주르륵 매달려 있는 죄수들.

그들은 전부 아겔과 관련이 있는 자들이었다.

죄를 지은 성자, 바를라 하돌라.

송곳니, 쿠라스크.

백작, 인듀라스.

광신도, 이오베까지.

벽에 매달린 그들은 완전히 피폐한 모습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완강히 저항한 흔적처럼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걸레짝이라고 봐도 무방할 상태였다.

주술사 카흘탁은 그들 앞에 섰다.

“이것밖에 잡지 못한 것인가.”

음산한 목소리에 가우록이 고개를 숙였다.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5급에 얼음의 기운을 쓰는 여자도 있다.”

“제 언니가 투기장으로 데려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저흰 투기장을 건드리진 못합니다.”

“쯧.”

혀를 차는 주술사.

기절한 척,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바를라가 치를 떨었다.

‘아리스 양과 그 언니까지 파악하고 있단 말인가.’

그들도 아겔과 관련된 인물. 이들은 조금이라도 그와 연관이 있는 자들이라면 모두 잡아들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혹시 모르니 투기장 출입구 근처에도 노예들을 심어 두도록.”

“예.”

주술사의 말에 가우록은 고개를 숙였다.

바를라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들고 주술사에게 말했다.

“이런 무도한 자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건드려서 무얼 하려는 겁니까.”

성자가 노려보자, 주술사의 눈이 그를 향했다.

음산한 기운을 발하는 주술사의 보라색 눈동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가 스며드는 듯했다.

바를라는 이를 악물고 그의 시선을 견뎌 냈다.

“괴롭히기 좋은 눈을 하고 있구나, 꼬맹아.”

“……당신이 원하는 바는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우릴 잡는다고 아겔 어르신을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르신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겁니다.”

바를라의 담담한 말에 주술사의 시선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네가 나보다 아겔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네가 생각하기에 아겔은 어떤 사람이지?”

“어르신이 어떤 사람이냐고요?”

바를라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어떤 인간보다 인간다운 분이시죠.”

“뭐라?”

대답을 들은 주술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해하고 있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신의 종자는.

굳은살이 박인 매정한 손이 성자의 턱을 콱 부여잡았다.

“큭……!”

“인간이라니. 농이라도 하려는 거냐.”

바를라의 턱을 붙잡은 억센 손에서 점점 압박감이 들어왔다.

“끄으으…….”

“놈은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바로 나처럼 말이지. 버러지 같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가 된 것이다.”

주술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매달려 있는 인듀라스, 이오베, 쿠라스크도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디 아겔이 평범한 인간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의 말도 안 되는 권능들을 보면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왜 아겔을 죽이려는지 궁금한가? 가르쳐 주지 않을 이유도 없지. 우리 같이 이미 정상에 올라와 있는 자들에겐 새로운 경쟁자는 그리 반갑지 않기 때문이다.”

우드득……!

“커헉……!”

바를라의 턱뼈가 부러졌다.

잔혹한 손속에 곁에 매달린 세 죄수는 침음을 삼켜야 했다.

파아아앗…….

성자의 몸에 서린 신성한 기운은 절로 제 몸을 회복시켰다.

어둠의 기운이 서린 사슬로 속박했음에도 신의 가호는 여전히 그의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주술사는 회복되는 바를라를 보고 손을 뗐다.

“성좌의 총애를 받는구나, 애송아. 하지만 그건 이제 축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여겨지게 될 것이다.”

몸을 돌린 주술사가 가우록을 바라보았다.

“너는 추적을 재개해라. 그런데 과학자는 어디에 있지?”

“마피아킹과 교전에 들어갔다는 교전 이후엔 대답이 없었습니다.”

저벅저벅.

마침 복도 한쪽에서 그들에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과학자라 불리는 죄수.

중급 죄수였던 그는 주술사의 힘을 받아 상급 죄수로 변모한 상태였다.

지금 모습은 괴물 같던 오른팔이 날아간 상태였지만.

“프흐흐흐, 좋은 타이밍에 도착한 것 같군요.”

주술사의 눈이 그의 몸을 향했다.

“오른팔은?”

본인이 직접 개조를 도운 팔이 날아간 모습은 유쾌한 기분이 들게 하진 않았다.

