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36)화 (137/186)

136화 격돌 (1)

“끄응…… 이게 뭔.”

아겔은 왜 갑자기 주암이 잠들었는지 몰랐지만, 잠버릇이 고약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업무 때문에 피곤하기로서니, 땅바닥에 누워 자는 게 말이 되는가.

물론 본인이 복도에서 잤던 수많은 나날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아겔이었다.

“쯧쯧, 입 돌아가면 안 될 터인데.”

아겔은 주암을 한쪽 벽에 기대어 눕혀 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이게 그리 쉽게 불러낼 수 있는 게 아닌데 기껏 보여 주려 했더니만.”

단검에 깃든 거대 지네의 기운을 불러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겔도 집중을 요할 정도.

가우록과 싸울 때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해 집중력이 극한까지 내몰렸을 때가 되어서야 잠든 힘을 깨우칠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한 번 더 해 볼까.”

단검을 쥔 아겔이 그것을 휘둘러 숏소드로 전환했다.

기다랗고 뾰족한 막대기 형태의 검. 검을 잡은 손을 보호하는 가드 따위는 없었다.

이걸 만들어 준 ‘대장장이’는 그딴 게 필요 없다고 했다. 오히려 독이 될 거라고.

그래서 이 형태로 완성된 무기는 고독에 있는 동안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주재료는 베르미스가 주었으나, 이걸 가공한 것은 고독의 대장장이.

오직 한 사람에게 하나의 무기만을 만들어 주는 장인이었다.

‘대장장이에게 한번 들러야 하긴 하는데.’

려홍을 만들어 줄 무기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으나.

이내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잡념을 털어 냈다.

‘집중.’

손에 잡힌 검의 매끄러운 느낌. 정신을 모은 아겔은 천천히 검무를 추듯 움직였다.

우웅…….

그의 움직임을 따라 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넘실넘실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마법 횃불이 닿는 공간을 암녹색으로 채우는 검의 기운.

천천히 녹색 거대 지네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익…….]

형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아겔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늙은 육신이 부들부들 떨려 오고, 숨이 거칠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순 없다.

아겔은 천천히 지네 형상을 인도해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유도했다.

‘결국엔 이걸로 적을 맞춰야만 한다.’

힘이 있어도 맞추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나 다름없는 일.

아겔은 원하는 대로 지네를 돌진시키기 위해 한없이 검을 휘둘렀다.

전신이 뜨거워지고 삐걱거리는 근육이 비명을 질러도.

검무는 멈추지 않았다.

누가 무술이나 검술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닌데도 아겔은 상상 속의 적과 목숨을 건 싸움을 펼쳤다.

얼마 전 죽기까지 싸웠던 가우록을 바탕으로 가상의 적이 수없이 많이 나타났고.

아겔의 검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적의 심장과 머리를 꿰뚫었다.

그 극렬한 움직임에 맞추어 지네 형상이 요동쳤다.

…….

촤륵.

검을 갈무리한 아겔은 땀에 젖은 죄수복을 말렸다.

얼마나 오랜만에 하는 수련인가.

이젠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옛날의 일이라 지금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벗이 남겨준 힘을 소화하려면 수련은 반드시 필요했기에 아겔은 불평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겨우 땀 좀 흘린 것 가지고 벌레 임금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누가 이것을 마다할까.

“그래도 이젠 조금 익숙해졌구먼.”

이동하고 쉬는 시간마다 수련을 거듭하니, 이제 지네 형상을 불러내는 게 수월해졌다.

하지만 아겔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원탁의 죄수들이 점거한 특수 감방.

적이 우글거리는 곳을 치려면 더 강한 힘이 필요했다.

지금보다 더욱.

‘전부는 아니더라도 검에 깃든 힘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이제 막 각성한 힘으로 가우록을 죽였다.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상급 죄수 다수와 전투에 돌입해도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허어…….”

난데없이 들려오는 경탄의 소리.

기척을 보니 기절했던 주암이 일어나 있었다.

“음? 자네 깨어 있었나? 아무리 피곤해도 길바닥에서 자면 어쩌나.”

“……잔 게 아니라 기절한 것이었습니다. 방금 보여 주신 그 기운의 압박감을 버티질 못하겠더군요.”

