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구출 (1)
줄리안은 홀로 복도를 헤매고 있었다.
멀끔하게 뒤로 넘겼던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깔끔한 정장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과학자의 팔을 날리며 쫓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제길…… 내가 그딴 놈에게 상처를…….”
그저 주술사에게 힘을 받고 상급 죄수가 된 어중이떠중이인 줄 알았더니, 놈도 악마와 직접 거래해 어둠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놈이 힘을 다루는 데 나만큼 능숙했다면 위험했을 테지.’
줄리안이 7급 죄수 중에서도 뛰어난 이유는 바로 악마와 거래했기 때문.
그가 거래한 ‘분열의 공좌’는 무엇이든지 갈기갈기 찢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전 악마와 거래했고 지금까지 그 힘을 다루어 왔던 줄리안은 악마의 힘을 다루는 데 익숙했다.
그런 줄리안조차 과학자와의 싸움에서 쉽사리 승기를 잡진 못했다.
다행히 힘 자체는 줄리안이 더 강했기에 놈을 쫓아낼 수 있었지만, 계속 싸웠으면 아무리 줄리안이라도 신체 한구석을 내주어야 했을 것이다.
악마의 힘에 대한 건 둘째 치고 지금 줄리안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원탁이 복도를 점령했다면 위험하다.’
놈들은 보부상 집단 트롯을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겔과 관련된 모든 자를 잡아들이고 있다.
줄리안도 관련이 있지만, 그는 자신보단 려홍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중급 죄수인 려홍은 원탁의 대부분인 상급 죄수에게 대항할 수 없을 테니.
우선 그 아이를 찾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감방 안에 있다고 완전히 안전한 것도 아니다.
상급 죄수 정도 되면 전기 충격을 무시하고 타인의 감방에 강제로 침입할 수도 있다.
아니, 들어갈 필요도 없다. 이들에게 감방 안에 있는 죄수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
‘위령이 남긴 아이를 위험에 처하게 둘 순 없지.’
줄리안은 품 안에 있는 연락용 수정구를 만지작거렸다.
마피아 클랜의 병력을 가져다 쓰면, 복도를 헤집고 다니는 원탁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권한은 혼자서 결정하고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질적인 약탈자의 수장은 그가 아니었으니.
“후우…….”
궐련을 비벼 끈 줄리안이 수정구를 들어 입 가까이 가져갔다.
“탈라스. 들리나.”
[…….]
수정구에선 아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줄리안은 조급해하지 않고 다시 목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몇 분 후.
[뭐지, 줄리안.]
텁텁하고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가 수정구를 통해 전달되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고독의 3대 세력을 이끄는 거두.
줄리안의 마피아 클랜이 속해 있는 약탈자들의 수장이었다.
그와 허물없이 대화할 수 있는 죄수는 줄리안을 포함해 고독에서도 열을 조금 넘을 뿐이었다.
“원탁이 날뛰고 있다. 가만두고 보기만 할 건가.”
줄리안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크지 않았다.
그저 마피아 클랜을 이끌고 지금 활개를 치는 원탁으로부터 려홍을 보호하는 것.
그러나 약탈자의 수장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이지. 놈들이 아겔을 잡느라 발버둥 치는 건 우리에겐 이득이지 안 그래?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운다는 데 괜히 참견해서 피 볼 생각은 없다.]
“…….”
약탈자는 원탁이 왜 결성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본관에서 봉기한 것은 전부 아겔을 잡기 위함.
약탈자들이 움직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서로 싸워서 제 살을 깎는다면, 고독의 전부를 우리가 차지하는 거다.]
“우리 쪽으로 피해가 온다면?”
[그럴 리가 없다. 놈들의 목적은 오직 아겔라스토스일 뿐이니까. 쓸데없이 부딪칠 필요 없지. 그러니 허튼 생각하지 말고 몸 사려, 줄리안.]
“놈들은 절지에서도 우리와 전쟁을 벌인 놈들이다. 정말 가만두고 보기만 할 건가.”
[같은 답을 하게 만드는군, 줄리안. 약탈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은 숨죽이고 기다려야 할 때야.]
으득.
줄리안의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이가 으스러져라 다문 그는 수정구를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약탈자와 오랜 시간 함께해 왔다.
그가 지금 딛고 서 있는 위치도 약탈자와 함께한 덕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줄리안은 이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중요한 게 생겨 버렸다.
‘려홍…….’
위령의 아이이자, 자신의 딸.