과학자는 고개를 숙였다.

“프흐흐, 죄송합니다. 마피아킹이 날려 버렸습니다. 저도 놈에게 상처를 내긴 했지만, 역시 왕이라 불릴 만한 자더군요. 놈이 가진 악마의 힘을 파훼하느라 애먹었습니다.”

“붙잡진 못했다는 말이군.”

마피아킹 또한 아겔과 관련이 있는 자.

그러나 주술사는 과학자를 과하게 타박하지 않았다.

“너는 이제 추적을 멈추고 이들을 고문하라.”

“아, 좋은 실험체들이 도착해 있었군요.”

“확실히 고문해라.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프흐흐, 여부가 있겠습니까.”

명령을 마친 주술사는 뒤돌아섰다.

그는 가우록과 함께 복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허리를 숙여 배웅한 과학자는 다시 허리를 펴며 손을 싹싹 비볐다.

“이것 참 설레기 시작하는데요.”

과학자의 게슴츠레한 눈이 매달린 이들을 훑었다.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은 그 광기 어린 눈빛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프흐흐, 즐거운 시간을 위해 준비할 것들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여러분. 가히 최고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경험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과학자도 복도의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향해 쿠라스크가 발작했다.

“야! 난 아겔이랑 아무 상관도 없어! 난 풀어 주면 안 되냐?”

그러자 이오베와 인듀라스의 시선이 무섭게 날아와 그에게 꽂혔다.

“역시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이 어렵지 않군. 충성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입 다물어라, 짐승 새끼야. 냄새난다. 간 붙었다 쓸게 붙는 게 박쥐가 보고 비웃겠군.”

두 사람의 노기 섞인 목소리에 쿠라스크가 변명했다.

“젠장…… 그, 그냥 해 본 소리야. 혹시 풀어 줄지 어떻게 알아? 나도 생각이 있었다고! 아겔에게 우리 위치를 알리면 되잖아.”

인듀라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군. 놈들은 아겔을 죽이기로 작정한 이들만이 모인 집단이다. 이들을 뚫고 그가 혼자서 우릴 구하러 오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생각하는 것부터가 역시 짐승 수준이었군.”

“젠장, 그놈의 짐승, 짐승. 너도 박쥐 새끼잖아!”

“고귀한 귀족인 나와 냄새나는 너 따위가 같다는 거냐.”

“캬아아악, 우리 다 똑같은 사람이잖아, 왜 차별적인 말을 하는 거냐? 나 열받게 하려고? 저 평등주의자 신도한테 함 물어봐!”

쿠라스크의 고갯짓을 받은 이오베가 고개를 저었다.

“백작의 말이 딱히 차별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사실을 말하고 있으니.”

“캬아아악……!”

고통에 얼굴을 숙이고 있던 바를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쯤 하시죠. 힘겨운 상황에 유머로 분위기를 푸는 것도 좋지만, 이젠 각오해야 할 겁니다. 진짜 고문이 시작될 테니까요.”

“““…….”””

세 사람은 입을 다물고 긴장했다.

중급 죄수의 정상에 위치한 자들인 만큼 이들도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죄수들.

그러나 상급 죄수가 내리는 고문은 그렇게 쉬운 과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반응하면 할수록 놈들이 원하는 바가 될 겁니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합니다.”

“젠장, 언제까지? 버티면 아겔이 구하러 오기라도 해?”

쿠라스크의 물음에 바를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도 마음속 한구석에 의심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아겔은 어디에 있을까.

자신들이 붙잡혀 있다는 사실은 알까.

‘과연 그가 우릴 구하러 오긴 할까.’

자신도 모르게 아겔의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는 생각에 바를라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아겔과의 관계가 깊어진 것일까.

바를라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진정 그의 친구라면 버팁시다. 원탁의 횡포를 두고 볼 분이 아니시니. 반드시 우릴 구하러 올 겁니다.”

“친구? 친구? 그 노인네가 우릴 친구로 생각하겠냐?”

“물론이죠.”

바를라의 눈에는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 * *

후삭은 비몽사몽한 눈을 떴다.

그리고 왼쪽 팔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신음을 뱉었다.

“(끄으으…….)”