주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겔에게 다가왔다.

“확실히 엄청난 힘이군요. 보아하니 벌레 임금의 기운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다네.”

주암이 보기에도 방금 아겔이 통제했던 기운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긴 시간 폐쇄 구역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벌레 임금의 기운.

그것이 아겔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강한 힘은 맞지만, 맹신하진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충고 고맙네.”

아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에 누워 있던 거대 개미를 불렀다.

그가 개미에 올라타자 주암이 고개를 들어 그에게 말했다.

“지금 원탁의 죄수들에게 몇 명이 잡혀 있습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내 친구가 구하러 갔지.”

“……아직 붙잡히지 않은 자들은 제가 보호하겠습니다.”

“그거 든든하구먼.”

아겔의 관계 조직도는 교정관급 이상은 필수 암기 사항이었기에 주암은 누굴 보호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주암이 그의 친구들을 지켜 준다면, 아겔도 마음 놓고 적진 한가운데를 돌파할 수 있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영감님.”

“자네도 죽지 말게.”

아겔이 손을 들어 거대 개미의 머리를 탁탁 쳤다.

“출발하자꾸나.”

키이이이잇.

거대 개미가 아겔의 부름에 일어섰다.

커다란 몸집과 대비되는 속도로 개미는 앞으로 나아갔다.

* * *

페이든 로자리오.

인내의 성좌가 선택한 신도이며 성좌 교단의 신실한 종.

그는 고독에 파견되고 가장 피가 식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그는 동력실을 차지하고, CCTV를 통해 아겔과 주암의 만남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독을 돌아볼 수 있는 건 CCTV실뿐만 아니라 동력실도 마찬가지.

이곳에선 고독이란 행성 교도소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집행관급 이상 집무실엔 CCTV가 없었지만.

“아겔…… 놈을 반드시 죽여야 해.”

교정관의 권한을 받은 그는 봤을 때부터 특이했던 아겔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정보를 열람하고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

그에게 원탁의 죄수들이 접근했다.

-아겔라스토스는 어둠의 사도가 되려는 자다. 성좌 교단인 네 입장에선 껄끄럽지 않나?

어둠의 사도.

이름만 들어도 반사적으로 소름이 돋는 존재.

현재 공석인 어둠의 사도 자리가 있었고, 열람한 정보에 의하면 아겔이 어둠의 사도가 되려 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았다.

‘사도 전쟁’ 때 인류를 수호한다고 자청했던 빛의 사도 3명이 어둠의 사도들에게 살해당했다.

교단이 거둔 성과는 분노의 사도 한 명뿐. 나머지는 아직도 살아서 여전히 외계(外界) 구역에서 인류를 몰살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

그런 끔찍한 존재가 다시 나타난다면, 우주는 다시 전쟁의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막아야 한다.’

아겔이 어둠의 사도가 되지 못하도록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하지만 페이든의 뜻대로 상황은 흘러가지 않았다.

이미 교단에 알린 지는 꽤 되었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이쪽 상황도 여의치 않으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령뿐.

이곳에서 외톨이나 다름없는 페이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동력실 권한을 움켜쥔 뒤 원탁과 손을 잡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동력실을 차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나.”

동력실은 고독의 모든 시스템을 통제한다.

변환, 개방, 방출, 불립과 불침 등.

현재 그는 동력실의 위치만 바꾸며 교정관들의 추적을 뿌리치는 중이었다.

집행관과 서기관까지 쫓고 있었지만, 이 드넓은 본관에서 길도 제대로 모르고 동력실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거기에 페이든은 그들의 위치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으니, 불공정한 술래잡기만 지속하고 있었다.

동력실을 차지한 게 아니었다면, 페이든은 진작 붙잡혔을 것이다.

“최대한 여기서 버틴다.”

더러운 악마의 수하들과 손잡은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겔의 죽음이라는 목적은 같았기에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다.

원탁이 아겔을 죽이고 성좌 교단이 고독 시찰을 나왔을 때, 그들의 보호를 받는 것이 최상.

최악의 경우, 목숨을 포기할지언정 아겔만큼은 죽여야 했다.

으득.

그는 자신의 펜던트를 꽉 쥐었다.