몇 번 이야기를 나눠 보지도 못했지만, 줄리안은 그녀를 볼 때마다 심장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려홍을 지키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버지란 분에 맞지 않는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위령의 아이니까. 내 딸이니까.
그 말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는 듯했다.
결심을 마친 줄리안이 수정구를 향해 말했다.
“약탈자를 탈퇴하겠다, 탈라스.”
[…….]
이번엔 충격을 조금 받았는지, 탈라스로부터 대답이 바로 돌아오진 않았다.
낮게 깔린 음성이 수정구를 통해 흘러나왔다.
[진심이냐, 줄리안. 왜지. 원탁만 배제하면 우린 이제 운동 연합을 걷어 내고 고독의 정상에 설 수 있다고 말했을 텐데.]
“목표가 바뀌었다. 더 이상 난 이 교도소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지 않겠다.”
[밑바닥?]
자조적으로 웃은 줄리안이 궐련에 불을 붙였다.
“너는 영원히 무저갱으로 내려가라. 난 이제 그만하겠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냐.]
“내가 직접 설명해 줘야 하나?”
쓰읍. 후우우우…….
길게 연기를 내뿜은 줄리안이 말했다.
“이제 우린 끝이라는 거지. 너도 어느 정도는 준비했을 텐데? 고독을 정복하면, 날 죽일 준비를 말이야.”
[…….]
정곡을 찔렸는지, 탈라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내 그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큭큭큭, 천하의 줄리안이 직접 그렇게 말할 줄이야. 뭐, 미안하다곤 말하지 않겠다. 이쪽은 원래 그런 생태니까. 알지?]
“그동안 고마웠다고 해 두지, 탈라스. 다음번에 만나면 죽여 버릴 테니, 눈에 띄지 마라.”
[피차일반이야, 줄리안. 그럼 다음에도 웃으면서 보자고.]
파직.
대화가 끝나자, 수정구가 깨졌다.
줄리안은 깨진 수정구를 바닥에 훌훌 털어 냈다.
약탈자를 탈퇴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탈라스 쪽에서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놈은 내가 대륙으로 내려갔다 온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대륙을 조사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놈에게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게 려홍을 보호해야만 한다.
줄리안은 서둘러 다른 수정구를 꺼냈다.
“피에트로.”
[예, 형님!]
그를 이어 마피아 클랜을 물려받을 남자, 피에트로.
수정구를 통해 연락하자마자 답이 돌아왔다.
“복도가 어수선하다. 정리한다.”
[알겠습니다!]
연락을 마친 줄리안은 궐련의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객관적으로 마피아 클랜보다도 적은 수인 원탁이지만, 그들은 대부분 상급 죄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원탁은 중급 죄수가 다수인 마피아 클랜보다 압도적인 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쪽은 숫자에 자신이 있었다.
적이 아무리 호랑이라도 사자가 무리를 이루면 해 볼 만하다.
“지금 당장 움직인다.”
[예!]
이것만 마저 피우고.
그는 깊게 궐련을 빨아들였다.
.
.
.
.
.
궐련을 다 피운 줄리안은 다시 움직이려 했다.
복도 한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아니었다면.
슥.
거대한 파충류 인간이 어둠 속에서 줄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큭큭, 이게 누구신가! 그 유명한 마피아킹 아닌가?”
“가우록…….”
줄리안은 입술을 씹으며 권총을 꺼내 들었다.
원탁의 7급 죄수 가우록.
상급 죄수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전투력을 지닌 놈이 줄리안 앞에 나타났다.
“원탁은 여전히 버러지들이 모인 곳답게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있군. 그런다고 아겔라스토스가 나올 것 같나.”
“큭큭, 해 봐야 아는 일이지.”
가우록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줄리안이 알고 있어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외려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파충류의 노란 눈깔이 줄리안의 전신을 게걸스럽게 훑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아겔과 관련이 있는 녀석 중 하나였지. 아주 오래전 아겔의 밑에서 시간을 보내며 성장했다지?”
“누가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거지?”
줄리안은 새로 궐련을 피웠다.
“내가 그 노인네 말동무를 해 준 건 사실이지만, 그 늙은이 때문에 강해졌다는 건 인정 못 하겠군.”
“크크큭! 천하의 마피아 클랜의 수장이 싸움을 모면하려 하는가?!”
쿵!
파충류의 단단한 주먹이 부딪쳤다.
줄리안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리가.”
철컥. 후우우…….