부러진 왼팔에 응급처치가 되어 있었다. 부목을 대고 단단히 고정한 모습.

누가 처치해 주었는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겔 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후삭은 한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아겔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앞에 덩그러니 놓인 단검 한 자루.

후삭은 그게 베르미스가 아겔에게 선물한 무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검에 묻어 있는 체액이 바로 자신이 모시던 왕의 것이라는 것도.

무릎 꿇고 있는 노인에게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죽였다.”

“…….”

“나의 오랜 벗이자, 다시 없을 하나뿐인 친구가 내 손에 죽었다.”

“(아아…….)”

말하진 않았지만, 묻고 싶은 바에 대한 대답을 듣자, 후삭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왕.

벌레 임금.

세상을 진동케 하는 거대한 괴수.

그리고 동족에겐 한없이 인자한 성군.

그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었다.

후삭은 기절했다가 다시 회복되는 감각에 어전을 한껏 채운 벌레 임금의 거대한 사체를 느낄 수 있었다.

“(왕께서 붕어(崩御)하셨다…….)”

후삭은 머리를 땅에 박았다.

눈가에서 체액이 뚝뚝 흘러나왔다.

“(결국, 이리 가시는군요, 나의 영원한 왕이시여……)”

다음 대 왕으로 내정된 후삭이었지만, 왕의 자리에 올라도 자신이 영원한 신하라는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오직 그의 왕은 베르미스 메르시스.

벌레 임금이라 불린 우주의 거악에 저항한 성군뿐이었다.

어느새 뒤로 벌레 종족의 신하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신료들은 왕의 육신에 생기가 없는 것을 보고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왕께서 붕어하셨다……!)

-(크흐흐흐흑……!)

그들은 그 자리에 허물어져 후삭과 똑같이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오직 아겔만이 담담하게 단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제부터 붕어한 선왕을 위해 곡을 하는 시간이 시작될 테고, 그것이 끝나면 후삭이 왕위에 오르는 즉위식이 시작될 것이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벗이여.’

덜덜 떨리는 주름진 손이 단검을 바스러지도록 부여잡았다.

“내 너를 반드시 다시 만나러 갈 것이다.”

벌떡 일어선 아겔은 어전을 나갔다.

후삭은 통곡을 하느라 아겔이 나간 줄도 모르고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

.

.

.

어전 회의.

라고 불렸어야 할 고위 신료들이 모인 이 자리엔 왕은 없었다.

후삭도 즉위식이 진행되지 않았으니, 벌레 종족의 진정한 왕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그러나 왕과 같은 위엄이 이미 그의 전신을 아우라처럼 감싸고 있는 듯했다.

신하 중 한 명이 후삭에게 말했다.

“(후삭 공, 아겔 님이 늦으십니다.)”

“(기다리시오, 으두카 공.)”

신하들은 후삭의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이 죽으면 곡을 하는 것이 마땅한 예(禮).

하나 회의를 열어야 할 만큼 아겔은 그들에게도 중요한 손님이었다.

“(아겔 님도 친우를 잃은 고통에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테…….)”

저벅.

후삭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둥그렇게 모여 앉은 신하들이 시선이 집중된 곳에서 아겔이 걸어왔다.

아겔은 천천히 걸어와 후삭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후삭은 입을 열었다.

“(우선 선왕을 위해 곡해야 할 이 시기에 모인 공들께 감사를 전한다.)”

-(이를 데가 있겠습니까.)

자리에 모인 신하 전원이 고개를 숙였다.

“(우선은 공들에게 한 가지 전달할 내용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아겔 님과 거래를 했다.)”

-(아겔 님과 거래를……?)

-무슨…….

단도직입적으로 이 자리를 모은 이유를 말하는 후삭. 그리고 폭탄 같은 발언에 신하들은 술렁였다.

후삭은 허벅지를 두드려 다시 그들의 주의를 끌고 말했다.

“(아겔 님은 나의 벗이 되어 주기로 하셨다.)”

-(벗……?)

-(벗이라니요.)

-(선왕과 동등하게 후삭 공을 대우해 주게 되었단 말인가.)

신하들이 탄식을 흘렸다.