신실하게 성좌를 믿었던 성기사와 사제였던 부모님.

페이든은 은하 곳곳에 남아 있는 마물을 토벌하다가 사망한 부모님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우주 곳곳에 마물의 군단을 뿌렸던 어둠의 사도들에게 악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둠의 사도에 대한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다.

전 우주를 공포로 물들인 잔혹한 존재들. 자비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들은 무참히 선량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즐거워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과연 악마가 선택한 이들답다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던 100여 년 전의 전쟁.

그걸 막을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쯤은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었다.

페이든의 충혈된 눈이 복도를 가로지르는 아겔의 모습을 따라갔다.

“혼자서 가는구나. 죽고 싶어서 발악하는군.”

폐쇄 구역은 CCTV가 없었기에 뭘 하고 돌아온 건지 몰라도 아겔은 분명 혼자였다.

그곳에서 쏟아져 나온 벌레 종족은 다른 곳을 습격하고 있었고.

이 난장판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동력실 권한을 가진 페이든뿐이었다.

“전부 죽어라.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더러운 것들.”

달칵.

저번 개방 때는 실수했지만, 이젠 동력실 기능을 다루는 데 어느 정도 능숙해진 페이든이었다.

그는 먼저 벌레들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뭘 하려는지 몰라도 놈들이 싸우길 원한다는 건 자명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놔둘 생각은 없었다.

페이든은 벌레들이 가득한 구역을 다른 구역과 바꿔 버렸다.

고위 마법과 복잡한 기관으로 이루어진 고독 본관은 동력실 주관자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행했다.

벌레들은 곧 길을 잃고 당황하다가 이내 다시 복도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됐다.”

그들이 가는 길을 영원히 막을 순 없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은 벌었다.

그다음, 페이든은 아겔이 달리고 있는 복도를 선택했다.

그리고 곧장 특수 감방 바로 앞에 있는 복도와 위치를 변환시켜 버렸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 주지, 이 악마야.”

.

.

.

한편 복도에서는 교정관 이상의 간부들이 직접 무전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서기관 베믈리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집행관의 보고를 받았다.

-또 움직였습니다, 서기관님.

“제길. 쉽게 안 잡혀 주는군.”

9급 능력자인 베믈리오조차 고독 본관 안에서는 마음대로 무언가를 할 순 없었다.

이곳은 주인님의 소유지이므로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니까.

마음만 먹으면 본관을 폭파시킬 수도 있겠지만, 뒷감당은 불가능했다.

베믈리오의 떨리는 목소리에 집행관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놈이 동력실에 들어갈 줄은. 폭탄을 심어 놨지만, 신호가 차단되어서 듣질 않습니다.

“네 탓이 아니야. 일단 최선을 다해 동력실을 찾아라.”

-예.

본관 이곳저곳으로 순간이동하는 동력실은 쉽게 도달할 수 없었다.

외근 갔다 오고 곯아떨어진 소장만 멀쩡했어도 금방 문제가 해결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소장만큼 속도가 빠른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슥.

한쪽 어둠 속에서 주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기관에게 다가온 그가 말했다.

“영감에게 저희 쪽 상황을 전하고 왔습니다. 그는 그대로 특수 감방으로 직행했습니다.”

아겔에게 다녀오라고 지시한 것은 베믈리오였다.

페이든이 동력실을 차지한 걸 몰랐다면, 그의 오해를 살 수도 있었기에 내린 조치였다.

“흠…… 무사해야 할 텐데.”

“8급 죄수 벌레 임금의 힘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저조차도 쉽게 압박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 그럼 일단 맡겨 보세. 우린 우리의 일을 해야 하니.”

베믈리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아겔을 죽이려는 자들. 원탁과 성좌 교단.

그리고 그를 지키려는 자들. 고독의 직원들과 기업가.

이젠 숨기는 것도 불가능해졌으니, 싸움은 전쟁으로 커질 터였다.

“이번 일을 어떻게든 넘긴다고 해도 다음이 없다는 보장이 없다. 속히 끝낸다.”

“예.”

-예!

주암과 무전기를 통해 듣고 있던 교정관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베믈리오는 빠르게 달리면서 생각했다.

부디 아겔이 죽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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