다시 불을 뿜을 준비가 된 권총이 파충류 인간의 머리를 향했다.
입에서 검은 연기가 나와 이미 어둠으로 가득 찬 복도를 더욱 검게 물들인다.
“내가 언제 싸움을 모면하려 했다는 거냐.”
권총의 방아쇠가 천천히 당겨지고.
가우록의 입이 위로 죽 찢어졌다.
“어디 마피아킹의 실력을 한번 볼까?!”
콰아아앙-!
* * *
아겔은 거대 개미에 올라타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결국, 벌레 종족은 출병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폐쇄 구역에 묶여 있었던 것은 선왕, 베르미스가 그 자리에 머물렀기 때문.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와 따로 가는가.)
이제 즉위식만 거치면 벌레 종족의 왕이 되는 후삭.
그는 적극적으로 아겔을 돕기로 했다.
아겔과 관련된 이들을 구출하러 출발하기 전, 후삭은 같이 갈 것이냐 물었지만, 아겔은 거절했다.
아겔은 그들과 길을 달리해 특수 감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베르미스의 힘을 얻은 이상 그에겐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단검에 담긴 웅혼한 의지. 벗이 남겨 준 힘은 아겔이 느끼기에도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단검을 들고만 있어도 베르미스가 보여 줬던 본체의 강력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베르미스…… 자네의 희생을 기억하겠네.”
아겔은 자신을 희생한 벗을 떠올렸다.
꾸욱.
단검을 강하게 잡은 아겔은 복도 앞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감지했다.
“싸움…….”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숫자는 단둘.
느껴지는 기세로 보아 상급 죄수 2명이었다.
“줄리안?”
아겔은 익숙한 느낌과 냄새를 감지할 수 있었다.
줄리안이 궐련에 넣어 피우는 환약 냄새가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악마의 힘도 아겔에겐 친숙한 것이었다.
“이런…….”
쾅!
두꺼운 비늘 주먹에 얻어맞은 줄리안이 한쪽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가우록은 온몸에 찢어진 상처를 입긴 했어도 파충류 인간답게 천천히 회복하는 모습.
그러나 줄리안의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악마의 힘은 너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지.”
“……큭. 버러지 같은 것이.”
쓰러진 채로 권총을 든 줄리안은 가우록을 향해 난사했다.
대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우록에겐 단 하나도 명중하지 못했다.
과학자와 싸울 때 남아 있던 상처가 지금 싸움에 독이 되고 있었다.
우득……!
“끄으으윽.”
권총을 쥔 줄리안의 손을 통째로 쥐어 버린 가우록이 징그러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분열의 악마. 확실히 위협적인 힘이야. 네 몸이 멀쩡했다면, 나도 긴장해야 했을 거다. 이거 과학자에게 감사해야겠군.”
“……입 닥쳐라, 도마뱀. 지금 상태라도 너쯤은.”
줄리안의 눈이 희번덕 떠졌다.
악마의 힘을 너무 많이 끌어 쓴 대가로 주황빛 눈동자는 반이나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이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들기 전, 한쪽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꼴사납구먼.”
메마른 목소리에 가우록이 고개를 홱 들었다.
노란색 파충류의 눈동자가 한순간 흔들렸다.
“아겔……?”
노인은 뭘 그리 놀라냐는 듯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왜. 날 죽이려고 안달이 나서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닌가. 직접 만나니 두려운가.”
아겔이 단검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줄리안의 손을 놓은 가우록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환희로 물들어 있었다.
“그럴 리가…… 너를 죽이려고 모든 것을 바쳤는데, 이 순간이 두려울 리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우록은 본능적으로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강자를 만났을 때 나오는 반응.
주술사 앞에서도 느껴지는 감정을 지금 아겔을 마주하고도 확실하게 받았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늙은이. 드디어…….”
입가는 찢어져 있었지만, 가우록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먹이를 발견한 포식자의 것처럼 아겔의 전신을 눈에 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었다, 아겔.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치더니, 이젠 겁을 상실해서 내 앞에 나타났구나.”
“도망이라고 말하니, 할 말은 없지만.”
촤악!
아겔의 단검이 숏쇼드의 형태로 변했다.
“지금은 딱히 도망갈 이유가 없는 듯하구먼.”
그가 싸울 의지를 보이자, 가우록은 흠칫 몸을 떨었다.
백수십 년을 원탁의 눈을 피해 살아온 아겔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짐작하기도 전에 가우록의 눈은 분노로 물들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가우록이 아겔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