지금까지 아겔은 벌레 종족의 친구는 아니었다. 단지 벌레 종족의 왕인 베르미스의 벗이었을 뿐.

다음 대 왕위에 오를 후삭의 친우가 된다면, 여태 이어 왔던 이 관계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신료들 입장에선 기껍기 그지없었다.

신하 중 한 명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저, 정말입니까, 아겔 님?)

질문에 대한 답을 확인해 주듯이 아겔이 입을 열었다.

“사실일세. 그리고 후삭. 이제 나에게 님이란 호칭을 붙이지 말게. 친구 사이에 님이라 칭하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

아겔의 말에 후삭이 자신의 실을 깨닫고 얼굴이 멍해졌다.

“자넨 이제 나의 친우일세. 왕이 된 만큼 나에게 존대도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구먼.”

아직 즉위식도 치르지 않았건만, 이미 신하들은 후삭이 왕이 될 것을 의심치 않았기에 아겔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보단 확실하게 인정하는 아겔의 말에 더 놀라, 그들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크, 크흠…… 그래, 아, 아겔. 이제 자넨 나의 친우요.”

후삭은 어색한 듯이 헛기침했고, 아겔은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가다듬은 후삭이 말했다.

“이제 벗으로 대우함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게 하겠소.”

“나도 마찬가지일세.”

신하 중 날카로운 눈매를 한 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후삭 공. 아직 우리의 몫은 남아 있는 거로군요. 아겔 님께선 약조를 지키셨으니 말입니다.)”

후삭이 고개를 끄덕임으로 긍정했다.

날카로운 눈매의 신하가 질문했다.

“(아겔 님의 요청 사항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염려치 말고 하명하소서.)”

그의 말에 신하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먼저 이렇게 나오니 후삭은 입을 열기가 이전보다 더욱 편해졌다.

심호흡한 후삭이 말했다.

“(후, 선왕께 죄를 짓는 심정이라 가슴이 아프지만, 시기를 요하는 일인지라 아겔의 요청은 지금 당장 들어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후삭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출병해야 한다.)”

-(출병을……!)

-(이 시기에 출병이라니…….)

-(폐쇄 구역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데…….)

-(가능하긴 하겠습니까.)

신료들이 격하게 반응하며 웅성거렸다.

벌레 종족은 한 번도 폐쇄 구역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일부는 아겔이 불렀던 것처럼 복도를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출병은 이야기가 달랐다.

고독에 있는 벌레 종족 전체가 움직이는 일이었다.

당연히 곡을 하는 이 시기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고.

“(공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방금도 말했다시피 지금 이 시기가 아니라면, 아겔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

거래의 약조를 어겼으니, 아겔과 후삭이 벗이 되는 과정이 틀어진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우려도 빗발쳤다.

-(하지만 곡하는 시기가 아직 다 되지 않았는데, 출병이라니오.)

-(저도 그 부분은 우려스럽습니다. 오히려 후삭 공이 즉위하였을 때, 왕의 위엄이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나진 않을지.)

-(아비에 대한 예도 다 마치지 못하였는데 움직이면, 반발이 나올 수도 있소.)

후삭의 날카로운 눈매가 좌중을 사로잡았다.

“(아비에 대한 예라. 선왕께서 살아계셔서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뭐라고 말씀하셨겠나.)”

-(…….)

베르미스의 성격을 아는 신하들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원탁과 맞서야 하는 단 하나뿐인 친우.

그가 곤경에 빠져 있는데,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독에 존재하는 벌레 종족의 유례 없는 출병을 각오하고서라도 말이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신하가 말했다.

“(그렇다면 출병의 목적을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도와야 할지 선이 정해진다면, 결정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자리에 모인 수십 명의 수십 쌍 넘는 눈동자가 아겔에게 향했다.

거대한 규모의 벌레 종족을 이끄는 고위 각료들의 무거운 시선.

늙은 죄수는 그 가운데서도 주저하지 않고 가볍게 입을 열어.

“자네들이 출병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 그것은…….”

아주 무거운 말을 내뱉었다.

“원탁의 말살.”

-…….

아겔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가 우그러뜨렸다.

“원탁이라는 이름 안에 있는 모든 죄수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자를 죽인다.”

회의 자리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